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지상의 여자들>, 관성과 사랑 그리고 저항 본문
"난 남자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하게 된 것을 사랑할 뿐이야."
"그건 사랑이 아니라 관성이지."
소설책 뒷표지에서 박문영이 쓴 <지상의 여자들>은 위와 같은 대화를 보여줍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남자들은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남자에게 기반하는 가부장 문화 역시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자신이 잘났다고 사방을 향해 꽥꽥 소리지르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집에서 여자들이 살림을 맡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군대에서 자신들이 고생한다고 나불거리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여자들을 추행하거나 폭행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약한 사람들을 헐뜯고 낄낄거리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아무것이나 건드리고 수습을 뒷전으로 미루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없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가 약해지기 때문에, 여자들은 목소리들을 높이고 새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가부장적이지 않은 사회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더 이상 여자들을 억압하지 않기 때문에, 가정부터 섹스까지, 여자들은 수많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여자들은 일탈을 꿈꾼 적이 없습니다. 여자들은 가부장 문화를 떠받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자들은 해방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여자들은 근본적인 것들을 묻기 시작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여자가 관용, 조화, 자애로움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여자가 그런가요? 여자가 본질적으로 관용, 조화, 자애로움을 좋아하나요? 어쩌면 이건 현모양처를 강조하기 위한 억압과 편견인지 모릅니다. 메갈리아 사태처럼, 여자들이 극단적으로 저항할 때, 흔히 사람들은 여자들이 폭력적이라고 헐뜯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가 훨씬 커다란 폭력을 훨씬 먼저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훨씬 커다란 폭력을 저질렀음에도,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보다 극단적인 여자들을 탓합니다.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가부장 문화는 옳은 것입니다. 이런 고정 관념 때문에 사람들은 극단적인 여자들이 가부장 문화에서 파생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남자가 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강인함은 누군가를 짓밟고, 죽이고, 때리고, 부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드러움, 보살핌, 포옹은 남성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부드러움, 보살핌, 포옹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고, 약한 것이고, 나쁜 것입니다. 남자는 누군가를 보살피고 안아줘서는 안 됩니다. 남자는 누군가를 때리고, 부수고, 죽여야 합니다. 남자는 자신이 강하다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누군가를 때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남성적인 측면입니다. 하지만 남자와 남성적인 측면 사이에는 필수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가부장적인 지배 계급은 그저 남자와 남성적인 측면을 연결했을 뿐입니다. 지배 계급이 남성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지배 계급은 계속 민중들을 통치하고, 명분을 내세우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이 지배 계급에게 저항할 때, 민중들은 여성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공유지, 돌봄 노동 사회화, 자급 경제를 중시합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이런 것들이 여성적인 측면이라고 주장합니다. 왜 공유지가 여성적인 측면이 되나요? 공유지와 여자라는 성별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가 있나요? 생물적으로 여자가 공유지로 이어지나요?
여자에게 두 젖가슴과 자궁이 있기 때문에, 여자가 공유지가 되나요? 글쎄요, 어머니 자연이라는 상징으로서 여자는 공유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문학적인 비유에 불과합니다. 문학적인 비유는 사회 구조를 직접 가리키지 못해요. 중요한 것은 문학적인 비유보다 사회 구조적인 측면입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여자와 공유지는 비슷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양쪽을 똑같이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에는 노동력들이 필요합니다. 돌봄 노동은 노동력들을 생산합니다. 돌봄 노동들이 아이들을 낳고 보살피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되고 노동력들을 판매할 수 있습니다. 돌봄 노동들이 노동력들을 생산함에도, 자본주의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사실 돌봄 노동들이 인류 문명을 떠받침에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돌봄 노동을 무시하고 보조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싶어합니다.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에 댓가들을 지불하는 순간, 자본가 계급은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에게 유일무이한 동기는 이윤 축적입니다. 그 무엇도 이윤 축적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고 해도, 이윤 축적은 신성하고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을 무시하고 댓가들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맡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여자들과 돌봄 노동들처럼, 공유지 역시 착취를 당합니다.
사실 자본주의가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지 않았다면, 이른바 인클로저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나타나지 못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공유지를 착취하고 사적 소유 토지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공유지는 생산 수단의 사회적인 소유입니다. 자본주의는 생산 수단의 개인적인 소유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공유지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는 충돌합니다. 자본주의는 공유지를 파괴하고 착취하기 원합니다. 이렇게 자본주의 경제에서 여자와 공유지는 똑같이 착취를 당합니다. 여자와 공유지는 비슷한 위상입니다. 그래서 에코 페미니즘은 공유지가 여성적인 측면이라고 말해요.
