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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쇼베 표범 벽화와 소행성 생태계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쇼베 표범 벽화와 소행성 생태계

OneTiger 2018. 12. 29. 19:09

[왜 신성한 동굴 속에서 화가는 표범을 그렸을까요? 표범이 화가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을까요?]



쇼베 동굴 벽화는 프랑스 아르데슈 쇼베 동굴에 있는 벽화들을 가리킵니다. 동굴 벽에는 수많은 야생 동물 그림들이 있고, 이것들은 가장 오래된 예술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유네스코는 대략 3만 6천 년 전에 고대인들이 벽화들을 그렸다고 추정합니다. 쇼베 동굴 벽화는 미술 역사를 뒤집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가 예술을 시작했음을 증명했죠. 게다가 그림체가 꽤나 뛰어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쇼베 동굴 벽화가 조작이라고 의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원시적인 고대인들이 이렇게 뛰어난 그림들을 그리지 못할 거라고 주장하죠.


벽화들을 그린 고대인들은 생동감이 넘치는 움직임과 원근법과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했습니다. 몇몇 그림에는 덧칠들이 있어요. 횃불과 함께 이런 그림을 감상할 때, 덧칠 그림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어쩌면 이런 그림은 가장 오래된 애니메이션일지 모르죠. 심지어 21세기 현대인들조차 이렇게 자세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들을 쉽게 남기지 못할 겁니다. 문제는 쇼베 동굴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장소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쇼베 동굴은 일반적인 거주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화가들은 일부러 동굴 속으로 들어왔고 그림들을 남겼겠죠. 그들이 누구일까요? 왜 이런 동굴에서 그들이 일부러 자세한 그림들을 그렸을까요?



쇼베 동굴을 둘러싼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이게 너무 오래된 벽화이기 때문에 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과 미술 역사학자들은 쉽게 해답을 찾지 못하겠죠.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과 예술가들은 한 가지 의견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쇼베 동굴 벽화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습니다. 벽화 내용은 야생 동물들입니다. 들소들, 동굴 사자들, 코뿔소들, 표범, 기타 등등. 야생 동물들은 주된 내용을 차지합니다. 학자들은 주술사들이 이런 동물들을 그렸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왜 주술사들이 야생 동물들을 그렸을까요? 들소들과 코뿔소들과 표범을 그렸을 때, 뭐라고 주술사 화가들이 느꼈을까요?


그들이 사냥 방법과 자연 지식을 전달하기 원했을까요? 그들이 야성적인 힘과 능력을 얻기 원했을까요? 어쩌면 양쪽 모두 해답인지 모릅니다. 주술사들은 자연 생태계를 관찰했고, 야생 동물들을 표현했고, 야성적인 능력을 얻기 바랐을지 모릅니다. 여전히 수많은 부족 문화들에서 주술사들은 야생을 관찰하고, 대지모신을 숭배하고, 사냥꾼들을 축복합니다. 쇼베 동굴에서 주술사 화가들 역시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을지 모릅니다. 쇼베 동굴은 성지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거주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야생 동물 그림들이 주술적인 힘을 뿜기 때문에 사람들은 함부로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쇼베 동굴 벽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부로 추측한다면, 그건 쉽게 오류에 빠질 겁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주술사 화가들이 야생 동물 그림들에게서 주술적인 힘을 얻기 원한다고 추정합니다. 그건 다수 의견이고, 따라서 쇼베 동물 그림들은 주술적인 의미를 담았을 겁니다. 왜 주술사들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야생 동물들에게서 주술적인 힘을 끌어내기 원했을까요? 주술사들은 다른 자연 요소들에게서 주술적인 힘을 빌릴 수 있었을 겁니다. 사실 수많은 주술사들은 태양, 대지, 바람, 파도, 번개, 해일, 폭풍을 예찬합니다.


