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태학 SF 그림의 장점과 단점 본문
※ <hw> 이미지 출처: polosatkin, https://www.deviantart.com/polosatkin/art/hw-637223009
위 그림은 미래 도시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특징들 중에서 하나는 흰색과 녹색의 조화일 겁니다. 전반적으로 인공적인 구조물들은 흰색입니다. 반면, 자연적인 요소들은 녹색 식물들입니다. 흰색과 녹색의 조화는 화사하고 깔끔한 미래 측면을 강조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이 녹색이라고 말합니다. 나뭇잎(속의 광합성 요소들)이 영양분을 생산하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 속에서 식물(속의 광합성 요소들)이 생산자이기 때문에, 녹색 식물들이 자연 생태계를 먹여 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이 녹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자연, 생태, 환경을 표현하기 원할 때, 사람들은 다른 색깔들보다 녹색을 선택할 겁니다.
녹색은 싱그럽고 풍요로운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흰색은 순수하고 담백합니다. 도화지는 흰색입니다. 화가가 하얀 도화지에 색칠하는 순간,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얀 도화지는 아무것도 담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흰색은 아무것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흰색은 순수합니다. 순수한 것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풍요로운 자연에게는 다른 색깔들보다 티없는 흰색이 어울릴 겁니다. 순수하고 긍정적인 흰색과 싱그럽고 풍요로운 녹색이 만날 때, 흰색과 녹색의 조합은 찬란한 미래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 그림은 흰색과 녹색을 조합했을 겁니다.
종종 긍정적인 미래 도시를 강조하기 위해 SF 그림들은 흰색과 녹색을 조합합니다. 비단 위 그림만 아니라 다른 그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그림(링크)이나 이런 그림(링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SF 팬들이 솔라펑크 도시(solarpunk city) 그림들을 검색한다면, SF 팬들은 다양한 흰색과 녹색 조합 도시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미래 도시가 정말 흰색과 녹색 조합이 될까요?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미래 도시가 친환경적이라고 해도, 위 그림은 그저 상상도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태 유토피아 도시 그림들에게 흰색과 녹색 조합은 암묵적인 공식 같습니다.
만약 어떤 화가가 생태 유토피아 도시를 그린다면, 전반적인 색감은 흰색과 녹색으로 흐를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하얗고 기하학적인 건물들과 도심 속의 녹색 식물들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이 그림이 긍정적인 미래 도시를 나타난다고 간주할 겁니다. 물론 수경 재배 실험실 역시 흰색과 녹색을 조합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림(링크)은 전형적인 수경 재배 구역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서 흰색은 순수하고 담백한 느낌보다 무균성 느낌에 가깝습니다. 불결한 세균들과 바이러스들과 해충들은 수경 재배 구역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 그림 속에서 흰색은 다소 획일적입니다. 여기에는 담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SF 그림들이 흰색 구조물과 녹색 식물을 조합한다고 해도, SF 그림들은 다른 분위기들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솔라펑크 도시는 흰색과 녹색의 조합을 긍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 수경 재배 구역은 순수하고 담백한 아름다움보다 획일적이고 균이 없는 깔끔함을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색감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나, 내용이 바뀔 때, 내용은 색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형식은 내용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수술실에서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녹색 가운을 입고 흰색 수술 기계를 운용한다고 해도, 이건 순수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여러 그림들이 똑같이 녹색과 흰색을 이용한다고 해도, 그림 내용과 색감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수술실과 달리, 본문 위의 그림은 훨씬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오직 흰색 인공 구조물들과 녹색 식물들만 있지 않습니다. 이 그림에는 파란 물이 있습니다. 저 물이 바다인지 호수인지 강물인지 그건 확실하지 않으나, 그림 속에는 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흰색 건물들 및 녹색 식물들과 달리, 파란 물은 주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림 속에서 파란 물은 상대적으로 많은 면적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인공 구조물들과 녹색 산맥은 파란 물을 둘러쌌습니다.
저 물이 바다라고 해도, 그림 속에서 물은 다른 것들을 둘러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은 다른 것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그래서 하얀 인공 구조물들 및 녹색 식물들과 달리, 파란 물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파란 하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물 위의 보트들 역시 흰색과 녹색 돛을 펼칩니다. 그림 속에서 파란색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파란색이 있기 때문에, 흰색과 녹색의 조합은 질리지 않을 겁니다. 만약 흰색과 녹색의 조합이 그림을 가득 채운다면, 이건 너무 질릴지 모릅니다. 그림 속에 오직 흰색과 녹색만이 있다면, 이건 너무 단조로울지 모릅니다.
