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플래닛 베이스> - 인공 생태계와 바이오 돔 본문
[이런 바이오 돔은 인공 생태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것을 관리할 수 있을까요?]
비디오 게임 <플래닛 베이스>는 외계 개척 도시를 건설하는 건설 및 경영 시뮬레이션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개척 지도자가 되고 외계 행성에서 무사히 개척 도시를 건설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달리, <플래닛 베이스>에서 외계 행성들은 불모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우주복 없이 인간이 생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계 행성 환경은 불모지보다 훨씬 가혹합니다. 지구 식생과 비슷한 생태계는 없습니다. 외계 행성들은 붉은 사막이거나 혹독한 눈밭이거나 거대한 가스 덩어리거나 위험한 폭풍 지대입니다.
당연히 이런 환경에서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성 공학은 불가능한 꿈이죠. 다른 건설 게임들과 달리, <플래닛 베이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일반적인 도시를 짓지 못합니다. <플래닛 베이스>에서 개척자들은 돔들을 건설하고 돔들을 서로 연결합니다. 외계 개척 도시는 돔 도시가 됩니다. 크고 작은 수많은 돔들과 그런 돔들을 연결하는 길고 짧은 통로들. 이런 구조는 외계 개척 도시를 대변하나, 이런 구조가 도시가 될 수 있을까요. 이건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는 도시 풍경과 거리가 멉니다. 게임 제목처럼, 이건 도시보다 개척 기지에 가깝죠. 이건 수많은 돔들이 기능적으로 늘어서있는 개척 기지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행성 공학을 시작한다면, 이런 수많은 돔들은 없어질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아주 거대한 돔을 짓고 그 돔 안에 일반적인 도시를 세울지 모릅니다. 그건 진짜 외계 개척 도시가 될 수 있겠죠. 하지만 <플래닛 베이스>에서 개척자들은 그런 외계 도시를 꿈꾸지 못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당장 수많은 돔들을 지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일반 노동자, 생물학자, 기술자, 의사, 경비 대원, 운송 로봇, 건설 로봇, 드릴 로봇을 이용해 물품들을 옮기고, 돔들을 짓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식량들과 재화들을 생산하고,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인구를 늘리고, 사회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개척 기지를 무사히 건설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수많은 요소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전력이 모자란다면, 수많은 돔들은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적당한 식당과 잠자리가 없다면, 개척자들은 피로에 시달릴 겁니다. 운석과 모래 폭풍, 벼락은 돔들을 날려버릴지 모릅니다. 침략자들은 허술한 외계 개척 기지를 약탈할지 모릅니다. 약품들이 없다면, 의사들은 환자들을 치료하지 못하겠죠. 식량들이 없다면, 개척자들은 굶주릴 겁니다. 식량들을 생산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바이오 돔을 짓고 생물학자들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녹색 바이오 돔에서 생물학자들은 여러 작물들을 키우고, 이것들은 다양한 요리 조합들이 됩니다.
<플래닛 베이스>에서 생물학자들은 농민들이 됩니다. 그들은 여러 작물들을 키워야 하고 인공적인 고기들을 생산해야 합니다. 만약 현실에서 과학자들이 외계 개척 기지를 건설한다면, 정말 생물학자들이 직접 농사를 지을까요? 어쩌면 그럴지 모릅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생물학자들은 농민들이 되고 화성 개척 도시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우주선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폐쇄된 공간 안에서 작물들이 자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했죠. 생물학자들은 그걸 화성 개척 도시에 적용합니다.
만약 인류가 화성 개척 도시를 짓는다면, 생물학자들은 직접 농민들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붉은 화성>에서 개척자들은 과학자들입니다. 초기 화성 개척자는 모두 과학자입니다. 따라서 좋든 싫든, 과학자들은 일반 노동자들과 농민들과 의사들과 기술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노동과 연구를 병행해야 했죠. 초기 화성 개척 도시에는 순수한 지식인이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오직 연구만을 고집했다면, 누군가가 노동을 거부했다면, 다른 과학자들은 눈총들을 보내거나 그 사람을 처벌했을지 모릅니다. 살아남기 위해 과학자들은 빨리 개척 도시를 짓고 확장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개척 도시를 늦게 지었다면, 그들은 목숨들을 잃었을지 모릅니다.
