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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생태적인 상상력이 흥미로운 이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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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인 상상력이 흥미로운 이유

OneTiger 2018. 7. 27. 20:23

[거대 괴수 다양성(?)을 상상하는 만화 <고지라 어웨이크닝>의 한 장면입니다.]



<별을 쫓는 사람들>이나 <듄> 연대기, <화성의 왕궁에서>나 <오로라>,  <홍수>나 <레비아탄>, <고지라>나 <가메라>, <알파 센타우리>나 <문명: 비욘드 어스>, 기타 등등. 이런 SF 소설들, 영화들, 비디오 게임들은 인공 생태계나 행성 공학이나 생체 개조 설정을 보여줍니다. 예전에 한 번 이야기한 것처럼, 저는 이런 설정이 생태적인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개 개조 동물부터 생체 비행선, 우주 정거장의 수경 농장, 거대 괴수, 지구화되는 외계 행성까지, SF 창작물들 속에서 인류는 수많은 생명체들과 생태계들을 이용하고 연구하고 조작합니다.


저는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이 다른 흔한 설정들보다 훨씬 독특하다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제가 가리키는 흔한 설정들은 인공 지능이나 로봇이나 강화복이나 우주선 같은 기계 공학을 뜻합니다. 사실 이런 흔한 설정들, 인공 지능과 로봇과 강화복과 우주선은 생태적인 상상력보다 훨씬 많은 인기를 끌죠.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으나, 개인적인 경험에서 저는 SF 창작물들에 이런 기계 공학 설정들이 생태적인 상상력보다 많다고 생각합니다. SF 동호회들에서도 기계 공학 설정들이 더 많은 논의를 이끌고요.



어쩌면 SF 평론가들이나 전문가들은 어떤 소재가 훨씬 많은 인기를 끄는지 조사했을지 모릅니다. 하드 SF 장르를 비롯해 SF 소설들에서 뭐가 더 많이 인기를 끌까요? 첨단 인공 지능과 우주선? 아니면 인공 생태계나 개조 식생? 장거리 항해 우주선 속에 인공 생태계가 존재한다면, 작가들이나 독자들이 뭐에 더 관심을 기울일가요? 장거리 항해 우주선? 인공 생태계? 저는 작가들이나 독자들이 인공 지능과 장거리 우주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공식적인 자료나 근거는 없으나, 개인적인 경험에서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과학계와 SF 창작계 모두 생태계 연구보다 기술적 특이점이나 로봇 공학이나 우주선 제조에 신경을 쏟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생태계 연구와 기계 공학은 분명하게 나뉘지 않을 겁니다. 생태계 연구와 로봇 공학과 우주선 제조는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자급자족하기 위해 장거리 우주선이 폐쇄 생태계를 구성하고, 무인 로봇들이 그런 생태계를 관리한다면, 그런 설정은 생태계 연구와 로봇 공학과 우주선 건조를 가로지르는 설정이 되겠죠. 서로 겹치는 영역에서 생태학자들이나 기계 공학자들 역시 연구할 수 있고요. 하지만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생태적인 상상력은 기계 공학 설정에 밀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추측이 완전히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기계 공학이 생태적인 상상력보다 인기를 끈다고 해도, 저는 생태적인 상상력이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개조 동물부터 거대 괴수와 행성 공학까지, 생태적인 상상력에는 기계 공학이 선사하지 못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저는 그게 인간을 벗어나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건 인간 이전에 나타난 존재를 경외하는 감성일지 모릅니다. 왜 생태적인 상상력과 기계 공학이 다를까요? 기계 공학은 인류에게서 비롯했습니다. 지구에서 인류가 출현하기 전까지 기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과학자들의 공식적인 견해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외계 행성에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게 기계보다 생명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구에서 생명체가 기계보다 먼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나타나고 본격적인 거대 문명을 발전시키고 산업 자본주의를 부흥시킨 이후, 마침내 기계는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기계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복잡한 자연 생태계는 존재했습니다. 원시적인 생명체들을 제외한다고 해도, 우리는 대략 5억 년 전에 이미 복잡한 자연 생태계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압니다. 생태계는 인간 이전에 나타났고,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공 지능이나 로봇이나 첨단 우주선이나 강화복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연 생태계는 스스로 잘 굴러갑니다. 지난 5억 년 동안, 자연 생태계는 스스로 붕괴했고 다시 부흥했습니다. 만약 기후 변화나 전면 핵 전쟁이 지구 생태계를 붕괴시킨다고 해도, 미생물들은 멸종하지 않을 겁니다. 몇 억 년 이후, 그것들은 다시 복잡한 자연 생태계로 진화하겠죠. 만약 이런 생명 현상이 우연이 아니라면, 설사 지구를 비롯해 태양계가 사라진다고 해도, 머나먼 우주 어딘가에서 생명은 계속 번성하고 생태계를 이루겠죠.