심지어 현대적인 종교인들조차 신이 폭풍이나 화산 폭발 같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과 달리, 쇼베 동굴 벽화에는 야생 동물들이 있습니다. 표범을 그리는 동안 뭐라고 주술사 화가가 느꼈을까요? 주술사 화가는 표범이 태양과 번개와 해일과 폭풍보다 훨씬 강하다고 느꼈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주술사 화가가 구태여 표범을 그렸을까요? 이유를 추측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증거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주술사 화가의 심리를 정확히 추측한다면, 그건 오류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가장 오래된 예술은 표범을 비롯해 야생 동물들을 묘사했고,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겠죠.



현대 도시 시민들과 달리, 고대인들은 야생 동물들과 부대껴야 했을 겁니다. 그들은 들소들을 사냥해야 했고 표범을 피해야 했을 겁니다. 소설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묘사하는 것처럼, 고대인들에게 표범은 꽤나 커다란 위협이었을지 모릅니다. 고대인들은 언제나 표범이 자신을 덮칠 거라고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덤불이 흔들릴 때, 고대인들은 덤불 속에 표범이 숨었을지 모른다고 걱정했을 겁니다. 설사 바람이 덤불을 흔들었다고 해도, 고대인들은 표범을 의심해야 했습니다. 그런 의심 덕분에 누군가는 목숨을 건졌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고대인들은 고기를 먹었을 겁니다. 수렵보다 채집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고 해도, 고대인들은 고기가 맛있는 식량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를 먹기 원했고 들소 그림들을 그렸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화가들은 들소 무리가 그저 장관이라고 생각했을 뿐인지 모릅니다. 생명체들이 아주 거대한 무리를 이룬다면, 그건 장관이 될 테고, 인간은 살아있는 거대함에 감탄할 겁니다. 그래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는 세계 자연 유산이 되었죠. 고대인들에게 엄청난 들소 무리는 세계 자연 유산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장관을 표현하기 원했고 그림을 그렸을지 모릅니다.



이런 추측들이 사실과 부합할까요? 아니면 이것들이 그저 허무맹랑한 망상에 불과할까요? 이유가 무엇이든, 야생 동물들은 인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어쩌면 아직 현대 도시 시민들은 그런 영향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야생 동물에게 어떤 초능력이 있다고 간주하고 그걸 초인에게 반영합니다. 스파이더맨은 대표적인 사례일 겁니다. 스파이더맨은 거미 같은 인간입니다. 거미처럼 스파이더맨은 거미줄을 쏘고, 거미줄을 치고, 벽을 기어오를 수 있습니다. 몇몇 초능력은 거미와 별로 상관이 없으나, 스파이더맨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거미를 스파이더맨에게 투영합니다.


배트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파이더맨과 달리, 배트맨은 진짜 초인이 아닙니다. 그저 상징으로서 브루스 웨인은 박쥐를 이용할 뿐입니다. 하지만 여러 만화들과 영화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종종 브루스 웨인은 박쥐 주술사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영화 <배트맨 비긴스>에서 브루스 웨인이 박쥐 무리와 감화하는 장면을 보세요. 그 장면은 주술사가 야생 동물과 교감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스파이더맨과 배트맨 이외에 미국 초인 영웅들 중에서 야생 동물을 투영하는 초인들은 많습니다. 쇼베 동굴 화가들은 그런 정신을 발휘했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고대인들에게 야생 동물은 의지로 움직이는 대상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태양과 지진과 화산 폭발과 폭풍과 해일이 거대하고 놀랍다고 해도, 그것들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숨을 쉬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뭔가를 잡아먹지 않습니다. 태양과 지진과 화산 폭발과 폭풍과 해일에게는 두 눈동자와 입과 사지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응가하지 않고, 잠을 자지 않고, 소리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생 동물에게는 의지가 있습니다. 고대인이 다가갈 때, 들소들은 도망쳤을 겁니다. 표범은 고대인들을 잡아먹기 원했을 겁니다.


