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에코토피아 뉴스>와 생태 문학이 추구하는 주제들 본문
[소설 <반지 전쟁> 3부작. 이런 소설에게 생태 문학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을까요?]
영어 위키피디아에는 '생태 문학(eco fiction)' 항목이 있습니다. 생태 문학은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이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 탐색하는 문학입니다. 생태 문학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고 해도, 이게 대략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 수 있을 겁니다. 생태 문학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 이후 등장했습니다. 아마 탈핵과 녹색당, 동물 권리 운동 때문이겠죠. <침묵의 봄> 같은 환경 운동 고전 역시 나왔고요.
하지만 오래 전부터 숱한 철학자들과 작가들은 자연이 문명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는 인간이 자연과 싸운다고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인간이 자연과 화합한다고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두 가지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자연 생태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인간 역시 지구 생태계에서 진화했고, 지구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 식물들, 미생물들과 끊임없이 다양한 관계들을 맺어야 합니다. 따라서 고대 철학자들은 진화론이나 환경 사회학 같은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자연과 인간이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 이야기해야 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생태 문학은 존재했죠.
하지만 인류 문명이 훨씬 거대해진 이후, 작가들은 본격적으로 생태 문학을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 문명은 정말 자연 환경을 어마어마하게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다른 문명들이 아예 자연 환경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 사회가 자연 친화적이라고 생각하나, 여러 부족 사회들 역시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켰습니다. 하지만 유럽 문명은 정말 엄청난 파급력을 미쳤습니다. 이런 파괴적인 측면 때문에 오히려 유럽 사람들은 환경 운동을 의식했죠. 대항해 시대는 자본주의 발달로 이어졌고, 자본주의는 산업 혁명과 함께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환경 범죄들을 저지릅니다. 매연, 폐수, 토양 침식, 밀렵, 온실 가스, 자원 고갈, 기타 등등.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이런 환경 오염에 분노했어요.
영어 위키피디아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생태 문학이 등장했다고 이야기하나, 저는 19세기에 이미 몇몇 기념비적인 생태 문학이 등장했다고 생각해요. 그것들 중 하나는 윌리엄 모리스가 쓴 <에코토피아 뉴스>일 겁니다. 아마 <에코토피아 뉴스>는 19세기에서 가장 환경 오염에 분노하고 가장 환경 오염을 제대로 분석한 환상 소설일 겁니다. 사실 1970년대 이후 수많은 생태 문학들이 등장했다고 해도, (SF 소설을 포함해) <에코토피아 뉴스>에 필적하는 소설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에코토피아 뉴스>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때문입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그저 환경 오염이 나쁘다고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생태 문학은 그저 자연 환경만 주시하는 소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태 문학은 그런 피상적인 시각을 벗어나고, 평등한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을 훨씬 잘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할 겁니다. 영어 위키피디아 역시 그런 점을 지적합니다. 여러 생태 문학들은 성 소수자 같은 문제에 치중합니다.
왜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생태 문학이 성 소주자 문제에 치중할까요? 샐리 기어하트가 쓴 <원더그라운드> 같은 소설은 여자 공동체가 자연 환경을 보존하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성 평등과 환경 보존이 무슨 관계를 맺었을까요? 여러 생태 문학들이 성 소수자 같은 사회적 문제에 치중하는 이유는 인종 차별과 성 차별과 계급 차별이 환경 오염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 차별과 환경 오염이 무슨 상관인지 물을 겁니다. 당연히 두 가지는 필연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자연 환경이 파괴되는 이유는 인류 사회에서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성 차별과 환경 오염은 똑같이 자본주의 체계에서 비롯합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이성애 부부를 선호합니다. 이성애 부부가 노동자들을 계속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성애 부부는 이런 노동력 재생산을 막을지 모르고, 그래서 자본주의 체계는 동성애를 비난합니다. 이는 동성애 차별이 무조건 자본주의에서 비롯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현대 문명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막강한 체계이고, 그런 막강한 체계가 동성애 차별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계는 자연 환경이 그저 이윤을 위한 상품이라고 생각하고, 자연 환경을 착취합니다. 따라서 성 차별과 환경 오염은 똑같은 원인에서 비롯했습니다.
