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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산소 미포함>과 살아있는 퍼즐 관리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산소 미포함>과 살아있는 퍼즐 관리

OneTiger 2019. 5. 4. 20:34

[산소를 뿜는 조류들.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은 생태계가 스스로 화학 질서를 구축한다고 묘사합니다.]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 Oxygen Not Included>은 우주 생존을 이야기합니다. 게임 제목이 붉은 글씨로 Not을 강조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산소 ''포함입니다. 우주에서 인간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인간이 우주 개척 기지를 짓는다고 해도, 여기에는 산소가 없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복제 개체들을 이용해 우주 개척 기지를 짓고, 생명체들을 키우고, 산소를 공급하고, 전력을 생산하고, 식량들을 얻고, 질병을 관리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나 복잡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우주 개척 기지를 확장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엄청난 과제들을 맡아야 할 겁니다.


<산소 미포함>은 여유 시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계속 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산소, 식물, 지형, 질병, 식량, 스트레스, 오염, 전력, 수압 같은 요소들은 연이어 게임 플레이어를 괴롭힙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유롭게 농장이나 기지 구조나 복제 개체를 고민하지 못합니다. 물론 게임 플레이어가 어느 정도 게임에 익숙해진다면, 산만하고 엄청난 과제들 역시 아기자기한 재미가 될 겁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가 <산소 미포함>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엄청난 과제들은 상당한 피로를 유발할지 모릅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한가하게 홍차 한 잔하기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 생존 게임들이 그러는 것처럼, <산소 미포함> 역시 농사와 생태계를 중시합니다. 특히, 게임 제목이 산소 '미'포함이기 때문에, 우주 기지에서 산소 공급은 아주 중요한 문제 같습니다. 식물들은 토지를 소모하거나 이산화탄소를 소비하거나 물을 소비하거나 미생물들을 통제합니다. 여러 식물들은 다양한 효과들을 선보이고, 식물들을 재배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지형과 주변 생태계와 화학 질서를 고려해야 합니다. 토양이 부족하다면, 우주 기지는 토양을 소비하는 식물들을 많이 재배하지 못할 겁니다. 기지 온도가 너무 낮다면, 영하 온도를 좋아하는 진눈깨비밀은 괜찮은 선택일 겁니다.


꼬집후추풀이 오염된 물을 먹기 때문에, 우주 기지가 심하게 오염되었다면, 복제 개체들은 꼬집후추풀을 식용 작물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겁니다. 고무갈대 역시 오염된 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주 기지에서 세면대나 구식 변기는 오염된 물을 만들고, 여기에서 해로운 미생물들은 사방에 퍼질 수 있습니다. 고무갈대가 오염된 물을 먹기 때문에, 고무갈대 밭은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 정화 구역이 될 수 있습니다. 신진 대사를 유지하기 위해 씨근풀은 주변 열 에너지를 흡수하고 냉각된 기체를 다시 뿜습니다. 따라서 씨근풀이 있다면, 주변 온도는 하락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우주 기지 온도를 낮추고 싶다면, 씨근풀은 좋은 선택일 거에요.



