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에서 내용과 형식(언어) 사이 본문
소설 <듄>에는 아라키스 행성이 있습니다. 아라키스 행성에는 사막 원주민 프레멘들이 있습니다. 프레멘들은 샤이-훌루드라는 창조자를 숭배합니다. 문제는 샤이-훌루드가 비단 신앙 대상만 아니라 거대한 모래 벌레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프레멘에게 샤이-훌루드는 신앙 대상 창조자를 가리키고 동시에 거대한 모래 벌레를 가리킵니다. 프레멘이 샤이-훌루드라고 말할 때, 이건 신앙 대상을 가리키거나 모래 벌레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프레멘이 경건하게 특정한 목소리로 샤이-훌루드라고 말한다면, 이건 모래 벌레보다 신앙 대상 창조자를 가리킬 겁니다.
샤이-훌루드라는 단어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해도, 프레멘은 경건하고 특정한 목소리로 샤이-훌루드가 창조자라고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 프레멘이 목청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샤이-훌루드는 위대하다."고 말한다면, 이건 모래 벌레라는 거대한 사막 야생 동물보다 추상적인 신앙 대상을 가리킬 겁니다. 이렇게 프레멘이 목청을 가다듬을 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보다 형식입니다. 경건한 목소리 없이, 프레멘은 신앙 대상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경건한 목소리 없이, 프레멘이 "샤이-훌루드."라고 말한다면, 청자는 프레멘이 모래 벌레를 가리킨다고 오해할 겁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아나레스 사회는 공유 사회입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은 개인적인 소유보다 공유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유격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물을 가리킬 때, 그들은 소유격을 수식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그들이 소유격을 붙인다고 해도, 그들은 "우리의"라는 소유격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소유격(내 집, 내 땅, 내 농장)을 강조한다면, 다른 아나레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지배 계급과 비슷하다고 조롱할 겁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이 계속 (개인적인) 소유격을 사용한다면, 이런 언어는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칠지 모르고, 아나레스 사람들은 개인적인 소유가 좋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이 이런 사고 방식에 물든다면, 그들은 공유 사회를 포기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나레스 사람들은 소유격을 부정합니다. 새로운 사회 구조는 새로운 언어 표현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사회 구조를 바꿀 때, 사람들은 언어 표현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들이 언어를 바꾸지 않는다고 해도, 사회 구조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언어 역시 바뀔지 모릅니다. 심지어 이런 공유 사회에서 개인적인 소유격은 욕설이 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적인 소유격은 욕설이 아니나, 공유 사회에서 상황(언어 표현)은 바뀔 겁니다.
아라키스 행성에서 프레멘이 경건하게 샤이 훌루드를 말하는 것처럼, 아나레스 사회에서 공유 사회가 개인적인 소유격을 없애는 것처럼, 언어에는 형식과 내용이 있습니다. 창조자라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프레멘은 경건한 목소리라는 형식을 이용합니다. 공유 사상이라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아나레스 사람들은 개인적인 소유격을 없애는 형식을 이용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형식을 이용해 내용을 전달합니다. 내용에게 형식은 아주 중요합니다. 심지어 형식 때문에 내용은 모호해질지 모릅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가 싸운 이후, 영희는 철수에게 사과 열매를 건넵니다. "자, 받아. 이건 내 사과야."
이 문장에서 '사과'라는 단어가 열매를 가리키나요, 화해를 가리키나요? 왜 영희가 철수에게 사과 열매를 건네나요? 영희는 철수가 열매를 먹기 원하나요? 아니면 영희는 철수와 화해하기 원하나요? 한국어 사과에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영희는 특별한 형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영희가 철수에게 사과 열매를 건넬 때, 영희가 "나는 너와 화해하고 싶어. 앞으로 우리 싸우지 말자. 이 사과 열매는 화해의 표시야. 어때, 맛있지?"라고 말한다면, 철수는 영희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 받아. 이건 내 사과야."라는 문장(형식)은 너무 모호합니다.
