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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외계 개척 행성들과 인간 중심주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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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개척 행성들과 인간 중심주의

OneTiger 2019. 2. 15. 20:03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은 당연하게 외계 개척을 이야기합니다. 이건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일지 모릅니다.]



존 발리가 쓴 <화성의 왕궁에서>는 화성 생존자들을 이야기합니다. 화성에서 과학자들은 커다란 사고를 당했고 곤경에 빠집니다. 지구는 구조대를 보내지 못하고, 화성에서 과학자들은 스스로 위기를 헤치고 생존해야 했습니다. 사고 이후, 과학자들은 연구자들에서 생존자들로 바뀝니다. 그들은 주거지를 짓고, 농사를 짓고, 지구가 구조대를 보낼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여기에서 생태학자 루시 스톤 맥킬리안은 그들이 화성을 오염시킬지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생존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주변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주거지를 짓거나 농사를 짓는다면, 당연히 과학자들은 주변 환경을 바꿀 겁니다. 비단 화성 과학자들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인간은 주거지를 짓고 농사를 짓고 주변 환경을 바꿉니다. 아니, 비단 인간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들은 주변 환경을 바꿉니다. 비버는 댐을 짓고 수위를 조절합니다. 코끼리는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숲을 없앱니다. 개미들은 진딧물들을 기르고 무당벌레를 내쫓습니다. 꿀벌들 덕분에 꽃들은 꽃가루들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영양분을 얻기 위해 생명체는 평행 상태로 퍼지는 엔트로피를 어느 정도 집중시킵니다. 그 자체로서 살아있다는 것은 주변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화성에서 과학자들이 살아남고 싶다면, 과학자들은 주변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만약 과학자들이 농사를 짓는다면, 농사는 화성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오염시키거나 줄일지 모릅니다. 생태학자 루시는 그걸 걱정합니다. 생존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루시 맥킬리안 이외에 다른 과학자들은 그걸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생물학자 쑹 리는 화성 생태계에 상관하지 않아요. 이건 생물학자와 생태학자가 드러내는 차이점입니다. 생물학자와 생태학자는 서로 비슷한 것 같으나, 거대한 상호 작용을 연구하기 때문에, 생물학자 쑹 리보다 생태학자 루시는 화성 생태계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루시가 지적한 것처럼, 화성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하거나 농사를 짓는다면, 그건 화성 생태계를 오염시킬지 모릅니다. 농사는 생태계를 바꾸는 대표적인 행위입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농사는 그걸 인위적으로 촉진하고 열매들을 선별하고 대량 생산합니다. 이런 행위는 자연 생태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테고 자연 생태계를 바꿀 겁니다. 비록 화성에서 과학자들이 간신히 목숨들을 부지한다고 해도, 루시는 그들이 화성 생태계를 오염시킬지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이미 화성에 도착했을 때, 과학자들은 화성 생태계를 오염시켰을지 모릅니다. 오염 없이, 순수하게 인간이 개입하고 관찰할 수 있을까요?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처럼,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은 사람들이 외계 행성에 정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생존자들이 되든, 개척자들이 되든, 사람들은 외계 행성에 정착합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주거지를 짓고, 농사를 짓고, 주변 환경을 바꿀 겁니다. 어쩌면 외계 행성에 사람들이 도착하는 순간, 이미 생태계 변화나 환경 오염은 나타났을지 모릅니다. 만약 개척자들 때문에 외계 행성 생태계가 바뀐다면, 생태학자들은 그걸 비판할 겁니다. 우리가 함부로 외계 생태계를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그런 권한이 있을까요? 외계 생태계에는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가치를 없앨 수 있는 권한이 있을까요?


지구에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숲을 밀어내고, 야생 동물들을 사냥하고, 숱하게 자연 생태계를 바꿉니다. 이미 인간은 수많은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켰습니다. 비단 서구 백인들만 아니라 원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문명인들은 원주민들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명인들에 비해 원주민들은 상대적으로 자연 친화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원주민들 역시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생명체이고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명체들과 충돌해야 합니다. 이건 피하지 못할 운명이죠.



