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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게임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의 연결 고리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게임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의 연결 고리들

OneTiger 2019. 6. 10. 20:10

[이런 행사는 세계 환경의 날과 진화 생물학 시뮬레이션 게임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다고 보여줍니다.]



※ 스팀 2019년 세계 환경의 날 행사 페이지: https://store.steampowered.com/sale/worldenvironmentday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스팀 역시 세계 환경의 날을 기념하고 기념 세일을 진행했습니다. 세계 환경의 날 행사로서 스팀은 여러 생태계 게임들을 늘어놓습니다. <서브노티카>는 외계 바다를 보여주고, 게임 주인공은 거주지와 잠수정을 짓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압주>는 엄청나게 풍요로운 해양 생물 다양성을 자랑합니다. 게임 주인공 잠수부는 수많은 해양 동물들과 어울리고, 다양한 해양 생태계들을 찾아가고, 백상아리와 함께 거대한 기계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백상아리가 해양 생태계의 수호자 같기 때문에, <압주>는 세계 환경의 날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니치>는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게임 속에서 야생 동물들은 교미하고 번성하고 진화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능력들을 부여하고 새로운 생물종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왜 이 세상에 아주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쉘터 2>는 엄마 스라소니와 아기 스라소니들을 보여줍니다. 엄마 스라소니는 아기 스라소니들과 함께 드넓은 야생을 방황합니다. 허기, 산불, 맹금과 곰과 늑대 같은 여러 포식자들은 아기들을 노리고, 엄마는 아기들을 무사히 키워야 합니다. <쉘터 2>는 간접적인 자연 다큐멘터리 같습니다.



<이매진 어스>는 행성 경영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행성을 경영하고 수익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가 오직 수익에만 몰두한다면, 환경 오염들은 심각해지고 기후 변화는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질 겁니다. 행성 경영과 기후 변화 사이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블록후드>는 생태 도시를 조성합니다. <블록후드>에서 중요한 것은 도시 경영보다 환경 균형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삼림 건물을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삼림 건물에서 야생 동물들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건물 옥상에 여러 나무들을 심고, 숲을 조성하고, 사슴과 멧돼지 같은 야생 동물들을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어스텅>은 외계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외계 행성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생명체들을 이용해 새로운 생태계를 꾸밀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무슨 환경에서 무슨 생물종이 살아갈 수 있는지 파악하고, 어떻게 여러 생명체들이 서로 영향들을 미치는지 연구하고, 기후와 지형을 조절해야 합니다. <서브머지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산업 문명은 자연 환경을 파괴했고, 결국 산업 문명 역시 무너졌습니다. (기후 변화 때문에) 바다는 도시를 덮쳤고, 각종 동물들은 기이하게 바뀌었습니다.



(원주민 소녀) 미쿠는 쪽배를 타고 동생과 함께 수몰된 도시에 도착합니다. 동생은 크게 다쳤고, 미쿠는 동생을 치료해야 합니다. 수몰된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안, 미쿠는 거대한 고래 상어를 비롯해 각종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녹색 식물들은 건물들을 뒤덮었고, 이건 자연이 번성하고 문명을 덮는다는 뜻 같습니다. 나중에 미쿠는 동생을 치료합니다. 여러 생태 유토피아들과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그러는 것처럼, <서브머지드> 역시 치유를 강조합니다. 자연과 복원과 치유 사이에는 뚜렷한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웨이킹 마스>는 화성 생태계 퍼즐입니다. 게임 주인공은 화성 동굴을 탐사하고, 여러 외계 생명체들을 조사하고, 동굴 생태계를 되살려야 합니다. 게임 주인공이 생물량과 생물 다양성을 늘린다면, 화성 동굴은 미로 같은 지역들을 개방할 겁니다. 생태계 조성은 퍼즐 같고, 게임 플레이어는 어디에 무슨 생명체를 배치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아크티코>는 극지 탐사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개 썰매, 카약, 낙하산을 이용해 극지를 탐사하고 기지를 지을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환경 조사 장치들을 설치하고 생태계 자료들을 모아야 합니다. 극지가 일상적인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언뜻 극지는 외계 행성 같습니다.