이런 논의가 복잡하게 들린다면, 우리는 좀 더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다른 생명체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짓밟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평등하게 야생 동물들을 돌볼 수 있을까요? 성 소수자가 울부짖는 상황에서 아무르 호랑이가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평등하게 살아갈 때, 마침내 동물 권리 역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태 문학들은 성 소수자 같은 문제에 치중해야 합니다. 평등한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동물 권리 역시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회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수많은 도피들이 정말 대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블로그 역시 저런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블로그는 'SF 생태주의'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저는 행성 공학이나 우주선의 폐쇄 생태계, 인공 생태계, 바이오스피어 실험, 거대 괴수나 생체 장비에 관심이 많습니다. 미래의 생태학을 대변하기 위해 저는 'SF 생태주의'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하지만 이 블로그에는 행성 공학이나 우주 수경 농장과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이야기들 역시 많습니다. 메갈리아 사태는 우주 수경 농장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죠. 심각한 양극화나 폭력적인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사태 역시 그렇고요. 이런 것들은 미래의 생태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저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떠들지 않고, 그저 기술적인 사안들만 늘어놓는다면, 생태학 문제를 제대로 살피지 못할 겁니다. 저는 그저 반쪽짜리 이야기를 떠들 뿐이겠죠. 사회적 문제들과 우주 수경 농장이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에서 자본주의 체계는 천연 자원들을 고갈시키고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기후 변화를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런 사회 구조가 우주 정거장이나 장거리 우주선에 적용된다면? 그때 무슨 일이 생길까요?
만약 냉동 수면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랜 동안 장거리 우주선은 머나먼 우주를 날아가야 할 겁니다. 만약 항해 기간이 아주 길어진다면, 사람들은 직접 먹거리를 길러야 할 겁니다. 우주선 사람들은 작물들과 가축들을 길러야 할지 모릅니다. 당연히 우주선 사람들은 지속 가능한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단기적인 목표를 위해 자본주의 체계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설사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고 해도,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 체계는 인류 문명을 끝장낼 겁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는 아주 심각한 위협이 됩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양극화를 부릅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소수 권력자가 다수 피권력자를 지배하는 상황을 뜻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계는 사람들에게 노예 근성을 주입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삶을 꾸리지 않고, 소수 권력자(대기업들)에게 복종합니다. 장거리 우주선에서 이런 노예들이 지속 가능한 방법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소수 권력자가 우주선을 장악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만을 추구하고, 결국 우주선 자체를 파탄에 빠뜨린다면? 현대 문명이 파탄으로 빠지는 것처럼 장거리 우주선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우주 정거장이나 궤도 거주지 역시 비슷한 문제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저는 장거리 우주선이나 우주 정거장, 궤도 거주지가 품은 폐쇄적인 생태계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폐쇄 생태계를 지속 가능하게 돌리고 싶다면, 먼저 사람들은 평등한 사회 구조를 이뤄야 합니다.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억압적인 사고와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아니, 이는 비단 폐쇄 생태계에만 해당하는 사안이 아닐 겁니다. 이재창이 쓴 <기시감>을 보세요. 게이트 우주선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요? 왜 그들이 그런 추잡한 짓거리를 저질렀을까요?
만약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면, 게이트 우주선이 그런 추잡한 상황에 직면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장거리 우주선은 고립된 세계입니다. 동시에 장거리 우주선은 지구와 이어지는 세계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장 장거리 우주선에 탑승해야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적인 사고 방식과 습관을 그대로 우주선에 옮길 겁니다. 비단 자본주의 이외에 대의 제도, 가부장적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겠죠. 장거리 우주선이 위기에 처한다면, 자본주의, 대의 제도, 가부장적 분위기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지 모릅니다. 그런 부정적인 상황에서 폐쇄 생태계 역시 안전하지 않겠죠.
행성 공학 역시 비슷합니다. 만약 인류가 외계 행성을 개척한다고 가정하죠. 하지만 우리가 억압적인 사회 구조와 노예 근성을 타파하지 않는다면, 행성 공학 역시 위기에 부딪힐 겁니다. 외계 행성이 지구화된다면, 대기업들은 지구화된 행성에서 이득을 얻기 원할 겁니다. 대기업들은 지구화된 행성이 이윤을 뽑아내는 상품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정치인들은 대기업들을 빨아주겠죠. 대의 제도는 다수의 민중보다 소수의 대기업들을 빨아줍니다. 소수 대기업들이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의 제도는 그런 대기업들을 편들죠.
이 세상에는 급진적인 진보 정당들이 있습니다. 녹색당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지만 녹색당이 국회에 들어가거나 대통령을 선출한다면, 세상이 많이 바뀔까요? 녹색당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녹색당이 세상을 정말 싱그러운 녹색으로 칠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녹색당이 국회에 들어가거나 대통령을 선출해도, 그저 또 다른 윗대가리가 탄생할 뿐입니다. 윗대가리는 윗대가리입니다. 녹색당은 우익 보수 정당들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저는 그런 점을 부인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뽑아야 한다면, 진보 정당을 뽑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윗대가리는 그저 윗대가리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윗대가리가 아니라 다수 민중입니다.