따라서 여성적인 사회는 공유지를 설정해야 할 겁니다. 여성적인 사회는 공유지를 설정하고, 돌봄 노동들을 사회화하고, 영리 기업 시장 경제에 반대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는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가부장 문화를 크게 비판하기 시작하나, 이런 비판은 근본적인 대안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우왕좌왕합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자들이 멍청하고 못나기 때문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너무 오랜 동안, 너무 폭력적으로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억눌렀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평소에 여자들이 에코 페미니즘 사상을 준비했다면, 새로운 기회가 나타날 때, 여자들은 에코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을 억압했고, 여자들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에게는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새로운 기회가 나타났음에도, 여자들은 우왕좌왕합니다. 이것 때문에 좌파 정당들은 중요한 역할이 될지 모릅니다. 좌파 정당들이 권력을 잡지 못한다고 해도, 좌파 정당들이 국회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도, 좌파 정당들은 실력과 사상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언젠가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면, 좌파 정당들은 민중들에게 다가가고 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쪽에서 민중들이 고민하고, 다른 한쪽에서 좌파 정당들이 대안을 제시할 때, 이건 변증법적으로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여성적인 것들이 우세해진다면, 사람들이 공유지를 설정하고, 돌봄 노동을 사회화하고, 영리 기업들에 반대한다면, 지배 계급은 무너질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무너질 겁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아직 이런 모습들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너무 오랜 동안 여자들이 억눌렸기 때문에, 여자들은 삐뚤어진 분노를 쏟아내느라 바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욕하고, 몰아붙이고, 헐뜯습니다. 아직 남자가 모두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들은 남자들을 욕하고 헐뜯고 몰아붙일 수 있어요.
소설 주인공 성연은 이런 상황이 껄끄럽다고 느낍니다. 성연은 가부장 문화를 좋아하지 않으나, 한편으로 성연은 여자들이 반드시 남자들을 물어뜯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연은 여전히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여자들은 이런 생각을 비웃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친구 희수조차 왜 성연이 남자들을 감싸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연에게 중요한 것은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적인 측면입니다. 하지만 희수는 여성적인 측면보다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을 강조합니다. 희수는 여성적인 남자, 남성적인 여자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희수는 왜 성연이 남자를 사랑하는지 따집니다.
성연은 대답합니다. 자신이 그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뿐이라고. 희수는 그게 사랑보다 관성에 가깝다고 쏘아붙입니다. 희수는 인간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게 가능한가요? 인간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나요? 흔한 농담처럼, 사랑은 콩깍지입니다. 인간이 사랑에 빠질 때, 인간은 연인의 수많은 단점들보다 몇몇 장점을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와 사랑에 빠진다면, 철수에게 수많은 단점들이 있다고 해도, 영희는 철수의 몇몇 장점을 열정적으로 사랑할 겁니다. 이건 선택이 아닙니다. 이건 콩깍지입니다.
인간이 뭔가를 '선택'하고 사랑한다면, 이게 정말 사랑이 될 수 있나요? 이건 우리가 맹목적으로 뭔가를 동경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동경한다면, 우리는 지배적인 관념을 동경할 테고 지배적인 것이 보편적이라고 오해할 겁니다. 지배적인 편견과 세뇌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경계하고 구별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사랑이 선택이 될 수 있나요? 음, 이건 꽤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간단히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을 간단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선택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은 어떤 실마리가 될지 모릅니다.
소설 <야생종>에서 소설 주인공은 안얀우라는 여자 초인입니다. 안얀우는 동물 변신술사이고 치유사입니다. 어느 날 도로라는 남자 초인은 안얀우를 찾아옵니다. 도로는 굉장히 막강합니다. 도로는 안얀우를 사로잡고 식민지 마을에 집어넣습니다. 식민지 마을에서 안얀우는 가축이 되어야 합니다. 안얀우는 암소입니다. 안얀우는 또 다른 초인들을 낳고 초인들을 번식시킵니다. 당연히 안얀우는 도로를 미워합니다. 동시에 안얀우는 도로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낍니다. 안얀우는 여러 아이들을 낳습니다. 안얀우는 아이들을 낳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얀우는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안얀우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젖을 먹입니다.
