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반다나 싱 단편 소설들과 어머니 행성 본문
[여자는 자신이 살아있는 행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행성은 자신이 어머니(여자)라고 자각합니다.]
반다나 싱이 쓴 단편 소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에서 소설 주인공 아내는 정말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이 행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행성은 '살아있는 행성'입니다. 어쩌면 소설 제목은 <자신을 '살아있는'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가 되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행성과 죽은 행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이언스 픽션에게 이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행성이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어있는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유일하게 지구가 살아있는 행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양계 안에서 살아있는 행성은 오직 지구뿐입니다.
어쩌면 화성이나 유로파 바다에는 미생물 생태계가 있을지 모르나, 아직 과학자들은 생명 현상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른 외계 행성들에 자연 생태계가 있을지 아직 과학자들은 확신하지 못합니다. 우주 생물학자들은 99.9%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추측하나, 이런 추측은 그저 100%를 향해 수렴할 뿐이고 완벽하게 100%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 과학자들이 외계 행성 생태계를 찾는다면,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화제가 될 겁니다. 비록 이 외계 행성 생태계가 그저 미생물 생태계에 불과하다고 해도, 외계 생태계가 존재한다면, 어딘가에는 외계 지적 문명이 존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류가 외계 지적 문명을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외계 행성 생태계는 감동적인 화제가 될 겁니다. 우리는 오직 지구에서만 생명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생명 현상이 지구의 고유한 특징인가요? 다른 행성들에서 생명 현상은 스스로 나타나지 못하나요? 인류 문명이 다른 행성들을 테라포밍하지 않는다면, 생명 현상이 우주로 퍼지지 못하나요? 만약 정말 생명 현상이 지구의 고유한 특징이라면, 생명 현상을 우주로 퍼뜨리기 위해 인류 문명이 다른 행성들을 반드시 테라포밍해야 하나요? 테라포밍이 인류 문명의 업적이고 의무인가요?
인류 문명에게 다른 행성들을 테라포밍하기 위한 권리가 있나요? 지구가 유일무이한 살아있는 행성이라면,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물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게 테라포밍 의무가 있고 인류 문명이 반드시 다른 행성들에 생명 현상을 퍼뜨려야 한다고 대답할 겁니다. 언젠가 태양계는 소멸할 겁니다. 태양계가 소멸한다면, 우주에서 생명 현상은 사라질 겁니다. 우주에서 생명은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생명 현상을 지키기 위해 인류 문명은 생명 현상을 퍼뜨리고 테라포밍해야 합니다. 생체 우주선과 생체 우주 거주지 역시 좋은 방법이나, 인류 문명은 살아있는 행성들을 키워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인류 문명이 지구 자연 생태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이고, 행성급 환경 오염은 엄청난 생물 다양성을 파괴할 겁니다. 인류 문명이 생물 다양성을 엄청나게 파괴한다면, 인류 문명에게 정말 테라포밍하기 위한 명분이 있을까요? 외계 행성을 집적대기 전에, 인류 문명은 생명의 요람 지구를 제대로 관리해야 할 겁니다. 인류 문명이 지구 자연 생태계를 존중할 때, 인류 문명은 외계 행성들을 테라포밍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지구 자연 생태계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테라포밍들 역시 망할 겁니다.
인류가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한다고 해도, 외계 행성 생태계는 다시 기후 변화와 온갖 환경 오염들에 시달릴 테고, 환경 오염들은 생물 다양성을 크게 파괴할 겁니다. 인류가 자연 생태계를 존중할 때, 테라포밍 역시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이걸 막습니다. 인류가 자연 생태계를 존중하기 원한다고 해도,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자연 생태계를 수탈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오직 이윤만 원합니다. 다른 것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연. 생명 현상. 존중. 웅장함. 원대함. 자본주의에게 이런 것들은 쓰레기입니다.