사람들이 숲을 줄이고 호랑이를 없앤다고 해도, 이건 피하지 못할 운명입니다. 호환을 반가워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심지어 호랑이를 사랑하는 동물학자조차 호환이 반갑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른바 '그리즐리 맨' 티모시 트레드웰은 회색곰들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회색곰이 티모시를 공격했을 때, 티모시는 그게 좋다고 느끼지 않았겠죠. 사람들과 커다란 포식동물들은 충돌해야 하고, 사람들은 포식동물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이건 인간이 무조건 모든 숲을 없애고 호랑이를 멸종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거대한 야생 보호 구역을 설정하고 호랑이들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야생 보호 구역이 넓어야 하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울창한 숲과 호랑이들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것이 시장과 상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그건 웃기지 않은 헛소리입니다. 21세기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계 행성에서 사람들이 외계 환경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지구 생태계를 관리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외계 자연 환경을 관리할 권한이 있을까요? 왜 구태여 우리가 외계 행성으로 나가고 외계 자연 환경을 관리해야 하나요? 만약 우리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면, 누가 우리에게 권한을 줬나요? 위대한 옛 존재들이나 오버로드들이 우리에게 권한을 줬나요?



[여기는 불모지, '빈 땅'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모지 행성에게도 특정한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플래닛 베이스>는 불모지 행성에서 사람들이 도시를 짓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플래닛 베이스>에는 건조하고 혹독하고 축축한 여러 불모지 행성들이 있습니다. 이런 행성들에서 사람들이 도시를 짓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게 침략이나 정복이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불모지 행성은 '빈 땅'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빈 땅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그건 침략이나 정복이 아니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아무도 살지 않기 때문에 불모지 행성이 빈 땅이 될까요? 외계 행성에서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당연히 외계 행성을 개척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그런 권한이 있을까요?


어쩌면 외계 행성에는 아직 우리 인간이 찾지 못하는 미생물 생태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를 관찰할 수 있겠습니까? 불모지 행성에 찾아갔을 때, 우리가 어떤 생명체도 살지 않는다고 완전하게 100%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우리는 우주를 초월하지 못하고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사고하거나 관찰하지 못합니다. 만약 외계 행성에서 사람들이 도시를 짓는다면, 도시는 (아직 인간이 파악하지 못한) 미생물 생태계를 멸종시킬지 모릅니다. 미생물 생태계는 진화하고 번성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을 겁니다.



외계 미생물 생태계가 영원히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외계 생태계를 없애기 위한 권한이 있을까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생명체이기 때문에 지구에서 우리는 호랑이를 관리하고 천연두를 없애야 합니다. 이건 운명입니다. 하지만 지구 생명체인 우리가 구태여 외계 행성에 진출하고 외계 미생물 생태계를 없애야 할까요? 누가 그런 권한을 줬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권한을 줬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위대한 옛 존재들이나 오버로드들은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음에도, 외계 행성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도시를 지어야 할까요?


왜 구태여 우리가 지구 밖으로 나가고 외계 행성에 찾아가야 할까요? 게다가 외계 행성에 생태계가 없다고 우리가 확신한다고 해도, 불모지 외계 행성에는 고유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화성은 불모지 행성입니다. 어쩌면 화성에는 생명체들이 있을지 모르나, 생명체들이 없다면, 화성은 불모지 행성이 되겠죠. 사람들은 화성이 '빈 땅'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화성이 '빈 땅'일까요? 아무도 살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그 장소가 '빈 땅'이 되나요? 화성에는 40억 년을 넘는 세월이 있습니다. 화성은 40억 년이 넘는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했습니다. 이건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지구 진화 역사에서도 40억 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죠.