파란 물과 하늘은 단조로움을 밀어냅니다. 파란 물과 하늘은 흰색과 녹색 조합을 해치지 않으나, 안전한 범위 안에서 파란 물과 하늘은 단조로움을 막습니다. 비단 호수(?)와 하늘만 아니라 건물 창문들 역시 파란 빛을 반사합니다. 그림 속에서 유리들은 전반적으로 파란 빛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건물이 모두 흰색이라고 해도, 흰색은 질리지 않습니다. 파란색은 단조로움을 막고 획일적인 흰색 느낌을 몰아냅니다. 비단 그림만 아니라 소설, 만화, 연극, 게임 같은 다른 창작물들에서도 이런 방법은 중요할 겁니다. 어떤 느낌이나 감성이 주도적이라고 해도, 오직 한 가지 감성만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그게 질린다고 느낄 겁니다.
본문 위의 그림은 디스토피아보다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SF 팬들은 위 그림이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에는 긍정적인 흰색과 풍요로운 녹색이 없습니다. 사이버펑크 건물들은 우아한 곡선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이버펑크 건물들에게는 우아한 곡선들보다 딱딱하고 날카로운 직선들이 어울립니다. 직선 고층 건물은 수직적입니다. 자본가 지배 계급이 무산자 민중 계급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직선 고층 건물은 밑바닥 인생들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위 그림 속의 건물들은 전반적으로 우아하고 낮습니다.
억압적이고 수직적인 계급 구조와 우아하고 낮은 건물들은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비디오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을 보세요. 이런 게임은 절대 우아한 흰색 건물과 싱그러운 녹색 식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본문 위의 그림과 <새틀라이트 레인>의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는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본문 위의 그림은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도시보다 생태 유토피아 도시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본문 위의 그림은 전형적인 솔라펑크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라펑크 도시는 생태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정말 본문 위의 그림이 생태 유토피아를 나타내나요?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소설보다 그림은 훨씬 인상적입니다. 본문 위의 그림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시각적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소설책을 펼치는 순간, 사람들은 글자들을 봐야 합니다. 글자들은 기호입니다. 글자들은 내용을 시각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글자들을 읽고 상상해야 합니다. 이건 번거롭습니다. 글자들이 비일상적인 내용을 묘사한다면, 독자는 쉽게 상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SF 소설을 읽기는 까다롭습니다. 독자가 화를 내고 하드 SF 소설을 멀리 던진다고 해도, 이건 당연한 현상인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보다 그림은 훨씬 인상적입니다.
문제는 그림이 추상적인 측면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위의 그림 속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뭐라고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나요? 하얗고 우아한 건물은 친환경적인 것 같으나, 사람들 역시 친환경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나요? 사람들이 무슨 사상을 추구하나요? 사람들이 동성애 합법 결혼과 임신 중절 권리에 찬성하나요? 사람들이 미성년자가 섹스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나이가 찬 여자가 반드시 (이성애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강대국의 대규모 학살에 관대하고 제3세계의 작은 범죄에 게거품을 물고 분개하지 않나요? 본문 위의 그림은 이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림은 오직 표면적인 것들만 보여줄 뿐입니다.
어제 게시글에서 저는 <지상의 여자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과 생태적인 상상력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나요? 만약 생태학 SF 그림이 태양열 전지판들과 우아한 흰색 건물들과 풍력 발전소들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이런 것이 생태적인 상상력이고 환경 보호라고 여길 겁니다. 반면, <지상의 여자들>에는 이런 것들이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지상의 여자들>과 생태적인 상상력 및 환경 보호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이 태양열 전지판들과 풍력 발전소들과 전기 자동차들을 늘어놓고 장땡을 친다고 해도, 이게 반드시 환경 보호를 가리킬 수 있나요?
환경 보호는 그저 첨단 기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평등한 사회 없이 환경 보호는 없습니다. 그리고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솔라펑크 도시 그림보다 <지상의 여자들>은 생태적인 상상력 및 환경 보호에 훨씬 밀접한지 모릅니다. 어제 게시글에서 제가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숱한 솔라펑크 도시 그림들보다 평등한 사랑과 저항을 논의하는 어제 게시글은 생태적인 상상력과 환경 보호에 훨씬 가까울지 모릅니다. 솔라펑크 도시 그림이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이건 얄팍한 생태적인 상상력과 환경 보호가 될 겁니다.
본문 위의 그림이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하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소설과 SF 그림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SF 그림은 시각적이나, 추상적인 사고 방식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SF 소설은 시각적이지 않으나, 사고 방식, 철학, 사상, 감정을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본문 위의 그림은 <Hybrid Wars - Machines Engage>라는 비디오 게임을 위한 컨셉 아트입니다. 그리고 <Hybrid Wars - Machines Engage>는 생태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이건 슈팅 액션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병사를 조종하고 적들을 쏴죽여야 합니다. 이건 생태 유토피아보다 밀리터리 SF입니다. 아무리 본문 위의 그림이 컨셉 아트라고 해도, 밀리터리 SF와 본문 위의 그림은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오직 본문 위의 그림만 감상한다면, 사람들은 이 그림이 미래 전쟁 게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