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표면 장력>, 두근거리는 비경 탐험과 생체 잠수정 본문
제임스 블리시가 쓴 단편 소설 <표면 장력>은 팬트로피를 이야기합니다. SF 세상에서 팬트로피는 테라포밍과 대조적인 개념입니다. 테라포밍은 인간이 환경을 바꾼다고 말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자연 환경을 바꿀 때, 그건 테라포밍이 됩니다. 보드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문자 그대로 개척 기업들이 화성 자연 환경을 조성하는 이야기입니다. 화성에서 개척 기업들은 온도를 올리고, 산소를 늘리고, 수분을 뿌립니다. 그들은 울창한 숲을 조성하고 심지어 최고 포식동물들을 풀어놓습니다.
자연 생태계가 건강하고 생물 다양성이 활기찰 때, 아무르 호랑이처럼 최고 포식동물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아무르 호랑이들이 번식한다면, 그건 화성 자연 생태계가 생생하게 잘 돌아간다는 뜻이겠죠. 이런 테라포밍과 달리, 팬트로피는 (환경이 아니라) 생명체를 바꿉니다. 물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인간에게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생긴다면, 그건 팬트로피에 해당할 겁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명체가 바뀌기 때문에 팬트로피는 자연 선택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연 선택은 문자 그대로 자연적이고, 팬트로피는 인위적입니다.
<표면 장력>은 우주 항해 시대를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태양계를 벗어나고 수많은 별들을 거칩니다. 여러 외계 행성들에서 그들은 '새로운 인간들'을 뿌립니다. 외계 행성에는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고, 인류는 다양한 인간들을 만듭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똑같이 인류에 속합니다. 미생물 같은 수중 인간과 호모 사피엔스는 똑같이 인류에 속하겠죠. 물론 그렇게 수많은 인간들이 정말 똑같이 인류가 될 수 있을지 그건 미지수입니다. 미생물 같은 수중 인간과 호모 사피엔스가 똑같이 인류애를 발휘한다면, 그건 꽤나 감동적인 장면이겠죠.
하지만 우주 곳곳에 서로 다른 인간들이 퍼진다면, 누군가는 누군가를 차별할지 모릅니다. 첨단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외딴 삼림 행성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차별할지 모릅니다. 여러 SF 소설들은 우주 항해 시대가 열렸을 때 새로운 식민지가 나타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주 곳곳에서 새로운 인간들이 나타난다면, 진보된 인류 문명은 낙후된 인류 문명을 침략할지 모릅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서 인간들은 인간들을 침략합니다. 하나는 지구인이고, 지구는 진보한 인류 문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애스시인이고, 지구 권력자들은 애스시가 낙후된 인류 문명이라고 간주하죠. 지구인은 애스시 행성을 침략하고 목재 자원을 수탈합니다.
단편 소설 <표면 장력>에서 인류가 이런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이런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여러 외계 행성들에서 그들이 새로운 인간들을 뿌릴 수 있을까요? 소설 속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솔직히 지구인들은 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이 소설에서 주된 등장인물들은 외계 행성에 적응한 새로운 인간들이죠. 그들은 미생물과 비슷한 수중 인간들입니다. 우주를 항해하는 동안 몇몇 지구인은 외계 행성에 추락합니다. 거기는 바다 행성이었습니다. 불시착한 지구인들은 자신들이 다시 우주로 날아가지 못하고 외계 행성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그들이 불시착한 바다 행성은 그들의 무덤이 되겠죠.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지구인들은 새로운 인간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미 외계 바다 행성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 경쟁한다는 사실입니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생존 압력이 거세기 때문에, 지구인들이 새로운 인간들을 만든다고 해도, 그들은 다른 생명체들에게 밀릴 겁니다. 지구인들은 그들을 직접 이끌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구인들은 최대한 안전한 웅덩이를 찾고 거기에 새로운 인간들을 풀어놓기로 결정합니다.
새로운 인간들(미생물 같은 수중 인간들)이 나타난 이후, 소설은 본격적인 이야기에 진입합니다. 지구인들 이야기는 도입부에 가깝죠. 그들은 배경 설명입니다. 주류 문학에서 인간은 주된 등장인물입니다. 하지만 SF 소설에서 인간은 배경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미생물 같은 수중 인간들 역시 인류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배경 설명이 된다고 해도, <표면 장력>에서 주된 등장인물들은 인간들입니다. 21세기 문명화된 지구인에게 미생물 같은 수중 인간들은 인류가 아닐지 모르나, 분명히 그들 역시 인류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실천하는 인류애는 비단 호모 사피엔스만 아니라 이런 인간들에게 뻗쳐야 할 겁니다.
