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레비아탄>의 꿀벌 군집과 인공 생태계 본문
[생체 비행선의 내부 구조. 가스를 생성하기 위해 부유 고래는 뱃속에 인공 생태계를 품었을지 모릅니다.]
스콧 웨스터펠드가 쓴 소설 <레비아탄>은 생체 비행선을 이야기합니다. 주연 등장인물들은 영국 공군 소속이고, 생체 비행선 승무원들입니다. 19세기에 찰스 다윈이 개조 동물들을 만든 이후, 영국은 개조 동물들을 산업과 군사에 이용했어요. 영국 공군은 아주 거대한 부유 고래를 만들었고, 부유 고래를 이용해 생체 비행선을 만들었죠. <레비아탄>은 가상의 1차 세계 대전과 레비아탄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부유 고래 비행선을 주로 조명합니다. 모종의 사건 때문에 부유 고래 비행선은 어떤 높고 외딴 산맥에 추락합니다. 혹독한 고산 지대에서 비행선 승무원들은 음식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이 먹기 위해서? 아닙니다. 비행선에게 먹이기 위해서입니다.
체펠린 비행선 승무원들과 달리, 부유 고래 승무원들은 다양한 식구들을 데리고 다닙니다. 부유 고래 비행선에는 사람들 이외에 다양한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적 항공기를 공격하는 맹금들과 화살 박쥐들, 가스 누출을 점검하는 가스 탐지견들, 살아있는 해파리 기구 같은 헉슬리들, 꿀을 모으고 가스를 생성하는 꿀벌들, 꿀벌들에게 꿀을 제공하는 꽃들. 무엇보다 부유 고래 역시 먹고 살아야죠.
소설 속에서 부유 고래는 내장에 꿀벌들을 품었습니다. 꿀벌들은 꿀을 채집하고, 고래 내장에 서식하는 박테리아들은 꿀을 분해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부유 고래는 영양분을 섭취하고 가스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체 비행선 안에는 나름대로 작은 생태계가 존재합니다. 생체 비행선이 품은 꿀벌들이 Apis mellifera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벌들을 honeybee 대신 그저 bee라고 부르는군요. 바이오펑크 소설이기 때문에 벌들 역시 개조 동물이겠죠. 하지만 이런 방법이 효율적이고 가능할까요. 비행선을 만들기 위해 구태여 이런 거대한 동물을 이용해야 하는지 솔직히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개조 동물이 꽤나 비약적인 발상이기 때문에 뭐라고 자세하게 논의하기가 어렵군요. 영국 공군은 부유 고래 비행선이 다른 비행선들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부유 고래 비행선은 스스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비행선 승무원들이 먹거리들을 찾은 이유는 부유 고래를 치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충분히 영양분을 섭취한다면, 부유 고래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스스로 치유할 수 있고 다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체펠린 비행선 승무원들은 직접 기계를 수리해야 하나, 생체 비행선 승무원들은 부유 고래를 잘 먹여야 합니다. 거대한 부유 고래부터 꿀벌들과 미생물 박테리아들까지, 이는 나름대로 작은 생태계입니다.
<레비아탄>에는 여러 개조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아마 수많은 독자들은 부유 고래부터 공격용 맹금들이나 화살 박쥐들 같은 전투적인 동물들에게 관심을 기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동물들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나, 저는 부유 고래의 꿀벌들이 훨씬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자 그대로 부유 고래의 내장과 꿀벌들과 꽃들과 박테리아들은 지속 가능한 순환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폐쇄적인 생태계일까요? 이게 자급자족 생태계일까요? <레비아탄>은 이런 문제에 많은 지면들을 할애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레비아탄>은 가상의 1차 세계 대전을 이야기합니다. 거대한 육상 전함이 쿵쿵거리며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고작 꿀벌들이 중요하겠어요. 다른 밀리터리 SF 소설들이 그런 것처럼 <레비아탄> 역시 전쟁 상황과 병사들이 느끼는 감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게다가 <레비아탄>은 성장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본격적인 하드 SF 소설이 아니고, 설정을 깊게 논의하지 않아요. 그래서 부유 고래 몸 속의 순환 체계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스콧 웨스터펠드가 독자에게 그럴 듯한 인공적인 생태계 설정을 내놨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SF 창작물들은 인공적인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존 발리가 쓴 <타이탄>은 괜찮은 사례일 겁니다. 우주 정거장이 자급자족하고 싶다면, 우주 정거장 사람들은 작물들과 가축들을 키워야 합니다. 우주 정거장 사람들은 농장을 만들어야 할 테고, 우주 농장은 인공적인 생태계가 될 수 있겠죠. 행성 공학 역시 인공적인 생태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우주의 개척자>에서 소설 주인공은 외계 위성을 개척합니다. 외계 위성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소설 주인공은 생태학을 공부하나, 생태학이 너무 복잡하다고 불평합니다. (<우주의 개척자> 역시 꿀벌 생태계를 언급하죠.)