40억 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견뎌야 했기 때문에 화성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지구 진화 역사는 40억 년에 미치지 못하거나 40억 년에 이릅니다. 지구 진화 역사처럼, 화성이 견딘 세월에게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지질학자 앤 클레이본은 생명체가 없다고 해도 불모지 화성에게 가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불모지에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땅에서 농작물들이 자라고 나무들이 우거지고 동물들이 뛰어다닐 때, 사람들은 그 장소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인간 중심적인 관점입니다. 아니면 이건 너무 생명체 중심적인 관점일지 모릅니다.


왜 우리가 어떤 것을 판단할 때, 기준이 생명체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중심인가요? 우리가 우주의 중심인가요? 기독교 신도들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신이 자신의 형상을 이용해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신은 인간(남자)이 만물을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신은 꽤나 성 차별론자인 것 같습니다.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을 수 있으나, 이브는 그렇게 하지 못했죠. 하지만 위대한 옛 존재들이나 오버로드들처럼,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나 우주의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준을 바꾼다면, 가치는 사라지거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불모지에도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과학자들이 시간 여행 장치를 만들고 태블릿 컴퓨터를 13세기 유럽으로 보낸다면, 유럽 귀족들이 태블릿 컴퓨터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태블릿 컴퓨터는 21세기 첨단 장비입니다. 태블릿 컴퓨터가 있기 때문에 야외에서 사람들은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글을 쓰거나 다른 프로그램들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3세기 유럽 귀족들은 태블릿 컴퓨터가 뭔지 알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그들은 매니악 같은 원시적인 컴퓨터조차 알지 못할 겁니다. 13세기 유럽 귀족들은 절대 태블릿 컴퓨터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들이 우연히 전원을 켜고 태블릿 컴퓨터를 작동시킨다고 해도, 그들은 어떻게 인간이 태블릿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13세기 유럽 귀족들은 태블릿 컴퓨터를 숭배하거나 이게 쓰레기라고 취급할지 모릅니다. 21세기 도시 시민에게 태블릿 컴퓨터는 유용한 첨단 장비이나, 13세기 유럽 귀족에게 태블릿 컴퓨터는 정체 모를 물건이거나 쓰레기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가치는 사라지거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치는 절대적이고 영원불멸하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불모지에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나, 그건 착각일지 모릅니다. 소설 <붉은 화성>이 보여주는 것처럼, 불모지 행성에서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해도, 지질학자는 얼마든지 불모지 행성을 연구하고 방대한 연구 결과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불모지 행성, '빈 땅'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뭔가를 놓칠지 모르죠.]



비디오 게임 <플래닛 베이스>에서 사람들이 도시를 뚝딱뚝딱 지을 때, 지질학자 앤 클레이본은 안타깝게 그걸 바라볼 겁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짓고 확장할 때, 외계 행성은 고유한 가치를 잃을 겁니다. 앤 클레이본은 '사람들이 손을 대지 않은' 순수한 외계 지질을 연구하고 싶어하겠죠. 어쩌면 앤 클레이본은 <플래닛 베이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확장할 때, 외계 지질은 가치를 잃을 겁니다. 사람들이 행성 전체로 도시를 확장한다면, 불모지 행성은 엄청난 가치를 잃을 겁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테라포밍을 시도한다면, 앤 클레이본은 진저리를 칠 겁니다.