지구인들은 새로운 인간들이 번성할 수 있을지 걱정했으나, 다행히 안락한 웅덩이에서 새로운 인간들은 적들을 물리치고 웅덩이 생태계에 적응하고 번성합니다. 한때 징그럽고 위험한 포식동물들은 인간들을 공격했으나, 인간들은 지혜를 발휘했고 함께 뭉쳤고 사악한 포식동물들을 몰아냈습니다. 안락하고 작은 웅덩이 안에서 그들은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새로운 웅덩이 문명이 무슨 문명인지 소설은 자세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게 중세 봉건 문명과 비슷할까요? 아니면 고대 원시 공산주의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그리스 민주주의? 20세기 자유 민주주의? 아니면 거대한 부족 사회?
<표면 장력>은 새로운 인간들이 나타났다고 설정했습니다. 새로운 인간들은 새로운 문명을 꾸립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회 구조가 있을 겁니다. <표면 장력>은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SF 소설을 쓸 때, SF 작가는 사회 구조를 고민해야 할 겁니다. 새로운 인간들이 나타난다면, 그들은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걸을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는 20세기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가 유일무이하게 올바른 사회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코뮌 정부나 거대한 부족 사회나 현실 사회주의나 생태 마을이 낡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호의를 보인다고 해도, 그건 호기심을 넘어가지 못하죠.
하지만 지구에는 다양한 인류 사회들이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유일무이하게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가 다른 인류 사회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가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부족 사회들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못했다면, 남한 사람들은 자유 민주주의가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죠.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가 옳다는 생각은 인종 차별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자유 민주주의가 좋다면, 자유 민주주의는 식민지 수탈을 사과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식민지 수탈에 제대로 사과하나요? 오히려 자유와 인권을 위해 미군은 양민들을 학살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의심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류 문명이 나타날 때, SF 작가는 사회 구조를 고찰할 수 있습니다. <표면 장력>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표면 장력>은 단편 소설이고, 우주 식민지나 새로운 사회 구조를 살필 여유는 별로 없습니다. <표면 장력>에서 중요한 것은 미지를 향한 동경입니다. 새로운 인류 문명은 웅덩이 생태계에 적응했고 순탄한 삶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계속 웅덩이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웅덩이가 세상의 전부라면, 그들은 웅덩이를 떠나지 않을 테고, 오직 웅덩이 안에서만 그들은 변화를 추구하겠죠.
하지만 누군가는 훨씬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인들이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추락한 지구인들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새로운 인간들은 그걸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주선이나 우주 항해나 외계 행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수중 인간들은 웅덩이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웅덩이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태양이나 밤하늘의 별들을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우주 항해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 역시 인간입니다. 어떤 수중 인간은 우주를 동경합니다. 이 세상에는 더 넓은 무대가 있고, 수중 인간은 더 넓은 무대를 동경합니다. 인간은 우주로 나가야 합니다. 우주로!
이런 감성은 수많은 SF 소설들을 관통합니다. 수많은 비경 탐험 소설들과 우주 탐사 소설들은 우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넓고, 아직 인류는 넓은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비록 웅덩이 속의 수중 인간들은 아직 첨단 과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첨단 과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탐험을 향한 동경이 사라져야 할까요? 소설 <2001 우주 대장정>과 달리, 수중 인간들은 첨단 우주선을 타고 찬란한 별들을 향해 폼나게 날아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작 뗏목을 탄다고 해도, 더 넓은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면, 언제나 비경 탐험은 웅장하지 않겠습니까.
조잡한 뗏목이 되든, 첨단 우주선이 되든, 미지를 향하는 호기심은 두근거리고 설렙니다. 탐험은 새로운 세상을 안내할 테고, 새로운 세상을 만날 때, 인간의 의식은 넓어질 겁니다. 어쩌면 인간의 의식은 바뀌고 아예 180도 뒤집어질지 모르죠. 하지만 인간이 열린 마음으로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아찔한 즐거움이 되겠죠. 비경 탐험 소설은 이런 과정을 보여주고 아찔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탐험가들을 따라가고, 탐험가들과 함께 더 넓은 세상을 둘러보는 동안, 독자 역시 아찔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죠. <표면 장력>이 선사하는 가장 커다란 미덕은 그것일 겁니다.
