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다섯 번째 계절>, 행성의 정수를 말하는 사이언스 판타지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다섯 번째 계절>, 행성의 정수를 말하는 사이언스 판타지

OneTiger 2019. 4. 26. 20:00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은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초인들을 내세우는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소설 속에는 오로진이라는 초능력자들이 있습니다. 오로진들에게는 태생적으로 조산술 능력이 있습니다. 조산술 능력은 문자 그대로 산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조산술은 비단 산만 아니라 운동 에너지와 열 에너지를 이용해 땅을 가르고, 화산을 터뜨리고, 마그마를 유도하고, 지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오로진 아기들조차 본능적으로 대지를 뒤흔들거나, 열점을 찾거나, 바위를 집어던집니다. 조산술은 어마어마한 능력입니다.


오로진들은 정말 강산을 바꿀 수 있어요. 문제는 특별한 훈련 없이 오로진이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갑자기 오로진이 흥분하거나 놀라거나 두려워한다면? 만약 오로진이 술에 취한다면? 만약 오로진에게 배탈이 난다면? 술에 취한 오로진은 저도 모르게 마을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갑자기 오로진이 놀란다면, 오로진은 지진을 일으키고 도시를 땅속으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오로진이 고통스러워하고 바닥을 뒹굴 때, 지각판은 함께 뒹굴지 모릅니다. 심지어 막강한 오로진은 제국 수도를 땅 속에 묻을 수 있습니다. 오로진은 걸어다니는 지진입니다.



'일반인들'은 오로진을 두려워합니다. 일반인들은 오로진을 보자마자 오로진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오로진은 살아있는 재앙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반인들에게 오로진은 아주 소중합니다. 소설 배경 무대가 고요 대륙이기 때문입니다. 이름과 달리, 가상의 장소 고요 대륙은 별로 고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몇 천 년이나 몇 백 년마다 고요 대륙은 엄청난 지진을 맞이합니다. 대규모 지진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심지어 지진 앞에서 막강한 제국조차 안전하지 못합니다. 대규모 지진은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류 문명을 갈아엎을 수 있습니다. 고요 대륙에는 비정기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있습니다.


고요 대륙 사람들은 이것을 '계절'이라고 부릅니다. 대규모 지진이 고요 대륙을 흔들고, 인류 문명이 멸망에 도달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도래할 때, 고요 대륙 사람들은 '계절'이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계절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고요 대륙은 별로 고요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작은 지진들은 온갖 장소들을 뒤흔듭니다. 고요 대륙에서 지진들은 일상입니다. 하지만 오로진들은 이걸 막을 수 있습니다. 오로진들은 일상적인 작은 지진들을 멈출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로진들은 '계절'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오로진은 제국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진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엇갈립니다. 오로진은 도시 하나를 땅 속에 묻을 수 있습니다. 오로진은 대규모 참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과 달리, 오로진은 지각 변동을 '보닐' 수 있습니다. 언제나 오로진은 지각 변동을 '보닙'니다. 오로진에게는 특별한 보님 기관이 있고 암석 구조를 살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막강한 오로진들은 거의 대지와 혼연일체가 됩니다. 막강한 오로진들은 거의 바위 정령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종 그들은 인간보다 대지에 속합니다. 일반인들은 지층을 '보니'지 못합니다. 지각 변동들이 일어남에도, 일반인들은 둔감하게 그걸 느끼지 못해요.


이것 때문에 오로진들은 일반인들을 둔치라고 부릅니다. 오로진 없이, 둔치들은 지각 변동을 막지 못합니다. 이건 아주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오로진은 걸어다니는 지진이나, 그것 때문에 오로진은 대규모 화산 폭발을 막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나요? 사람들이 오로진들을 미워해야 하나요, 아니면 존중해야 하나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오로진을 미워하고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오로진이 악마라고 여기고 오로진을 해치기 원합니다. 하지만 대규모 참사가 도시들과 마을들을 뒤흔들 때, 사람들은 오로진을 찾고 오로진은 구원자가 됩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계절>은 숱한 초인 이야기들과 비슷합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만화 <엑스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초인들이 있습니다. 초인들은 재난을 일으킬 수 있고 재난을 막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초인들을 두려워하나, 한편으로 사람들은 초인들을 경외합니다. 초인 이야기에는 공식들이 있고, <다섯 번째 계절>은 공식들을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하지만 수많은 초인 이야기들과 달리, <다섯 번째 계절>에는 스팀펑크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시대적인 격차들을 뒤섞습니다. 고요 대륙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범선을 탑니다.