세계 환경의 날 세일 게임들 중에는 <영혼들 Spirits>이 있습니다. <영혼들>은 퍼즐 게임이고 <레밍즈>와 비슷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목표 지점으로 영혼들을 무사히 안내해야 합니다. 영혼들은 오직 앞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영혼들 앞에 낭떠러지와 함정과 벽이 있다고 해도, 영혼들은 오직 앞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능력들을 이용해 영혼들의 진로를 바꾸어야 합니다. <레밍즈>와 달리, <영혼들>은 별로 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게임은 아기자기합니다. <레밍즈>는 엄청난 인원과 다양한 능력들과 드넓은 지역을 자랑하나, <영혼들>에서 인원은 많지 않습니다.


영혼들에게는 바람 불기, 바람 막기, 굴착, 줄기로 변하기 같은 몇몇 능력만 있습니다. 목표 지점들 역시 별로 멀지 않아요. 하지만 <레밍즈>와 달리, <영혼들>은 바람과 활공이라는 요소를 보여줍니다. 바람과 활공 때문에 기계적인 계산은 까다롭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어디로 바람이 영혼들을 날릴지 쉽게 예측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허공에서 영혼들은 영원히 내려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영혼들>에는 식물들이 있고, 영혼들은 식물들을 살려야 합니다. 아주 까다로운 위치들에 식물들이 있기 때문에, 안전한 안내와 식물 깨우기를 모두 만족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퍼즐 게임들이 그러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숱한 시행착오들을 거쳐야 합니다.



[게임 <영혼들>은 직접 산업 문명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자연 상징을 활용합니다.] 



<영혼들>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합니다. 이게 너무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머리를 쥐어싸고, 마우스를 집어던지고, 키보드를 부수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공들여 완벽한 계획을 세웠음에도, 세심한 계획과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영혼들이 가시들에 들이박거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관문 앞에서 영혼들이 방황하거나 식물들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분노의 사자후를 내지를지 모릅니다. <영혼들>에는 정지 기능이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을 정지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을 예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열심히 정지 단추를 누르고 게임 화면을 노려본다고 해도, 영혼들은 가시들로 돌진하고 세심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지 모릅니다. <영혼들>은 수채화 같은 그림체로 산뜻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들을 자랑합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숲 속 풍경은 마음을 평안하게 다독이는 것 같습니다. 몽환적인 음악 역시 평안한 분위기에 일조합니다. <영혼들>에는 치열하고 시뻘건 싸움박질과 폭력과 파괴가 없습니다. 고전 퍼즐 게임 <레밍즈>는 그저 픽셀 그래픽을 보여줬을 뿐이나, 21세기 초반 퍼즐 게임으로서 <영혼들>은 환상적인 수채화 (같은) 그림체를 보여줍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퍼즐을 풀지 않고) 그림체를 감상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분명히 <영혼들>은 기발하고 참신하고 멋진 게임입니다. 훌륭한 퍼즐 게임들이 그러는 것처럼, <영혼들>은 멋진 시간 여행 장치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안전한 경로와 식물 위치들과 영혼 능력들을 탐색하고 고민하고 계산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갈 겁니다. 어쩌면 몇 십 분 동안 식물 하나를 깨우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전전긍긍할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우연히 시간을 확인하고 크게 놀랄지 모릅니다. 비록 <영혼들>이 아기자기하고 규모가 작다고 해도, 이 퍼즐 게임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영혼들>이 훌륭한 시간 여행 장치라고 해도, 왜 퍼즐 게임이 세계 환경의 날 행사에 들어가야 하나요? 퍼즐 게임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요?


<압주>와 <어스텅>과 <블록후드>가 세계 환경의 날 행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건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압주>는 해양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백상아리가 기계들을 물리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스텅>은 어떻게 자연 생태계가 순환하는지 보여줍니다. <블록후드>는 산업 문명을 비판하고 번성, 치유, 복원, 조화를 이야기합니다. 세계 환경의 날은 우리가 자연 환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래서 <압주>와 <어스텅>과 <블록후드>는 세계 환경의 날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반면, <영혼들>에는 이런 내용들이 없습니다. <영혼들>은 정령이 자연 환경을 지킨다고 말하지 않고, 어떻게 자연 생태계가 순환하는지 보여주지 않고, 산업 문명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압주>와 <어스텅>과 <블록후드>과 함께 <영혼들>은 세계 환경의 날 행사에 들어갑니다. <영혼들>이 자연 환경을 지키자고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 생태계 순환을 보여주지 않음에도, 왜 이 게임이 세계 환경의 날과 어울리나요? 이게 그저 얄팍한 상술에 불과한가요? 게임들을 판매하기 위해 스팀이 얄팍한 상술을 부리나요? 어쩌면 이건 정말 얄팍한 상술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그저 얄팍한 상술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거의 모든 것은 얄팍한 상술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 목숨은 상술이 되고, 생물 다양성은 상술이 되고, 세계 환경의 날 역시 상술이 됩니다.