자연 생태계에게는 재생산을 위한 여유가 필요합니다. 작은 텃밭부터 거대한 산호초 지역까지, 자연 생태계는 여유롭게 재생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해야 하고 재생산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플랜테이션 모노 컬쳐는 이걸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상당히 많은 지역들에서 농민들은 지력 회복을 중시합니다. 지력 회복은 재생산으로 이어집니다. 지력이 살아날 때, 농사 역시 풍요로워집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해야 하고, 플랜테이션 모노 컬쳐는 지력을 고갈시킵니다. 이윤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원이 고갈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재생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윤 극대화와 재생산은 대립합니다. 자본주의가 이윤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자본주의는 쉬지 않고 상품들을 만들고 판매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상품들을 만들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그 분, 창조주가 아닙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는 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에서 자원을 얻고, 자원을 가공하고, 쓰레기를 다시 자연에 버려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면, 자연에게는 재생산하기 위한 여유가 없을 겁니다. 이런 자본주의 경제는 가부장 문화와 비슷합니다. 가부장이 무엇인가요? 가부장은 '남자 어른'입니다. 전통적으로 남자 어른은 재생산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풍경은 진부한 산업 자본주의입니다. 이 게임은 산업 자본주의가 자원을 거덜낸다고 비판합니다.]
남자 어른과 돌봄 노동 사이에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돌봄 노동이 남자 어른보다 여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 어른은 침략하고, 정복하고, 탐험해야 합니다. 남자 어른들은 대규모 산업 노동에 종사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는 이런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가부장적인 것이고, 침략이고, 정복이고, 탐험입니다. 학교 역사 교과서들은 이런 것이 인류 역사라고 가르칩니다. 학교 역사 교과서들이 돌봄 노동을 가르치나요? 아니, 역사 교과서들은 돌봄 노동이 인류 문명을 뒷받침한다고 절대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 시험 문제는 돌봄 노동보다 침략과 정복과 탐험을 묻습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돌봄 노동과 침략 전쟁 중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합니까? 전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소모적입니다. 고작 전쟁 따위가 없다고 해도, 인류 문명은 스스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 돌봄 노동이 없다면, 인류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돌봄 노동 없이, 인류 문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돌봄 노동은 재생산입니다. 사회학자들은 돌봄 노동을 사회적인 재생산이라고 부릅니다. 에코 페미니즘에게 생산이라는 단어는 다소 거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생산이라는 어감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돌봄 노동이 재생산이라고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가부장 문화는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이 인류 문명을 뒷받침함에도,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보다 침략, 정복, 탐험, 대규모 산업을 중시합니다. 사실 돌봄 노동이 노동력들을 키우고, 이런 노동력들이 대규모 산업에 종사함에도, 가부장 문화는 하늘에서 노동력들이 뚝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어디에서 노동력들이 비롯하는지 파악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아무 이유 없이 노동력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돌봄 노동은 하찮은 것이 됩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들을 놈팽이로 만들고, 온갖 놈팽이들은 "집에서 여자는 애나 봐라."라고 지껄입니다. 자본주의는 이런 가부장 문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개무시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역시 자연 재생산을 착취하고 개무시합니다. "자연에게는 재생산하기 위한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윤 추구를 버리고, 경제 발전을 늦추고, 자연에게 여유를 줘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연에게 여유가 없다면, 우리 역시 피해를 당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절대 이런 문구들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자연이 재생산하든 말든, 자본주의는 쉬지 않고 자원들을 가공하고, 상품들을 판매하고, 쓰레기들을 버려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유를 준다면, 이윤 극대화는 실패할 테고, 자본주의는 망할 겁니다.