동시에 고요 대륙에는 전깃불이 있고, 기계 설비들이 있고, 전신기가 있습니다. 고요 대륙 범선들은 대포를 쏘지 않습니다. 대포는 최신 발명품입니다. 고요 대륙 기술자들은 기계 설비들로 생명 유지 장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시대적인 격차들은 뒤죽박죽입니다. 소설 속에서 인류 문명은 대포를 쏘지 못하나 전깃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대규모 지질 현상 때문에 대학 과학자들은 열심히 지질학을 공부하는 것 같으나, 다른 학문 분야들은 크게 발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실 속에서 19세기 유럽이 전깃불을 밝혔을 때, 유럽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것을 까먹으나, 19세기 근대적인 진보는 전깃불을 밝혔고 붉은 깃발을 휘둘렀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을 쓴 것처럼, 공산주의 안에는 성 해방 운동이 있었습니다.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에는 여러 문제점들과 한계들이 있으나, 21세기 오늘날에도 성 해방 운동에게 이 책은 좋은 참고서가 됩니다. 오늘날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엥겔스를 비판하고 동시에 혁명 정신을 이어나갑니다. 근대적인 진보는 오직 거대 산업 공장만 짓지 않았습니다. 거대 산업 공장은 산업 노동자들을 배출했고, 그들은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혁명 주체가 될 수 있었어요. 근대적인 진보와 자연 과학과 혁명 운동은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계절>에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이 있나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히 고요 대륙에는 여러 노동 조합들이 있으나, 거대 산업 공장들은 보이지 않고, 좌파 운동권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근대적인 진보는 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여자들은 자본주의가 가정 주부화를 강요한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신들이 피지배 계급이라고 깨닫고 혁명 주체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다섯 번째 계절>에서 여자들은 가정 주부화를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이 소설에는 자본가 계급과 임금 노동자 계급이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 기계 설비는 근대적인 진보에서 비롯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는 기계 설비가 있으나, 근대적인 진보가 없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기계 설비들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고 대충 넘어갑니다. 시대적인 격차들은 혼란스럽습니다. 이 소설은 시대적인 격차들을 뒤섞습니다. 근대적인 진보는 더 이상 근대적인 진보가 아니에요. 그래서 독자가 <다섯 번째 계절>을 읽는 동안, 독자는 근대적인 진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일상이 일상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왜 일상이 존재하는지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상이 어긋나는 순간, 일상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이제까지 일상이 존재했다고 새롭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익숙한 것을 쉽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낯선 것들 속에 익숙함이 있을 때, 우리는 익숙함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빨간 방울 토마토들 속에 빨간 딸기가 있다면, 우리는 다들 빨갛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청포도들 사이에 빨간 딸기가 있다면, 빨간 딸기는 두드러질 겁니다. 우리는 쉽게 빨간 딸기를 알아볼 수 있을 거에요. 방울 토마토들과 청포도들 속에서 빨간 딸기는 그저 빨간 딸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방울 토마토들 사이에서 빨간 딸기는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청포도들 사이에서 빨간 딸기는 두드러집니다. 우리가 익숙한 것을 낯선 것들 속에 집어넣는다면, 우리는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팀펑크는 재미있습니다. 스팀펑크는 첨단 미래 기술을 19세기 문명에 집어넣습니다. 미래 시대와 첨단 기술은 잘 어울리나, 19세기 문명과 첨단 기술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스팀펑크 작가가 첨단 기술을 중세 문명에 집어넣는다면, 이건 훨씬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중세 문명 속에서 증기 기관 열차는 훨씬 두드러질 겁니다. 19세기 유럽 도시에서 보행 로봇은 훨씬 두드러질 겁니다.