그렇게 자연 생태계는 인간과 무관합니다. 인류 이전에 자연 생태계는 존재했습니다. 자연 생태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런 기나긴 감성을 담았습니다. 생태적인 상상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생태적인 상상력은 훨씬 기나긴 감성을 담을 수 있겠죠. 기계 공학 설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계들이 뛰어나고 효율적이라고 해도, 인간 이후 그것들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태적인 상상력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훨씬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훨씬 먼저 나타났기 때문에.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의 거대 괴수. 자연 생태계는 인류보다 원대합니다.]



물론 여러 SF 창작물들에서 인류는 동물을 개조하거나 행성을 바꾸거나 인공적인 생태계를 만듭니다. 생태적인 상상력은 분명히 인공적인 개조를 포함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생태 개조는 기계 공학과 다릅니다. 기계 공학은 순수하게 인공적인 생산이고, 반면, 생태 개조는 이미 존재하는 자연 생태계를 바꾸는 행위입니다. SF 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거대 괴수를 만든다고 해도, 그런 거대 괴수는 우주 구축함과 다릅니다. 거대 괴수는 우리 인류가 자연계를 자극하고 뻥튀기한 결과물입니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생체 결전 병기 제노 타이탄은 갯가재가 인위적으로 진화한 결과물입니다. 아무리 인류가 제노 타이탄을 만들었다고 해도, 제노 타이탄에게는 갯가재라는 원본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중 부양 구축함은 다릅니다. 공중 부양 구축함에는 원본이 없습니다. 공중 부양 구축함은 인류가 순수하게 스스로 설계한 결과물입니다. 어쩌면 기계 공학을 좋아하는 SF 팬들은 그런 측면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순수한 설계보다 원본을 관찰하고 조작하는 자극이 더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인간과 상관없이, 아주 오랜 동안 그런 원본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제노 타이탄과 공중 부양 구축함은 똑같이 인류가 만든 결과물이나, 설계 과정은 각자 다릅니다.



생태학자들이 선호하는 풍성한 생명력이나 원대한 치유력 같은 개념 역시 여기에 들어갈 겁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자연 생태계가 붕괴했고 부흥했기 때문에 자연계는 우리에게 생명력이나 치유력 같은 감성을 선사하죠. 인류가 관리하지 않는다면, 컴퓨터나 발전소나 우주선은 멈출 겁니다. 글쎄요, 언젠가 완전한 인공 지능은 인류 없이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죠. 기계 공학 설정을 좋아하는 SF 팬들은 그런 인공 지능을 꿈꾸고, 거기에서 매력을 느끼죠. 기술적 특이점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정말 그런 인공 지능과 만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완전한 인공 지능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인공 지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이 자신 있게 예측한 것과 달리, 어쩌면 그런 인공 지능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지 몰라요. (설사 그게 나타난다고 해도, 그런 완벽한 인공 지능조차 인류에게서 비롯한 결과물이죠.) 하지만 이미 자연 생태계는 번성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구태여 SF 설정을 들먹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자연 생태계가 번성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계 공학 설정에는 풍성한 생명력이나 원대한 치유력 같은 감성이 없습니다. 그건 생태적인 상상력의 몫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첨단 인공 지능보다 개조 동물이 훨씬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이유들 역시 많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생태적인 상상력은 기계 공학 설정과 다를 겁니다. 나무들이 싱그러운 녹색 나뭇잎들을 매달고, 꿀벌들이 웅웅거리며 황금빛 꿀과 밀랍을 저장하고, 철새 떼들이 엄청난 무리를 이루고, 거대한 혹등고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솟구치고, 어마어마한 대보초가 장관을 선사할 때…. SF 작가들은 그런 경관들에서 생태적인 상상력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생태적인 상상력은 풍성한 생명력이나 원대한 치유력과 함께 정말 장엄한 감동을 우릴 수 있을 겁니다.