이렇게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는 비슷합니다. 이건 그저 비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는 똑같은 원리로 작동합니다. 양쪽 모두 돌봄 노동과 재생산을 개무시합니다. 만약 사회적인 부가 돌봄 노동으로 흐른다면,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제대로 축적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회사들을 나가지 않고 돌봄 노동들에 참가한다면, 영리 기업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을 개무시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적인 부를 독차지해야 합니다. 돌봄 노동이 노동 시장에 노동력들을 공급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에게 댓가를 지불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자본가 계급은 속류 경제학을 따르고 임금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과잉 노동 시간을 없애고 임금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댓가를 지불한다면, 어떻게 자본가 계급이 이윤을 축적할 수 있겠습니까? 자본가 계급이 임금 노동자들에게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본가 계급이 돌봄 노동에 상관하겠습니까? 이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비유가 아닙니다. 이건 경제 현상입니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경제학으로 계산하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비단 사회적인 재생산만 아니라 자연 재생산을 착취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재생산과 자연 재생산은 경제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인류 사회는 사회 재생산과 자연 재생산에게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인류 사회는 돌봄 노동에게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인류 사회는 비용을 투자하고 쓰레기들과 폐기물들을 정화해야 합니다. 사회 재생산과 자연 재생산은 청구서를 요구할 수 있고, 인류 사회는 청구서를 계산해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청구서를 외면하고 사회 재생산과 자연 재생산을 착취하고 싶어합니다. 자본주의는 절대 온실 가스를 정화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정화 비용이 이윤 극대화를 막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반드시 성 차별과 계급 차별과 환경 오염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막기 원한다면, 우리가 기후 변화를 해결하고 싶다면, 우리에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부장 사회보다 여성적인 사회로 나가야 합니다. 여성적인 사회, 돌봄 노동과 재생산을 중시하는 사회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인류 사회는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은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이 서로 영향을 미칠 때, 이런 영향은 여성적인 영향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행성이 여자라면, 인류 문명 역시 여자가 될 겁니다. 이 게임이 그걸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지구 자연 생태계는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 행성이 여성이라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편 소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에서 소설 주인공 아내는 자신을 살아있는 행성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반다나 싱은 재미있고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했으나, 사실 그 차체로서 이건 독특한 상상력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지구 행성을 '어머니 지구'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어머니 지구는 유명한 개념입니다. 그림 창작 사이트에서 인터넷 유저들이 어머니 지구를 검색한다면, 인터넷 유저들은 다양한 어머니 지구 그림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구태여 우리가 어려운 생태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머니 지구라는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단편 소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 이외에 다른 단편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모음집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에서 반다나 싱은 여자, 행성, 자연, 숲, 야생 동물을 연결합니다. 단편 소설 <델리>에서 (기후 변화를 가리키는 것 같은)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소설 주인공은 시원한 숲을 찾습니다. <델리>는 시원한 숲이 '아늑한 녹색 자궁'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늑한 녹색 자궁'은 어머니 자연입니다. 독자는 녹색 자궁, 울창한 숲, 어머니 자연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갈증>은 가부장 문화를 피하기 원하는 여자와 강물, 야생 동물(뱀)을 연결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에서 가부장 식민지를 피하기 위해 여자(아내, 어머니)가 야생 동물로 변신하고 자연(바다)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갈증>은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독자가 <야생종>과 <갈증>을 비교한다면, 이건 흥미로운 비교가 될 겁니다. 소설 <야생종>처럼, 단편 소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처럼, 단편 소설 <갈증>에서 여자는 가부장 문화에서 벗어나는 아내입니다. 아내는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갈증>에서 임신, 출산, 돌봄 노동은 중요한 의미로 이어집니다.
<갈증>은 여자와 강물과 야생 동물을 이용해 재생산을 말합니다. 여자와 야생 동물은 생명 현상이고 자연에 속할 수 있습니다. 강물은 어떨까요? 여자와 강물이 이어질 수 있나요? 어떤 독자들은 강물이 가부장적인 측면에 가깝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한강의 기적, 4대강 사업, 운하 사업 같은 것들은 가부장적인 측면입니다. 하지만 대규모 사업이 사라지고 강물이 여자(어머니)와 야생 동물과 재생산과 함께 어울린다면, 강물은 여성적인 측면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범람하는 강물이 비옥한 농사로 이어지는 것처럼, 강물은 여성적인 측면, 번성, 재생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편 소설 <갈증>은 여자와 야생 동물과 재생산을 강물에 빠뜨리는지 모릅니다.