우리에게 외계 행성에서 도시를 확장할 권한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테라포밍을 시도하고 불모지 행성을 없애기 위한 권한이 있을까요? 우리가 불모지 행성에게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만약 누군가가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건 너무 섣부른 판단일지 모릅니다. 이미 인류 문명은 '빈 땅'에 가치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그건 엄청난 비극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서구 문명이 식민지 대륙에 도착했을 때, 백인들은 식민지 대륙이 '빈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원주민들과 인디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취급했고, 따라서 식민지 대륙은 빈 땅이 되었습니다. 백인들은 빈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과거 유럽 백인들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빈 땅'이었습니다. 서구 문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럽 백인들은 자신들이 빈 땅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함부로 야생 동물들을 도살했습니다. 백인들에게 동물들을 팔기 위해 어떤 원주민들은 동물 도살에 참가했습니다. 그렇게 '빈 땅'을 수탈하는 동안 서구 문명은 발전했죠. 그렇게 서구 자본주의는 온갖 인종 차별들과 환경 오염들과 동물 학대들을 거쳤습니다. 온갖 인종 차별들과 환경 오염들과 동물 학대들 때문에 서구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있었죠. 그래서 서구 자본주의는 절대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들 때문에 서구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서구 자본주의는 식민지 지역들을 수탈합니다. 군사적인 폭력은 사라졌으나, 경제적인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노골적인 군사적인 폭력은 사라졌으나, 은밀한 군사적인 폭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식민지 주민들은 계속 신음하고, 식민지 자연 환경은 계속 오염됩니다. 서구 백인들은 계몽과 이성과 과학을 외쳤으나, 그건 서구적인 계몽이었고 부르주아 계급의 이성이었고 가부장적인 과학이었습니다. 서구적인 계몽과 부르주아 계급의 이성과 가부장적인 과학은 '빈 땅'을 수탈했고,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자연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막스 베버나 게오르크 헤겔이나 조지 버나드 쇼는 유명한 지식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몽주의와 이성과 과학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빈 땅'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을까요? 막스 베버는 유럽 백인보다 인디언이 열등하다고 간주했습니다. 막스 베버는 중국인들이 무식하기 때문에 중국에 자본주의 경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스 베버는 유럽이 열대 밀림을 파괴했기 때문에 유럽 자본주의가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종 차별이 머릿속에 틀어박혔기 때문입니다. 막스 베버는 수구 보수적인 인종 차별론자였으나,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막스 베버를 신봉합니다.


게오르크 헤겔은 유럽 백인보다 흑인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흑인들에게 계몽과 과학과 이성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흑인들은 야만인들이고, 계몽과 과학과 이성은 백인들의 몫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진보한 문명이 열등한 문명을 수탈할 수 있다고 말했고 식민지 수탈을 옹호했습니다. 심지어 조지 버나드 쇼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자본론>에 감동했고 존 메이너드 케인즈에게 <자본론>을 권유했습니다. 뭐, 케인즈는 <자본론>을 개무시했으나, 케인즈에게 <자본론>을 권한 것처럼, 조지 버나드 쇼는 대표적인 유럽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식민지 수탈에 반대했습니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장했고, 당연히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지 수탈에 반대했습니다. 솔직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럽 중심적이었고 어느 정도 식민지 수탈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산주의가 도래하기 전에 전세계가 자본주의로 발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식민지 근대화 이론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론과 실천은 다를 수 있습니다. 유럽 사회 민주주의 정당 당원들에게 <공산당 선언>은 교과서와 비슷했습니다. <공산당 선언>이 식민지 수탈에 반대했기 때문에, 당연히 유럽 사회 민주주의는 식민지 수탈에 반대했습니다. 게다가 식민지 수탈이 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급진적인 사회 민주주의 당원들은 격렬하게 식민지 수탈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에게 동조하는 사회주의자들은 1차 세계 대전에 동의했고 전쟁에 반대하는 민중 혁명과 로자를 학살했습니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식민지 수탈을 옹호할 때, 그들은 계몽과 과학과 이성을 믿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계몽과 과학과 이성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유럽 사회 민주주의는 계몽과 과학과 이성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유럽 백인 남자 상류층의 계몽과 과학과 이성이었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에는 이런 단점들이 있습니다. 지리학자 제임스 블로트는 그 어떤 사상보다 마르크스주의가 평등을 추구한다고 말했으나, 동시에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든지 인종 차별에 빠질 수 있다고 보여줬습니다. 21세기 과학이 다를까요? 21세기 과학이 완전무결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21세기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불모지 행성을 바라볼 때, 21세기 사람들에게는 17세기 유럽 침략자들과 비슷한 관점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주에서 인류는 녹색 생명들을 뿌려야 할 겁니다. 그때 생명 현상은 계속 이어질 수 있겠죠.]