고대인은 들소와 표범이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간주했을 겁니다. 들소와 표범은 숨을 쉬고, 감정을 표현하고, 뭔가를 먹습니다. 들소와 표범에게는 두 눈동자가 있고, 입이 있고, 사지가 있습니다. 들소와 표범은 응가하고, 잠을 자고, 소리를 지릅니다. 고대인들이 폭풍과 해일과 번개를 의인화할 수 있다고 해도, 폭풍과 해일과 번개는 추상적입니다. 반면, 야생 동물들은 아주 생생하죠. 구태여 의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야생 동물들은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들소와 표범은 먹고 먹히는 먹이 그물망, 자연 생태계에 속합니다.



이렇게 고대부터 야생 동물은 인간에게 막대하고 다양한 영향들을 미쳤을 겁니다. 고대인들은 야생 동물들과 부대껴야 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야생 동물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생명체라고 간주했을 겁니다. 설사 그들이 간주하지 못했다고 해도, (태양과 폭풍과 번개와 달리) 먹이 그물망 속에서 고대인들은 야생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야 했습니다. 살아있는 거대함은 장관이고, 고대인들은 장관을 표현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주술사 화가들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야생 동물들에게서 영감을 빌렸다면, 그건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건 아주 당연한 현상이겠죠. 아무리 번개가 대단하다고 해도, 번개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번개에게는 두 눈이 없습니다. 번개는 숨을 쉬지 않습니다. 번개는 응가하지 않고 과일이나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대인들의 관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번개와 표범이 똑같은 위상이라고 간주하지 않았을 겁니다. 동물들조차 번개와 동물을 똑같은 위상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번개와 표범을 구분할 수 있었겠죠. 고대인들이 자연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도, 고대인들은 표범이 번개와 다르다고 여겼을 겁니다.



스토리텔링 게임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에는 여러 늑대인간 부족들이 있습니다. 늑대인간 부족들은 다양한 토템들을 숭배합니다. 다양한 토템들은 동물들입니다. 그리폰, 유니콘, 올빼미, 거대 늑대, 거북이, 사자, 바퀴벌레, 쥐, 맹금, 기타 등등. 어떤 늑대인간 부족들은 천둥신이나 눈보라 정령을 숭배하나, 그런 무형적인 존재들보다 동물들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왜 늑대인간 부족들이 토템으로서 동물들을 숭배할까요? 왜 게임 제작자들이 동물 토템들을 많이 설정했을까요? 이게 우연일까요?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할까요?


어쩌면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게임 제작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동물 토템들을 설정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쇼베 동굴 화가들이 야생 동물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처럼, 게임 제작자들은 무형적인 존재들보다 동물들이 훨씬 생생하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동물들이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무형적인 존재들보다 동물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쇼베 동굴 그림과 늑대인간 동물 토템을 함께 바라본다고 해도, 그건 커다란 오류가 아닐 겁니다.



어쩌면 이런 추정은 착각일지 모릅니다. 고고학자들, 인류학자들, 미술 역사학자들은 아직 고대 예술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야생 동물 벽화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건 착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추정에는 아예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아이들은 무형적인 존재보다 동물에게 쉽게 매력을 느낍니다. 쇼베 동굴 벽화와 늑대인간 동물 토템들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야생 동물은 원초적이고 매혹적이고 생생합니다. 야생 동물은 그런 요소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훨씬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쇼베 동굴 벽화는 예술입니다. 상상 없는 예술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건 어려운 물음일지 모르나, 수많은 미학자들은 상상과 예술이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대답할 겁니다. 창작물, 픽션은 '허구'입니다. 우리는 허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허구는 현실에 없는 것이죠. 프리다 칼로가 그린 수박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수박입니다. 그림 속의 수박을 볼 때, 우리는 비단 수박만 아니라 프리다 칼로의 세계관과 상상력을 봅니다. 그림 속의 수박이 열정적이고 강렬한 이유는 그게 프리다 칼로가 상상한 수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허구를 만들 때, 인간은 상상해야 합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다면, 왜 인간이 실존하는 야생 동물들에 만족해야 할까요. 인간은 훨씬 넓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야생 동물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 생태계를 과장하고 훨씬 놀랍고 신비롭고 이질적인 자연 생태계를 만들 수 있어요.



