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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블록후드> - 생태 공동체와 삼림 건물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블록후드> - 생태 공동체와 삼림 건물

OneTiger 2018. 11. 24. 18:19

[이 게임은 사회적인 합의와 삼림 건물, 야생 동물들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삼림 건물은 정말 환상적이에요.]



비디오 게임 <블록후드>는 건설 시뮬레이션입니다. 다른 건설 시뮬레이션들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뭔가를 뚝딱뚝딱 짓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하고, 건설 과정에서 각종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건설 게임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심시티> 같은 게임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심시티>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시장이 되고 도시를 짓습니다. 도시는 방대하고, 당연히 게임 플레이어는 온갖 방대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비단 <심시티>만 아니라 숱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도시에 치중하죠.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


종종 웅장한 도시를 지은 이후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런 광경을 흡족하게 바라봅니다. 건설 게임은 웅장해야 합니다. 어쩌면 건설 게임 세계에서 이건 관례일지 모릅니다. <블록후드>는 그런 관례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블록후드>는 웅장해질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메트로폴리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구글 이미지에서 이 게임을 검색한다면, 사람들은 웅장한 메트로폴리스보다 몇몇 건물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블록후드>는 방대한 도시가 아니라 건물들에 치중합니다. 그런 건물들이 모일 때, 그건 도시로 이어질 수 있으나, 그건 통상적인 도시와 다르겠죠.



방대한 도시를 짓지 않기 때문에, 일부 건물들에 치중하기 때문에, <심시티> 같은 게임에 비해 <블록후드>는 아기자기합니다. 고층 건물들이 주르륵 늘어서있는 건설 게임들과 달리, <블록후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서너 건물들에 신경을 쏟아야 합니다. 종종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오직 건물 하나에만 죽어라 매달립니다. 다른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도시 건설이라면, <블록후드>는 건물 건설에 가까울 겁니다. 왜 다른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들과 달리, <블록후드>는 도시가 아니라 건물을 중시할까요? 왜 이 게임이 훨씬 방대한 규모로 확장하지 않을까요?


방대한 도시를 표현한다면, <블록후드>가 다른 것들을 생략해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도시는 방대합니다. 도시가 방대하기 때문에, 이걸 표현할 때, <블록후드>는 물리적인 규모에 치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블록후드>는 물리적인 규모보다 생활 공간을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생활 공간. 우리가 숨쉬고 먹고 자고 활동하고 소통하는 생활 공간. 건축은 그저 자재들을 뚝딱뚝딱 조립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건축은 생활 공간을 조성하는 행위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게임 플레이어는 어떻게 사람들이 삶을 꾸릴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질을 향상하기 원합니다. 그 삶은 지속 가능해야 합니다. 건물은 레고 블록이 아닙니다. 건물은 살아있는 공간, 살아가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블록후드>에서 건물을 지을 때, 게임 플레이어는 주변 환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건물과 주변 환경이 어울리지 못한다면, 그 건물에서 사람들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 못할 테고 지속 가능한 삶을 이어가지 못하겠죠. 게임 플레이어가 아파트 주변에 공장을 짓는다면, 공장은 많은 수익을 창출할 겁니다. 수익을 더 많이 얻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공장들을 훨씬 늘리고 싶어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숲을 없애고 공장을 짓겠죠. 수익은 늘어나겠으나, 공장은 온실 가스를 뿜을 겁니다. 숲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무들은 온실 가스를 흡수하지 못합니다.