개척 과학자들은 제한적입니다. 화성은 지구가 아니고, 인력은 제한적입니다. 개척 과학자들은 제한적인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습니다. 우주복을 입지 않는다면, 화성에서 과학자들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당장 개척 기지가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오직 연구만을 고집하고 노동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모두의 안전을 위협할 겁니다. 사실 화성에 도착하기 전에 과학자들은 그들이 연구와 노동을 병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죠. 그래서 아무도 노동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지구에서 그들은 개척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의 실험했고 훈련했죠.
심지어 몇몇 과학자는 자신들이 직접 화성 개척 기지를 짓는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일손을 놓지 않았죠.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화성에서 그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 골몰했어요. 그래서 화성에 도착한 이후, 생물학자들은 직접 농민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SF 작가의 상상력입니다. 진짜 개척 도시 건설 과정은 이것과 다를지 모릅니다. 미래는 SF 작가의 상상력과 다를지 모릅니다. 이런 묘사와 달리, 화성 개척 도시에는 정말 농민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개척 도시에 넓은 농장들이 있다면, 농민들은 작물들을 키울 테고, 작물들은 개척자들을 먹여 살리겠죠. 생물학자들은 오직 연구만 담당하고, 농민들은 작물들과 가축들을 맡을지 모릅니다.
생물학자들과 농민들이 분업하고 싶다면, 개척 기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개척자들이 제한적이라면, 그들은 쉽게 분업하지 못할 겁니다. 개척자들은 연구와 노동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종종 그들은 수많은 작업들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개척자들은 노동자들이 되고 동시에 농민들이 되고 동시에 기술자들이 되고 동시에 건축가들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특정한 분야만을 고집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생물학자는 노동자와 농민과 기술자와 건축가와 의사가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개척 도시를 짓는 과정은 고되고 힘들 겁니다. 아무리 개척자들이 다양한 대안들을 세운다고 해도, 외계 행성은 그들이 깨닫지 못한 시련들을 선사하겠죠. 이런 상황에서 아무도 노동을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과학자들은 노동자들이 되어야 할 겁니다. 과학자들이 순수하게 오직 연구만 고집하고 싶다면, 개척 기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해야 합니다. 개척 도시가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해야 한다면, 우주선들은 지구에서 화성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운송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주선들에 그런 여력이 있을까요? 우주선들이 단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운송할 수 있을까요? 개척 도시를 짓기 전까지, 화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울 겁니다. 전문가들은 화성 개척 기지가 쉽게 자급자족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자급자족 능력은 아주 떨어지겠죠. 이런 악조건 아래에서 개척 기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휴대 식량들로 개척자들이 버틸 수 있다고 해도, 개척 기지는 당장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할 겁니다. 개척자들은 제한적일 테고, 그들은 수많은 노동들을 맡아야 할 겁니다. 따라서 생물학자들은 직접 농민들이 될지 모릅니다. 설사 소설 <붉은 화성>과 게임 <플래닛 베이스>가 틀리게 묘사했다고 해도, 진짜 화성 개척 기지에서 지식 노동과 육체 노동은 분리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모두 지식 노동자가 되고 동시에 육체 노동자가 될지 모르죠.