[비록 구닥다리 같다고 해도, 이런 소설은 우리에게 여전히 소중한 교훈을 전달하는지 모릅니다.]
다수 민중이 대기업들에게 매달린다면, 다수 민중이 계속 대기업들을 숭배한다면, 다수 민중이 임금 노예가 되기 원한다면, 대기업들은 외계 행성에 마수를 뻗을 겁니다. 결국 외계 행성 역시 환경 오염에 시달리겠죠. 비정규직들이 비참하게 죽어나가는 것처럼 외계 행성 거주자들 역시 산업 폐기물에 오염되겠죠. 지구화된 외계 행성은 그저 또 다른 환경 오염이 될 뿐이겠죠. 지구가 망가진 것처럼 외계 행성 역시 안전하지 않겠죠. 저명한 자연 과학자들은 핵 폐기물과 기후 변화 때문에 인류가 외계 행성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핵 폐기물과 기후 변화는 지구를 망칠지 모르고, 인류는 또 다른 고향별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들은 왜 핵 폐기물이 생기고 왜 기후 변화가 생기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남한에서는 <인터스텔라>가 아주 유행이었죠. <인터스텔라>는 지독한 환경 오염을 보여주고요. 하지만 <인터스텔라>는 왜 자연 환경이 파괴되는지 말하지 않았죠. 대신 이 영화는 열심히 우주 풍경에 시각 효과를 들이부었습니다. 저는 <인터스텔라>가 얄팍한 SF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우주에서 인류 문명을 고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주 풍경에 열심히 시각 효과를 들이붓는다고 해도, 그 영화가 훌륭한 사이언스 픽션이 될까요? 이 세상에는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을 고찰하는 SF 소설들이 존재합니다. 킴 로빈슨이 쓴 <오로라>는 그런 소설이 될 수 있겠죠.
<오로라> 같은 소설들은 우리가 서로 평등하게 살아갈 때 자연 환경을 보존할 거라고 말합니다. 만약 기후 변화가 지구를 덮치고, 우리가 부랴부랴 외계 행성으로 탈출한다면, 우리가 제대로 이주할 수 있겠어요? 외계 이주가 그렇게 쉬운 문제일까요? 이웃집에 놀러가는 것처럼 우리가 다른 행성이나 다른 항성계로 훌쩍 건너갈 수 있나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겁니다. 우주는 가혹한 환경입니다. 우주는 절대 만만한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우주에 진출하고 싶다면, 우리는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대의 제도, 가부장적 구조가 삶을 산산조각 깨뜨리는 상황에서 우리가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는 당장 사람들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재촉합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더 많은 돈을 갈구합니다. 아무도 스스로 주인이 되고 삶을 일구겠다고 다짐하지 못합니다. 다들 대기업들에게 애걸복걸 매달리고, 다들 돈을 벌고 싶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는 차근차근 우주에 진출하지 못합니다. 설사 인류가 무사히 우주에 진출한다고 해도, 오직 대기업들만 이득을 챙기겠죠. 지금 지구에서 대기업들이 이득을 챙기는 것처럼.
어제 저는 부유 고래 비행선과 개조 꿀벌 군집을 이야기했습니다. 소설 <레비아탄>에서 영국 과학자들은 거대한 부유 고래를 만들었고, 고래에 선체를 붙였습니다. 거대 부유 고래는 생체 비행선이 되었죠. 영양분을 얻고 가스를 생성하기 위해 부유 고래는 몸 속에 엄청난 개조 꿀벌 군집을 품었습니다. 꿀벌들은 꿀을 모으고 고래 내장에 서식하는 박테리아들은 그것들을 소화합니다. 이것 역시 인공적인 생태계입니다. 하지만 만약 개조 꿀벌 군집이 생체 비행선에서 도망치고 자연 생태계를 교란한다면? 그래서 다른 양봉 농민들이나 과수원 농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영국 정부가 그런 농민들에게 보상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문민 정부라는 작자들이 무슨 짓거리를 저지르는지 봤습니다. 약자들이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국가 정부는 마음대로 약자들을 두들겨패고, 감옥에 가두고, 고향에서 내쫓습니다. 영국 정부가 양봉 농민들이나 과수원 농민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농민들은 보상을 받지 못할 겁니다. <레비아탄>은 1차 세계 대전을 묘사합니다. 만약 아프리카나 인도 식민지에서 생체 비행선이 말썽을 일으킨다면, 영국 정부는 더욱 사태를 방관하겠죠. 개조 꿀벌들이 인도 농민들을 괴롭힌다고 해도, 영국 정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영국 정부는 저항하는 농민들을 학살하겠죠.
