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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 분류, 끝없는 함정

OneTiger 2019. 7. 13. 20:57

코니 윌리스가 쓴 <둠스데이 북>은 소설입니다. <둠스데이 북>은 20세기 소설(1992년 출판)입니다. <둠스데이 북>은 20세기 미국 (영어) 소설입니다. <둠스데이 북>은 시간 여행 장치와 미래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둠스데이 북>은 20세기 미국 (영어) SF 소설입니다. 소설, 20세기, 미국 영어, 사이언스 픽션. <둠스데이 북>에는 이런 속성들이 있습니다. 소설은 가장 커다란 속성(범주)이고, 사이언스 픽션은 가장 작은 속성(범주)일 겁니다.

 

<둠스데이 북>이 소설이기 때문에, 독자는 <둠스데이 북>을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과 카타야마 쿄이치가 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이사벨 아옌데가 쓴 <영혼의 집>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독자는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둠스데이 북>과 <폭풍의 언덕>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영혼의 집>과 <서유기>는 모두 소설입니다. 독자는 다섯 소설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은 너무 커다란 범주입니다. 범주가 너무 크기 때문에, 독자가 다섯 소설들을 비교한다고 해도, 독자는 특정한 주제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둠스데이 북>을 다른 것들과 비교하기 원한다면, 특정한 주제를 위해 독자는 범주를 좁혀야 합니다.

 

 

<둠스데이 북>은 20세기 소설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서유기>와 <폭풍의 언덕>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제외할 수 있습니다. <서유기>는 고전 소설이고, <폭풍의 언덕>은 19세기(1847년 출판) 소설이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21세기(2004년 출판) 소설입니다. <영혼의 집>은 20세기(1982년 출판) 소설이고, 그래서 독자는 <둠스데이 북>을 <영혼의 집>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독자가 좀 더 범주를 좁힌다면, <영혼의 집> 역시 나가리가 됩니다. <영혼의 집>은 미국 (영어) 소설이 아닙니다.

 

<둠스데이 북>은 20세기 미국 소설이나, <영혼의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범주를 좁힌다면, 독자는 <폭풍의 언덕>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영혼의 집>과 <서유기>를 모두 버려야 할 겁니다. 만약 독자가 <둠스데이 북>을 <폭풍의 언덕>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영혼의 집>과 <서유기>와 비교할 수 있다고 해도, 독자가 특정한 주제를 논의할 수 있나요? 독자가 다섯 소설들을 이용해 무엇을 논의할 수 있나요? 다섯 소설들은 문학이고, 문학은 보편적인 미덕, 선의,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독자는 다섯 소설들을 이용해 보편적인 미덕을 논의… 할 수 있나요?

 

 

<영혼의 집>과 <서유기>가 똑같은 미덕을 이야기하나요? <둠스데이 북>과 <폭풍의 언덕>이 똑같은 미덕을 이야기하나요? <둠스데이 북>에는 여자 대학생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이 여자 대학생을 인정할 수 있나요? 독자가 다섯 소설들을 이용해 보편적인 미덕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어렵습니다. 만약 독자가 다섯 소설들을 이용해 보편적인 미덕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독자는 미덕이라는 범주를 훨씬 확대해야 합니다. 고대 남자들이 여자들을 차별했다고 해도, 독자는 그걸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는 비슷할지 모르나, 이런 비교에는 별로 가치가 없을 겁니다.

 

이런 비교가 너무 커다란 범주를 허용하기 때문에, 너무 커다란 범주 속에서 중요한 차이들은 두루뭉실해질 겁니다. 독자가 내용과 주제보다 형식에 치중한다고 해도,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는 좋은 비교 대상이 아닐 겁니다. 양쪽 모두 글자 매체입니다. 양쪽 모두 글자를 이용해 이야기합니다. 양쪽 모두 허구입니다. 양쪽에는 모두 문학적인 시점, 허구, 비유, 문체, 문단 구성, 문법, 기타 등등이 있습니다. 독자는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를 이용해 이런 형식들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이런 것들을 논의할 때, 독자가 무엇에 집중할 수 있나요?