스팀과 스팀 게임들 역시 얄팍한 상술이 되어야 합니다. 이건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스팀이 얄팍한 상술을 부린다고 해도,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혼들>에서 영혼들은 숲의 영혼 같습니다. 그들은 나뭇잎에서 나타나고, 숲 속에서 살아가고, 식물 줄기로 변하고, 식물들을 깨웁니다. 각종 메뉴 단추들(메뉴 화면으로 돌아가기, 일시 정지, 다시 시작하기, 모두 깨우기) 역시 나무 뿌리, 삼림, 나무 새싹, 나뭇잎들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혼들>은 숲과 나무와 나뭇잎을 강조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환상적인 숲 속을 헤매고 신비로운 나뭇잎 영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숲, 식물, 나무, 나뭇잎은 자연과 생태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자연과 생태를 표시하기 원할 때, 우리는 식물과 나무와 나뭇잎을 그립니다. 식물(속의 광합성 요소)이 생산자이고 자연 생태계를 지탱하기 때문에, 우리는 식물(꽃, 나무, 나뭇잎)이 자연과 생태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암묵적인 약속입니다. 글자가 사회적인 기호인 것처럼, 녹색 나뭇잎 문양은 자연을 상징하기 위한 암묵적인 약속입니다. 이웃집 영희가 나뭇잎 문양을 그린다면, 영희가 구태여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나뭇잎 문양이 자연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겁니다.


퍼즐 게임 <영혼들>은 산뜻하고 아름다운 수채화 (같은) 그림체를 이용해 나뭇잎 영혼들과 은빛 줄기들과 은빛 식물들과 잔잔한 숲 속을 보여줍니다. (전반적으로 색깔들이 붉기 때문에, 숲은 가을 같습니다.) <영혼들>이 식물을 강조하기 때문에, <영혼들>과 자연을 상징하는 문양 사이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혼들>은 산업 문명을 직접 비판하지 않으나, 이 게임은 연이어 나뭇잎 영혼들과 줄기들과 식물들과 숲 속을 보여줍니다. <영혼들>은 자연 상징(식물)을 핵심적으로 이용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영혼들>에서 자연 상징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세계 환경의 날 역시 자연 상징을 이용합니다. 세계 환경의 날은 우리가 자연 환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비긴스>와 게임 <영혼들>은 똑같이 상징으로서 식물, 나뭇잎을 이용합니다.]



세계 환경의 날 역시 자연 상징(식물)을 핵심적으로 이용합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우리가 세계 환경의 날을 검색한다면, 우리는 식물들을 가리키는 수많은 상징들과 문양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는 공통점(자연 상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퍼즐 게임 <영혼들>이 자연 생태계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영혼들>은 세계 환경의 날 행사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 게임에서 자연 상징이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맡기 때문에, <영혼들>이 세계 환경의 날 행사에 속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어설픈 끼워팔기와 얄팍한 상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두 가지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통점, 유사성을 이용해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들>은 세계 환경의 날 행사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일종의 비유입니다. <영혼들>이 산업 문명을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 공통점, 유사성이 있다고 간주하고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기 때문에,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이 이어질 때, 이건 비유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비유를 비판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유가 그저 임시적인 연결 고리에 불과하고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서브노티카>가 해양 생태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어스텅>이 자연 생태계 순환을 보여주기 때문에, <블록후드>가 산업 문명을 비판하고 삼림 건물을 제시하기 때문에, <서브노티카>와 <어스텅>과 <블록후드>는 세계 환경의 날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영혼들>에는 오직 연약한 연결 고리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연약한 연결 고리(비유)는 당장 끊어질지 모릅니다. 연약한 연결 고리는 거센 비판을 견디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유보다 직접적인 주장을 훨씬 좋아할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비유보다 직접 주제를 주장해야 한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비유가 연약한 연결 고리인가요? 정말 비유에 아무 가치가 없나요? 우리가 반드시 주제를 직접 주장해야 하나요? 우리가 주제를 다른 것과 연결하고 우회적으로 주장하지 말아야 하나요? 만약 우리가 정말 주제를 다른 것과 연결하지 말아야 한다면, 만약 우리가 정말 비유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강조하지 못하고, 과장하지 못하고, 확대하지 못할 겁니다. 언어 활동은 기계적이고 딱딱하고 시시해질 겁니다.