단편 소설 <아내>에서 소설 주인공 아내는 숲을 꿈꿉니다. 아내는 숲을 방황하고, 숲에서 잠들고, 숲에서 야생 동물을 만납니다. 싱그럽고 야성적인 숲 냄새는 어떤 초자연적인 야수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단편 소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 및 <델리>의 아늑한 녹색 자궁 및 <갈증>과 달리, <아내>에서 숲은 번성하는 생명력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내가 싱그러운 숲 냄새를 맡고 초자연적인 야수를 추측하기 때문에, <아내> 역시 여성적인 측면과 자연을 연결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머니 지구, 어머니 자연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모음집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에는 어머니 자연을 상징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반다나 싱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반다나 싱은 경제학으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분석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반다나 싱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반다나 싱은 예술가의 촉으로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보다 여성적인 사회가 낫다고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 후기 <사변 소설 선언문>에서 반다나 싱은 제3세계 환경 오염을 걱정하고 '백인 남자 경제를 비판'합니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는 어머니 지구와 여성적인 사회를 그리고, 여성적인 사회는 비단 환경 오염들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비롭고 웅장한 자연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에는 '아버지 대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대지라는 표현은 아버지 행성으로 이어집니다. 어머니 자연, 어머니 행성과 아버지 대지, 아버지 행성은 다른 느낌을 풍깁니다. 단편 소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에서 아내(어머니)가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할 때, 행성은 살아있는 행성입니다. 여기에는 풍성한 생명 현상이 있습니다. 어머니로서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생명 현상을 퍼뜨립니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는 아내의 벌거벗은 몸이 아주 풍만하다고 묘사합니다. 이건 육감적인 느낌보다 다소 뚱뚱한 느낌에 가깝습니다. 이건 아이를 낳은 여자의 체형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단편 소설 <델리>가 숲을 녹색 자궁이라고 표현할 때, 단편 소설 <갈증>이 여자와 야생 동물과 재생산을 연결할 때, 단편 소설 <아내>에서 아내(어머니)가 신비스러운 숲 냄새를 맡고 초자연적인 야수를 추측할 때, 여기에는 살아있고 꿈틀거리고 번성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 대지에는 이런 느낌들이 없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대지 초능력자 오로진들은 엄청난 파괴들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대지는 지진, 화산, 해일입니다. 아무리 아버지 대지가 너그럽다고 해도,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 대지는 생명 현상을 낳지 못합니다. 속편 소설들에서 아버지 대지라는 표현이 바뀐다고 해도, 적어도 <다섯 번째 계절>에서 아버지 대지는 풍요로운 번성보다 불타는 파괴에 가깝습니다.
[부드럽고 깊은 물과 거대한 동물들과 녹색 나무들. 이건 아버지 행성보다 어머니 행성입니다.]
어떤 독자는 어머니 자연과 아버지 대지가 그저 문학적인 비유에 불과하다고 말할 겁니다. 문학적인 비유 없이, 우리는 얼마든지 평등한 공유지 사회와 자연 생태계를 기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생물 다양성을 바라보기 위해 동물 변신술사를 언급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일상적으로 비유를 사용합니다. 비유, 은유, 직유는 일상적입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들만 이런 비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화 <캔디♥캔디>는 들장미 소녀가 아닙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캔디♥캔디>는 들장미 소녀가 됩니다. 활발하고 화사한 소녀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가 들장미라는 심상과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캔디♥캔디>를 비롯해 수두룩한 순정 만화들, 로맨스 만화들은 온갖 빤짝이 효과들과 뽀샤시 효과들을 연출합니다. 이런 빤짝이 효과들과 뽀샤시 효과들이 사라진다면, 만화 독자들은 재미가 없다고 느낄 겁니다. 현실에서 캔디스 같은 소녀와 테리우스 같은 미소년이 연애한다고 해도, 빤짝이 효과들과 뽀샤시 효과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현실에는 캔디스 같은 소녀와 테리우스 같은 미소년이 있을 겁니다. 이런 소녀와 미소년이 환상적인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공기는 반짝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맨스 만화들은 빤짝이 효과들과 뽀샤시 효과들을 연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학적인 비유를 원합니다.
