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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식물 아내>와 언폴른과 나무 종족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식물 아내>와 언폴른과 나무 종족들

OneTiger 2019. 4. 24. 19:51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서 여러 나무 종족들은 다양한 측면들을 반영합니다.]

 

 

패트리스 앤 머피가 쓴 <식물 아내> 또는 <채소 마누라>는 남자 농부가 식물 아내를 키운다고 이야기합니다. 농부는 농장에 식물 아내 씨앗을 심습니다. 흙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식물 아내는 자랍니다. 처음에 식물 아내는 어린 소녀였으나, 점차 식물 아내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됩니다. 인간 남자 농부는 식물 아내와 사귀고 싶어합니다. 남자 농부가 식물 아내를 구입했고, 흙에 심었고, 키웠기 때문에, 남자 농부는 자신이 식물 아내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식물 아내는 순순히 남자 농부를 따르지 않습니다. 남자 농부가 말을 건다고 해도, 식물 아내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지성적인 나무처럼, 식물 아내는 그저 주변 환경과 교감할 뿐입니다. 남자 농부는 분통을 터뜨립니다. 남자 농부는 자신의 소유물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자 농부와 식물 아내 사이에서 갈등은 복잡해집니다. 사실 남자 농부는 일방적으로 식물 아내를 학대합니다. 많은 독자들은 단편 소설 <식물 아내>가 가정 폭력을 비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 농부가 식물 아내를 일방적으로 소유하기 원할 때, 남자 농부가 식물 아내를 학대할 때, 많은 독자들은 가정 폭력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가정 폭력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은 <식물 아내>가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오직 페미니즘 소설만이 되어야 하나요? 오래 전부터 숱한 SF 소설들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은 인조인간과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보여줍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인간(남자 농부)과 비인간 존재(식물 아내)가 갈등하는 것처럼,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비인간 존재(인조인간) 역시 갈등합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은 비인간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도 인간(남자 농부)은 비인간 존재(식물 아내)를 구입하고 심고 키웁니다. 그래서 비인간 존재는 인간에게 종속됩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는 비단 페미니즘 소설만 아니라 바이오펑크 소설인지 모릅니다. 유전 공학 기술자들은 생체 개조 기술을 이용해 지성적인 식물을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나무 종족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나무 종족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비단 <프랑켄슈타인>과 <식물 아내> 이외에 숱한 SF 소설들은 이런 주제를 다룹니다. 하지만 이런 SF 소설들은 페미니즘 소설에 속하지 않습니다. 메리 셸리는 여자 작가이나, <프랑켄슈타인>은 페미니즘 소설이 아닙니다.

 

 