이런 사례들처럼 미래의 생태학이나 인공 생태계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떨어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 소수자와 대의 제도와 장거리 우주선의 인공 생태계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여길 겁니다. 그들은 왜 폐쇄 생태계가 성 소수자로 이어지는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생태 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생태 문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자세히 확대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블로그에서 제가 떠드는 딱딱하고 지루한 설명보다 그런 소설들이 훨씬 나을 겁니다.
남한에는 좋은 소설 번역본들이 많습니다. 해외(영어권 출판계)의 많은 생태 소설들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나, 남한에는 이미 좋은 소설들이 많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저는 <붉은 별>이나 <우주 상인>이나 <에코토피아 비긴스>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나 <와인드업 걸>이나 <홍수>나 <카본 다이어리 2015> 같은 소설들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꾸준히 언급할 겁니다. 사실 제가 이 블로그에서 게시글을 올리는 이유는 저런 소설들을 구석구석 뜯어보기 위해서입니다.
[소설 <카본 다이어리 2015>의 표지 그림. 좋은 생태 문학은 평등한 공동체를 묘사해야 할 겁니다.]
소설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기후 변화가 사람들을 괴롭혔을 때, 수구 꼴통들은 신이 동성애인에게 천벌을 내린다고 주절거렸습니다. 수구 꼴통들은 동성애가 불경하기 때문에 신이 기후 변화를 이용해 천벌을 내린다고 떠들었습니다. 웃기지 않은 헛소리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 저렇게 생각하는 수구 꼴통들이 있을 겁니다. 아마 남한에도 그런 인간들이 없지 않겠죠. 이게 그저 우스꽝스러운 소동에 불과할까요. 그래서 작가가 이런 내용을 소설에 집어넣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제목처럼 <카본 다이어리 2015>는 탄소 배출과 기후 변화를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여자 주인공을 내세우고, 다양한 여자들을 이용해 억압적인 가부장 구조와 성 평등과 여자 권리를 전개합니다. 결국 기후 변화는 평등한 사회 구조로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한다면, 인간들은 자연 환경을 보존하지 못합니다. 자연 환경 역시 인간이 착취하는 대상이 되겠죠. 그래서 아무리 세계 지도자들이 모이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시끄럽게 떠들어도, 그들은 기후 변화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서로 평등하게 살아갈 때, 성 소수자를 차별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연 환경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본 다이어리 2015>는 현대 소설입니다. 19세기에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소설이 존재했을까요? 위에서 제가 언급한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는 그런 소설입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소설 주인공은 미래로 시간 여행하고, 목가적인 미래 사회를 둘러봅니다. 대기업들, 국회 의원들, 전형적인 핵가족(노동자 남편과 가정 주부)들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수공예 노동을 즐기고, 서로 평등하게 살아가고, 자유롭게 서로 사랑합니다. 극단적인 양극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더 이상 남자들에게 얽매이지 않습니다. 국회 의원들과 대기업들이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 침략 역시 사라졌습니다. 공장들은 매연을 뿜지 않고, 자본주의 농업은 토양을 침식시키지 않고, 폐수는 강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토지를 비롯한 생산 수단을 공유하기 때문에 아무도 마음대로 자연 환경을 파괴하지 못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성 소수자나 동물 권리를 주시하지 않으나, 전반적인 내용과 사상은 꽤나 급진적입니다. 저는 <에코토피아 뉴스>가 현대적인 생태 문학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생각해요. <카본 다이어리 2015>나 <오로라>는 <에코토피아 뉴스>에게서 이어지는 연장선일 겁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인터스텔라>를 본다면, 모리스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고 여길 겁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왜 <인터스텔라>가 착취적인 사회 구조를 이야기하지 않는지 반문하겠죠. 이는 21세기 하드 SF 영화가 19세기 환상 소설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죠. 아무리 <인터스텔라>가 우주 항해를 멋지게 그리고 시각 효과를 들이붓는다고 해도, 저는 <에코토피아 뉴스>가 <인터스텔라>보다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을 본질적으로 고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에코토피아 뉴스>에 아무 단점이 없지 않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19세기 유럽 백인 남자 지식인이었고, 그런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단점들 중 하나는 여자 노동자입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여자를 너무 가정적인 모습으로서 묘사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자유 연애를 지지하고, 보수적인 가족 관계를 타파하고, 가부장적 구조를 집어 던집니다. 하지만 결국 여자는 살림을 돌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성 평등을 지지하나, 유럽 백인 남자 지식인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죠. <에코토피아 뉴스>를 읽을 때, 저는 독자들이 이런 부분에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로라>나 <카본 다이어리> 역시 마찬가지고요. 생태 문학 역시 지배적인 관념에 얽매입니다. 독자들은 그걸 판별하는 시각을 갖추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저런 단점들이 있음에도, <에코토피아 뉴스>는 기념비적인 환상 소설입니다. 저는 19세기 생태 문학들 중 <에코토피아 뉴스>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영어 위키피디아의 생태 문학 항목이 <에코토피아 뉴스>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영어 위키피디아의 생태 문학 항목은 짐 드와이어 같은 몇몇 평론가나 저널리스트에게 기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평론가들과 저널리스트들은 윌리엄 모리스를 언급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짐 드와이어가 쓴 글을 직접 읽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자세히 이야기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짐 드와이어가 윌리엄 모리스를 빼먹었다면, 그건 꽤나 커다란 실수일 겁니다.