그 덕분에 <표면 장력>은 낙천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인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인류가 앞으로 나갈 때, 그건 진보가 됩니다. 진보는 문자 그대로 앞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수중 인간들이 안락한 웅덩이를 떠나지 않는다면, 그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건 진보가 아니라 보수가 되겠죠. 인류는 앞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나갈 때, 인류는 의식을 넓힐 수 있고, 그건 눈부신 빛이 될 겁니다. 눈부신 빛은 지식이 될 테고, 지식은 진보한 문명을 낳겠죠.
물론 앞으로 나가는 동안, 인류는 수많은 어려움들에 부딪힐 겁니다. 언제나 비경 탐험에는 수많은 위험들이 있습니다. 비경 탐험은 탄탄대로가 아닙니다. 진보는 신나는 아우토반이 아니죠. 하지만 진보를 포기해야 할까요? 더 넓은 세상이 인류를 기다림에도, 안락한 웅덩이 속에서 인류가 만족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탐험을 포기하자고 주장합니다. 비경 탐험은 위험하고 심지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안락한 웅덩이에서 계속 살 수 있다면, 인류는 웅덩이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이런 보수적인 의견들은 존재하죠.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훨씬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넓은 세상으로 나갈 때, 그들에게는 배가 필요할 겁니다. 강물을 돌아다니는 항해자들에게는 뗏목이 필요합니다. 다른 행성으로 날아가는 우주인들에게는 우주선이 필요합니다. 미생물 같은 수중 인간들에게는 잠수정이 필요합니다. 수중 인간은 수중 동물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물고기와 비슷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잠수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웅덩이를 떠날 때 잠수정이 메마른 지상을 거널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잠수정은 수륙 양용 잠수정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20세기 인류 문명과 달리, 수중 인간들에게는 첨단 과학이 없습니다.
그들은 성을 쌓고, 낫질을 하고, 쇠뇌를 쏩니다. 수중 인류 문명은 중세 문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잠수정을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중세 문명이 잠수정을 만들 수 있을까요? 대답은 생체 잠수정입니다. 수중 인간들이 비경 탐험을 결정했을 때, <표면 장력>은 바이오펑크가 되고 생체 잠수정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 자체로서 수중 인간들은 바이오펑크가 될 수 있으나, 여기에서 <표면 장력>은 멈추지 않습니다. <표면 장력>에는 비단 진보를 향하는 낙천적인 기대만 아니라 생체 잠수정 역시 있습니다. 비록 이건 첨단 우주선에 까불지 못하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생체 잠수정은 훨씬 신기합니다.
수중 인간들과 달리, 현실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들은 이런 생체 잠수정을 만들지 않을 겁니다. 21세기 인류가 유전 공학을 발달시킨다고 해도, 21세기 인류는 생체 잠수정을 만들지 않겠죠. 이미 기계 잠수정이 있음에도, 왜 인류가 구태여 생체 잠수정을 만들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기계 탈것들에게 익숙합니다. 자동차, 항공기, 열차, 선박, 잠수정 그리고 우주선…. 모든 탈것은 기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타고 다니나, 이건 예외적인 사례입니다. 게다가 대양으로 나가거나, 심해로 잠수하거나, 하늘을 날아가거나, 유로파 위성으로 건너갈 때, 동물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류는 기계 탈것들을 이용해야 합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인류가 생명체들을 쉽게 조작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유전 공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생명체를 조작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생명체들은 너무 복잡하고, 인간은 그걸 당장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계는 인간의 하인이나, 생명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생명체를 조작할 수 있다고 해도, 인류보다 생물 다양성은 먼저 존재했고, 생물 다양성은 인간의 하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기계 탈것을 이용해야 할 겁니다.
반면, 미생물로서 수중 인간들은 균사들을 조절하거나 식물에게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수중 인간들은 웅덩이 속의 다른 동물들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수중 인간들은 그 동물들을 '선주민'이라고 부릅니다. 수중 인간들은 후발 주자입니다. 불시착한 지구인들이 새로운 인간들을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작은 웅덩이 안에는 수중 생태계가 있었죠. 뒤늦게 수중 인간들은 거기에 '인위적으로' 끼어들었으나, 그들은 그저 포식동물들을 처치했을 뿐이고 다른 선주민들과 협력합니다. 적어도 유럽 백인들보다 수중 인간들은 훨씬 인간적입니다.
유럽 백인들은 '선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끔찍하게 학살했으나, 수중 인간들은 다른 웅덩이 동물들과 손을 잡습니다. 심지어 다른 웅덩이 동물들이 고지식하게 군다고 해도, 수중 인간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함부로 하대하지 않습니다. 만약 유럽 백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손을 잡았다면, 플랜테이션 농업이나 다른 환경 오염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기후 변화 역시 훨씬 작은 문제가 되었겠죠. 수중 인간들은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SF 세상에서 외계인들은 모범 사례를 맡을 수 있죠. 비록 수중 인간들은 인류에 속하나, 많은 사람들은 수중 인간들이 인류보다 외계인에 가깝다고 생각하겠죠.