만약 우리가 이런 자연 생태계를 과장할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이런 자연 생태계를 과장하고 상상한다면? 고대인들이 무엇을 상상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추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주 속의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꿈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 인류가 소행성 내부를 굴착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소행성 내부를 굴착할 수 있다면, 그 안에 미래 인류는 거대한 축을 집어넣고 회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소행성이 회전할 때, 그건 인공 중력을 생성하겠죠. 미래 인류는 소행성에 태양열 전지들을 붙이고 태양열을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후 그들은 개조 미생물들을 뿌릴 수 있을 겁니다. 미생물들은 위대한 생존자들입니다.


첨단 과학 기술은 미생물들을 훨씬 위대한 생존자로 개조할 수 있겠죠. 척박한 불모지 속에서 개조 미생물들은 숨을 쉬고 산소를 뿜을 겁니다. 이렇게 소행성 내부에는 중력, 태양열, 대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소행성 내부가 이런 조건들을 갖춘다면, 미래 인류는 소행성 내부에 수분을 뿌리고 인공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소행성 내부는 아주 거대한 야생 보호 구역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보호 구역은 아무르 호랑이 같은 최고 포식자들을 얼마든지 먹이고 키울 수 있겠죠. <2312> 같은 SF 소설들은 그런 미래를 꿈꿉니다. 소행성 내부에서 살아있는 아주 거대한 보호 구역과 수많은 야생 동물들. 예술 속에서, <2312> 같은 SF 소설들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야생,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표범이 예술에 영감을 미치는 것처럼, 우리는 외계 호랑이와 외계 식생을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소행성 생태계를 상상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평등하게 관리하는 미래 문명을 함께 상상해야 할 겁니다.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 문명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소행성 내부의 거대한 야생 보호 구역과 세계화 자본주의가 서로 어울릴까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고 찌질대는 자본주의 문명이 소행성 내부의 야생 보호 구역을 만들 수 있겠어요? 아직 플랜테이션 농업을 버리지 못하는 자본주의 문명이 광활한 야생 보호 구역을 만들 수 있겠어요?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조차 그걸 용납하지 못할 겁니다.


사이비 작가들은 그게 가능하다고 헛소리를 주절거릴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이비 지식인들이 헛소리를 떠듭니까. 얼마나 많은 사이비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를 예찬합니까.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라는 행성적인 재난을 불렀음에도, 사이비 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낫다고 주절거리죠. 그들은 심지어 공산주의 뻘짓들조차 폭력적인 자본주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책 좀 읽었다는 지식인들이 권력을 편들고 찌질대는 것보다 추잡한 꼴불견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래서 경이로운 미래 생태계를 꿈꾼다면, 우리는 미래 생태계를 평등하게 관리하는 미래 문명을 함께 꿈꿀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사실 이런 인공 생태계 설정은 생태적인 상상력들 중에서 가장 거대할 겁니다. 아무리 거대 괴수가 '거대'하다고 해도, 소행성 내부의 인공 생태계보다 거대하지 못하겠죠. 생체 우주선부터 소행성 생태계, 행성 공학까지, 인류는 새로운 생태계들을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왜 오직 지구에서만 야생 동물들이 번성해야 할까요? 왜 오직 지구에서만 호랑이들이 번성해야 할까요? 행성들과 위성들과 소행성들과 우주 인공 거주지들에서 미래 인류는 호랑이들을 풀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과정에는 여러 위험들이 있을 겁니다. 설사 인류에게 첨단 과학 기술이 있다고 해도, 인류가 너무 빨리 생태계를 조성하거나 바꾼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참사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이제까지 문명이 흐르는 동안 인류는 수없이 자연 생태계를 함부로 바꿨고, 그것들은 참사들로 이어졌습니다. 미래 인류가 생체 우주선을 만들거나 소행성 내부의 보호 구역을 조성하거나 위성에 삼림을 조성한다면, 그것들 역시 참사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가 생각하는 첨단 과학은 첨단 과학이 아닐지 모릅니다. 반다나 시바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연 과학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겁니다. 계몽주의 이후 자연 과학은 숱한 파괴들에 일조했습니다. 우리는 자연 과학을 바꿔야 할 겁니다. 그때 고대인들이 표범을 주술적으로 바라본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생태계를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죠.