도로가 안얀우의 젖을 먹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안얀우는 도로에게 젖꼭지를 물립니다. 만약 사랑이 선택이라면, 안얀우는 이런 감정들을 버릴 수 있었을 겁니다. 사랑이 선택인 것처럼, 안얀우는 증오를 선택하고 아이들과 도로를 증오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안얀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비단 소설 <야생종>만 아니라 <블러드 차일드>를 비롯해 여러 소설들에서 옥타비아 버틀러는 사랑이 꽤나 복잡한 감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블러드 차일드>에서 사랑과 다른 감정들이 명확하게 나뉘나요? 그건 그렇지 않아요. 심지어 사랑은 증오와 얽히고 쉽게 떨어지지 못합니다. 희수는 안얀우가 바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희수는 바보처럼 안얀우가 관성을 추구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희수는 성연에게 '관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관성은 맹목적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뭔가를 제어하지 못할 때, 이건 관성이 됩니다. 인간이 습관을 그저 되풀이할 뿐이라면, 이건 관성이 될 겁니다. 성연이 감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습관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성연이 사랑하기 때문에, 희수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 관성이라고 말했습니다. 희수는 인간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관성과 선택은 대조적입니다. 인간이 뭔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은 관성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관성은 일방통행입니다. 관성에는 샛길이나 갈래길이 없습니다.
만약 샛길이나 갈래길이 나타난다면, 인간은 선택할 수 있고, 인간은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관성은 계속 앞으로 나갑니다. 이제까지 관성이 계속 걸어온 것처럼, 관성은 계속 앞으로 나갑니다. 관성이 멈추거나 다른 길로 빠진다면, 관성이 목적지를 고민한다면, 이건 관성보다 계산이 될 겁니다. 관성과 계산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관성은 맹목적으로 계속 나가야 합니다. 샛길과 갈래길이 나타난다고 해도, 관성은 계속 나가야 합니다. 계산은 다릅니다. 갈래길이 나타날 때, 계산은 목적지를 고민합니다. 계산은 자신이 무슨 길을 선택할 수 있는지 고민합니다. 선택 및 계산은 관성과 대조적입니다.
희수는 사랑이 관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희수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희수는 계산하고 선택할 겁니다. 적어도 희수가 "그건 사랑이 아니라 관성이지."라고 말했을 때, 희수는 인간이 사랑을 계산하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가요? 사랑이 계산이 되고 선택이 될 수 있나요? 인간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나요? 인간이 손익을 계산하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나요? 엄마가 아이를 사랑할 때, 엄마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그저 아기를 사랑할 뿐입니다. 자신이 낳았기 때문에. 엄마가 아기에게 젖꼭지를 물릴 때, 엄마는 선택하거나 계산하지 않을 겁니다.
아기를 위해 엄마는 그저 아기에게 젖꼭지를 물릴 뿐입니다. 물론 희수는 엄마가 선택했고 계산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자가 임신하기로 결정할 때, 여자는 엄마가 됩니다. 하지만 여자가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면, 엄마로서 여자는 아기를 사랑할지 모릅니다. 이건 선택과 계산이 아닙니다. 여자가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만약 여자가 아기를 낳고 아기를 사랑한다면, 이게 관성이 되나요? (만약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지 못한다면, 사랑이 식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걸 되돌리지 못할 겁니다.) 희수는 이게 관성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엄마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그저 상황에 적응했을 뿐이기 때문에, 희수는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사랑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통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걸 사랑하지 않습니다. 뭔가가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우리에게 의지하지 않을 때, 그것은 타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타인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못할 겁니다. 어떤 결혼식 주례사에서 박노해 시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타인을 인식할 때,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할 수 있습니다. 노래 <레인보우>에서 "(내가) 안 보이는 뭔가로 너에게 연결이 된다"는 가사처럼, "너와 나의 마음이 숨을 쉬는 것처럼 하나가 된다"는 가사처럼, 이런 가사가 너무 진부하다고 해도, 사랑에서 하나는 둘을 전제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둘이 노력할 때, 이런 노력은 사랑이 될 겁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원한다고 해도,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아와 인간의 육체는 똑같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아에게 인간의 육체는 타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소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몸은 내 것이야. 내 육체는 내 소유야." 하지만 정말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소유할 수 있나요? 만약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소유할 수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는 그런 개념입니다. 인간이 사과를 소유할 때, 인간은 사과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과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의 육체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아니, 이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다른 사람에게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인간(아기)이 태어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버리지 못합니다. 어쩌면 유전 공학 기술은 이런 개념을 바꿀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전 공학 기술 없이,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를 버리지 못합니다. 이건 소유가 아닙니다. 인간이 "내 몸은 내 것이야."라고 말할 때, 이건 소유보다 운명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들과 운명적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연인이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연인은 타인입니다. 연인은 이걸 인정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숱한 시간 여행 이야기들은 두 연인을 갈라놓는지 모릅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가 시공간을 이용해 두 연인을 갈라놓을 때, 두 연인은 상대가 타인이라고 아주 확실하게 인식합니다. 아득한 시공간 때문에, 두 연인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두 연인은 상대가 타인이라고 절실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타인처럼, 우리는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통제가 아닙니다. 사랑에는 통제가 없습니다.