언어 활동은 비유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니체는 언어의 본질이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할 때, 우리는 연결 고리를 만듭니다. 이런 연결 고리는 아주 임시적입니다. 예전에 5월 22일 게시글 '<다섯 번째 계절>과 종이 위의 글자들'이 설명한 것처럼, 언어 활동에는 임시적인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와 해양 파충류 Dermochelys coriacea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는 해양 파충류 Dermochelys coriacea를 가리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해양 파충류 Dermochelys coriacea가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라고 임시적으로 연결합니다.


이게 임시적인 연결이기 때문에, 인류 문명에서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연결 고리는 끊기고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 역시 사라질 겁니다. 아무도 가죽 등껍질 해양 파충류와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를 연결하지 않을 겁니다.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을 반드시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에는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이외에 수많은 스탈린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싫어할지 모르고, 어떤 사람들은 좋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스탈린이라는 이름(단어)은 직접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 <인셉션>은 "Noooooooooooon, rien de rien."이라는 가사를 들려줍니다. 어떤 관객들은 이 가사와 마리옹 코티야르를 연결할지 모릅니다. 왜 이 가사와 마리옹 코티야르가 이어질 수 있나요? 여기에 비유, 연결 고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Non, rien de rien."이라는 문구는 노래 <Non Je ne Regrette Rien>의 가사입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노래 <Non Je ne Regrette Rien>을 불렀습니다. 영화 <라 비앙 로즈>에서 마리옹 코티야르는 에디트 피아프를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옹 코티야르는 영화 <인셉션>에 출현했습니다. 영화 <인셉션>에서 <Non Je ne Regrette Rien>는 각성 음악입니다.


<Non Je ne Regrette Rien>이 각성 음악이기 때문에,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 <인셉션>은 늘어지는 노래 가사 "Noooooooooooon, rien de rien."을 들려줬을 겁니다. 어쩌면 마리옹 코티야르가 에디트 피아프를 연기했기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은 의도적으로 각성 음악을 <Non Je ne Regrette Rien>으로 선정했을지 모릅니다. 가사 "Noooooooooooon, rien de rien."과 마리옹 코티야르 사이에는 이런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연결 고리들 때문에, 관객들이 "Noooooooooooon, rien de rien."과 마리옹 코티야르를 연결한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Noooooooooooon, rien de rien."이 반드시 마리옹 코티야르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연결 고리들을 검토하고 두 가지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는 장수 거북이라는 해양 파충류를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봄이 찾아온 듯이 꽃 피는 내 맘에 나비가 돼 날아와. 날갯짓에 난 또 설레잖아." 이 문구는 노래 <밀리언즈>의 가사입니다. <밀리언즈>는 사랑을 봄날 나비에 비유합니다. 왜 사랑이 봄날 나비인가요? 사랑과 봄날 나비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 고리들이 있나요? 사랑이 반드시 봄날 나비가 되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소설 <듄>에서 아라키스 원주민 프레멘들은 사랑과 봄날 나비를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아라키스 행성은 사막 행성이고, 사막 행성에는 봄날 나비가 없습니다. 프레멘들은 왜 <밀리언즈>가 사랑과 봄날 나비를 연결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사랑과 봄날 나비 사이에는 약한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연결 고리가 약하기 때문에, 이건 쉽게 끊어질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 덕후들은 나비를 모스라와 연결할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 덕후들이 나비들을 볼 때, 그들은 설레는 연애보다 거대 나방 괴수를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이렇게 사랑과 봄날 나비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봄날 나비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봄날 나비에 비유하지 말아야 하나요? 우리가 사랑을 언급할 때, 우리가 반드시 사랑을 직접 설명해야 하나요? 우리가 사랑을 아주 정확하게 규정해야 하나요? 아니, 이게 가능한가요? 누가 사랑을 아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나요?