온실 가스가 계속 늘어난다면, 주변 환경은 오염될 테고, 아파트 역시 오염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죠. 결국 아파트는 오염될 테고, 공장 역시 무너질 겁니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겠죠. 게임 플레이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공장을 지을 때, 게임 플레이어는 비단 수익만이 아니라 주변 환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공장이 온실 가스를 뿜는다면, 온실 가스를 처리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나무들을 심거나 정화 장치를 설치해야 합니다. 어쩌면 나무들을 심거나 정화 장치를 설치하기 위해 주민들은 의견들을 모아야 할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주민 공동체를 짓고 의견들을 합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온실 가스를 흡수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가 숲을 늘린다면, 숲은 또 다른 환경을 조성할 겁니다. 숲을 유지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기름진 토양을 늘리거나 지하수를 끌어오거나 습지를 늘릴지 모릅니다. 습지에 어울리는 숲을 조성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맹그로브를 심거나 깨끗한 지하수를 위해 다른 정화 장치를 설치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나무들이 늘어난다면, 야생 동물들은 숲으로 몰리겠죠. 초식동물들이 늘어난다면, 육식동물들 역시 숲으로 몰릴 겁니다. 아파트와 주민들과 공장과 숲과 야생 동물들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여기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주민들과 야생 동물들이 서로 어울리고, 소통하고, 합의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속 가능한 삶을 꾸리는 공간이 될 겁니다. <블록후드>는 그런 공간을 표현하기 원합니다. 이 게임은 게임 플레이어가 뚝딱뚝딱 자재들을 조립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건축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조립 행위에 불과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아무거나 조립한다고 해도, 건물들은 늘어날 겁니다. 하지만 그런 건물들은 생활 공간이 되지 않겠죠. 생활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주변 환경을 파악하고 건물과 주민들과 자연 생태계가 무슨 관계들을 맺는지 예상해야 합니다.



만약 다른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블록후드>가 방대한 도시를 표현했다면, <블록후드>는 이런 생활 공간에 쉽게 치중하지 못했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유기적인 생활 공간보다 방대한 물리적인 규모에 신경을 쏟겠죠. 이건 방대한 도시 건설 게임이 무조건 물리적인 규모를 내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방대한 도시 건설 게임 역시 유기적인 생활 공간과 지속 가능한 삶을 표현할 수 있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생활 공간보다 물리적인 규모에게 시선을 돌릴지 모릅니다. 이런 현상은 거대 괴수 영화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뭐라고 느끼든,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에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괴수들이 싸움박질을 벌인다면, 등장인물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겠죠.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이 뭐라고 느끼고 이야기하는지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등장인물들은 그저 움직이는 배경에 불과하겠죠. 등장인물들이 고통스러워하고 분노하고 겁에 질리고 울부짖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언제 거대 괴수들이 싸움박질을 벌일지 기다릴 겁니다. 거대 괴수 영화가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폭력과 싸움박질이 없다면, 관객들이 거대 괴수 영화에 진지하게 몰입할까요? 아니, 자연 생태계는 그저 병풍 따위에 불과하겠죠. 거대 괴수 이야기처럼, 방대한 도시 건설 게임은 유기적인 생활 공간을 압도할지 모릅니다. 방대한 도시 시장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생활 공간이 아니라 오직 물리적인 규모만을 바라볼지 모릅니다. <블록후드>는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방대한 도시가 아니라 몇몇 건물에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생명체들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건물이 생활 공간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블록후드>는 퍼즐 형식을 도입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 게임 플레이어는 퍼즐을 풀어야 합니다. <블록후드>에서 모든 주민, 동물, 식물, 건물, 기후, 지리는 서로 다양한 관계들을 맺습니다. 그런 관계들을 조절할 때마다, 생활 공간은 무너지거나 지속 가능한 삶을 꾸릴 수 있습니다. <블록후드>에서 수많은 요소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독립적이지 않고 고립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이어지고, 그런 연결망 속에서 건물은 살아있는 공간이 됩니다. 수많은 주민들, 구조물들, 식생들, 동물들은 뭔가를 소비하고 동시에 뭔가를 생산합니다.


소비와 생산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일지 모릅니다. 아파트는 유기 폐기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주민들은 먹고 자고 쌀 테고, 그런 것들은 유기 폐기물이 되겠죠. 유기 폐기물들이 모인다면, 그건 지하수와 공기를 오염시킬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기름진 토양을 조성하고 정화 장치를 설치한다면, 토양과 정화 장치는 유기 폐기물을 흡수할 겁니다. 기름진 토양 위에 숲이 있다면, 숲은 깨끗한 공기를 '생산'할 겁니다. 정화 장치들 역시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정화 장치는 주민들의 합의를 '소비'할지 모릅니다. 이건 주민들이 서로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죠. 정화 장치를 늘리고 싶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주민 공동체를 지어야 합니다. 주민 공동체는 주민들의 합의를 '생산'할 겁니다.