 

 

독자가 20세기 서구 SF 소설과 고전 중국 환상 소설을 비교한다고 해도, 독자가 특정한 문학 비평 이론을 적용할 수 있나요? 독자는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를 비교할 때, 왜 독자가 이 두 가지를 비교해야 하나요? 이 세상에 수두룩한 소설들이 있음에도, 왜 독자가 구태여 <둠스데이 북>을 <서유기>와 비교해야 하나요?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에게 소설이라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이게 중요한가요? 근본적인 공통점이 중요한가요? 어떤 두 비교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근본적인 공통점을 이용해 특정한 주제를 논의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 사이에는 아주 근본적인 공통점(소설)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근본적인 공통점이 너무 커다란 범주라는 사실입니다. <둠스데이 북>은 여자 대학생을 인정하고, <서유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삼장 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모두 남자들(남성적인 등장인물들)입니다. 반면, <둠스데이 북>에서 주인공 시간 여행자는 여자 대학생입니다. <서유기>는 인류의 절반 여자를 무시하나, <둠스데이 북>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손오공: "여자는 대학원에 갈 수 있어." 사오정: "뭐라고? 여자가 대화하기 원한다고?") <둠스데이 북>은 근대화와 시대 격차를 인정하나, <서유기>는 근대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시간 여행 소설로서 <둠스데이 북>은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고 여러 시점들을 동원합니다. <서유기>에는 이런 형식이 없습니다. 19세기 서구 문화가 여러 소설 형식들을 정립한 이후, 코니 윌리스는 <둠스데이 북>을 썼습니다. 19세기 서구적인 근대화는 소설 <둠스데이 북> 형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유기>는 이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고전 환상 소설 형식은 서구적인 근대화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매체가 근본적인 공통점이 된다고 해도, 만약 독자가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를 비교한다면, 독자는 이런 엄청난 차이들을 무시해야 합니다.

 

만약 독자가 소설이라는 아주 넓은 범주를 다루고 싶다고 해도, 이런 범주 안에는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가 없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문학 비평 강의는 SF 소설들을 다루지 않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 <타임 머신>과 <멋진 신세계>가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주류 문학 평론가들 역시 이런 SF 소설들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주류 문학 평론가들은 이런 SF 소설들이 세계 고전 문학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주류 문학 평론가들은 사이언티픽 로망스 바이오펑크로서 <프랑켄슈타인>을 평가하지 않을 겁니다. 주류 문학 평론가들은 19세기 서구 문학 사조에서 사이언티픽 로망스보다 낭만주의, 고전주의, 리얼리즘 같은 것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쌍한 독자가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를 비교하고 싶다고 해도, 이건 좋은 비교가 되지 못할 겁니다. 분명히 독자는 두 소설을 비교할 수 있고, 어떤 문학 강사들은 이런 비교가 좋다고 평가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는 너무 커다란 범주를 허용해야 하고, 너무 커다란 범주 속에서 중요한 차이들은 사라집니다. 다른 문학 강사들은 독자가 너무 두루뭉실하게 중요한 차이들을 무시한다고 비판할 겁니다. 만약 독자가 다른 문학 강사들을 만족시키기 원한다면, 독자는 범주를 훨씬 좁혀야 합니다. 독자는 <둠스데이 북>에서 '훨씬 좁은 속성'을 끌어내고 이걸 이용해야 합니다.

 

독자는 '훨씬 좁은 속성'을 이용해 <둠스데이 북>을 다른 것들과 비교해야 합니다. 첫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가장 좁은 범주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가장 좁은 범주가 됩니까? 문학 강사가 "왜 사이언스 픽션이 가장 좁은 범주인가요? 코니 윌리스는 여자 소설 작가입니다. 왜 이런 범주가 좁은 범주가 되지 못하나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독자가 대답해야 하나요? 일반적으로 유명한 소설 작가들은 남자들입니다. 세계 고전 문학 목록은 남자 작가들을 늘어놓습니다. 세계 고전 문학 목록에 여자 작가들이 있다고 해도, 여자 작가들보다 남자 작가들은 훨씬 많습니다.

 

 

페미니즘 서적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레베카 솔닛은 여자 작가가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사회 구조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쉽게 작가가 되지 못합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투덜거릴 겁니다. "아놔, 내가 페미니즘 평론가임에도, 왜 내가 남자 작가들을 훨씬 많이 떠들어야 하지?" 서구 문명이 가부장적이고 코니 윌리스가 여자 작가이기 때문에, 이건 좁은 속성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이런 속성을 이용해 <둠스데이 북>을 다른 것들과 비교한다면, 독자는 중요한 차이들을 두루뭉실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문학 강사들은 이런 비교를 호평할지 모릅니다. 이런 중요한 범주가 있음에도, 만약 독자가 여자 작가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좁은 속성이라고 간주한다면, 기준이 무엇인가요?