아, 물론 자연 생태계에는 오직 이런 아름다운 모습들만 있지 않습니다. 사실 아름다운 장관은 아주 인간적인 관점이죠. 우리는 자연 생태계에 온갖 병균들과 기생충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온갖 동물들은 치열하게 싸우고, 폭력은 일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그저 아름답고 싱그러운 생명력이나 치유력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엄청난 폭력이나 고통이 있습니다. 아무도 기생충들에게 생명력이나 치유력이라는 감성을 갖다붙이지 못하겠죠. 우리는 오직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장면들만 아름답다고 말하겠죠.



몇몇 기생충학자나 미생물학자는 그런 끔찍한 병균이나 기생충이 사랑스럽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관점이 아니겠죠. 심지어 벌레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꿀벌조차 징그럽다고 여깁니다. 꿀벌이 징그러울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꿀벌을 좋아합니다. 꿀벌이 꿀이라는 음식을 제공하고, 꽃가루들을 수분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는 꽤나 클지 몰라요. 만약 꿀벌이 사람들에게 병균을 옮기거나 알을 슨다면, 우리는 꿀벌을 예쁘다고 말하지 않겠죠. 그래서 사람들은 꿀벌이 예쁘다고 말하는 반면, 파리나 모기를 그렇게 혐오하겠죠.


어쩌면 보송보송하고 매끄러운 황금빛을 자랑하기 때문에 꿀벌이 예쁘다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릅니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시커멓고 털이 삐죽삐죽 뻗은 파리보다 보송보송하고 황금빛인 꿀벌은 훨씬 예쁠지 몰라요. 네, 그런 이유 역시 있겠죠. 만약 꿀벌이 시커멓고 털이 삐죽삐죽 났다면, 꿀벌이 꿀과 수분을 제공한다고 해도, 우리는 꿀벌을 미워했을지 모릅니다. 뭐, 우리 몸 속에는 이로운 미생물들이 많고, 우리 몸은 그것들과 공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미생물들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벌레를 워낙 싫어하는 사람들은 꿀벌조차 징그럽다고 여기겠으나, 미학적인 관점에서 꿀벌은 꽤나 예쁠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 없이 이미 자연 생태계는 이런 우아하고 장엄한 생명체를 낳았습니다.]