노래 <취급 설명서>는 연애를 취급 설명서에 비유합니다. 노래 가사에서 화자(여자)는 자신(의 사랑)이 반품되지 않는다고 양해를 바랍니다. 네, 사랑은 반품 불가, 교환 불가입니다. 사랑이 반품이 된다면, 여러 측면들에서 이건 곤란할 겁니다. 노래 가사에서 화자(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제품에 비유합니다. 제품에 취급 설명서가 있는 것처럼, 사랑에도 취급 설명서가 있습니다. 연인이 취급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사랑을 함부로 취급하고 망가뜨린다면, 이건 아주 커다란 손해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 노래 가사가 사랑을 제품(물건)에 비유한다고 화를 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노래 가사는 꽤나 아기자기합니다.
화자는 자신의 사랑이 영구 보증 가능하다고 장담합니다. 영리 기업들에게 상품은 오직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반면, 노래 가사에서 화자는 사랑을 영구 보증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속의 영리 기업 상품보다 노래 가사 속의 사랑은 훨씬 고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비유가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사랑이 제품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사랑 취급 설명서가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노래 <취급 설명서>가 사랑을 직접 가리키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이 사랑 고백은 진부함을 벗어납니다. "나는 영원히 너를 사랑해."보다 "내 사랑은 영구 보증이야."라는 고백은 훨씬 독특합니다. 문학적인 비유에는 여러 가치들이 있어요.
[사랑이 영구 보증 가능하다면, 이건 상투적인 고백에서 벗어날 겁니다. (목소리는 정말 촉촉합니다.)]
동물 변신술사와 초자연적인 야수 역시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다른 것들 역시 비유인지 모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소설 <오로라>는 장거리 세대 우주선을 이야기합니다. 장거리 세대 우주선에는 자연 생태계가 있습니다. 생태학 분과 학생들은 우주선 내부 생태계가 지속 가능한지 재미있게 토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그저 생태학 모식도에 불과한가요? 독자가 우주선 내부 생태계를 바라볼 때, 독자는 얼마나 생태계 순환이 복잡한지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우주선 내부 생태계는 자연이 인류를 뛰어넘고 인류가 자연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생태학 분과 학생이 아니라고 해도, 독자는 우주선 내부 생태계를 읽고 감동을 느낄 겁니다.
(한때 스팀에 있었던) 비디오 게임 <유니버심> 데모 판본은 원시적인 행성 자연 환경을 보여줍니다. <유니버심> 데모 판본은 행성 자연이 여자라고 말합니다. 여자 해설자는 원시적인 행성 자연 환경을 향해 "이것은 어머니 행성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유니버심> 데모 판본은 공개 소프트웨어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그저 행성 자연을 감상할 뿐이고 다른 것들을 플레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데모 판본은 감동적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행성 자연을 둘러보고 감동을 느낄 때, 게임 플레이어는 웅장한 생명 현상을 느꼈을 겁니다. 여기에는 어머니 지구, 어머니 자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니버심> 예고편에서 행성은 "나는 살아있는 행성이다."라고 스스로 선언합니다. 어머니 행성은 살아있는 행성입니다. <유니버심> 데모 판본이 살아있는 행성을 어머니라고 가리키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가 자신이 느낀 감동을 함축하고 싶을 때, 어머니 자연이라는 표현은 유용합니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를 비롯해 여러 단편 소설들은 그걸 증명합니다. 특히, 소설이 글자들이기 때문에, 소설은 비유에 적합한 매체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행성은 어머니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언어로 비유합니다. 그림 역시 뭔가를 비유할 수 있으나, 비유는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연결하고 가리켜야 합니다. 그림은 그저 뭔가를 직접 보여줄 뿐이고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머니 지구를 묘사하는 아래 그림을 보세요. 그림 속에는 배가 부른 여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배가 부른 여자가 어머니라고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자는 밥을 많이 먹었고 배를 불렸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림 제목은 <Mother Earth>입니다. 하지만 그림 제목과 달리, 우리는 그림 속의 여자가 지구 행성이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실 그림 속에는 여자가 지구 행성이라고 확인하기 위한 근거가 없습니다. 여자가 드라이어드 같은 나무 요정이라고 해도, 이런 해석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 제목 때문에, 우리는 여자가 드라이어드보다 지구 행성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림 제목은 언어(글자)입니다.