이런 행성 공학 소설은 가장 대표적인 인공 생태계를 보여줄 겁니다. 보드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다양한 식물, 동물, 미생물 카드들을 보여주고, 이런 것들을 이용해 화성을 테라포밍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보드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이런 생명체들이 대기를 생성하고 화성을 지구화하는지 관찰할 수 있어요. (이는 나름대로 교육용 생태 시뮬레이션 게임이 될 수 있겠군요.) 우주 정거장이나 행성 공학이 너무 거창하다면, 우주선 속의 산소 공급실은 좀 더 작은 사례가 될 수 있겠죠. 대니 보일이 감독한 <선샤인>에서 우주선 속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생물학자는 녹색 정원을 돌봅니다. 우주선의 다른 장소들과 달리, 녹색 정원은 싱그러운 생명체들을 보여줍니다.
[우주선에 산소를 공급하는 식물들. 이런 '산소 정원'이 폐쇄적인 인공 생태계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우주선 속의 생태계가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개척자> 같은 행성 공학은 거창합니다. 하지만 <우주의 개척자>에서 사람들은 외계 위성이라는 발판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외계 위성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외계 위성은 스스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빅뱅 이후 우주가 만든 결과물입니다. 반면, 우주선은 인간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주선은 인간이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조립한 결과물입니다. 비록 우주선은 외계 위성보다 압도적으로 작습니다. 하지만 우주선은 순수하게 인간이 창조한 결과물입니다. 그런 결과물 속에서 자연 생태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주선 속에서 뭔가가 하나 잘못된다면, 그건 파국적인 비극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우주선이 순수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인간은 모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주선 속의 인공 생태계는 작습니다. 하지만 그건 훨씬 까다롭고 순수한 작업일지 모릅니다. 바이오스피어 2 실험은 우주선 속의 인공 생태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선례입니다. 이런 폐쇄적이고 인공적인 생태계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이오스피어 2 실험은 실패했죠.
<선샤인>에 등장하는 녹색 정원은 언뜻 간단한 수경 농장 같습니다. 만약 장거리 항해 우주선이 이런 수경 농장을 품었다면, 우주 승무원들이 그걸 계속 관리할 수 있을까요? 수경 농장의 식물들이 지속 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는 아주 간단한 작업처럼 보이나, 어쩌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문제가 존재할지 모릅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우주 생물학자들과 하드 SF 작가들 역시 알지 못할 겁니다. 아무도 장거리 항해 우주선을 만든 적이 없고, 아무리 장거리 우주 여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드 SF 작가들은 온갖 해괴한 상황들을 상상하나, 그런 것들은 고작 사고 실험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현실은 사변을 뛰어넘고, 그래서 장거리 항해 우주선은 예상하지 못한 고난들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경 농장이 정말 제대로 돌아갈까요? 혹시 이상한 미생물들이 번식하지 않을까요? 식물들이 시들거나 병들고, 우주선에 제대로 산소를 공급하지 못하고, 그래서 우주 승무원들 역시 비참한 최후에 이르지 않을까요? 흔히 사람들은 자연 생태계가 그냥 순환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주선 속의 수경 농장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될지 몰라요.
<레비아탄>에 등장하는 부유 고래 내장과 꿀벌 군집을 저런 생태계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타이탄>의 인공 농장과 <우주의 개척자>의 외계 농장과 <테라포밍 마스>의 행성 공학과 <선샤인>의 녹색 정원과 <레비아탄>의 꿀벌 군집을 서로 비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인공 생태계라는 단어가 이런 창작물들을 관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생명체는 각자 자연 환경을 바꿉니다. 생존하기 위해 모든 생명체는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풍성한 생명의 요람은 그렇게 형성되었습니다.
