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게임 <울프>와 이질적인 사이언스 픽션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게임 <울프>와 이질적인 사이언스 픽션

OneTiger 2019. 7. 12. 20:36

[이런 생태계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간접적으로 야생 동물들이 될 수 있습니다.]

 

 

1995년 비디오 게임 <오델 다운 언더>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장르입니다. 작은 청어부터 거대한 백상아리까지,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물고기들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들은 먹이를 먹고, 포식자를 피하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델 다운 언더>는 여러 배경 무대들을 보여주고, 물고기들은 여러 배경 무대들을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오델 다운 언더>는 다소 단순한 게임이나, 생태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이런 형식은 나름대로 유구한 전통(?)을 자랑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을 직접 조종하고, 야생 동물이 되고, 야생을 누비고, 살아남습니다.

 

야생 동물 시점으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야생 동물이 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을 훨씬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심파크>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보다 관리자가 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국립 공원 레인저가 되고, 공원 관리자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생물 다양성을 조절해야 합니다. <심파크>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이 되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 시점으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생태계를 느끼지 않습니다. <심파크>는 아이소메트릭 시점이고,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을 내려다봅니다.

 

 

여러 전략 게임들, 경영 게임들, 건설 게임들은 아이소메트릭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모든 것을 내려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위치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병사들, 건물들, 지리들을 내려다봅니다. <심파크>에서도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환경을 내려다봅니다. 게임 플레이어와 자연은 대등한 시점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연을 내려다보고 자연을 통제해야 합니다. <심파크>와 달리, <오델 다운 언더>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수중 자연 환경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어류가 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예쁘장한 블루탱이 되든 화끈한 관짝가오리가 되든, 게임 시점은 물고기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게임 플레이어와 관짝가오리는 대등한 시점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관짝가오리가 되어야 합니다. <심파크>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환경을 전반적으로 조망해야 하나, <오델 다운 언더>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전반적인 자연 환경보다 야생 동물 개체 하나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건 반드시 <심파크>보다 <오델 다운 언더>가 낫거나 <오델 다운 언더>보다 <심파크>가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파크>와 <오델 다운 언더>에는 모두 장점이 있을 겁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전반적인 자연 생태계 순환을 보고 싶다면, <심파크>는 좋은 선택일 겁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동물들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면, <오델 다운 언더>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1994년 비디오 게임 <울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델 다운 언더>와 달리, <울프>는 야생 동물 롤플레잉 게임에 가깝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늑대 개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성별, 계급, 무리 숫자, 외모 같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자신이 원하는 늑대 개체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늑대 개체에게 훨씬 애정을 쏟을 수 있을 겁니다. <오델 다운 언더>는 단순하게 물고기가 돌아다니고, 먹이를 먹고, 포식자를 피하고,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울프>에는 훨씬 복잡한 생태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두머리 늑대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늑대 무리를 이끌어야 할지 모릅니다. 야생에서 살아남기는 너무 어렵고, 목표를 수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1994년 게임 <울프>에는 사냥꾼들이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게임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늑대를 쏘기 원합니다. 야생 늑대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도망쳐야 합니다. 야생 늑대는 사냥꾼과 (사냥꾼이 탑승한) 항공기에게서 도망쳐야 합니다. 야생 늑대가 도망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사냥꾼(인간)보다 늑대(야생 동물)에게 감정을 이입할지 모릅니다.

 

 

사냥꾼이 늑대를 쏘고, 숲 속 바닥에서 늑대가 죽어가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사냥을 혐오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게임 플레이어는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야생 동물들이 안간힘을 쓰고 인간들을 피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이런 감정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일방적으로 책을 읽거나 동영상을 시청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1994년 <울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이 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수분을 보충해야 하고, 먹이를 찾아야 하고, 다른 늑대들과 소통해야 하고, 새끼들을 돌봐야 하고, 주변을 감시해야 합니다.

 

사냥꾼이 나타났을 때, 게임 플레이어는 정말 개발에 땀이 나도록, 아니, 늑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합니다. 개와 늑대가 동일한 부류(Canis lupus)이기 때문에, 개발에 땀이 나든 늑대 발에 땀이 나든, 상황은 너무 다급할 겁니다. 사냥꾼이 늑대를 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인간이라는 생물종을 다시 바라볼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인간이 총을 쏜다는 사실을 다시 고민할지 모릅니다. 수많은 비디오 게임들은 살인을 묘사합니다. 수많은 비디오 게임들에서 사람들은 총들을 쏘고 뭔가를 죽입니다. 수많은 FPS 게임들은 이런 사격 잔치, 살인 잔치를 묘사합니다.