다른 균사들과 식물들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수중 인간들은 생체 잠수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수중 생명체들은 잠수정의 다리가 되거나 지느러미가 됩니다. 그것들은 잠수정에 산소를 공급하거나 깨끗한 물을 돌립니다. 수중 인간들은 웅덩이 동물들과 균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지시할 수 있습니다. 웅덩이 밖의 지상에서 몇몇 동물이나 균사는 말라죽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웅덩이 생명체들은 생체 잠수정을 이루었고, 그들은 먹이를 먹기 원합니다.
<표면 장력>은 단편 소설이고 어떻게 생체 잠수정이 작동하는지 자세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생체 잠수정이 탐험하는 과정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나, 분량 그 자체는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량이 좀 더 길고 <표면 장력>이 생체 잠수정을 좀 더 자세히 보여준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인류가 이런 생체 잠수정을 만들 수 있을까요? 인류는 균사들이나 다른 식물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지시하지 못합니다. 평생 동안 시골 할머니가 텃밭을 일군다고 해도, 시골 할머니는 상추들에게 말을 건네지 못할 겁니다. 평생 동안 양봉 농민들이 꿀벌들을 키운다고 해도, 양봉 농민들은 꿀벌들에게 지시하지 못합니다. 양봉 농민들이 꿀벌들을 지시할 수 있다면, 분봉은 힘든 작업이 되지 않겠죠.
<표면 장력>에서 생체 잠수정의 작동 원리는 소통과 지시입니다. 수중 인간들은 다른 웅덩이 생명체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지시할 수 있습니다. 웅덩이 생명체들은 동력이 되고, 생체 잠수정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인류는 소통하지 못하고 지시하지 못하죠. 사실 생체 탈것을 설정할 때, SF 작가는 어떻게 인간이 생체 탈것을 조종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생체 탈것은 기계 탈것과 다릅니다. 생체 잠수정은 기계 잠수정과 다릅니다. 어떻게 인간이 생체 잠수정을 조종할 수 있을까요? 스콧 웨스터펠드가 쓴 <레비아탄>에는 생체 비행선이 있습니다.
<표면 장력>의 생체 잠수정과 <레비아탄>의 생체 비행선은 모두 똑같이 생체 탈것입니다. 하지만 양쪽은 서로 다릅니다. 생체 잠수정은 거의 완전한 생체입니다. 반면, 생체 비행선은 생체와 기계의 결합입니다. <레비아탄>에서 유전 공학 기술자들은 아주 거대한 부유 동물을 만들었고 거기에 선체를 매달았습니다. 공군 승무원들은 선체에 타고 선체에서 생활하고 선체에서 운항합니다. 거대한 부유 동물은 그저 부유 가스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래서 공군 승무원들은 생체 비행선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생체 잠수정은 훨씬 유기적입니다. 수중 인간들이 웅덩이 생명체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판타지에서도 이런 소통 방법은 문제가 될 겁니다.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에서 이집트 세력에게는 레비아탄이 있습니다. 레비아탄은 아주 거대한 갑주어입니다. 둔클레오스테우스처럼 레비아탄은 갑옷을 입은 거대 물고기입니다. 레비아탄은 이집트 유닛들을 뱃속에 집어넣고 바다를 건널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고래가 요나를 삼키고 뱉은 것처럼, 거대 갑주어 레비아탄은 이집트 유닛들을 삼키고 뱉을 수 있죠. 그래서 레비아탄은 튼튼한 수송선이 됩니다. 적군 함선들이 화살들을 퍼붓는다고 해도, 거대 갑주어 레비아탄은 화살들을 무시하고 바다를 건널 수 있죠.