이런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지식 노동과 육체 노동을 다시 고찰할지 모릅니다. 지식 노동은 개척 기지를 뒷받침하지 못할 겁니다. 육체 노동이 없다면, 개척 기지는 무너질 겁니다. 개척 기지는 작은 인류 문명입니다. 개척 기지는 인류 문명의 축소 판본이 되겠죠. 문명이 나타날 때, 언제나 육체 노동은 문명을 떠받쳤습니다. 농민들이 없는 문명이 존재할 수 있겠어요? 그런 문명은 존재한 적이 없을 겁니다. 그런 문명은 절대 존재한 적이 없을 겁니다. 살기 위해 인간은 먹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식량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식량을 생산해야 합니다.
종종 비디오 게임들은 이런 과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비디오 게임의 장점은 그것이죠. 시험 모델 같은 함축적인 표현. 그것 때문에 비디오 게임은 가볍고 얄팍해질 수 있으나, 어떤 현상을 단순화할 수 있죠.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실시간 전략입니다. 하지만 <커맨드 앤 컨커>나 <홈월드>나 <KKND> 같은 실시간 전략과 달리,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문명이 나타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커맨드 앤 컨커>와 <홈월드>와 <KKND>보다 <문명>에 훨씬 가깝습니다. 심지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는 전투 없는 게임들이 있습니다. 이게 실시간 전략 게임인데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전투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가장 먼저 진보된 문명을 건설한다면, 그 게임 플레이어는 승리할 겁니다.
이렇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문명 발달 과정을 조명하죠.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게임 플레이어는 식량들을 생산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실시간 전략 게임과 달리,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식량 생산 방법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일꾼들은 과일들을 따고, 사슴들을 사냥하고, 양들을 도축하고, 물고기들을 낚고, 농장들을 일굽니다. 과일과 사슴 고기와 양 고기와 생선과 곡물은 모두 식량 자원에 속합니다. 목재 자원, 금 자원, 석재 자원과 달리, 식량 자원을 생산하는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식량 자원이 초기 문명을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식량 자원 없이 문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식량 생산은 육체 노동입니다. 인간이 과일을 따고, 사슴을 사냥하고, 양을 도축하고, 물고기를 낚고, 곡물을 키울 때, 그것들은 육체 노동이 됩니다. 정신 노동은 식량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지식인이 글을 쓰고 연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식량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지식인이 위대한 걸작들을 연이어 쓴다고 해도, 인간은 글을 먹지 못합니다. 좋은 글이 마음의 양식이 된다고 해도, 인간은 마음의 양식으로 살지 못합니다. 인간은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육체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육체의 양식이 존재한 이후, 마음의 양식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건 마음의 양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의 양식은 중요합니다. 인간은 오직 빵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빵과 함께 장미가 필요합니다. 설사 세상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직면한다고 해도, 생존자들은 휴대 식량과 함께 고전 문학을 챙겨야 할지 모릅니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디스토피아 소설처럼, 고전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삭막해질지 모릅니다. 육체의 양식처럼 마음의 양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의 양식이 중요하다고 해도, 인간은 오직 그것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육체의 양식을 생산해야 합니다. 육체 노동은 식량을 생산해야 합니다.
누가 식량을 생산해야 할까요? 어떻게 사람들이 식량을 생산해야 할까요? 수많은 문명들 속에서 지식 노동은 이런 것을 결정했습니다. 지식 노동자들은 육체 노동들을 결정했습니다. 농민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들을 직접 통제하지 못했죠. 현대 자본주의 사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농민들이 식량 생산을 결정할 수 있을까요? 농업 노동자들이 식량 생산을 결정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불가능합니다. 농업 노동자들은 영리 기업들에 속했습니다. 협동 조합들 이외에 농업 노동자들은 영리 기업들을 운영하지 못합니다. 기업 경영자들, 자본가들이 지시할 때, 농업 노동자들은 무조건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업 노동자들보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노동들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으나, 농민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 속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식량들과 노동들과 노동력들을 상품들로 만듭니다. 농민들은 상품화가 되어야 합니다. 농민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지고, 결국 그들은 상품화가 되어야 합니다. 농민들은 식량(곡물과 버섯과 가축)이 아니라 상품을 생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제나 거대한 권력은 독점 자본들에게 몰립니다. 농민들이 독점 자본들을 거부한다면, 독점 자본들은 농민들을 짓밟을 겁니다. 아니, 이미 독점 자본들은 숱한 농민들을 짓밟았습니다.