자연계에는 분명히 어중간한 영역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영역을 찬양할 테고, 누군가는 싫다고 말하겠죠. 그렇다고 해도 풍성한 자연 생태계 없이 우리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첨단 과학 기술은 생태계 없는 인류 문명을 형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시대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 자연 생태계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는 절대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풍성한 생명력이나 원대한 치유력 같은 용어들은 계속 우리를 감동시키겠죠. 우리가 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는 꽃에 꿀이 있거나 꽃이 열매로 이어지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꽃보다 꿀이나 열매를 더 좋아할지 몰라요. 꿀이나 열매를 먹기 위해 우리는 꽃을 칭찬하는지 모르죠. 진화 심리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심리학과 상관없이, 자연 생태계는 우리에게 거대하고 살아있는 장관을 선사하고, SF 작가들은 그걸 훨씬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2014년 <고지라>를 보세요. <고지라>에서 거대 괴수들은 인류보다 훨씬 먼저 나타났고 까마득한 시절을 살았습니다. 거대 괴수들은 그렇게 자연 생태계가 경이롭다는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고지라가 함재 미사일들을 씹어먹고, 현수교를 끊어먹고, 무토를 때려잡는 장면에 감탄할 겁니다. 고지라가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자연계가 인간 없이 존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마나 고대 신 같은 존재들 역시 인간을 벗어났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악마나 고대 신 같은 설정은 초자연적인 설정이고, 생태적인 상상력과 위상이 다르죠. 어떤 사람들은 천체 물리학 설정 역시 인간을 벗어났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SF 작가가 행성 공전이나 암흑 물질이나 우주의 팽창과 수축을 말한다면, 그건 정말 인간을 벗어나는 아득한 설정이겠죠. 그런 설정이야말로 초자연적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동시에 인간을 벗어나는 아주 경외적인 설정이겠죠. 어떤 SF 독자들은 그런 경외적인 설정을 좋아할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살아있는 꿈틀거림이 없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생태적인 상상력에는 생명력이나 치유력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들이 꿈틀거리고 번성하고 먹고 싸기 때문에 생태적인 상상력은 매력적입니다. 아무리 설정이 원대하다고 해도, 거기에 살아있는 꿈틀거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행성은 능동적으로 위성을 만들지 않습니다. 행성과 위성은 그저 물리 법칙을 따르죠. 하지만 생명은 능동적으로 자손을 낳습니다. 생명은 능동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듭니다. 생명을 정의할 때, 생물학자들은 생명이 무에서 질서를 만든다고 말하죠. 자연 생태계는 그런 능동적이고 새로운 질서들의 거대한 상호 작용이고요.



누군가는 제노 타이탄 같은 개조 생명체가 풍성한 생명력이나 원대한 치유력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제노 타이탄은 자연 생태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이고, 인류가 만든 인공적인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제노 타이탄은 풍성한 생명력과 관계가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제노 타이탄을 만든 조화 사상은 방대한 자연 생태계를 찬양합니다. 방대한 자연 생태계를 찬양하기 때문에 조화 사상은 인공적으로 갯가재를 진화시켰고, 결국 제노 타이탄을 만들 수 있었죠. 자연 생태계에 관심이 없는 순수 사상이나 우월 사상은 공중 부양 구축함이나 보행 병기 엔젤을 만들고요.


게다가 조화 사상이 생태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도, 거대 괴수를 만들기 위해 조화 사상은 자연 생태계를 탐구해야 합니다. 공중 부양 구축함이나 보행 병기 엔젤과 달리, 제노 타이탄에게는 원본이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개조 생명체에게는 원본이 있어요. 설사 특정한 형태가 없는 개조 종양 덩어리라고 해도, 종양이라는 원본이 있죠. 그런 관점에서 개조 생명체와 자연 생태계는 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제노 타이탄보다 고지라가 훨씬 자연 생태계에 가까운 상상력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노 타이탄과 자연 생태계는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거대 괴수나 생체 병기나 행성 공학을 이야기하는 SF 설정이 자연 환경을 보존할 수 있을까요? 21세기 초반에 기후 변화나 핵 폐기물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생태적인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SF 창작물들은 그런 환경 오염을 간과하지 못할 겁니다. 이는 생태적인 상상력이 무조건 기후 변화나 핵 폐기물을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창작가가 오직 풍성한 생명력만을 예찬하고 싶다면, 창작가는 그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현실 속에서 SF 창작가가 순수하게 풍성한 생명력을 노래한다면, 그건 다소 모순적이지 않을까요?


저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창작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생태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창작가가 생태계를 노래한다면, 그게 정말 이상하지 않을까요? 장수 거북이 멸종한 상황에서 장수 거북을 즐겁게 노래한다면, 그게 정말 모순적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생태적인 상상력을 설정하는 창작가들이 환경 오염을 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환경 오염을 주시한다면, 창작가들은 어떻게 우리가 자연 환경을 보존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야 할 테고요.