하지만 주민 공동체는 지식을 '소비'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게임 플레이어는 지식을 생산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도서관과 학교를 짓는다면, 도서관과 학교는 지식을 '생산'할 겁니다. 기름진 토양 위에서 나무들이 늘어난다면, 나무들은 비단 깨끗한 공기만 아니라 '야생과 레저를 생산'할 겁니다. 야생과 레저가 늘어날 때, 어떤 주민들은 행복하다고 느낄 겁니다. 나무들이 늘어난다면, 야생 동물들은 숲으로 몰릴 테고, 그것들은 야생과 레저를 더 많이 '생산'할 겁니다. 그건 다시 주민 사회에 영향을 미치겠죠. 이렇게 퍼즐을 조립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생산과 소비 관계들을 조립해야 합니다.


<블록후드>에는 담수, 염수, 공기, 지하수, 전력, 유기 폐기물, 과일, 물고기 같은 유형적인 자원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블록후드>에는 야생, 레저, 지식, 지역 사회 같은 무형적인 자원들이 있습니다. 유형적인 자원들과 무형적인 자원들은 서로 영향들을 미칩니다. 야생, 레저, 지역 사회는 비가시적입니다. 이런 것들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누가 야생을 그리거나 지역 사회를 만질 수 있겠어요? 나무와 여우는 야생 자원을 늘리겠으나, 나무와 여우는 야생이 아닙니다. 주민 공동체는 지역 사회 자원을 늘리겠으나, 우리는 주민 공동체를 보거나 만지지 못합니다. 야생과 주민 공동체는 비가시적인 자원이죠. 하지만 이런 비가시적인 자원들 역시 생활 공간에 막대한 영향들을 미칩니다. 지속 가능한 삶을 꾸리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자원들을 꾸준히 생산해야 합니다.



<블록후드>에는 여러 게임 모드들이 있습니다. 건설 시뮬레이션으로서 샌드박스 모드는 주된 게임 모드겠죠. 하지만 스토리 모드는 <블록후드>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직접 드러낼 겁니다. 스토리 모드를 이끌어가는 두 게임 주인공은 어떤 남자와 멧돼지입니다. 어머, 멧돼지? 왜 멧돼지가 나올까요? 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멧돼지가 주인공이 될까요? 스토리 모드에서 남자는 무분별한 산업 개발을 상징합니다. 반면, 멧돼지는 야생과 레저, 지속 가능한 삶을 상징하죠. 이건 꽤나 진부한 구도입니다. 인간 남자는 무분별한 산업 개발이 되고, 야생 동물(멧돼지)은 지속 가능한 삶이 됩니다. 이건 너무 단순한 이분법이고 흑백 논리 같습니다.


하지만 스토리 모드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성찰로 흘러갑니다. 남자가 소년이었을 때, 숲에서 소년은 멧돼지를 만납니다. 소년과 멧돼지는 함께 도토리들을 찾고 즐겁게 놉니다. 남자가 청년이 되었을 때, 청년은 아파트들을 짓기 원합니다. 청년 옆에서 멧돼지는 나무들과 야생 동물들 역시 중요하다고 조언하죠. 청년은 조언을 받아들이고 도시와 야생은 어느 정도 공존합니다. 남자가 중년이 되었을 때, 마침내 문제는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중년 남자는 건설 기업 직원이 되었고 공장들을 늘리기 원합니다. 공장들이 늘어날 때, 건설 기업은 막대한 수익을 얻고, 중년 남자는 수익에 두 눈이 멀어요.