여기에는 정답이 없을 겁니다. 미래 인류가 무엇을 하든, 그건 비극이 되거나 희극이 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가치 판단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미래 인류가 지구를 떠나지 않든, 소행성 내부를 바다로 채우고 장수 거북들을 풀어놓든, 아무도 완전하게 가치를 판단하지 못할 겁니다. 미래 인류가 무엇을 하든, 인류는 그저 불안정하게 역사를 가로지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언젠가 인류 문명은 선택해야 할 겁니다. 선택의 시간이 도래했을 때, 중립은 없을 겁니다. 아무도 완전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중립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논의할 때, 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솔직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인류 문명이 외계 행성들로 진출하고 새로운 생태계들을 조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문학자들은 인류 문명이 외계 문명이나 외계 생태계와 만나지 못할 거라고 말합니다.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너무 넓고, 우주에 외계 문명들이나 외계 생태계들이 있다고 해도, 인류 문명은 거기에 닿지 못합니다. 언젠가 아득하게 머나먼 미래에 외계 문명이 태양계를 방문한다고 해도, 이미 태양계는 소멸했을지 모릅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면, 태양계와 함께 인류 문명은 사라질 겁니다. 태양계가 사라진다면, 인류 문명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못할 테고, 외계 문명은 한때 인류 문명이 존재했다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이건 가능성이 아주 아주 희박하나, 어쩌면 우주에서 지구는 유일한 생명의 요람일지 모릅니다. 만약 정말 지구가 유일한 생명의 요람이라면, 태양계가 소멸할 때, 유일한 생명의 요람 역시 사라질 겁니다. 아니, 태양계가 소멸하기 전에, 태양이 바뀐다면, 지구 생태계는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머나먼 미래에 태양이 바뀐다면, 우주에서 생명은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따라서 그 전에 인류 문명은 우주에 생명들의 씨앗들을 퍼뜨려야 할 겁니다. 인류 문명은 시도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인류 문명이 테라포밍이나 팬트로피에 성공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나, 적어도 인류 문명은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계속 외계 행성들에 새로운 생태계들을 퍼뜨릴 수 있다면, 우주에서 생명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지구에서 다른 생명체들은 하지 못합니다. 오직 인류 문명만 테라포밍이나 팬트로피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에는 많은 허점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주장이 완전하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밸 플럼우드 같은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주장에 반박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외계 행성에서 인류 문명이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할 때, 사람들은 토론하고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평등하게 교육을 받고,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논의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이 불안정한 역사를 가로지른다고 해도, 사람들이 평등하게 논의할 때, 인류 문명은 실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게 가능할까요?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평등한 논의가 가능할까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평등이 아니라 상품화를 추구합니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거기에 저항할 때, 세계화 자본주의는 그걸 무참하게 짓밟을 겁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연 과학자들조차 인류가 기후 변화를 초래했다고 헛소리합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인류이고, 세계화 자본주의가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수탈함에도, 과학자들은 이런 헛소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열심히 헛소리들을 퍼뜨립니다. 21세기 과학자들은 막스 베버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21세기 과학자들은 막스 베버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밑바닥 사람들을 외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등한 논의가 가능할까요? 과학자들이 밑바닥 사람들을 외면하고 인종 차별하는 상황에서 전세계 사람들이 평등하게 논의할 수 있나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는 세계화 자본주의가 테라포밍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그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망상이겠죠. 우리가 정말 외계 개척 생태계를 논의하고 싶다면, 그 전에 우리는 평등한 사회 구조를 이룩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외계 개척 생태계를 논의한다면…. 그건 진짜 모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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