우리가 사랑을 규정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언어 없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언어 없이, 아이작이 린의 젖가슴을 빨고 애무한다면, 이건 사랑 표현이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정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문제는 언어 활동이 비유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언어 활동이 비유에 가깝다면, 우리가 사랑을 아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 자체로서 언어 활동에 약한 연결 고리들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가 해양 파충류 Dermochelys coriacea를 직접 가리키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을 규정하고 싶다고 해도, 우리는 수많은 연결 고리들을 이용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우회적으로 사랑을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유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해도, 우리는 비유에서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비유는 선택보다 운명인지 모릅니다. 이건 너무 비관적인 사고 방식 같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저주해야 할지 모릅니다. 특히, 소설 작가들이 글자들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 작가들이 오직 글자들만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 작가들은 언어를 저주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언어 활동을 좋아하든 저주하든, 우리는 비유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비유에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제목처럼, 수전 팰위크가 쓴 <늑대 여자>는 여자 늑대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현실에는 늑대 인간이 없습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늑대로 변신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늑대 인간이 없음에도, 왜 단편 소설 <늑대 여자>가 여자 늑대 인간을 이야기하나요? 이 단편 소설이 현실 도피적인가요? 어떤 평론가들은 사변 소설이 현실 도피적이라고 조롱하고 비판합니다. 평론가들은 이런 것들을 평론이랍시고 열심히 떠듭니다. 수전 팰위크가 현실에 여자 늑대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수전 팰위크가 늑대 인간을 믿기 때문에, 수전 팰위크가 <늑대 여자>를 썼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흔히 우리는 늑대와 개를 대조합니다. 늑대는 자유로운 야성을 상징하고, 개는 길들여진 가축을 상징합니다. 보수 우파 정치인들은 민중들을 개돼지라고 부릅니다. 늑대와 개돼지는 다릅니다. 늑대가 부정적인 상징이 된다고 해도, 늑대는 종속과 굴복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늑대 여자>는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길들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유와 종속을 가리키기 위해 <늑대 여자>는 여자를 늑대에 비유했을 겁니다. 여자가 늑대이기 때문에,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는 훨씬 강렬합니다.



늑대 변신 없이, 소설 작가는 성 해방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여자들이 늑대들로 변신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자들은 성 해방 투쟁에 열정적으로 참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늑대라면, 자유로운 야생 늑대와 종속적인 개가 대조적이기 때문에, 여자 늑대 인간은 성 해방 투쟁을 훨씬 강렬하게 상징할 수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소설 <야생종>에서 안얀우는 여자이고 야생 동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안얀우가 가부장적인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 안얀우는 야생 동물로 변신합니다. <늑대 여자>와 <야생종>은 비슷한 소재(야성, 동물 변신, 성 해방)를 상상합니다.


SF 독자가 <늑대 여자>와 <야생종>을 비교한다면, 이런 비교는 꽤나 흥미로울 겁니다. 단편 소설 <늑대 여자>처럼, 사변 소설은 상상력을 이용해 주제를 강렬하게 강조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수많은 설정들은 비유들, 상징들, 연장선들입니다. 바다는 거대합니다. 우리는 바다가 거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쥘 베른은 거대한 바다가 거대한 야수를 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해저 2만리>는 거대 바다 괴수를 보여주지 않으나, 거대 괴수 이야기는 그럴 수 있습니다. 고지라 같은 거대 바다 괴수는 바다를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상징하고 비유합니다. 고지라는 바다를 향하는 놀라움의 연장선입니다.