수익 앞에서 중년 남자는 오직 산업 개발만을 추구합니다. 공장들은 계속 늘어납니다. 공장들이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주변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해도, 중년 남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시위대들이 분노하고 오염 수치가 올라간다고 해도, 중년 남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중년 남자 옆에서 멧돼지가 떠든다고 해도, 중년 남자는 듣지 못합니다. 이제 중년 남자는 더 이상 멧돼지와 이야기했던 소년과 청년이 아닙니다. 소년과 청년은 사라졌습니다. 중년 남자는 오직 수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인 인간이 되었죠. 멧돼지는 상황이 잘못 돌아간다고 계속 경고하나, 중년 남자는 오직 산업 개발만을 쳐다볼 뿐입니다.


중년 남자는 산업 개발을 계속 밀어붙입니다. 이제 중년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 과일들, 나무들, 사회적인 합의, 시위대들, 지역 공동체. 아무것도 남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수익이 수익을 낳고, 그 수익이 또 다른 수익을 낳고, 그 수익이 다시 수익을 낳을 때, 남자는 그저 기뻐할 뿐입니다. 멧돼지는 무분별하고 급속한 산업 개발이 잘못될 거라고 계속 경고하나, 중년 남자는 이윤 축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죠. 멧돼지는 상황이 너무 이상하다고 걱정하나, 중년 남자는 걱정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년 남자가 자본주의를 달성한 이후, 경고는 현실이 됩니다. 건물들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환경 오염은 생활 공간을 짓밟고 오염시키기 시작합니다. 충격과 공황 속에서 중년 남자는 붕괴와 종말을 목격합니다.



"인간, 순록, 소나무 같은 동식물은 죽었을 때보다 살아있을 때가 낫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생명을 파괴하기보다 보존하기에 힘쓸 겁니다." 이 문구는 헨리 데이빗 소로의 말입니다. 도시가 붕괴한 이후, 멧돼지는 다른 멧돼지 친구와 함께 다른 야생 지역으로 도망칩니다. 두 멧돼지와 게임 플레이어는 함께 새로운 생활 공간을 짓기 시작합니다. 나무들, 습지들, 풀밭들, 여러 야생 동물들…. 두 멧돼지와 게임 플레이어는 풍성한 생물 다양성과 자연 생태계를 가꾸기 시작하죠. 이런 자연 생태계에 중년 남자 역시 도착합니다. 모든 것이 붕괴한 도시에서 탈출한 이후, 중년 남자는 풍성한 자연 생태계에 도착했습니다.


중년 남자는 멧돼지와 만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습니다. 멧돼지는 남자가 두 눈이 멀었다고 이야기하죠. 산업 개발과 수익 때문에 중년 남자는 두 눈이 멀었고 종말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중년 남자는 땅을 치고 후회합니다. 다시 시간은 흐르고, 남자는 노인이 됩니다. 노인과 (늙은) 멧돼지는 모든 것이 붕괴한 도시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제 남자는 생물 다양성과 자연 생태계와 공존이 무엇인지 압니다. 남자와 멧돼지는 무너진 도시를 살리고 건물들과 자연 환경과 주민 공동체를 복구하기 시작합니다.



스토리 모드가 이야기하는 서사는 간단합니다. 솔직히 서사가 너무 진부하기 때문에 이걸 구태여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수많은 책들에서 사람들은 이런 서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겠죠. 무분별한 산업 개발은 나쁘고, 인간은 자연과 공존해야 하고,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아무리 서사가 진부하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는 진부한 서사를 감동적인 생태 철학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 모드를 진행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숲을 돌아다니고, 숲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고, 무분별한 산업 개발을 추구하고, 생물 다양성을 깨닫고, 마침내 생태 공동체를 조성합니다.