조류 탈산기와 조류 배양기는 식물 재배에 속하지 않으나, 식물 재배처럼, 조류 탈산기와 조류 배양기는 생명체들을 이용해 주변 화학 질서와 생태계를 조절합니다. 만약 조류 탈산기에서 조류가 오염되었다면, 조류 탈산기는 오염된 산소를 뿜을 겁니다. 조류 배양기는 지속적으로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이산화탄소가 없다고 해도, 조류 배양기는 산소를 뿜을 수 있어요. 사실 <산소 미포함>에는 식물 재배 이외에 다른 업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산소 '미'포함이라는 제목처럼, <산소 미포함>은 여러 화학 반응들을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물리적인 변화(액체, 고체, 기체)를 조절할 수 있고 여러 원소들을 합칠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냉각 수소 기체를 오염된 산소 사이에 통과시킨다면, 산소는 액화 산소가 될 겁니다. 이렇게 오염된 산소는 액화 산소가 되고, 이건 오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수소의 끓는점이 꽤나 낮기 때문에, 수소는 좋은 냉매가 될 수 있어요. 이렇게 식물 재배, 조류 재배, 주변 생태계, 화학 질서, 지형은 서로 꾸준히 영향들을 미칩니다. 그래서 우주 기지를 개척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생존 게임들에는 여러 미덕들이 있으나, 끊임없는 상호 작용은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끊임없는 상호 작용은 일종의 퍼즐 같습니다. 이건 스스로 움직이고 바뀌는 퍼즐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퍼즐을 풀어야 하나, 게임 플레이어는 퍼즐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어느 정도 상황과 조건을 바꿀 수 있으나, 퍼즐은 스스로 움직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퍼즐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퍼즐을 그저 관리할 뿐입니다. 끊임없는 상호 작용에는 생명 현상이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식물들과 미생물들과 동물들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그저 그것들을 배치할 뿐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명령한다고 해도, 식물들과 미생물들과 동물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양봉 농민이 꿀벌들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각종 생명체들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양봉 농민이 꿀벌들을 그저 관리할 뿐인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명령보다 관리에 신경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존 게임은 재미있습니다. 주변 환경이 스스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주변 환경이 스스로 움직일 때, 그 속에서 인간은 몇몇 요소를 관리합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지배하지 못합니다. 인간보다 생태계는 원대하고 선천적입니다. 이른바 '대자연'은 오직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나 아마존 강이나 응고롱고로 초원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게임 <산소 미포함>과 <웨이킹 마스>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살아있는 퍼즐이에요.]



비록 <산소 미포함>은 그저 생존 게임에 불과하나, 여기에도 '대자연'이 있습니다. <산소 미포함>과 대자연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나, 분명히 <산소 미포함>은 왜 자연이 위대한지 보여줍니다. 게임 속 생태계는 스스로 움직입니다. 게임 속 생태계는 스스로 화학 질서를 조절합니다. 게임 속에는 여러 식물들, 미생물들, 동물들이 있고, 복제 개체들이 그것들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새로운 화학 질서를 조성할 겁니다. 화학 질서가 무너지거나 넘칠 때, 우주 개척 기지는 망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이것을 통제하기 원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통제하지 못합니다.


식물들, 미생물들, 동물들이 명령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생명체들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그저 관리하고 통제할 뿐입니다. 생명체들은 기계 로봇이 아닙니다. 인류보다 식물들, 미생물들, 동물들은 선천적이고, 그래서 인류는 생태계를 완벽하게 다루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산소 미포함>은 <웨이킹 마스> 같은 게임과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생태계를 이용해 주변 질서를 조성하고 퍼즐을 풀어야 합니다. 비록 <웨이킹 마스>에는 우주 기지 건설이 없으나, <웨이킹 마스>가 외계 동굴 생태계를 고민할 때, <산소 미포함>이 주변 화학 질서를 관찰할 때, 양쪽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을 겁니다.



게임 <웨이킹 마스>에서 게임 주인공 과학자는 생명체들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는 그저 생명체들을 배치할 뿐입니다. 과학자는 생명체들을 없애거나 심거나 옮길 수 있으나, 이것들은 명령이나 조종이나 통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과학자가 생태계를 조성한 이후, 과학자가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생태계는 스스로 움직일 겁니다. 나중에 과학자가 다시 돌아온다면, 생태계는 다소 바뀔지 모릅니다. 포식 식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먹거나, 폭발 씨앗이 다른 꽃들을 불태우거나, 노란 부유 씨앗이 토대를 바꾼다면, 생태계는 달라질 겁니다. 과학자가 직접 명령하거나 조종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태계는 스스로 움직입니다. 게임 <산소 미포함> 역시 생태계가 스스로 움직인다고 보여줍니다.


물론 <산소 미포함>에는 많은 우주 기지 개척자들과 시설들과 장치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산소 미포함>에서 자연 생태계는 훨씬 작은 비중을 차지할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자연 생태계를 통제하고 조종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웨이킹 마스>에서 화성 동굴 생태계가 스스로 바뀌는 것처럼, <산소 미포함>에서도 생태계는 스스로 새로운 화학 질서를 만듭니다. 그래서 생태계는 기계와 다릅니다. 인간이 만들지 않고 조종하지 않는다면, 기계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니, 인류가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자연 생태계는 스스로 움직이고 꾸준히 바뀌었습니다. <산소 미포함>에도 이런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 생태계가 원대하기 때문에, 인류는 자연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합니다.