아니, 잠깐. 정말 <프랑켄슈타인>이 페미니즘 소설이 아닌가요?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남자 농부가 식물 아내를 소유하기 원하는 것처럼,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 사이에 종속-해방 관계가 있지 않나요? 이런 해석이 반드시 그릇된 해석인가요? 페미니즘은 그저 성별 논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건 꽤나 피상적인 시각입니다. 페미니즘은 해방, 저항, 계급 투쟁으로 나가야 합니다. 사실 어지간한 사상들보다 에코 페미니즘은 어떻게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심각하게 착취하고 수탈하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어지간한 사상들보다 에코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그저 성별 논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만약 페미니즘이 폭넓은 범주를 자랑한다면, 페미니즘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해석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비록 페미니즘이 <프랑켄슈타인>을 해석하지 못한다고 해도, <식물 아내>는 페미니즘 소설이고, 페미니즘 비평가는 <프랑켄슈타인>과 <식물 아내>가 비슷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식물 아내>는 가부장적인 폭력을 말하고 동시에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말합니다. <식물 아내>에는 두 가지 측면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성 해방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갈등입니다. 아니, 이 소설에는 비단 두 가지 측면 이외에 다른 것들 역시 있습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여자는 다른 뭔가가 아니라 식물입니다. 여자는 식물입니다. 이게 부정적인 의미인가요, 아니면 긍정적인 의미인가요? 비단 <식물 아내>만 아니라 수많은 사상들은 여자가 식물이라고 비유합니다. 화가들이 어머니 자연을 그릴 때, 어머니(여자)는 녹색 식물입니다. 어머니는 식물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자연이 나무, 식물, 풍성한 생산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아무르 호랑이나 바다 악어나 백상아리가 아닙니다. 화가가 여자 같은 나무를 그린다면, 사람들은 이게 어머니 자연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나무에게 얼굴과 두 손과 두 발과 두 젖가슴이 있다면, 이 나무는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화가가 바다 악어를 '여성스럽게' 그린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성스러운 바다 악어가 어머니 자연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바다 악어는 포식자, 사냥꾼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는 야생, 처녀, 사냥을 상징하나, 오늘날 사람들은 여자와 사냥꾼을 연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남자 사냥꾼이 원시 공동체를 먹여살렸다고 착각합니다. 심지어 데스몬드 모리스 같은 인류학자는 남자 사냥꾼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여자가 둥근 젖가슴을 진화시켰다고 '아무 근거 없이' 주장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나 최재천 같은 과학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남자 과학자들은 용감무식하게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를 숭배합니다. 다들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그림처럼, 흔히 어머니 자연은 야생 (포식) 동물들보다 녹색 잎들과 나무들과 꽃들이 됩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남자 사냥꾼이 원시 공동체를 먹여살린다고 해도, 결국 사냥꾼은 소비적입니다. 사냥꾼은 생명체를 돌보고 키우지 않습니다. 여자는 생산적입니다. 여자의 두 젖가슴과 자궁은 생산적입니다. 어떤 여자들은 이걸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어떤 여자들은 이걸 부정적으로 비판합니다. 예전에 독일 녹색당 여자 당원들은 어머니의 생산적인 몸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관념이 여자를 돌봄 노동에 억지로 밀어넣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은 이런 관념을 이용해 여자를 돌봄 노동으로 밀어넣기 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에코 페미니즘 지식인들은 여자들이 어머니 원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자가 자신의 생산적인 몸을 인정할 때, 여자는 문명과 자연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여자의 생산적인 몸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대조적일 수 있습니다. 누가 옳은가요? 우리가 어떤 쪽을 지지해야 하나요? 대답이 무엇이든, 양쪽 모두 자연(식물)처럼 여자가 풍성한 생산력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은 식물이 수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물은 움직일 수 있으나, 식물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아무르 호랑이는 펄펄 뛰어다닐 수 있으나, 세콰이어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세콰이어가 거대한 나무라고 해도, 세콰이어는 그저 성장할 뿐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여자를 식물에 비유한다면, 이건 여자가 수동적이라는 편견이 될지 모릅니다.

 

 

남자는 정자를 생산합니다. 여자는 난자를 생산합니다. 정자는 열심히 움직이고 난자를 향해 헤엄칩니다. 난자는 기다립니다. 여자와 남자가 섹스할 때, 남자는 열심히 성기를 삽입합니다. 여자의 음문은 성기를 받아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가 수동적이고 남자가 적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온순하고, 남자는 공격적입니다. 이건 꽤나 흔한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편협한 사고 방식입니다. 하루 종일 인간은 섹스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게 가능한가요? 하루 종일 인간이 오직 섹스만 한다면, 인간은 탈진하고 죽을 겁니다.) 인간 활동은 오직 섹스만이 아닙니다.

 

섹스가 아주 커다란 쾌락이라고 해도, 섹스는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일부터 하루 종일 모든 사람이 오직 섹스하기만 한다면, 인류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직 섹스만으로 인간을 판단한다면, 우리는 아주 심각한 오류에 빠질 겁니다. 문제는 이런 오류가 만연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식물 아내>가 여자를 식물에 비유한다면, 이건 오해를 확대할지 모릅니다. 패트리스 머피가 가부장적인 편견과 성 차별을 확대하기 원했을까요? <식물 아내>가 여자를 나무보다 바다 악어나 백상아리로 설정해야 했을까요? 사이언스 픽션에서 여자와 나무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가 있나요?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는 나무 종족 캑터케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별로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꽤나 사납습니다. 나무 종족의 육체에는 따가운 가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독특한 톱날 쇠뇌를 사용합니다. 톱날 쇠뇌는 톱날을 발사하고, 이건 꽤나 치명적인 발사 무기입니다. 캑터케이들은 거대한 온실을 만들고, 다른 종족들은 온실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나무 종족 캑터케이들은 수동적이거나 온순하거나 평화롭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서 언폴른 종족 역시 수동적이거나 온순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언폴른은 엄청난 식량들을 생산합니다. 그들이 나무 종족이기 때문에, 그들은 엄청난 식량들을 생산하는 것 같습니다. 언폴론들은 평화를 바랍니다. 뭐, '평화를 위해' 언폴른은 나무 우주 순양함을 건조하고 다른 우주 종족들과 싸웁니다. 그렇다고 해도 언폴른은 평화를 바랍니다. 언폴른에게 여성적인 측면이 있나요? 언폴른 고향별 코야실 행성이 엄청난 식량을 생산한다고 해도, 이게 어머니 자연으로 이어질 수 있나요? 언폴른이 평화를 바란다고 해도, 이게 반드시 여성적인 측면인가요? 여성적인 측면이 무엇인가요? 단편 소설 <식물 아내>가 여성적인 측면을 자세히 설명하나요?