사랑에 통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선택하거나 계산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사랑에 통제가 있다면, 우리는 통제력을 발휘하고 선택하고 계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통제가 없고, 그래서 우리는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계산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통제와 계산이 아니에요. 선택과 계산은 손익을 따집니다. 계산이라는 관념에는 손익이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뭔가를 선택했을 때, 이득보다 손실이 크다면, 인간은 그걸 다시 버릴 겁니다. 이건 계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계산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계산이 될 수 있나요?
셸 실버스테인이 그리고 쓴 <아낌 없이 주는 나무>는 거기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림책 <아낌 없이 주는 나무>에서 사과 나무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과 나무는 줍니다. 사과 나무는 나뭇잎들을 주고, 그늘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사과들을 주고, 나뭇가지들을 주고, 줄기를 줍니다. 마지막까지 사과 나무는 그루터기를 줍니다. 그래서 사과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사과 나무가 소년에게 수많은 것들을 주었기 때문에,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사과 나무는 손실과 이득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멀리 떠났을 때, 사과 나무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과 나무는 소년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합니다.
사과 나무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과 나무가 소년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과 나무가 소년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과 나무는 손실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소년이 아주 멀리 떠난다고 해도, 사과 나무는 소년에게 뭔가를 주기 바랐습니다. 사랑에는 손익 계산이 없습니다.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콩깍지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장님입니다. 희수는 여기에 반박하고 사랑이 선택과 계산이라고 계속 주장할지 모릅니다. 희수는 성연이 관성적이라고 계속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사랑할 때, 이게 관성인가요?
두 연인이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질 때, 이게 관성인가요? 이건 문자 그대로 '운명'입니다. 여기에는 통제가 없습니다. 여기에 통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에 빠져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육체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사랑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이건 인간이 반드시 맹목적으로 사랑을 추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뭔가를 사랑할 때, 인간은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저 두 연인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사랑을 말할 때, 사람들은 오직 두 연인만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건 커다란 오해입니다. 이건 너무 커다란 오해입니다.
어떤 초역사적이고 초월적이고 초문명적인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초역사적이고 초월적이고 초문명적인 시공간을 쉽게 떠듭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시공간 속에서 인간이 뭔가를 한다고 말합니다. 이건 착각이고 오해이고 거짓말입니다. 초역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뭔가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 활동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무슨 조건들 속에서 인간이 활동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사랑할 때, 초역사적이고 초월적이고 초문명적인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절대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노래 <레인보우>가 들려주는 가사처럼, 인간이 사랑에 빠질 때, 오직 사랑하는 연인만을 비추는 시간과 다정한 공간이 나타난다고 해도, 결국 이런 찬란하고 다정한 시간과 공간은 다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속해야 합니다.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사랑합니다. 다른 수많은 인간 활동들처럼,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현상은 이런 특정한 시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천 년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문구는 이런 현상에 저항하는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해도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현상에는 비단 사랑하는 대상만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은 사랑에 영향을 미치고 사랑을 바꾸거나 억압하거나 자극합니다. 숱한 결혼 정보 업체들을 보세요. 결혼 정보 업체들은 사랑하기 위해 인간이 조건들(특히 재산)을 따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사랑입니까? 연인을 고르기 위해 인간이 스펙을 따지고 학벌을 따지고 연봉을 따지고 직장을 따진다면, 이게 사랑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걸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물론 사랑에는 수많은 종류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사랑이 오직 하나뿐이라고 단정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팀펑크 판타지에서 인간과 벌레 종족이 연애한다고 해도, 이것 역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과 벌레 종족이 연인이 될 수 있다면, 인간이 스펙과 학벌과 연봉과 직장을 따진다고 해도, 이건 사랑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현상에 사랑을 둘러싼 조건들이 있다면, 우리는 비단 연인만이 아니라 연인을 둘러싼 요소들을 함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인간 남자 아이작은 벌레 종족 케프리 여자 린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군사 정부는 인간 이외에 다른 종족들을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그래서 인간과 케프리 연인은 공공연하게 연애하지 못합니다. 아이작이 연인을 떠나야 하나요? 린이 아이작을 외면해야 하나요? 상황이 너무 가혹하고 억압적이기 때문에, 린과 아이작이 사랑을 버려야 하나요?