지식 노동들은 이런 과정을 옹호합니다. 독점 자본들이 숱한 농민들을 짓밟을 때, 지식 노동들은 독점 자본들을 편들죠. 얼마나 많은 지식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반대할까요? 설사 지식 노동자들이,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를 공격한다고 해도, 그들이 정말 자세히 자본주의를 분석할까요? 수많은 진보 지식인들은 자본주의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비 자본주의를 언급하거나 문화적인 이데올로기를 언급하거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언급합니다. 이것들이 정말 자세한 분석일까요? 소비 자본주의? 이건 망상입니다. 어떻게 생산 없이 소비가 존재할 수 있나요? 아무도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누가 식량을 소비할 수 있나요?
문화적인 이데올로기? 왜 독점 자본들이 가난한 농민들을 짓밟을까요? 농민들이 촌스럽고 꾀죄죄하기 때문에? 거름 냄새, 응가 냄새가 역겹기 때문에? 독점 자본들이 농촌을 차별하기 원하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진짜 목적은 이윤이죠. 이윤을 남기기 위해 독점 자본들은 식량을 상품화해야 합니다. 상품화 과정 속에서 독점 자본들은 농민들을 짓밟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사회?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무너뜨립니다. 식민지 수탈은 자본주의 발달을 뒷받침했습니다. 구조적으로 자본주의는 뭔가를 수탈해야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증명한 것처럼, 수탈 없는 자본주의는 성립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보 지식인들은 이런 것들을 떠들지 않습니다. 진보 지식인들은 생산 과정, 이윤 축적, 식민지 수탈을 떠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망상들만 떠들죠. 소비 자본주의, 문화적인 이데올로기, 더불어 사는 사회는 망상입니다. 진보 지식인들은 지배 계급, 독점 자본들을 공격하지 않아요. 그들은 독점 자본들을 옹호하고 민중들의 각성을 방해합니다. 자본주의를 공격하고 싶다면, 우리는 임금 노동 제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기본 소득은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계급 투쟁을 수반하는 기본 소득은 디딤돌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무산자 민중 계급이 독점 자본가들을 압박하고 기본 소득을 시행한다면, 그건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디딤돌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진보 지식인들은 이런 대안을 언급하지 않죠. 그들은 그저 착하게 살자고 말할 뿐입니다. 이건 악습입니다. 이런 악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지식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잘난 척해서는 안 됩니다. 지식 노동자들은 육체 노동자들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외계 개척 도시에서 이런 악습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노동들을 맡는다면, 지식 노동과 육체 노동은 분리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지식인들이 농민들이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농민들을 기만하지 못하겠죠.
게임 <플래닛 베이스>는 이런 사회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플래닛 베이스>는 그저 외계 기지 건설 게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소설 <붉은 화성>은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을 분리하지 않는 사회를 꿈꿉니다. 따라서 게임 플레이어가 <붉은 화성>과 <플래닛 베이스>를 서로 연결한다면,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을 분리하지 않는 사회를 상정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붉은 화성>과 게임 <플래닛 베이스>는 모두 외계 기지 건설을 묘사합니다. 주된 내용은 그것이죠. 따라서 <붉은 화성>과 <플래닛 베이스>는 서로 쉽게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생물학자들이 농민들이 되는 것처럼, <플래닛 베이스>에서 생물학자들은 농민들이 됩니다.