이렇게 형식이 중요함에도, 종종 사람들은 형식보다 내용에 주목합니다. 형식 없이, 사람들은 말하지 못합니다. 단편 소설 <말과 소리>에서 옥타비아 버틀러가 언어 소멸 아포칼립스를 묘사한 것처럼, 만약 한국어가 당장 소멸한다면, 수많은 남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겁니다. 남한 사람들은 쉽게 소통하지 못할 겁니다. 한국어라는 형식이 있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내용들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언니, 저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저는 언니의 연인이 되고 싶어요." 이것들은 꽤나 간단한 문장들입니다. 이것들을 말하기 위해 남한 사람들은 특별히 어려운 문법을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문장들은 한국어입니다.
한국어가 소멸한다면, 이 문장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주 짧고 쉬운 문장 구조를 말한다고 해도, 언어라는 형식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짧고 쉬운 문장 구조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형식)를 사용합니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내용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속담처럼, 형식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내용을 전달하기 원합니다. 영리 기업이 오직 성과로만 노동자들을 평가하고 인사 고과에 반영하는 것처럼, 우리는 과정과 방법보다 결과에 치중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결과에 치중하기 때문에, 종종 소통은 불화로 이어집니다.
이웃집 영희가 모호하게 사과하기 때문에, 철수는 제대로 영희와 화해하지 못할 겁니다. 형식과 내용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형식이 중요하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시(詩)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일상 언어와 달리, 시는 언어를 가볍게 도구화하지 않습니다. 종종 시는 내용보다 형식에 훨씬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너무 너저분한 넝마 같아." 만약 문학 강의 시간에 학생이 이런 시를 창작했다면, 학생은 형식을 강조하기 원했을 겁니다. 이 문구에서 '너', '너'무, '너'저분한, '넝'마에는 운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구는 과잉입니다. 짧은 문장에서 똑같은 음절 '너'들이 연이어 튀어나오기 때문에, 이 시구는 운율을 너무 들이댑니다. 문학 강사는 이 시구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어설픈 시구는 얼마나 많이 시(詩)가 형식을 중시하는지 보여줍니다. 전문적인 시인들은 훨씬 좋은 사례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박두진이 쓴 <청산도>에서 '철철철'은 '짙푸른 산'을 수식하고 강조합니다. 그 자체로서 '철철철'에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건 순수하게 형식입니다. 우리(한국어 사용자)가 '철'이라는 음절을 연이어 발음할 때, 우리는 이런 발음이 생생한 생명력을 떠받든다고 느낍니다.
만약 우리가 이걸 발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입 안에서 음절들을 씹고 굴리고 맛보고 즐기고 음미하지 않는다면, '철철철'은 명분을 잃을 겁니다. 다른 언어들, 가령, 파푸아 뉴기니 언어는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라고 읊조리지 못합니다. 한국어와 파푸아 뉴기니 언어가 다른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가 형식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시구에 '철철철' 같은 (씹고 맛보고 즐기기 위한) 형식이 없다면, 사람들은 시가 이상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시들은 꽤나 삭막합니다. 언어가 춤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알란 브라운존(Alan Brownjohn)이 쓴 시 <상식 Common Sense>은 별로 시 같지 않을 겁니다.
아래에 인쇄된 목록에
영국 빈민들 숫자와
빈민 지원금 총액이 있다.
인구 만 명당 빈민들의
평균 숫자를 구하라.
. . . The table printed below gives the number
Of pauper in the United Kingdom, and
The total cost of poor relief.
Find the average number
Of paupers per ten thousand people.
이건 별로 시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건 사회 복지사 기출 문제와 비슷합니다. "The total cost of poor relief. 빈민 지원금 총액이 있다."는 시구는 "너는 너무 너저분한 넝마 같아." 및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와 다릅니다. "너는 너무 너저분한 넝마 같아."가 아주 조잡한 시구라고 해도, 언어가 춤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식>보다 "너는 너무 너저분한 넝마 같아."를 훨씬 좋아할지 모릅니다.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은 시에서 내용보다 형식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독자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형식입니다.