사실 많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인간이 자연 생태계를 통제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에서 소설 주인공 토비는 꿀벌들을 키웁니다. 토비는 양봉 농민입니다. 양봉 농민으로서 토비는 계속 꿀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토비는 이게 허튼 짓거리라고 생각합니다. 토비는 인간입니다. 인간이 꿀벌들에게 말한다고 해도, 꿀벌들이 인간 언어를 이해할 수 있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토비는 꿀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꿀벌들이 동물들, 생명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명체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양봉 농민은 꿀벌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양봉 농민은 꿀벌들이 살아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조건들과 상황들을 바꿉니다. 어쩌면 언젠가 생체 개조 기술은 개조 꿀벌을 만들지 모릅니다.


그때 양봉 농민은 꿀벌들에게 명령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조종기로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처럼, 양봉 농민은 조종기를 누르고 꿀벌들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생체 개조 기술은 개조 꿀벌을 만들지 못합니다. 미래 유전 공학이 개조 꿀벌을 만들 수 있을지 아무도 그걸 확신하지 못합니다. 미래 유전 공학 기술이 개조 꿀벌을 만든다고 해도, 유전 공학이 모든 자연 생태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나요? 양봉 농사는 주변 생태계와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해야 합니다. 유전 공학이 자연을 통제하고 싶다면, 유전 공학에게는 개조 꿀벌 이외에 수우우우우우만아느은 개조 생명체들이 필요할 겁니다.



유전 공학이 정말 모든 자연 생태계를 개조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진보가 찬란하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유전 공학은 많은 혜택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유전 공학이 모든 자연 생태계를 개조하기 원한다면, 이건 진보가 아니라 뻘짓이 될지 모릅니다. 게임 <산소 미포함>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스스로 움직이는 상호 작용과 화학 질서를 풀어야 합니다. 이건 너무 까다롭습니다. 주변 생태계와 화학 질서가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양쪽이 아주 복잡한 퍼즐들이 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고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첫째 문단이 말하는 것처럼, 이건 상당한 피로를 유발합니다.


<산소 미포함>은 그저 비디오 게임에 불과합니다.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는 훨씬 방대하고 훨씬 복잡합니다. 아무리 진보가 찬란하다고 해도, 진보가 방대하고 복잡한 자연 생태계를 모두 개조할 수 있을까요? 유전 공학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한계를 인정해야 할지 모릅니다. 진보는 무한한 개조보다 이런 인정인지 모릅니다. 이건 인류가 패배를 시인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무한한 개조가 반드시 진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산소 미포함> 같은 비디오 게임조차 생태계가 복잡하다고 묘사합니다. 현실 속에서 과학 기술이 모든 자연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이런 테라포밍은 로망 같습니다. 하지만 오직 자연 과학만이 테라포밍에 영향을 미칠까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과학 기술이 모든 자연을 통제한다고 대답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과학 기술이 기후 변화를 해결할 거라고 믿습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심각한 환경 오염이라고 해도, 과학 기술은 기후 변화를 해결할 겁니다. 따라서 인류 사회는 사회 구조를 바꿔서는 안 됩니다. 인류 사회는 과학 기술이 환경 오염들을 해결할 거라고 믿어야 합니다. 인류 사회는 계속 시장 경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계속 과학 기술들을 휘둘러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과학 기술이 자연을 통제하고 해결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비디오 게임이 아닙니다. 현실은 <산소 미포함>이 아닙니다. 아니, 심지어 <산소 미포함>조차 우주 기지가 처절하게 망한다고 묘사합니다. 다행히 비디오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리셋 버튼을 누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시 시작하기 기능이 없다면, 아무도 <산소 미포함> 같은 복잡한 생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리셋 버튼이 없고 다시 시작하기 기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과학 기술이 자연을 통제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이건 무모한 헛소리입니다. 기후 변화는 사라져야 하고, 기후 변화와 함께 자본주의 역시 사라져야 할 겁니다.