스팀펑크는 근대적인 진보를 새롭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실 근대적인 진보는 19세기 유럽에서 비롯했습니다. 만약 스팀펑크가 근대적인 진보를 새롭게 보여준다면, SF 독자는 어디에서 근대적인 진보가 시작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수많은 것들에는 기원이 있습니다. 근대적인 진보에도 기원이 있습니다. 오늘날 근대적인 진보가 일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원을 쉽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스팀펑크는 그걸 알려줄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가 미래 기술을 과거에 투영하고 근대적인 진보가 시작한 19세기 유럽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19세기 유럽에서 지질학자들은 대륙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이런 사고 방식은 대륙 이동설이 됩니다. 소설 <다섯 번째 대륙>에서 지하학자들이 대륙 이동설을 고려하나요? 어떻게 지하학자들이 지질 구조를 조사하나요? 그들이 무슨 장비들을 이용하나요? 오로진이 지하학자들과 함께 조사하고 연구하나요? 오로진이 지질 구조를 '보닐' 수 있기 때문에, 지하학자들이 특수 장비들을 사용하지 않나요? 아니면 오로진들이 특수 장비들을 사용한다면, 오로진들이 지질 구조를 훨씬 자세히 '보닐' 수 있을까요? 소설 <다섯 번째 대륙>은 이런 내용들을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마법과 상상 과학 기술, 시대적인 격차들을 뒤섞습니다. 독자는 얼마든지 저런 내용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소설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여러 설정들과 암시들을 던집니다. 소설 시점이 어떤 장소나 어떤 내력이나 어떤 연대기를 묘사할 때, 등장인물들이 뭔가를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대화할 때, 작가 노라 제미신은 설정들과 암시들을 슬쩍 끼워넣습니다. 무엇보다 훌륭한 사이언스 판타지로서 <다섯 번째 계절> 뒷부분에는 용어 사전이 있습니다.



여러 SF 소설들이 용어 사전을 포함하는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에서 독자는 용어 사전을 읽고 배경 설정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용어 사전을 이용해 낯선 고요 대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어 사전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전은 사전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SF 설정 사전과 SF 소설이 똑같다고 간주합니다. SF 작가 지망생들은 열심히 설정 사전을 만듭니다. 그들은 좋은 설정 사전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세한 설정 사전은 든든한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전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야기에는 등장인물, 시점, 사회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독자가 이야기를 읽을 때, 독자는 특정한 시점을 이용해 등장인물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초인 소설로서 <다섯 번째 계절>은 오로진들을 보여줍니다. 소설 주연들은 세 오로진들입니다. 그들은 소녀, 처녀, 엄마 오로진입니다. 세 오로진들은 각자 다른 길들을 걷습니다. 소녀 오로진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녀 오로진은 오로진 훈련 학원에 들어가고 여러 기술들을 배웁니다. 독자는 소녀 오로진 다마야와 가장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아직 세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다마야와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어떻게 오로진들이 성장하는지 지켜볼 수 있어요.



소녀 오로진 다마야와 달리, 이미 처녀 오로진 시에나이트는 훈련을 끝냈습니다. 시에나이트는 일종의 국가 공무원 같습니다. 시에나이트는 제국 오로진입니다. 마을 지도자들과 도시 지도자들은 제국 오로진들에게 민원들을 요청합니다. 지진이 마을을 덮치거나 도시에 위험한 지각 현상이 있을 때, 제국 오로진들은 거기로 달려가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시에나이트는 제국 오로진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다마야와 달리, 시에나이트는 노련하고 냉철합니다. 다마야가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마야는 세상이 두렵다고 느끼고 겁을 먹으나, 시에나이트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에나이트는 분노를 느끼고 권태를 느낍니다. 사람들이 계속 오로진을 두려워하고 핍박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시에나이트가 제국 오로진이라고 해도, 시에나이트가 지진을 막아준다고 해도, 사람들은 의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언젠가 시에나이트가 흥분하고 화산을 터뜨릴지 모른다고 여깁니다. 의심, 핍박, 증오 속에서 시에나이트는 살아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에나이트가 해맑게 웃는다면, 오히려 그건 이상할 겁니다. 시에나이트는 깐깐하고 까칠합니다. 의심, 핍박, 증오는 시에나이트를 깐깐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몰아붙였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성, 인간성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정말 천사야. 이웃집 영희의 인성은 지랄 같아." 이렇게 사람들은 인간성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인간성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인간성이 나타납니까? 하늘에서 인간성이 뚝 떨어지나요? 아니면 인간이 태생적인 인간성과 함께 태어나나요? 시에나이트가 태생적으로 깐깐하고 까칠하고 냉소적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니코마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이 사회 구조(정치 경제)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 제도를 지지했고 여자 권리를 개무시했으나, <니코마스 윤리학>은 중요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사회 구조는 도덕을 만듭니다. 사회 분위기는 까칠한 시에나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사회 구조가 계속 시에나이트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시에나이트는 까칠해져야 했습니다.