파푸아 뉴기니 독자가 "너는 너무 너저분한 넝마 같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파푸아 뉴기니 독자가 '너'라는 연이은 음절들을 느낄 수 있다면,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은 이게 충분하다고 주장할 겁니다. 시는 언어에 형식이 있다고 강조할 수 있고, 그래서 시는 중요합니다. 산문은 형식보다 내용에 치중하고, 그래서 산문은 형식을 강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일반적인 산문과 다를지 모릅니다. 소설 <듄>이 샤이 훌루드와 멜란지 스파이스라는 비일상적인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소설 <빼앗긴 자들>이 개인 소유격을 부정하는 것처럼, SF 소설은 일상에 비일상적인 단어들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SF 독자는 형식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조던 피터슨은 정말 좆 같아." 이렇게 열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철수가 보수 우파 지식인을 경멸할 때, 철수는 '좆'이라는 욕설을 사용합니다. 좆은 남자 성기입니다. 하지만 앤 레키가 쓴 소설 <사소한 정의>에서 은하 제국 사람들은 "조던 피터슨은 정말 젖탱이 같아."라고 욕할 겁니다. 은하 제국 사람들은 3인칭 대명사를 '그녀'라고 사용하고, 욕설 역시 여자 성별을 따릅니다. 남자에게는 젖가슴이 없습니다. 오직 여자에게만 젖가슴이 있습니다. 게다가 좆과 달리, 젖탱이는 생식 기관보다 수유 기관입니다. 젖가슴은 특별하고, 여자는 특별합니다. 그래서 은하 제국 사람들은 젖탱이라고 욕하나, 이런 욕설은 젖가슴을 탓하지 않습니다. 소설 <사소한 정의>가 욕설로써 젖가슴을 사용하기 때문에, 여자 독자들이 앤 레키를 비판해야 하나요?
어쩌면 어떤 여자 독자들은 <사소한 정의>가 불쾌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소한 정의>는 수유 기관을 욕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조던 피터슨은 정말 좆 같아."와 "조던 피터슨은 정말 젖탱이 같아."에서 좆과 젖탱이는 그저 형식에 불과합니다. 이 욕설은 여자와 여자의 신체를 비하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좆과 젖탱이는 내용보다 형식입니다. 이것들이 내용보다 형식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고요 대륙 사람들은 "씨발, 대지불이여, 조던 피터슨은 삭아뒈질 거야."라고 욕할 수 있습니다. '대지불'과 '삭아뒈지다'는 '좆'과 '젖탱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고요 대륙에서 지각 변동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고요 대륙 사람들은 새로운 언어를 표현합니다.
시(詩)가 단어의 내용보다 단어의 형식에 치중하는 것처럼, SF 소설은 새로운 언어를 만듭니다. 그래서 SF 소설 역시 형식을 강조할 수 있을 겁니다. SF 소설 이외에 SF 만화, SF 영화, SF 게임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압도적으로 언어(글자들)를 동원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은 글자들입니다. 만화와 영화와 게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불렛 타임으로 멋지게 총알들을 피한다고 해도, 이건 언어가 아닙니다. 이건 영상입니다. 이 유명한 장면에서 "트리니티! 도와줘!"라는 언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대사(언어)보다 불렛 타임 시각 효과(영상)입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 예고편에서 <달빛>과 함께 모스라가 두 거대한 날개를 우아하게 펼친다고 해도, 이건 언어보다 음악과 영상입니다. 아이맥스 카운트다운에서 고지라가 포효한다고 해도, 이건 언어보다 효과음입니다. 우리는 고지라가 "Skreeeeeeeeeonk~!!!!"라고 포효한다고 적을 수 있으나, "Skreeonk"는 고지라 포효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고지라 포효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고, 사회적인 기호 알파벳 "Skreeonk"는 고유한 특징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글자, 그림, 음악, 영상은 다릅니다. SF 소설은 가장 많이 글자들을 동원하고, 그래서 SF 소설은 언어의 형식을 강조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