 

어쩌면 시대는 기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서구적인 근대화는 필수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우주와 자연과 문명이 바뀔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주와 자연과 문명이 바뀐다면, 이건 정말 엄청난 충격일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충격, 짜릿함, 경이를 사랑합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이런 충격, 짜릿함, 경이를 사랑하나요? 왜 다른 문학 사조들, 장르들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 격변을 사랑하나요? 19세기 서구 문명이 엄청난 변화들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 선언>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인류 문명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획기적인 변화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19세기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 경제였고,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엄청나게 바꿨습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인류 문명에서 다른 어떤 것들보다 자본주의 경제가 가장 놀라운 변화라고 말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너무 자본주의를 띄우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를 좋아한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너무 엄청난 변화였기 때문에, 19세기 서구 사람들은 시대가 바뀐다고 깨닫습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이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처럼, 미래 인류 문명들 역시 엄청난 변화들을 겪을지 모릅니다. 사회주의 운동 역시 19세기 서구적인 근대화에서 비롯했습니다. 어쩌면 미래 문명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경제를 추구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경제가 나타난다면, 이것 역시 아주 짜릿한 충격이 될 겁니다. 심지어 인류 문명은 계급 투쟁을 끝내고 새롭게 역사를 쓸지 모릅니다. 착취 역사는 끝나고, 보편적인 진리와 미덕을 위해 인류 문명은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기 원합니다. 만약 <공산당 선언>이 선언하는 것처럼, 서구적인 근대화가 가장 획기적인 변화이고, 사이언스 픽션이 획기적인 변화에서 비롯했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아주 중요한 범주, 속성, 기준이 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아주 중요한 범주이기 때문에, 다른 차이들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다른 차이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 <붉은 별>과 <둠스데이 북>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쓴 <붉은 별>과 <둠스데이 북> 사이에는 너무 많은 차이들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남자이고, 코니 윌리스는 여자입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20세기 초반 사람입니다. 코니 윌리스는 20세기 후반 사람입니다. 오늘날 21세기 초반(2019년 7월 12일)에도 코니 윌리스는 존재합니다. <붉은 별>은 외계인과 우주 여행을 말합니다. 이건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많은 유토피아 소설들이 설교들을 늘어놓는 것처럼, <붉은 별>에는 여러 설교들이 있습니다.

 

설교 덕분에 이 소설은 소설보다 사회 과학 서적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떤 문학 강사들은 <붉은 별>이 소설보다 문학이라고 말할 겁니다. <붉은 별>은 지구보다 외계 행성 문명을 주로 보여줍니다. <둠스데이 북>은 중세 유럽 문명을 강조하나, <붉은 별>은 중세 유럽에게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붉은 별>은 1인칭 시점이고, 분량은 아주 길지 않습니다. <둠스데이 북>은 여러 시점들과 여러 등장인물들을 보여줍니다. 등장인물들이 많기 때문에, 서사는 복잡하게 꼬이고, 분량은 길어집니다. <붉은 별>은 20세기 초반 러시아 언어를 동원하고, <둠스데이 북>은 20세기 후반 미국 영어를 동원합니다. 이렇게 두 소설 사이에는 많은 차이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합니다. 소설 <붉은 별>은 사회주의 혁명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둠스데이 북>은 사회 구조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둠스데이 북>을 읽는 동안, 독자가 무분별한 소비 문화를 느낀다고 해도, 이 소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만약 SF 동호회에서 독자가 <둠스데이 북>을 이용해 시간 여행을 말한다면, SF 동호회 회원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만약 SF 동호회에서 독자가 <붉은 별>을 이용해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한다면, SF 동호회 회원들은 게거품을 물고 독자가 악랄한 빨갱이 계집년이라고 비난할 겁니다.

 

SF 동호회 회원들은 전복, 혁명, 시대 격변을 떠드나, 그들은 오직 입으로만 전복과 혁명과 시대 격변을 떠들 뿐입니다. 그들은 절대 전복과 혁명과 시대 격변에 참가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SF 동호회 회원들에게 전복은 그저 소설 속의 재미있는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붉은 별>과 <둠스데이 북>을 쉽게 비교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독자가 <붉은 별>을 이용해 사회주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독자는 마르크스주의 학술 모임이나 급진적인 가투 현장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뭐, 어떤 트로츠키 그룹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임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볼셰비키를 배신한 반동이라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붉은 별>과 <둠스데이 북>은 모두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두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고, 사이언스 픽션이 아주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독자는 다른 차이들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서구적인 근대화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어쩌면 미래에도 서구적인 근대화 속에서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할지 모릅니다. 서구적인 근대화는 비단 지구만 아니라 외계 행성들을 바꿀지 모릅니다. 미래 인류는 외계 행성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짓거나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추진할지 모릅니다. 이런 첨단 과학 기술들은 서구적인 근대화에서 비롯했습니다.