희수는 린과 아이작이 헤어져야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상황이 너무 가혹함에도, 린과 아이작이 서로 연애한다면, 희수는 이게 관성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게 정말 관성인가요? 하지만 아이작은 군사 정부가 사라지기 바랍니다. 군사 정부가 사라진다면, 도시가 평등한 사회가 된다면, 종족 차별은 사라질 겁니다. 케프리 여자와 인간 남자는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상황이 불리하다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상황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억압적인 상황보다 자유분방한 상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랑할 때, 인간이 정말 '선택'해야 한다면,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보다 '사랑을 둘러싼 조건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왜 오직 사랑하는 대상을 바꾸는 행위만 선택이 됩니까? 사랑을 둘러싼 조건들을 바꾸는 행위 역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사랑을 버려야 합니까? 억압적인 상황이 사랑을 짓밟는다면,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억압적인 상황을 바꾸고 자유분방한 상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스펙을 강요한다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뒤집고 평등한 사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선택입니다. 어쩌면 이건 훨씬 중요한 선택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희수는 '이런 선택'을 말하지 않아요. 희수는 오직 사랑하는 대상을 바꾸는 행위만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넷에는 수많은 웹툰들이 있습니다. 웹툰들 중에는 많은 연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런 연애 이야기들에서 빈부 격차는 굉장히 중요한 소재입니다. 만화 <징크스의 연인>이 대기업과 서민을 대조하는 것처럼, 연애 이야기들에서 빈부 격차는 사랑을 갈라놓고 공격하고 방해하고 짓밟습니다. 유명한 로맨스 웹툰들 중에서 빈부 격차가 없는 만화들은 상대적으로 드물 겁니다. 하지만 왜 빈부 격차가 존재합니까? 왜 대기업과 서민이 존재합니까? 왜 가난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나요? 빈부 격차가 당연한가요? 대기업과 서민이 당연한가요? 아니, 이것들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우리는 이것들과 싸워야 할 겁니다. 아이작이 군사 정부를 뒤집기 원하는 것처럼, 우리는 빈부 격차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이것처럼, 억압적인 상황이 사랑을 가로막을 때, 연인을 위해 우리는 상황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위해 우리는 평등한 사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희수는 성연이 관성적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성연은 저항하는 중이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다른 여자들이 신나게 남자들을 욕할 때, 성연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고 사랑을 지키기 원했습니다. 이건 관성이 아니라 저항인지 모릅니다.
성연과 안얀우와 사과 나무와 아이작과 린이 관성을 따르는지, 희수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 사랑이 선택인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아주 중요하고 복잡하고 거대한 개념이기 때문에, 이 게시글은 정답을 내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합니다. 여자들이 목소리들을 높이기 시작했다고 해도,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나요? 희수는 가부장 문화가 성별 문제라고 진단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건 그릇된 진단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성별 문제보다 계급 문제입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가 엄청난 편견들을 퍼뜨리기 때문에, 희수는 그런 편견에 물들었습니다. 성연은 희수와 다릅니다.
누가 훨씬 관성적인가요? 지배적인 관념을 떨치지 못하는 사고 방식이 훨씬 관성적이지 않나요? 희수가 지배적인 관념에 물들었기 때문에, 정말 관성적인 쪽은 성연보다 희수인지 모릅니다. 성연은 남자라는 성별보다 남성적인 측면이라는 계급에 주목합니다. 에코 페미니즘 역시 성별보다 계급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에코 페미니즘은 공유지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주장하고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합니다. 우리가 여성적인 사회를 만든다면, 우리가 여성적인 사회를 '선택'한다면, 여성적인 사회 속에서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성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적인 여자가 여성적인 남자를 사랑한다면, 이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위해 우리가 뭔가를 선택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보다 사랑을 둘러싼 요소들을 선택해야 할 겁니다. 이런 사랑은 맹목적인 관성보다 저항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