이건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그런 과정에 참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스스로 숲을 돌아다니고,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 물질들을 퍼뜨리고, 잘못을 깨닫고, 다시 생태 공동체를 복구하죠.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의 손으로 시작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그걸 다시 복구합니다. 적어도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그런 과정에 참가한다고 느낄 겁니다. 이건 게임의 장점이겠죠. 책을 읽거나 영화를 관람할 때보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서사에 참가한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서사가 진부하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는 감동적인 생태 철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태 철학은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로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 자체로서 <블록후드>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이 게임에 사이언스 픽션 요소는 없습니다. 아무도 이게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하지만 <블록후드>와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환경 오염이 문명을 끝장낼 거라고 걱정하죠. 고전적인 생태 유토피아 <에코토피아 뉴스>, 생태 공동체를 그리는 <퍼시픽 엣지>, 폐허 속에서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는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 오염과 붕괴와 절망을 바라보는 <워터 나이프>까지.


사이언스 픽션 세상에서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커다란 줄기를 형성했습니다. 이런 소설들에 친숙하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블록후드> 스토리 모드와 SF 소설들을 쉽게 연결할 수 있겠죠. 산업 폐기물들이 늘어나고, 온실 가스가 늘어나고, 주민들이 시위하고, 도시가 붕괴하고, 남자가 공황에 빠지고, 멧돼지가 야생 지역으로 도망칠 때…. <블록후드>는 <에코토피아 뉴스>, <퍼시픽 엣지>, <홍수>, <워터 나이프>와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블록후드>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이 게임은 일련의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죠.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번개 모임을 연다면, <블록후드>가 거기에 참가한다고 해도,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반갑게 <블록후드>를 맞이할 겁니다.



만약 마가렛 앳우드나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블록후드>를 플레이한다면, 뭐라고 그들이 말할까요? 그건 확실하지 않으나, 분명히 마가렛 앳우드나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느낌을 말할 겁니다. <블록후드>가 보여주는 생태 철학에는 그런 가치가 있겠죠. 이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을 좋아하는 SF 독자에게 <블록후드>는 긍정적인 경험이 될 겁니다. 제가 직접 이 게임을 플레이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는 게임 플레이를 자세히 평가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감상문들을 읽고 공략 동영상들을 지켜본다면, SF 독자들은 <블록후드>와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을 어렵지 않게 연결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고층 건물들이 숲을 조성하고 야생 동물들을 품을 때, 그런 장면은 미래의 삼림 건물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게임 잡지 코타쿠는 <블록후드>가 미래적인 건물을 정말 환상적으로 보여준다고 호평했어요. 코타쿠가 미래를 언급한 것처럼, <블록후드>는 정말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을지 모르죠. 삼림 건물들은 미래로 이어지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인공 생태계가 될 수 있을까요? 흔히 인공 생태계는 폐쇄 생태계가 됩니다. 바이오스피어 2 실험처럼, 사람들은 인공 생태계가 폐쇄 생태계라고 간주하죠. 하지만 <블록후드>에서 삼림 건물은 닫힌 생태계가 아니라 열린 생태계입니다. 미래 도시는 정말 '열린 인공 생태계'를 조성할지 모릅니다. <블록후드>는 아기자기한 게임이고 열린 인공 생태계를 자세히 고증하지 않으나, 삼림 건물은 꽤나 인상적이에요.



아쉽게도 그런 인상적인 풍경은 일정한 선을 넘지 못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이 공존해야 한다고 깨달을지 모릅니다. 수많은 유닛들이 깨끗한 공기를 뿜을 때, 인간들과 야생 동물들이 함께 어울릴 때, 게임 플레이어는 '환경 보호론자' 도전 과제와 '공생' 도전 과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블록후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환경 보호론자가 되고, 공생을 체험하고, 주민 공동체와 생태 도시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블록후드>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환경 보호론자 도전 과제를 달성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그걸 현실에 적용하지 못할 겁니다. 이 게임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분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블록후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얼마든지 주민 공동체와 생태 도시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현실에서 권력자들은 독점 자본가들입니다. 독점 자본가들이 공장들을 짓고 온실 가스를 뿜는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굴복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현실에서 사람들은 절대 자연 생태계를 평등하게 관리하지 못하죠. 정말 생태 도시를 짓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분석해야 합니다. 그런 분석 없이, 우리는 절대 생태 도시를 짓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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