인간성은 태생적이지 않습니다. 사회 분위기는 인간성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사회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로서 영희가 깐깐하고 까칠하고 냉소적이라고 해도, 이건 사회주의자의 태생적인 인간성이 아닐 겁니다. 자본주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자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냉소적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자본주의 권력자들이 온갖 거짓말들로 사회주의자를 괴롭힌다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해맑게 웃을 수 있을까요? 공산주의 국가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원래 공산주의 국가는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공산주의 국가를 계속 괴롭히고, 압박하고, 침략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는 극단적으로 저항해야 했어요.



따라서 진짜 문제는 인간성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폭력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사회 구조입니다. 자본주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자를 괴롭히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까칠해집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공산주의 국가를 압박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는 극단적으로 저항합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이 여자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메갈리아 같은 현상은 나타납니다. 사회 분위기가 오로진들을 증오하기 때문에, 시에나이트는 해맑게 웃지 못합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읽는 동안 독자는 다마야와 함께 차별과 증오 속으로 들어갑니다. 독자는 시에나이트와 함께 차별과 증오를 통과합니다.


독자가 차별과 증오를 빠져나온다면, 그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나요? 독자는 에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에쑨은 아이 엄마입니다. 다마야는 제국 질서에 들어가고, 제국 질서 속에서 시에나이트는 살아갑니다. 반면, 이미 에쑨은 그런 과정과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독자는 에쑨과 함께 훨씬 자유롭게 고요 대륙을 떠돌 수 있습니다. 다마야와 시에나이트가 제국 질서에 속했기 때문에, 에쑨은 다소 동떨어집니다. 하지만 제국 질서 밖에서 에쑨이 살아가기 때문에, 독자는 일반인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마야와 시에나이트는 별로 일반인들을 많이 만나지 않아요.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다마야, 시에나이트, 에쑨을 이용해 어떻게 차별과 핍박과 증오가 얼룩지는지 보여줍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수많은 초인 이야기들은 이런 공식들을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알프레드 반 보그트가 쓴 소설 <슬랜>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까지, 이런 이야기들은 많은 인기들을 끕니다.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강력한 초능력자입니다. 엘사는 오로진과 비슷합니다. 오로진이 지진을 일으키는 것처럼, 엘사는 엄동설한을 몰고 옵니다. 오로진이 조산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엘사는 얼음 마법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오로진이 멸시를 받는 것처럼, 엘사는 왕국을 떠나고 혼자 살고 싶어합니다. 이건 꽤나 고전적인 이야기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고전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마야, 시에나이트, 에쑨을 이용해 기묘한 연결 고리를 만듭니다. 독자는 다마야와 함께 첫걸음을 딛고, 시에나이트와 함께 사회 분위기를 겪고, 에쑨과 함께 일상을 돌아다닙니다. 기묘한 삼각 관계(?) 덕분에 독자는 오로진을 훨씬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요 대륙과 제국 분위기와 오로진들을 소개하기 위해 노라 제미신은 세 등장인물들을 선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오로진들을 핍박한다고 해도, 분명히 오로진들은 초인입니다. 일반인보다 오로진은 우월합니다. 적어도 일반인들과 달리, 오로진은 지각 현상을 '보닐' 수 있고 지진을 막거나 화산을 터뜨릴 수 있습니다. 막강한 오로진은 자연 현상을 새롭게 쓸 수 있습니다. 막강한 오로진은 신화 속의 영웅과 비슷합니다. 오세아니아 신화를 차용한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마우이가 섬을 끌어올리고, 코코넛 나무들을 심고, 바다 괴수들을 처치하고, 자연 환경을 뒤집는 것처럼, 막강한 오로진들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오로진은 지진을 일으키고 군대를 땅 속에 묻을 수 있습니다. 오로진은 해일을 일으키고 함선을 침몰시킬 수 있습니다.