 

 

에코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측면이 공유지, 돌봄 노동 사회화, 자급 경제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는 공유지, 돌봄 노동 사회화, 자급 경제가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식물 아내>가 여성적인 측면을 자연에 비유한다면, 이 소설이 환경 보호를 주장할 수 있나요? 에코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측면이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공유지를 설정하고, 돌봄 노동을 사회화하고, 자유 시장 경제를 없앤다면, 영리 기업들은 함부로 자연 환경을 파괴하지 못할 겁니다. 여성적인 측면은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반면,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여자가 식물(생산적인 자연)임에도, <식물 아내>는 여성적인 측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인상적으로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공유지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할 겁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의 나무 종족 캑터케이들 역시 공유지를 상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 2>의 언폴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중세 유럽 판타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반지 전쟁>에는 엔트들이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과 <배틀 포 웨스노스>에도 나무 종족들이 있습니다.

 

 

[나무 종족을 비롯해 자연 친화적인 세력 유닛들. 하지만 이런 유닛들은 공유지를 주장하지 못해요.]

 

 

이런 나무 종족들이 공유지를 설정하나요? 나무 종족들이 생산 수단의 개인적인 소유를 금지하고 공유를 원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나무 종족들은 공유지를 주장하지 않아요. <반지 전쟁>, <히어로즈 오브 마인트 앤 매직>, <배틀 포 웨스노스>에는 모두 나무 종족들이 있으나, 그들은 공유지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는 여자가 식물(생산적인 자연)이라고 비유하나, 여자는 반드시 자연이 아니고, 나무 종족은 반드시 공유지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지 전쟁>, <히어로즈 오브 마인트 앤 매직>, <배틀 포 웨스노스>와 달리, <식물 아내>에는 중요한 실마리가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남자 농부는 농장을 경작하나, 자급 경제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은 외계 행성을 개척하는 중이고, 남자 농부는 환금 작물들을 심습니다. 소설 속의 농장은 전형적인 플랜테이션 농장입니다. 남자 농부는 행성 토착 식생을 혐오하고 경작 기계로 토착 식생을 제거합니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농업 감독관은 농장들을 관리합니다. 남자 농부, 환금 작물, 플랜테이션 농업, 탐험과 개척, 토착 식생 파괴, 군대 그리고 이것들에게 저항하는 식물 여자. 분명히 이런 요소들은 에코 페미니즘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식물 아내>가 공유지를 직접 주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식물 아내>와 에코 페미니즘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다소 아쉽습니다. 소설 <반지 전쟁>부터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 2>까지, 다들 방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반지 전쟁>은 중세 서사시이고, <엔들리스 스페이스 2>는 우주 서사시입니다. 양쪽 모두 에픽이에요. 반면, <식물 아내>는 단편 소설입니다. 3, 4분 안에 독자는 이걸 읽을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류 문명은 외계 식생을 개척하나, 개척 과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식물 아내>는 외계 식생에게 지성이 있는지 모른다고 암시하나, 이건 그저 암시에 불과합니다. <반지 전쟁>과 <엔들리스 스페이스 2>와 달리, <식물 아내>는 그저 단편 소설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엔트와 언폴른과 식물 아내 모두 나무 종족입니다. 우리는 나무(식물)가 자연 환경을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숱한 생태주의 그림들이 녹색 나뭇잎 문양을 내세우나요? 나무는 자연입니다. 나무는 자연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아무르 호랑이나 바다 악어나 백상아리가 자연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디오 게임 <압주>에서 백상아리는 해양 생태계의 수호자 같으나, 그렇다고 해도 자연이라는 단어에서 많은 사람들은 백상아리보다 풍성한 나무를 연상할 겁니다. 자연이라는 관념에 이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엔들리스 스페이스 2>는 나무 종족 언폴른을 설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나무 종족과 자연 환경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가 있다고 해도, <엔들리스 스페이스 2>는 어떻게 문명이 자연에 영향을 미치는지 살피지 않습니다. 언폴른은 멋집니다. 언폴른 그림들을 보세요. 나무 종족이 첨단 컴퓨터를 조작하는 장면들은 독특합니다. 나무는 자연입니다. 자연은 원초적입니다. 첨단 컴퓨터는 근대적인 진보입니다. 원초적인 것과 근대적인 진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양쪽은 서로 어울리지 않으나, 언폴른은 부조화를 깨뜨리고 첨단 컴퓨터를 조작합니다. 심지어 언폴른은 거대하게 성장하고 생체 우주선으로 변신합니다.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서 다른 종족 우주선들과 달리, 언폴른 우주선은 생체 우주선입니다.