식물 플랑크톤들은 산소를 뿜습니다. 이는 혐기성 생명체에게 당혹스러운 상황이겠으나, 이런 산소 덕분에 다른 호기성 생명체들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죠. 잎이 넓은 활엽수들은 거창한 그늘을 드리웁니다. 그늘 때문에 잡초들은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코끼리들은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숲의 경관을 바꿉니다. 비버들은 댐을 짓고, 수위를 조절합니다. 인류 역시 자연 환경을 바꿉니다. 게다가 미래를 예측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기 때문에 인류는 자연 환경을 훨씬 거시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인류는 물이 없는 곳에 물을 끌어들이고, 기름진 토양을 만들고, 황무지를 푸른 초원으로 바꿀 수 있어요.
과학 기술이 발달한다면, 이런 변화는 더욱 놀라운 경관들을 연출할 겁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다면, 인류는 자연 생태계를 더욱 크게 바꿀 수 있겠죠. 심지어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외계 행성이나 우주 역시 생명을 품을 수 있겠죠. 여러 SF 창작물들은 그런 인공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인공 생태계라는 표현이 잘못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자연 생태계에 속했습니다. 인간은 자연 생태계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류가 우주 농장을 만들거나 죽은 위성을 녹지로 바꾼다고 해도, 그건 인공 생태계가 아닐지 모릅니다. 인류가 우주 농장을 만든다고 해도, 결국 인류는 지구에서 생명의 씨앗을 가져와야 합니다.
소설 <우주의 개척자>에서 인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지구에서 뭔가를 가져왔고, 그걸 외계 위성에 심었습니다. 보드 게임 <테라포밍 마스>에 등장하는 다양한 생명체들은 인류가 뚝딱 만든 결과물이 아닙니다. 인류는 지구에서 그것들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다섯 번째 문단에서 저는 우주선이 인류가 순수하게 창조한 결과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은 틀렸을지 모릅니다. 우주선이나 우주선 속의 수경 농장 역시 그렇게 순수한 창조물은 아니겠죠. (그렇다고 해도 우주선 속의 인공 생태계는 행성 공학보다 민감한 체계일지 모릅니다.)
[게임 <테라포밍 마스>의 한 장면. 점차 황무지 화성은 푸른 숲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레비아탄>에 등장하는 생체 비행선은 우주선이 아닙니다. 게다가 거대한 부유 고래는 기계 우주선과 확연히 다르죠. 하지만 <레비아탄>의 부유 고래 비행선과 <선샤인>의 우주선은 똑같이 꿀벌 군집이나 정원을 품었습니다. 그런 꿀벌 군집과 정원이 가스나 산소를 공급하기 때문에 승무원들 역시 높은 창공을 비행하거나 태양까지 항해할 수 있고요. <레비아탄>과 <선샤인>은 인공적인 탈것 속의 인공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인공 생태계가 제대로 돌아갈 때, 배가 운항하고 승무원들 역시 살아갈 수 있죠. 비행선이나 우주선이 하나의 인공적인 세계라면, 고래 내장 속의 꿀벌 군집과 우주선의 녹색 정원은 세계를 뒷받침하는 순환 체계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고래 내장 속의 꿀벌 군집과 우주선의 녹색 정원이 서로 다르다고 지적할지 모르겠습니다. 맞아요. 두 가지는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인공적인 꿀벌 군집이나 산소 정원은 비행선과 우주선을 지탱하는 생태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바이오스피어 실험과 고래 내장 속의 꿀벌 군집과 우주선의 녹색 정원을 서로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자연 환경을 조성합니다. 언젠가 결국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자연 환경을 조성할지 모릅니다. 그런 자연 환경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레비아탄>에서 영국 군대는 다윈주의자라고 불립니다. 찰스 다윈이 개조 동물을 만든 첫째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썼고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이기 때문에 스콧 웨스터펠드는 찰스 다윈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찰스 다윈이 그저 생물학자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동시에 찰스 다윈은 지렁이들과 기름진 토양을 관찰한 생태학자였습니다. 그래서 다윈은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비록 이 책은 <종의 기원>이라는 엄청난 폭발력에게 한참 밀리나, 현대 농업을 걱정하는 생태학자들은 <지렁이의 활동>이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미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생명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썼고, 그게 진화(자연 선택)를 촉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영양분이 흐르는 과정을 묘사하지 않았으나, <종의 기원>은 생태적인 시각을 포함했습니다. 어쩌면 <레비아탄>의 영국 과학자(다윈주의자)들은 생태학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지 모르죠. <레비아탄>은 그런 내용을 몇 번 언급하고, 독자는 그런 설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속에서 노라 발로우 박사가 이야기하는 자연 철학은 그걸 반증하는 근거고요.