 

서구적인 근대화, 진보는 비단 지구만 아니라 외계 행성들을 바꿀지 모릅니다. 외계 행성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긍정적인 변화가 되거나 부정적인 변화가 될지 모릅니다. 서구적인 근대화에는 긍정적인 측면들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들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기후 변화는 생물 다양성을 크게 파괴할지 모릅니다. 서구적인 근대화(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아니면 서구적인 근대화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일지 모릅니다. 서구적인 근대화가 근본적으로 식민지 수탈에 기반하기 때문에, 아무리 진보가 찬란한 것 같다고 해도, 결국 인류 문명은 진보를 버려야 할지 모릅니다.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물질적인 재화들을 늘렸다고 찬양합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엄청난 산업력을 유지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엄청난 산업력은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했습니다. 식민지 수탈이 사라진다면, 엄청난 산업력 역시 사라질지 모릅니다. 어쩌면 찬란한 진보는 너무 공허한 허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서구적인 근대화가 긍정적인 페미니즘이든, 부정적인 자본주의든, 진보가 절대적으로 나쁘든, 서구적인 근대화는 엄청난 변화이고,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범주는 <붉은 별>과 <둠스데이 북>을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독자가 두 소설을 비교한다고 해도, 독자가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를 비교하는 것과 달리, 이건 너무 넓은 범주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끝이 아닙니다. 다른 SF 독자들은 <붉은 별>이 유토피아 문학이고 <둠스데이 북>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겁니다. 독자는 <붉은 별>과 <둠스데이 북>을 이용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아주 중요한 주제를 논의할 수 있으나, 다른 SF 독자들은 <붉은 별>을 <둠스데이 북>보다 다른 SF 소설들과 비교하기 원할 겁니다. 인류 문명에서 유토피아 문학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삶은 쉽지 않고,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이상향을 꿈꿨습니다. 19세기 이후, SF 작가들은 서구적인 근대화와 시대 격변을 이용해 유토피아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독자가 이런 문학 사조를 고려한다면, 범주는 다시 좁아질 수 있습니다. <붉은 별>과 <둠스데이 북>은 헤어져야 할 겁니다. 독자는 <둠스데이 북>을 시간 여행 소설들과 함께 묶고 <붉은 별>을 유토피아 소설들과 함께 묶어야 할 겁니다. 단편 소설 모음집 <시간 여행 SF 걸작선>이 <화재 감시원>을 다른 시간 여행 소설들과 함께 묶은 것처럼, 독자는 <둠스데이 북>을 다른 시간 여행 소설들과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둠스데이 북>은 <백 투 더 퓨처>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백 투 더 퓨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영상 중심적인 매체입니다. <백 투 더 퓨처>는 글자 매체가 아닙니다.

 

 

<붉은 별>과 <둠스데이 북>은 똑같이 SF 소설(글자 매체)입니다. 반면, <백 투 더 퓨처>는 영상 중심적인 매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소설 <둠스데이 북>이 소설 <붉은 별>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와 가깝다고 말할 겁니다. <둠스데이 북>과 <백 투 더 퓨처>는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매체(소설과 영화)보다 하위 장르(시간 여행)는 우선합니다. 독자가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를 비교할 때, 매체보다 내용이 우선하는 것처럼, <둠스데이 북>과 <백 투 더 퓨처>는 소설과 영화라는 매체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형식 없이 내용은 존재하지 못하나,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둠스데이 북>을 읽을 때, 이 사람은 "나는 좋은 문장들을 읽고 싶어."보다 "나는 시간 여행을 알고 싶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문장을 위해 코니 윌리스가 부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행위를 무생물보다 생명체에 비유하고, 문장 호흡을 조절한다고 해도, 독자는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속에서 시간 여행자가 중세 문법을 음미한다고 해도, 독자는 <둠스데이 북>을 구성하는 문장들을 음미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이 시간 여행 이야기를 원하기 때문에, <둠스데이 북>을 읽은 이후, 이 사람은 <백 투 더 퓨처>를 찾을 겁니다.