 

언폴른 나무 우주선에게는 잎사귀들(?) 같은 태양열 돛들이 있습니다. 장대하게 우주를 항해하는 언폴른 나무 우주선들은 정말 환상적입니다. 소설 <반지 전쟁>에서 엔트들이 꾸물거리며 걷는 동안,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서 언폴른들은 첨단 컴퓨터를 조작하고 우주선을 발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장엄한 스페이스 오페라는 어떻게 문명이 자연에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지 않습니다. 비록 <식물 아내>는 그저 단편 소설에 불과하나, 이 소설은 여성적인 측면이 가부장적인 플랜테이션 농업을 물리치고 토착 식생과 조화를 이룬다고 암시합니다.

 

 

비디오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 2>는 거대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이가 없습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는 문자 그대로 짧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분량과 깊이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건 언제나 나무 종족이 플랜테이션 농업을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현실 속의 환경 오염들이 너무 심각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점차 계절은 5월로 향합니다. 어쩌면 지독한 폭염은 다시 기승을 부릴지 모릅니다. 이렇게 환경 오염이 심각한 상황에서,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가 멋진 나무 종족과 생체 우주선을 보여줌에도, 나무 종족은 자연과 문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식물 아내>처럼 단편 소설이 할 수 있음에도,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는 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아쉬워요.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가 엄청난 식생을 파괴한다면,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나무 종족을 떠든다고 해도, 여기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현실에 나무 우주 순양함은 존재하지 않아요. 현실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우리가 풍성한 나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나무 우주 순양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식생을 무자비하게 파괴합니다.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서 언폴른은 그걸 지적하지 않아요. <식물 아내>는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식물 아내>가 너무 짧다고 해도, <식물 아내>는 <엔들리스 스페이스 2>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어요.

 

 

[이야, 이런 장면은 정말 장대합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자연과 문명을 말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단편 소설 <식물 아내>부터 비디오 게임 <배틀 포 웨스노스>까지, 여러 사례들은 어떻게 창작물이 자연, 여자, 식물을 바라보는지 알려줍니다. 여기에는 어떤 특정한 규칙이 없습니다. 창작물은 특정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식물 아내>가 페미니즘 소설이거나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다루거나 바이오펑크거나 자본주의 모노 컬쳐에 반대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식물 아내>는 바이오펑크 분위기를 팍팍 풍기지 않으나, 유전 공학 기술자들이 나무 종족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남자들이 식물 아내들을 키울 수 있을까요. 식물 아내들은 외계인들인지 모릅니다. 언폴른처럼, 식물 아내들은 외계인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식물 아내 씨앗은 공산품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뭐, 누가 압니까. 어쩌면 소설 속에는 비단 식물 아내들만 아니라 나무 우주선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식물 아내들은 거대하게 자라고 우주선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야, 식물 아내들이 우주선들로 성장하고 온갖 행성들에 뿌리들을 내린다면, 이것 역시 멋진 상상력이 될 겁니다. 현실 속에는 자연, 여자, 식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이 있고, 창작물들은 그것들을 반영합니다. SF 팬들이 생태적인 상상력을 비평하고 싶다면, SF 팬들은 이런 다양한 시선들을 종합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 그림 <Mother Nature Concept> 출처: Scott Da Rocha, https://www.artstation.com/artwork/dgQ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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