[이런 그림은 아늑한 녹색 자궁, 어머니 행성,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그림과 달리, 언어는 뭔가를 직접 가리키고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추상적인 글자들을 늘어놓고, 그 덕분에 그림보다 소설은 훨씬 자세히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건 글자들이 지시 대상을 완전하게 표현하고 가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편 소설 <아내>에서 남편은 개념을 언어에 가두기 원했으나, 이건 불가능한지 모릅니다. 남편은 모든 개념을 언어에 가두기 원합니다. 하지만 언어가 추상적이라면, 언어는 모든 개념을 가두지 못할 겁니다. 언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는 빈틈이 있고, 철학자들과 비평가들은 남편이 실현 불가능한 작업에 도전한다고 비판할 겁니다.
며칠 전에 5월 22일 게시글이 이야기한 것처럼, 장수 거북이라는 대형 해양 파충류와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거무튀튀하고 가죽 등껍질이 있고 육중한 대형 해양 파충류와 단어 장수 거북을 연결합니다. 언어가 본질적으로 비유이기 때문에,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이라는 추상적인 2차원 글자들 세상)에서 외모 없이 에쑨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영롱한 구슬'이라는 단어는 영롱한 구슬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단어에 부드러운 자음들 'ㅇ', 'ㅇ', 'ㄹ', 'ㄴ', 'ㅇ', 'ㄹ'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영롱한 구슬'을 영롱하게 발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롱한 구슬'과 영롱한 구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왜 우리가 영롱한 구슬을 '이우리옹 동곤'이라고 가리키지 않고 '영롱한 구슬'이라고 가리키나요? '영롱한 구슬'처럼, '이우리옹 동곤' 역시 영롱한 발음입니다. '이우리옹 동곤' 역시 부드러운 자음들(ㅇ, ㅇ, ㄹ, ㅇ, ㅇ, ㄴ)을 연이어 늘어놓습니다. 심지어 '영롱한 구슬'보다 '이우리옹 동곤'에 받침들이 적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영롱한 구슬'보다 '이우리옹 동곤'이 영롱한 구슬에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롱한 구슬을 이우리옹 동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詩)가 춤꾼으로써 언어를 이용하기 때문에, 시는 이우리옹 동곤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청산별곡>이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라고 부드러운 자음들(ㅇ, ㄹ)을 연이어 늘어놓을 때, 이것은 특별한 내용보다 특별한 형식이 됩니다.
하지만 이건 문자 그대로 시적인 표현이고, 아무 이유 없이 형식 때문에 일상 언어와 산문은 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 언어와 지시 대상을 연결합니다. 이게 의도적이기 때문에, 언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는 빈틈이 있고, 그래서 언어는 모든 개념을 가두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뭔가를 설명하고 가리키고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를 이용합니다. 다른 것들보다 언어는 훨씬 적합한 도구입니다. 글자들에 이런 특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글자들로 우리의 심성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행성이 어머니, 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림 <Mother Earth> 출처: Kan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