더욱 웃긴 점은 존 로널드 톨킨이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반지 전쟁> 때문이겠죠. 짐 드와이어는 우드 엘프들과 엔트들이 생태 철학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드 엘프들과 엔트들이 생태 철학을 반영하나요? 생태 철학은 평등한 사회 구조를 주장해야 합니다. <반지 전쟁>이 평등한 사회 구조를 주장하나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반지 전쟁>은 열심히 왕족들과 귀족들을 미화합니다. 어떻게 이런 소설이 생태 문학이 될 수 있나요?
[소설 <반지 전쟁>은 우드 엘프 설정을 낳았습니다. 이런 설정이 환경 보호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드루이드나 우드 레인저 같은 판타지 설정을 좋아합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낭만적인 자연관과 중세 판타지를 접목했고, 드루이드는 그런 결과물일 겁니다. <네버윈터 나이츠> 같은 비디오 게임에서 드루이드는 커다란 늑대를 소환하고, 표범으로 변신하고, 마법 덩굴을 키우고, 야생 동물들과 대화합니다. 울창한 숲 속에서 드루이드 서클은 기이한 사건을 조사합니다. 드루이드가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싱그러운 기운을 뽐내고, 녹색 나뭇잎들로 치장하는 장면들은 멋집니다. 저는 그런 장면들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중세 판타지 게임들은 이런 드루이드 설정을 자주 활용합니다. 예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이나 <배틀 포 웨스노스>나 <엔들리스 레전드>나 <토탈 워: 워해머>에서 우리는 비슷한 드루이드 설정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들이 생태 철학을 반영할 수 있을까요? <배틀 포 웨스노스>를 이미 비판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저는 더 이상 길게 떠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배틀 포 웨스노스>가 그랬던 것처럼 <반지 전쟁>의 엔트들은 생태 철학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요.
존 로널드 톨킨이 생태 문학가가 되고 윌리엄 모리스가 빠지는 상황. 우스꽝스러운 상황이군요. 솔직히 감히 <반지 전쟁>이 <에코토피아 뉴스>에게 상대가 되나요? 저는 <반지 전쟁>이라는 소설 자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반지 전쟁>은 대단한 소설이죠. <반지 전쟁>은 중세 판타지 소설이나, SF 작가들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반지 전쟁>에 더 가까운 SF 소설들 역시 많을 겁니다. <반지 전쟁>은 정말 웅장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웅장한 서사 소설이 무조건 좋은 생태 문학이 되나요? 그렇지 않아요. 우드 엘프들이나 엔트들은 생태 철학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레골라스나 트리비어드나 갈색의 라다가스트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는 트리비어드나 갈색의 라다가스트를 좋아하는 취미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형이상학적인 자연관에서 비롯했을 뿐입니다.
이런 소설이 생태 문학 항목에 들어갈 수 있을지 저는 좀 의심스럽습니다. 생태 문학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는 설명과 <반지 전쟁>이 생태 문학이라는 설명은 서로 들어맞지 않아요. 귀족을 열심히 미화하는 소설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할 수 있을까요? 신성한 백인들이 악독한 흑인들을 학살하는 소설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정말 생태 문학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이런 낭만적인 자연관에서 허식과 가면을 벗겨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