저는 이런 인공 생태계들이 정말 신비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행 로봇이나 인공 지능 역시 놀라운 상상력이나, 저는 인공 생태계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레비아탄>에서 비행선 승무원들이 부유 고래에게 음식을 먹인 것처럼, 생태계는 '생명체들이 서로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생명체들이 듬뿍 먹고 쑥쑥 자랄 때, 시인들은 풍성한 자연력 운운합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가벼워 보이는 표현일지 모르겠군요. 이건 어떨까요. 생태계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영양분을 생산하고 전달하고 소비하는 상호 작용'입니다. 이는 훨씬 학술적이고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이는 표현이군요. 뭐라고 부르든, 생태계는 영양분(에너지)이 흐르는 그물망입니다. 이런 영양분 그물망이 얽힌 모습을 분석하고 관찰할 때, 생태학자들은 기쁨을 느낄 겁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어느 정도 생태학자이고, 생태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 역시 먹고 사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명체가 먹고 사는 문제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겠어요. 유기체 동물로서 우리 인간은 반드시 뭔가를 소비하고 영양분을 얻어야 합니다. 어쩌면 나중에 유전 공학자들이 인간에게 엽록소를 집어넣을지 모르죠. 우리 피부는 녹색으로 바뀌고, 광합성을 이용해 영양분을 생산할지 모르죠. 인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물이 오직 광합성으로 버틸 수 있는지 저는 좀 궁금합니다. 하지만 광합성을 이용한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주변 환경이 풍성할 때, 광합성 역시 의미가 있겠죠.
저런 인공 생태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주변 환경에 시선을 돌려야 할 겁니다. 소설 속의 개조 꿀벌들을 논의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현실 속의 진짜 자연 생태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가상의 인공 생태계를 논의할 자격이 있을까요. 진짜 자연 생태계를 관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가상의 생태계 관리를 논의할 수 있겠어요. 자,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제대로 관리하는 중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와 미세 플라스틱 쓰레기들과 핵 폐기물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후 변화는 정말 행성적인 대재난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언제 대재난을 일으킬지 모름에도, 우리는 계속 대기업들에게 굽신거리고 복종하는 중입니다. 대기업들이 온실 가스를 뿜어도, 신처럼 왕처럼 우리는 대기업들을 떠받듭니다. 대기업들이 자연 환경을 마구잡이로 착취해도, 우리는 대기업들에게 애걸복걸 매달립니다. 우리는 임금 노동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임금 노예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되기 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행성 공학과 우주 농장과 인공 생태계를 논의한다면, 그건 정말 우스꽝스러운 꼴일 겁니다. 노예 근성이 충만한 우리가 무슨 인공 생태계를 관리하겠어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양봉 장면. 자본주의 디스토피아, 생태계 붕괴, 개조 생명체들.]
어쩌면 누군가는 비행선 내장의 꿀벌 군집이 그저 기술적인 문제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기술적인 문제인가요? 만약 개조 꿀벌 군집이 비행선에서 도망치고 자연 생태계를 교란한다면? 그것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이 대대적인 피해를 받는다면? 양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살인벌 사건을 들어봤을 겁니다. 개조 꿀벌들이 그런 사건을 일으킨다면? <레비아탄>은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지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SF 독자들은 <인간 종말 리포트> 같은 소설을 <레비아탄>에 연결할 수 있어요. <인간 종말 리포트>에서 대기업들은 온갖 개조 동물들을 만듭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개조 생명체들은 자연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고, 그게 대대적인 피해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생태계 관리는 그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생태계 관리는 기술적인 문제인 동시에 사회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생태계 관리는 파탄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레비아탄>은 그런 문제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 종말 리포트>처럼 SF 세상에는 개조 생명체를 경고하는 소설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SF 독자들은 <인간 종말 리포트>가 제기한 문제를 <레비아탄>에 대입할 수 있어요. SF 독자들은 인공 생태계와 생태계 관리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겠죠.
구태여 <레비아탄>으로 생태계 관리를 이야기할 이유가 있을까요? <레비아탄>은 <원더그라운드>나 <생각보다 너무 싱싱해> 같은 소설이 아닙니다. <레비아탄>은 밀리터리 SF 소설이고,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이나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이야기한 것처럼, 공중 철갑함과 싸우는 이야기가 <레비아탄>에게 훨씬 어울리겠죠. 하지만 저는 고래 내장 꿀벌들이 독특한 발상이라고 생각하고, 이걸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노라 발로우 박사가 잠시 자연 철학을 언급한 것처럼, 고래 내장 꿀벌들을 이용해 독자들은 생태계 관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