[현실에 거대 바다 괴수는 존재하지 않으나, 거대 바다 괴수는 바다가 경이롭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와, 바다는 엄청나게 넓어!"라고 말하지 않고 "우와, 고지라처럼 바다는 정말 거대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유에는 멋진 가치가 있습니다. 아라키스 프레멘들이 사랑과 봄날 나비를 연결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사랑과 봄날 나비를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연결합니다. 우리는 봄, 따뜻한, 화사함, 생명체들의 약동, 파릇파릇한 새싹들, 꽃송이들, 나비들, 화려함, 설레임, 두근거림, 연애, 고백, 사랑, 생기, 젊음, 생명력 같은 수많은 요소들을 연결합니다. 연애는 섹스로 이어질 수 있고, 섹스는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건 연애가 반드시 출산으로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자유분방하게 연애와 섹스를 즐길 수 있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동성애가 가정을 무너뜨린다고 지랄지랄거리나, 가정은 무너져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를 뒷받침하는 억압적인 핵가족은 반드시 무너져야 합니다. 게다가 이웃집 영희와 아랫집 수진이 화끈하고 끈적거리는 원 나이트 스탠드를 때린다고 해도, 인류 문명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이성애 섹스를 좋아하고, 수많은 상황들에서 이성애 연애는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연애는 출산, 번성으로 이어집니다. 봄은 생명력들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봄과 생명력과 연애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연결 고리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연애와 봄날 나비를 연결할지 모릅니다. 이런 비유가 완전히 옳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이런 비유에는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섹스는 번성으로 이어집니다. 동물들이 교미하고, 출산하고, 번성하고, 진화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풍성해집니다. <어스텅>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번성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섹스와 생물 다양성과 <어스텅> 사이에는 긴밀한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생태계 게임에서 섹스 욕구를 느낄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생태계 게임에서 섹스 요구를 느낀다면, 이게 황당무계한 상황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생태계 게임에서 번성과 생명력을 유추하고 섹스 욕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생태계 게임은 훌륭한 섹스 매개체가 될지 모릅니다. 비유에는 연결 고리들이 있고, 이런 연결 고리들 속에서 사랑은 봄날 나비가 됩니다. 사막 행성의 프레멘들과 달리, 온대 기후라는 현실 속에서 위너는 <밀리언즈>를 부릅니다.


온대 기후 속에서 우리는 약동하는 봄을 인식할 수 있고, 그래서 <밀리언즈>는 사랑과 봄날 나비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밀리언즈>가 사랑과 봄날 나비를 연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혼들>(이 보여주는 나뭇잎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이 사용하는 나뭇잎 상징)을 연결할 수 있을 겁니다. <블록후드>와 달리, 사실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와 <어스텅> 역시 우리가 자연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브노티카>에서 해양 생태계가 핵심적이기 때문에, <어스텅>에서 생태계 순환이 핵심적이기 때문에, 세계 환경의 날이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서브노티카>와 <어스텅>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는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비유를 저주할지 모릅니다. 비유에 약한 연결 고리들이 있기 때문에, 연결 고리들은 쉽게 끊어지거나 다른 것들을 잇습니다. 퍼즐 게임 <영혼들> 이외에 수많은 것들은 자연과 나뭇잎을 연결합니다. 화장품 가게에서 수많은 '자연 친화적인' 화장품들은 자연 상징을 이용합니다. '자연 친화적인' 화장품들은 포장지들과 뚜껑들과 상표들과 상자들에 나뭇잎 문양들을 집어넣고 자신들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광고합니다. 이런 화장품들은 자연이 밝고 건강하고 깨끗하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 자연 친화적인 것은 고급입니다. 그래서 자연 친화적인 것은 비쌉니다.


자연 친화적인 것을 위해 우리는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자연 친화적인' 화장품들은 우리가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녹색당들은 이런 비싼 화장품들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녹색당들은 이런 소비 행위들을 규탄할 겁니다. 하지만 자연 친화적인 화장품들처럼, 녹색당들 역시 녹색 나뭇잎 문양을 좋아합니다. 녹색당들은 동물 권리를 지지하고, 핵 발전소에 반대하고, 동물 실험에 반대합니다. 녹색당들은 자신들이 자연과 생태를 주장한다고 생각하고 녹색 나뭇잎 문양을 사용합니다. 고급 화장품들과 녹색당들은 모두 나뭇잎 문양을 사용하나, 고급 화장품들과 녹색당들은 대조적입니다.