하지만 어떻게 이집트 유닛들이 레비아탄을 조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집트 유닛들이 방향을 설정하고 수심을 측정할 수 있죠? 신의 기적으로? 제목처럼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에는 신들이 있습니다. 이집트 신들이 있기 때문에 이집트 유닛들은 레비아탄을 부를 수 있죠. 신의 기적 덕분에 레비아탄은 튼튼한 장갑 수송선이 될 수 있습니다. 판타지는 신의 기적이나 마법을 이야기할 수 있죠. 이것 덕분에 판타지는 생체 수송선을 이야기할 수 있죠. 게임 플레이어가 어떻게 거대 갑주어를 조종하는지 묻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가 걱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판타지에는 마법이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메일스트롬>은 중세 판타지 해전을 묘사합니다. 이 게임에서 오크 함선들은 거대한 상어들을 이용합니다. 말들이 마차를 끄는 것처럼, 거대한 상어들은 오크 함선을 끕니다. 이건 생체 함선이 되지 못하겠죠. 아무리 거대한 상어들이 선체를 끈다고 해도, 함선 그 자체는 생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차가 생체 탈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죠. 물론 거대한 상어들 없이 오크 함선이 충각 돌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오크 함선에서 거대한 상어들이 필수적이라고 말할 겁니다. 오크 함선은 거대한 상어들을 이용하는 생체 함선일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오크가 거대한 상어들을 조종한다는 사실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이건 어색하지 않은 풍경입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에서 인간들이 거대한 상어들을 함부로 조종한다면, 그건 어색한 풍경이 될 겁니다. 판타지에서 이집트 유닛들은 신의 기적으로 거대한 갑주어를 조종할 수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현실적인 설정을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에는 똑똑한 개조 동물이나 텔레파시 같은 편리한 설정이 있습니다. TV 드라마 <우주선 렉스>에서 우주선 승무원들은 생체 우주선과 직접 대화합니다. 생체 우주선이 똑똑한 개조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해밀튼이 쓴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우주 부유 생명체는 인간과 교감할 수 있고 생체 우주선이 될 수 있죠. 인간이 부유 동물과 소통할 수 있다면, 생체 우주선은 꿈이 아닐 겁니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이나 중세 판타지가 이런 생체 탈것을 설정할 때, 동물 권리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현실에서 코끼리 조련사 마후트는 많은 논란들을 부릅니다. 코끼리는 아주 거대한 야생 동물입니다. 인간이 코끼리처럼 거대한 동물을 다루고 싶다면, 인간은 코끼리에게 고통을 줘야 합니다. 고통 때문에 마후트는 코끼리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구태여 코끼리를 이용할 이유가 없음에도, 수익 때문에, 권력 때문에, 재미 때문에, 코끼리는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생체 탈것에게는 이런 문제가 있죠.
레비아탄 비행선이 체펠린 비행선과 싸울 때, 부유 고래를 비롯해 다른 동물들은 고통을 받을 겁니다. 상대 항공기들과 싸우는 동안, 부유 고래는 총격을 받을지 모르고, 화살 박쥐들과 요격 맹금들 역시 총격을 받을지 모릅니다. 오크 함선이 드워프 함선과 싸울 때, 드워프 함선이 포탄들을 날린다면, 포탄들은 거대한 상어들을 두들겨팰지 모르고, 상어들은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지 모릅니다. 물론 유전 공학이나 마법 주문은 고통을 잠재우거나 아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생명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유전 공학이나 마법 주문이 없다면? 생체 잠수정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이 고통을 느낄까요? 만약 생체 탈것을 구성하는 생명체가 인간처럼 고통을 느낀다면, 인간들이 구태여 생체 탈것을 만들어야 할까요?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들에게 이런 설정은 막연한 상상력에 불과합니다. 언젠가 미래 인류는 텔레파시 능력을 각성하고, 향유 고래와 대화하고, 향유 고래에게 잠수정을 매달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때 생체 잠수정은 신나게 해저를 탐험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건 그저 상상력에 불과합니다. 미래 인류는 계속 기계 잠수정을 탈 겁니다. <표면 장력>은 생체 잠수정이라는 로망스러운 설정을 자극하나, 현실 속에서 인류는 생체 잠수정을 만들지 못하겠죠.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생체 잠수정과 비경 탐험은 로망스러운 소재이고 동시에 드문 소재입니다.
국내에서 SF 독자들은 여러 유명한 창작/번역 SF 소설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슨 소설이 생체 탈것과 비경 탐험을 이야기할까요? 무슨 작가가 생체 우주선이나 생체 비행선이나 생체 잠수정을 비경 탐험과 연결할까요? 이런 작가나 소설이 있을까요? 이런 SF 소설은 거의 없을 겁니다. <표면 장력>에는 생체 탈것과 비경 탐험이 있죠. 생체 잠수정은 웅덩이 생태계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생체 탈것은 그저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행위가 아닙니다. <표면 장력>이 보여주는 것처럼, 생체 탈것은 생태계 관리로 이어질 수 있죠. 게다가 생체 잠수정은 찬란한 진보를 향합니다. 이 세상에는 더 넓은 미지가 있고, 인류는 미지를 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