 

그리고 <둠스데이 북>이 다른 시간 여행 이야기들과 어울리는 것처럼, <붉은 별>은 다른 유토피아 이야기들과 어울릴 겁니다. <붉은 별>은 <에코토피아 뉴스>, <안드로메다 성운>, <빼앗긴 자들>, <붉은 화성>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유토피아 소설들은 소설이라는 매체를 뛰어넘고 다른 SF 영화들, SF 게임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겁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빼앗긴 자들>과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가 함께 어울린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힙니다. 언제나 시간 여행 이야기가 <둠스데이 북>과 어울릴 수 있나요? 단편 소설 모음집 <시간 여행 SF 걸작선>은 <채리티가 남긴 말>을 담았습니다. 단편 소설 <채리티가 남긴 말>은 시간 여행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두 주인공은 시간을 건너뛸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시간 여행이 아닙니다. 만약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이 시간을 건너뛸 수 있다면, 시간 여행 장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이 시간 여행 이야기가 될 수 있나요? <채리티가 남긴 말>이 <둠스데이 북>과 어울린다면,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 역시 그럴 수 있나요?

 

소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 역시 그럴 수 있나요? 소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 시간 여행보다 연애 감정은 훨씬 중요합니다. 시간 여행보다 연애 감정을 읽기 위해 어떤 독자들은 소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을 선택할 겁니다. 어쩌면 문학 평론가들 역시 이게 시간 여행 SF 소설보다 연애 소설에 가깝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만약 <둠스데이 북>이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과 어울린다면,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가 <둠스데이 북>과 어울릴 수 있나요? (코니 윌리스는 이 애니메이션이 성 차별들을 미화한다고 싫어할지 모릅니다.)

 

 

<둠스데이 북>과 <쏘아올린 불꽃>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붉은 별>과 유토피아 소설들 역시 문제가 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 <붉은 별>, <안드로메다 성운>, <빼앗긴 자들>, <붉은 화성>은 똑같이 유토피아 소설들입니다. 이것들 중에서 <붉은 화성>은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이야기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에게 생태계 변화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고, <퍼시픽 엣지>부터 <뉴욕 2140>까지, 여러 킴 스탠리 로빈슨 소설들은 생태계 변화를 다룹니다. 만약 SF 독자들이 <붉은 화성>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들은 유토피아 이야기보다 생태계 변화를 훨씬 좋아할지 모릅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이 생태계 변화에 치중하지 않기 때문에, <안드로메다 성운>이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해도, 독자들은 <안드로메다 성운>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안드로메다 성운>보다 <Among Ripples 2>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을 훨씬 좋아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를 비슷한 범주로 분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가 옳은가요? 사람들이 <안드로메다 성운>을 제외하고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를 연결할 수 있나요? 만약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가 어울린다면, <둠스데이 북>과 <쏘아올린 불꽃>보다 이건 훨씬 비약적인 분류일지 모릅니다.

 

 

분명히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는 똑같은 범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킴 스탠리 로빈슨은 비단 SF 소설들만 아니라 여러 사설들을 쓰고 강연들에 나갑니다. <Among Ripples 2> 역시 생태계 변화를 말합니다. 대부분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생태계 변화는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공통점을 포착하고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를 똑같은 범주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건 비약이 아닐 겁니다. 아니, 이게 정말 비약이 아닌가요? 이게 너무 황당무계한 분류가 아닐까요?

 