하지만 바이오 돔은 농장이 아닙니다. 바이오 돔은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농장과 많이 다릅니다. 여기는 농장보다 작물 실험실과 비슷합니다. 제한적인 토양 위에서 생물학자들은 작물들을 키웁니다. 이건 수경 농업이 아닙니다. 토양 그 자체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토양은 너무 좁습니다. 이런 좁은 토양 위에서 작물들이 자랄 수 있을까요? 수경 농업보다 이런 농업은 훨씬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아니면 이게 그저 비디오 게임적인 묘사에 불과할까요? 이렇게 정말 화성 개척 농민들이 작물들을 키울 수 있을까요?
설사 이게 가능하다고 해도, 이건 폐쇄 생태계, 인공 생태계가 될 겁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농업을 담당하는 생물학자 히로코는 폐쇄 생태계를 언급합니다. 그런 언급처럼, <플래닛 베이스>에서 바이오 돔은 폐쇄 생태계, 인공 생태계가 됩니다. 바이오 스피어 2 실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폐쇄 생태계 및 인공 생태계는 아주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누군가는 왜 바이오 돔이 '생태계'인지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바이오 돔은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생태계와 다르죠. 사람들은 생태계가 먹이 그물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야생 동식물들이 이루는 먹이 그물망.
태양은 플라크톤들을 키우고, 작은 물고기들은 플랑크톤들을 먹고, 중간 크기 물고기들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커다란 물고기들은 중간 크기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물수리들은 커다란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미생물들은 시체들을 분해하고, 분해된 영양분들은 다시 담수 생태계로 돌아가고…. 흔히 사람들은 이런 야생 먹이 그물망이 자연 생태계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오 돔에는 이런 야생 먹이 그물망이 없어요. 하지만 생태계는 그저 야생 동식물들이 이루는 먹이 그물망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건 생태계의 전부가 아니에요. 생태계는 생물 다양성과 환경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고 순환하는 체계입니다.
따라서 바이오 돔은 생태계가 될 수 있습니다. 바이오 돔 안에서 토양 미생물들과 작물들과 열기와 공기와 물은 상호 작용하고 순환하는 체계를 이룹니다. <플래닛 베이스>에는 공기 생산 장치가 있으나, 바이오 돔들이 늘어난다면, 바이오 돔들 속의 작물들은 산소를 보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영화 <선샤인>에서 수경 농장은 살아있는 산소 공급 공장입니다. <선샤인>처럼, <플래닛 베이스>에서 바이오 돔들은 살아있는 산소 공장들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인류가 정말 외계 생태계를 조성한다면, 그 첫걸음은 이런 바이오 돔이 될지 모릅니다. 바이오 돔은 일반적인 자연 생태계와 많이 다른 것 같으나, 우리가 외계 생물 다양성과 인공 생태계를 논의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런 바이오 돔을 빼먹지 못하겠죠.
하지만 바이오 돔은 쉬운 문제가 아닐 겁니다. 바이오 돔은 인공 생태계입니다. 게다가 이건 아주 폐쇄적인 인공 생태계입니다. 좁은 바이오 돔에서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 그건 생물학자들이 돌이키지 못하는 재난이 될지 모릅니다. 드넓은 행성 생태계와 달리, 좁은 바이오 돔에는 여분이 없을 테고, 작은 실수는 치명적인 재난이 될 수 있겠죠. 그래서 인공적인 폐쇄 생태계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비단 바이오 돔만 아니라 우주 정거장 생태계나 생체 우주선 역시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겠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누군가는 인공적인 폐쇄 생태계가 로망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드넓은 행성 생태계와 달리, 바이오 돔, 우주 정거장 생태계, 생체 우주선은 수많은 난관들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생명들이 살지 못하는 가혹한 환경에서 바이오 돔, 우주 정거장 생태계, 생체 우주선은 생명들을 키워야 합니다. 마침내 생명들이 수많은 난관들을 돌파했을 때, 죽음의 공간 속에서 생명들이 번성하기 시작했을 때, 삭막한 환경이 살아있고 꿈틀거리는 환경이 되었을 때, 그 감흥은 우주를 돌파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바이오 돔, 우주 정거장 생태계, 생체 우주선은 로망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