고급 화장품들을 내놓는 화장품 회사들은 동물 실험에 찬성할지 모릅니다. 화장품들을 연구하기 위해 화장품 회사들은 동물 실험에 찬성할지 모릅니다. 녹색당들은 이런 화장품 회사들을 비판할 겁니다. 화장품 회사와 녹색당이 똑같이 나뭇잎 문양을 사용한다고 해도, 화장품 회사와 녹색당은 대립합니다. 아무리 화장품 광고에서 광고 모델이 자연을 이야기하고 녹색 나뭇잎들과 예쁜 꽃송이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녹색당은 이걸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녹색당이 녹색 나뭇잎들과 예쁜 꽃송이들을 이용한다고 해도, 이런 녹색 나뭇잎들과 예쁜 꽃송이들은 화장품 회사를 비판할 겁니다. 나뭇잎 문양이 자연과 생태를 상징한다고 해도, 나뭇잎 문양과 자연 사이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화장품 회사는 나뭇잎 문양과 자연 사이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연결 고리가 약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나뭇잎 문양과 자연 사이에 끼어들 수 있습니다. 녹색당은 나뭇잎 문양과 자연 사이에 생태 마을 운동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연결 고리가 약하기 때문에, 생태 마을 운동은 나뭇잎 문양과 자연 사이에 끼어들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나뭇잎 문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나뭇잎 문양에서 자연과 생태를 유추할 때, 이 유추에는 매개체가 있습니다. 매개체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거나 생태 마을 운동이거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생태계 게임들은 환경 보호를 말하지 않으나, 생태계 게임과 환경 보호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스팀은 세계 환경의 날 행사에 <배틀 포 웨스노스>를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세계 환경의 날 행사 페이지에는 <배틀 포 웨스노스>가 없습니다. 하지만 <서브노티카>와 <어스텅>과 <블록후드>와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 연결 고리들이 있다면, <배틀 포 웨스노스>와 세계 환경의 날 사이에도 연결 고리가 있을 겁니다. <배틀 포 웨스노스>에는 저항군 세력이 있습니다. 저항군 세력에는 삼림 레인저와 나무 거인이 있습니다. 숲 지형에서 삼림 레인저는 모습을 감출 수 있고, 나무 거인은 문자 그대로 거인 같은 나무입니다. 전반적으로 저항군 세력은 자연 친화적입니다.


저항군 세력에서 드루이드는 꽃송이들과 나뭇잎들을 피웁니다. <영혼들>이 세계 환경의 날과 이어질 수 있다면, 삼림 레인저 역시 세계 환경의 날과 이어질 수 있고, <배틀 포 웨스노스>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삼림 레인저와 세계 환경의 날은 똑같이 나뭇잎 문양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뭇잎 문양이 자연과 생태를 가리킬 때, 무엇이 매개체가 되어야 하나요? 우리가 무엇이 매개체라고 간주할 수 있나요? 우리가 무엇을 나뭇잎 문양과 자연 및 생태 사이에 집어넣을 수 있나요? 화장품 회사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가 시장 경제를 나뭇잎 문양과 자연 사이에 집어넣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를 비유할 때, 우리는 현실을 이용해 비유합니다. 온대 기후 속에서 위너가 <밀리언즈>를 부르기 때문에, 사랑은 봄날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라키스 행성 프레멘들에게 온대 기후는 현실이 아니고, 프레멘들은 사랑을 봄날 나비에 비유하지 않을 겁니다. 온대 기후 속의 연애와 봄날 나비처럼, 기후 변화라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영혼들>과 세계 환경의 날을 연결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후 변화가 매개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개체는 '자본주의 비판'이 되어야 할 겁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서 가장 심각한 환경 오염은 기후 변화입니다.


심지어 유구한 인류 문명 속에서 기후 변화는 가장 심각한 재앙일지 모릅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보다 현실 사회주의가 문제라고 지껄이나, 이건 그저 웃기지 않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최악의 경우, 기후 변화는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릴지 모릅니다. 해안선들이 수몰된다면, 지리학자들은 세계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겁니다. 지구에서 이런 행성급 환경 오염보다 무엇이 훨씬 심각한 폭력이 되나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최선이라고 나불거리나,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그 어떤 변명을 동원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의 변명들은 헛소리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뭐, 한심하고 멍청하고 무능한 헛소리 이외에 보수 우파 지식인들에게 다른 재능이 있을까요?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고, 그래서 우리는 나뭇잎 문양과 자연 사이에 '자본주의 비판'을 집어넣어야 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이 <서브노티카>와 <어스텅>과 <영혼들>과 <배틀 포 웨스노스>를 플레이할 때, <서브노티카>와 <어스텅>과 <영혼들>과 <배틀 포 웨스노스>가 직접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21세기 초반 오늘날에서 가장 심각한 환경 오염이 기후 변화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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