두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이런 공통점은 너무 넓은 범주가 되고, 너무 넓은 범주는 중요한 차이들을 무시합니다. 우리의 불쌍한 독자가 <둠스데이 북>과 <서유기>를 묶기 원했을 때, 이미 독자는 이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사람들이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를 똑같은 범주에 집어넣는다면, 불쌍한 독자가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사람들 역시 실수를 저지를지 모릅니다.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 사이에서 생태계 변화가 너무 넓은 범주인가요, 아니면 (차이들을 무시할 수 있는) 훨씬 좁은 범주인가요? 이건 너무 넓은 범주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를 묶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중요한 차이들을 언급해야 할 겁니다. <Among Ripples 2>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이 게임은 미래 인류 문명이 외계 행성을 개척하고 평등하게 살아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Among Ripples 2>는 사회주의 혁명이 옳고 자본주의 경제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Among Ripples 2>가 사회주의 혁명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Among Ripples 2>를 좋아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Among Ripples 2>는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자연 생태계는 심각한 위협에 부딪혔습니다. 기후 변화는 생물 다양성을 크게 파괴할지 모릅니다. 11번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제대로 관리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를 없애야 합니다. 사회주의 경제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운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Among Ripples 2>를 좋아한다면, 사람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알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에코토피아 뉴스>, <안드로메다 성운>, <빼앗긴 자들> 그리고 <붉은 화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Among Ripples 2>, 자연 생태계, 기후 변화, 자본주의 오염, 사회주의 혁명, <붉은 화성>은 돌고 돕니다. 15번째 문단에서 사람들이 유토피아보다 생태계 변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드로메다 성운>보다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를 함께 묶었으나, 자연 생태계 보호와 사회주의 혁명이 필수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Among Ripples 2>를 플레이하고 <안드로메다 성운>을 읽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Among Ripples 2>를 플레이하고 <안드로메다 성운>을 읽는다고 해도, 이게 가능한가요? 이게 너무 넓은 범주가 아닌가요? 사람들이 <Among Ripples 2>, 자연 생태계, 기후 변화, 자본주의 오염, 사회주의 혁명, <안드로메다 성운>을 함께 묶는다면, 이게 너무 넓은 범주가 아닌가요? 이런 분류가 다른 중요한 차이들을 무시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Among Ripples 2>와 <안드로메다 성운>을 함께 묶는다면, 아니, <안드로메다 성운>이 빠지고 <Among Ripples 2>와 <붉은 화성>이 함께 어울린다고 해도, 이건 너무 넓은 범주일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불쌍한 독자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을지 모릅니다. 이런 논의가 끝없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 평론가는 장르, 사조, 주제를 무한하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소설 <유리알 유희>에서 유희 명인이 어떤 별의 천문학상의 위치, 바흐의 푸가 주제, 라이프니츠나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에서 출발하고, 유희 기호를 이용해 고전 음악과 자연 법칙의 공식 사이를 대비하고, 첫 주제에서 무한 편성까지 마음대로 진전하는 것처럼, 평론가는 유사성들을 이용해 장르와 사조와 주제를 무한히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론가는 '무한한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생태학 SF 소설과 생태계 게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요? 이런 스크린샷은 '무한한 함정'일지 모릅니다.]

 

 

<둠스데이 북>과 <쏘아올린 불꽃>은 끝없는 논의입니다. <Among Ripples 2>와 <붉은 화성>은 훨씬 끝없는 논의입니다. 심지어 이건 '무한한 함정'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SF 팬들이 SF 장르를 분류하기 원할 때, 소설 <백경>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불길하게 경고한 것처럼, 평론가는 SF 팬들에게 경고해야 할지 모릅니다. "오오, 그대 SF 독자여, 그대가 SF 장르를 분류하기 원할 때, 무한한 심연 속에서 그대는 끝없이 방황할지니…. 시지푸스가 영원한 비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대는 무한한 심연을 탈출하지 못하노라." 하지만 이렇게 평론가가 경고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장르가 뚝 떨어진다고 착각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완전한 형태로서 장르가 뚝 떨어진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나타나기 전에 서구적인 근대화는 없었고 사이언스 픽션 역시 없었습니다. 서구적인 근대화 속에서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서구적인 근대화가 시대적인 산물인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시대적인 산물입니다. 우리가 서구적인 근대화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다른 것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이언스 픽션들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장르를 분류할 때, 독자는 '무한한 함정'을 주의해야 합니다.

 

 

"아놔, 젠장, 그래서 결론이 뭐지? 이 게시글이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이렇게 우리의 불쌍한 독자는 물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비단 불쌍한 독자만 아니라 수많은 SF 팬들은 어떻게 사람들이 장르, 사조, 주제를 분류할 수 있는지 알기 원할 겁니다. 하지만 이 게시글은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이 게시글이 결론을 내린다면, 결론은 "결론이 없다."가 될 겁니다. 우리는 장르, 사조, 주제를 고정하지 못합니다. 이제까지 이 게시글이 산만하게 계속 떠든 것처럼, 끝없는 논의 속에서 장르, 사조, 주제는 나타납니다.

 

 

※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 게시글이 <둠스데이 북>을 열심히 떠들었음에도, 왜 게시글 이미지에 <둠스데이 북> 표지 그림보다 <Among Ripples 2> 스크린샷이 있지? 이런 구성은 게시글 완성도를 망칠 거야!" 어쩌면 이렇게 불쌍한 독자는 물을지 모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기가 생태적인 상상력을 덕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시글이 <둠스데이 북>을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게시글 이미지는 <둠스데이 북>보다 <Among Ripples 2>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게시글 완성도를 지적할지 모르나, 게시글 완성도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생태학 SF 덕질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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