아니면 야생 동물을 상상하는 예술은 거대 괴수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는 과장된 야생 동물입니다. 모비 딕부터 제노 타이탄까지, 거대 괴수들은 야생 동물들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거대하기 때문에 야생 동물보다 거대 괴수는 훨씬 원초적이고 훨씬 매혹적이겠죠. 100m짜리 떡대 갯가재가 돌아다닌다면, 누가 거기에서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떡대 갯가재가 황당무계하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떡대 갯가재가 함재 미사일들을 가뿐하게 씹어먹거나 공중 부양 전차를 갈기갈기 찢는다면, 그건 훨씬 황당무계하겠죠. 하지만 우리 인간은 100m짜리 떡대 갯가재를 이용해 야생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쇼베 동굴 벽화의 다양한 동물 그림들처럼, 100m짜리 떡대 갯가재는 상상을 표현한 결과이고 예술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조건 현실을 '현실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이 세상에서 수많은 예술들은 사라져야 할 겁니다. 이사벨 아옌데가 환상적인 재규어 이야기를 쓴다면, 사람들은 그게 훌륭한 문학이라고 칭송할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사벨 아옌데가 이야기하는 마술적인 재규어를 칭송하고 100m짜리 갯가재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이건 오류입니다. 예술은 현실적인 주제를 현실적이지 않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주제가 무조건 현실적이어야 한다면, 다양한 환상 문학들은 사라져야 할 겁니다. 현실적인 주제가 현실적이어야 한다면, 수많은 환상 문학 작가들은 환상 문학들을 쓰지 않았겠죠. 우리는 표현 방법이 아니라 예술이 담은 주제를 들여다봐야 할 겁니다.



소행성 내부의 야생 보호 구역은 놀랍고 신비롭고 거대한 자연 생태계가 됩니다. 인간이 절대 떠나지 못하는 자연 생태계. 인간이 부대껴야 하는 자연 생태계. 인간을 낳은 자연 생태계. 소행성 내부의 야생 보호 구역은 그런 자연 생태계를 품었습니다. 동시에 그건 인류가 만든 자연 생태계입니다. 그래서 인공 생태계 이야기는 아주 원초적이고 매혹적이고 동시에 진보적인 창작 소재인지 모릅니다. 설사 쇼베 동굴 벽화보다 훨씬 오래된 예술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 예술이 야생 동물이 아니라 다른 것을 표현했다고 해도, 여전히 인공 생태계 설정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창작 소재일 겁니다.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에는 진보적인 찬란함과 원초적인 생생함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엄청난 인공 중력 막대와 막대 아래에서 숲을 활보하는 아무르 호랑이. 하나는 진보적이고, 다른 하나는 원초적이죠. 하지만 소행성 내부의 보호 구역에서 두 가지는 어울릴 수 있습니다. 만약 소행성 내부에 오직 기계들과 건물들만 가득하다면, 호랑이들이 활보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오직 진보적인 감성만 있고 원초적인 감성이 없겠죠. 하지만 고대인들이 쇼베 표범을 그린 것처럼, 우리는 비단 진보적인 감성만 아니라 원초적인 감성을 함께 느끼기 원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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