[소설 <오로라> 홍보 영상의 한 장면. 어떻게 우리가 행성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창작가들이 생태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그건 관념적인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그런 상상력은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출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SF 창작물들이 인간의 탐욕을 운운할까요. 하지만 현실 속에서 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는 이유는 그저 인간의 탐욕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건 너무 막연한 시각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굶어죽는 수두룩한 사람들이 탐욕스러운가요? 그들에게는 탐욕을 부릴 여유조차 없습니다. 어떻게 깡마르고 굶어죽는 아이가 탐욕을 부릴 수 있겠어요? 어떻게 그런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가 탐욕을 부릴 수 있겠어요? 그런 아이와 엄마에게는 당장 밥 한 그릇이 아쉬울 겁니다. 생존에 매달리느라 그들은 탐욕을 부리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탐욕을 부릴 수 있는 권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혐의를 권력자들에게 돌려야 합니다. 권력을 움켜쥔 계급들. 그들이 누구일까요? 누가 공장을 소유하고, 누가 매연과 온실 가스와 산업 폐기물을 함부로 버릴까요? 네, 그들은 자본가 계급입니다. 진짜 문제는 자본가 계급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비 행태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맞아요. 소비 역시 중요한 문제죠.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소비하고 싶다면, 먼저 우리는 뭔가를 생산해야 합니다. 생산 없는 소비는 불가능합니다. 생산이 있기 때문에 소비 역시 있습니다. 생산은 소비보다 선행합니다. 하지만 숱한 사람들은 생산보다 소비에 중점을 둡니다. 소비 역시 중요한 문제이나, 소비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생산이죠. 누가 재화들을 생산할까요? 그들은 자본가 계급입니다. 자본가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대항해 시대부터, 제3세계에서 초기적인 유럽 자본주의는 엄청난 열대 우림을 밀어냈죠.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매연과 산업 폐기물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출발부터 자본주의는 엄청난 환경 오염을 저질렀습니다. 자본주의는 그저 나쁘지 않습니다. 근본부터 자본주의는 잘못되었습니다. 자본가들이 착해진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생물 다양성을 복원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무너뜨리고, 평등하게 자연 생태계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세상을 향해 우리는 꾸준히 나가야 할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학교 교육들과 언론 매체들과 예술 문화들과 일상을 장악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옳다고 배웁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를 아주 당연하게 재생산합니다. 우리는 직장이 힘들다거나 날씨가 뜨겁다거나 월요일이 싫다고 아무렇지 않게 푸념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푸념합니다. 그런 푸념은 지배 체계를 바꾸지 않아요.


그렇게 우리는 지배 체계에 순응하고, 그런 사고 방식들을 퍼뜨립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임금 노예 제도에 순응합니다. 우리에게 임금 노예로 살아야 하는 아무 이유가 없음에도, 우리는 임금 노예 제도를 의심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쉽게 깨닫지 못하고, 세상은 천천히 바뀌죠. 하지만 천천히 바뀐다고 해도, 사람들이 계속 저항한다면, 세상은 바뀔 겁니다. 저는 생태적인 상상력이 그런 저항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쉽게도 여러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그런 저항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계에 일조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창작가들은 꾸준히 생태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자본주의를 비판할 겁니다. 그런 상상력이 조금씩 조금씩 퍼진다면, 세상은 좀 더 좋아지겠죠. 그런 움직임이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한다고 해도, 언젠가 사람들은 자연 생태계를 다시 바라볼지 모릅니다. 만약 그런 시대가 온다면, SF 창작가들은 훨씬 놀라운 생태적인 상상력을 펼칠지 모르겠어요. 그런 상상력은 어떻게 자연 생태계가 인간 없이 스스로 번성하고 풍성해질 수 있는지 표현하겠죠.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개념 때문에 생태적인 상상력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인간 없이 스스로 풍성해지는 순환 체계. 누군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지 몰라요.


아무리 인공 생태계가 인위적인 개조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자연 생태계는 스스로 번성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생태적인 상상력보다 기계 공학 설정이 좋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생태적인 상상력에는 이런 특징 이외에 다른 특징들이 많고요. 관객들이 고지라를 그저 대자연의 상징이라고 해석한다면, 그건 너무 비좁은 해석이겠죠. 하지만 스스로 번성하는 거대한 순환 체계는 분명히 생태적인 상상력의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입니다. 창작가들이 생태적인 상상력을 예찬하고 싶다면, 그런 부분을 간과하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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