소설 <홍수>에서 토비는 꿀벌들을 정복하고 통제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토비는 꿀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토비는 이게 멍청한 짓거리라고 생각하나, 꿀벌들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토비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솔직히 이건 정말 멍청한 짓거리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토비는 과학 기술이 만능이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인정일 겁니다. 토비는 비단 꿀벌들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개조 동물들을 정복하거나 통제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토비가 아기를 낳고 아기에게 젖을 먹인다면, 토비는 꿀벌들을 비롯해 다른 생명체들을 좀 더 열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소설 <홍수>는 임신과 출산과 수유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은 출산과 자연이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소설 <야생종>에서 소설 주인공 안얀우는 많은 아이들을 낳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얀우는 많은 아이들을 낳고 먹입니다. 동시에 안얀우는 치유사이고 동물 변신술사입니다. 안얀우는 어머니이고, 치유사이고, 동물 변신술사입니다. 이런 여러 측면들은 따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토비 역시 이런 측면들을 깨달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건 토비를 비롯해 여자들이 반드시 임신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여자들이 임신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반드시 육아를 맡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사회적인' 재생산이라는 용어처럼, 돌봄 노동들은 사회화가 되어야 합니다.



임신과 상관없이, 비단 토비 같은 여자들만 아니라 남자들 역시 이런 측면들을 느끼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피지배 계급 민중들(무엇보다 여자들)이 이런 측면들을 고민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여자의 생산적인 몸을 통제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적인 생산(여자의 몸)을 통제하기 원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생태적인 생산(자연)을 통제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의 유일무이한 목표는 이윤 극대화입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생산(여자의 몸과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생산이 노동력들을 공급하고, 자연 환경이 자원들을 공급함에도,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주의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이 힘들게 사회 구성원들을 배출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공짜로 노동력들을 얻기 원합니다. 자본주의는 공짜로 쓰레기들을 버리고 쓰레기 정화 비용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에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에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무분별한 개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이게 이윤을 부른다면,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사회적인 생산과 생태적인 생산은 억압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겁니다.


마리아 미스 같은 에코 페미니즘 학자는 생산이라는 단어가 너무 기계적이고 딱딱하다고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마리아 미스는 임신과 출산을 생산이라는 용어와 구분하기 원해요. 음, 확실히 생산이라는 단어는 공장 기계 같은 느낌을 풍겨요. 생산이라는 용어는 여자와 자연이 똑같다고 간주하고 여자를 차별할지 모릅니다. "임신이 대단해? 심지어 들짐승들조차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일 수 있어. 임신과 수유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가부장적인 편견은 사회적인 생산을 과소평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용어가 무엇이든, 자본주의는 생산을 억압하고, 자본주의는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논의를 너무 엉뚱하게 전개한다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첫째 문단에서 저는 게임 <산소 미포함>을 언급했으나, 이제 논의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과 여자의 생산적인 몸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산소 미포함>에 에코 페미니즘을 어설프고 조잡하게 연결했다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언뜻 게임 <산소 미포함>과 에코 페미니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소 미포함>에서 생태적인 상상력(각종 식물들, 미생물들, 동물들, 화학 질서들, 생태 구역)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이 선천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생태적인 상상력은 자연과 여자를 연결합니다. 소설 <야생종>에서 안얀우는 어머니이고, 치유사이고, 야생 동물입니다. <야생종>이 보여주는 것처럼, 여러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자연과 여자가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마르셀 서루가 쓴 소설 <먼 북쪽>이나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꽤나 얄팍한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하지만 소설 <야생종>이 그러는 것처럼, 얄팍한 환경 아포칼립스 역시 자연과 여자를 고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여자와 자연을 착취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소 미포함>과 에코 페미니즘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이 없을 겁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적인 상상력을 비평하고 덕질하기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어요.]



어제 게시글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을 둘러싼 여러 요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게시글에서 저는 수경 재배 실험실과 여자 식물학자와 가부장적인 차별을 이야기했습니다. 여자 식물학자와 가부장 문화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경 재배 실험실이 생태적인 상상력이기 때문에, 제가 <산소 미포함>으로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는 것처럼, 수경 재배 그림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고 방식은 복합적이고 총체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총체적인 사고 방식이 골치가 아프고 어렵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오직 씨근풀의 수소 냉각 효과가 12kW라거나 35~85°C 조건에서 밤나리가 자란다거나 꿀꺽물고기가 오염된 물을 9°C의 물로 정화한다는 이야기들만 생태적인 상상력이 되어야 하나요? 이런 것들이 생태적인 상상력의 전부일까요? 생태학 SF 덕질은 훨씬 폭넓고 총체적인 시각을 갖추어야 할 겁니다.



※ <산소 미포함> 스크린샷 출처: ]]]],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93365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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