제국 수도에서 오로진은 열점이나 균열을 찾고, 대지와 접촉하고, 황제의 머리 위에 마그마를 흘릴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보다 오로진은 우월합니다. 독자는 세 오로진들(다마야, 시에나이트, 에쑨)과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합니다. 독자는 전지적 시점을 이용해 그들의 내면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독자는 우월한 초인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읽는 동안, 독자는 우월한 초인이 되고 우쭐거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초인 이야기에는 이런 우월한 감성, 자부심, 우쭐거리는 기분이 있습니다. "나는 굉장하고 우월해." 초인 이야기에는 이런 정서가 있습니다.



물론 고요 대륙 제국은 바보가 아닙니다. 오로진이 제국 수도를 땅 속에 묻을 수 있다면, 제국 황제는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겁니다. 대비책은 오로진들을 억제할 수 있고, 그래서 오로진들은 함부로 우쭐거리지 못합니다. 사실 오로진들은 우월한 노예들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초인은 초인입니다. 오로진이 지각 현상을 보니고, 얼음 고리를 형성하고, 지진을 일으킬 때, 여기에는 우쭐거리는 기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운 시선이나 놀라는 시선으로 오로진을 바라봅니다. 소설 <슬랜>과 만화 <엑스맨>과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에는 이런 정서가 있습니다. 만화 <엑스맨>이 소수자를 상징하나요? <겨울 왕국>이 억압을 말하나요?


하지만 엘사는 우월합니다. 거대한 눈사태가 몰아친다고 해도, 엘사는 두려워하지 않고, 얼음성을 세우고, 눈덩이 거인을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초인 이야기가 핍박과 억압과 차별과 증오를 말한다고 해도, 초인 이야기에는 우쭐거리는 기분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 소녀 다마야조차 지각 변동을 보니고 바위를 집어던질 수 있습니다. 초인은 우월합니다. 아무리 작가가 증오를 떠든다고 해도, 초인은 우월합니다. 일반인은 초인에게 범접하지 못합니다. 초인이 우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초인을 증오합니다. 독자는 일반인보다 초인에게 감정을 이입합니다. 독자는 우월해집니다. "우와, 다른 사람들보다 나는 훨씬 굉장해." 초인 이야기에 이런 정서가 없다면, 초인 이야기는 많은 인기들을 끌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초인들이 우월하기 때문에, 고요 대륙이 천재지변들을 겪기 때문에, 언어 역시 바뀝니다. 고요 대륙 제국은 현실 속의 인류 문명이 아닙니다. 제국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노라 제미신은 21세기 미국 영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아무리 고요 대륙 제국이 가상의 사회라고 해도, 노라 제미신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동원하지 못합니다. 노라 제미신이 새로운 언어를 동원한다면, 독자들은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읽지 못할 거에요. 하지만 잠시 동안 노라 제미신은 언어의 물질성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요 대륙이 절대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 지각 변동들이 고요 대륙을 뒤흔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각 현상을 이용해 감탄하거나 욕합니다.


"아, 씨발, 대지불이여, 이게 무슨 삭아뒈질 난리법석이지?" 이렇게 제국 사람들은 욕합니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지진을 이용해 욕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이라는 제목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규모 지진을 '계절'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렇게 SF 소설은 언어의 물질성에서 살짝 벗어나고 낡은 구닥다리 언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SF 소설은 언어를 환기시킬 수 있습니다. SF 만화나 SF 영화나 SF 게임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이 가장 많이 언어를 이용하기 때문에, 만화와 영화와 게임보다 소설에서 언어의 물질성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언어의 물질성은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고요 대륙에서 사람들이 대규모 지각 참사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언어의 물질성에는 대규모 지각 참사가 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대지불이여." 이렇게 사람들이 외칠 때, 이 문구는 고요 대륙의 물질성을 담습니다. 그리고 초인 오로진들은 정말 대지와 혼연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그저 대지불을 외칠 뿐이나, 오로진들은 대지를 움직이고, 들어올리고, 깨뜨릴 수 있습니다. 가끔 오로진은 인간보다 바위 정령에 가깝습니다. 오로진은 인간보다 대지에 속합니다. 오로진은 인간보다 행성이 됩니다.


그래서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꾸준히 행성과 아버지 대지를 언급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행성이 인격체라고 말합니다. 이건 그저 비유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아니면 행성은 정말 인격체인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알파 센타우리>를 보세요.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은 행성이 인격체라고 말합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읽는 동안, 독자는 오로진이 되고 행성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정말 웅장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웅장한 규모처럼,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웅장한 감동을 남깁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