 

 

[야생 동물 시점으로 게임 플레이어는 문명과 야생을 바라봅니다. 이건 이질적인 체험일 겁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FPS 게임을 플레이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얼마든지 총을 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총들을 쏠 테고 게임 플레이어를 쓰러뜨릴 겁니다. 하지만 수많은 FPS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다른 인간들과 싸웁니다. 적어도 게임 플레이어는 지적 존재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테크노 스릴러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플레이하든, 스페이스 오페라 <헤일로> 시리즈를 플레이하든, 지적 존재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총을 쏘고 총에 맞습니다. 엉고이부터 지랄하네까지, 아무리 <헤일로> 시리즈가 온갖 외계인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외계인들은 지적 존재입니다.

 

지랄하네는 정말 무식하게 지랄하나, 지랄하네 역시 지적 존재입니다. 지랄하네는 어떻게 지적 존재가 중력 망치를 휘두르는지 압니다. 반면, <울프>에서 늑대들은 야생 동물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영리하게 늑대를 조종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늑대는 야생 동물입니다. 우리는 늑대를 비롯해 온갖 야생 동물들을 지적 존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검수리가 위풍당당하다고 해도, 아무리 아무르 호랑이가 화려하고 날렵하고 야성적이라고 해도, 아무리 장수 거북이 우아하고 장엄하다고 해도, 검수리와 아무르 호랑이와 장수 거북은 지적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게임 속의 늑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비디오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지적 존재들이 됩니다. <헤일로> 시리즈처럼,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에서도 게임 플레이어는 지적 존재들과 만납니다. 아무리 외계인들이 기이하다고 해도, 외계인들은 지적 존재입니다. '지랄하네'와 '지적 존재'는 어울리지 않는 어감이나, 지랄하네 역시 지적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랄하네에게 친근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계인을 구상할 때, 우리가 인간을 참고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온갖 외계인들을 늘어놓으나, 그들은 유사 인간들입니다. 지랄하네 역시 유사 인간입니다.

 

지랄하네는 진짜 외계 야만인이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외계인들은 늘어놓으나, 우리가 스페이스 오페라들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인간들(지적 존재들)을 만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달리, 1994년 게임 <울프>는 지구 생태계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늑대들을 이용해 북아메리카 삼림 생태계를 묘사합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외계인들이 없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울프>를 초해석하거나 과잉 해석하고 외계인들을 느낀다고 해도, 외계인들은 주력이 되지 못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인들보다 늑대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 인간과 늑대는 다릅니다. 우리 인간과 야생 동물은 다릅니다. 야생 동물들은 지적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참고하고 외계인들을 만듭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들은 인위적(인공적)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들은 파생적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들은 존재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들은 인간들에게서 파생했습니다. 야생 동물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야생 동물들을 구상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진화하기 전에 이미 자연 생태계는 존재했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수많은 야생 동물들을 낳았습니다. 인류가 진화하기 전에 이미 자연 생태계는 스테고사우루스와 트리세라톱스와 스피노사우루스와 람베오사우루스와 모사사우루스와 오프탈모사우루스를 낳았습니다.

 

우리 인간과 늑대는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늑대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야생 동물들이 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야생 동물들을 구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과 야생 동물은 다릅니다. 어쩌면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보다 야생 늑대는 훨씬 이질적인 존재일지 모릅니다. 외계인이 다른 장소에서 왔기 때문에, 외계인은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방인(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을 구상할 때, 우리는 우리를 참고합니다. 야생 동물이 이방인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직접 야생 동물을 구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보다 야생 동물은 훨씬 이질적일지 모릅니다.

 

 

현실에는 지랄하네가 없습니다. 오직 스페이스 오페라 속에만 지랄하네는 있습니다. 현실에는 야생 늑대가 있습니다. 현실과 게임 <울프>에서 우리는 모두 북아메리카 야생 늑대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 지랄하네가 없기 때문에, 현실에 야생 늑대가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야생 늑대보다 지랄하네가 훨씬 이질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현실에는 중력 망치 같은 기이한 첨단 장비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들이 기이한 첨단 장비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들은 지적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지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이용해 다른 지적 존재들을 구상합니다.

 

기독교에서 야훼가 자신을 이용해 인간들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를 이용해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들을 구상합니다. 외계인들은 우리에게서 비롯했습니다. 외계인들과 달리, 늑대를 비롯해 야생 동물들은 우리에게서 비롯하지 않았습니다. 검수리와 아무르 호랑이와 장수 거북은 우리 인류에게서 비롯하지 않았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검수리와 아무르 호랑이와 장수 거북을 낳았습니다. 검수리와 아무르 호랑이와 장수 거북이 우리 인간에게서 비롯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랄하네가 우리 인간에게서 비롯했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보다 야생 동물은 진짜 이방인일지 모릅니다.

 

 

[게임 <헤일로> 시리즈는 여러 외계인들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헬리 외계인들이 정말 이방인인가요?]

 

 

흔히 SF 독자들은 비인간 존재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이 재미있다고 말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온갖 비인간 존재들이 있습니다. 작은 엉고이부터 떡대 지랄하네까지, <헤일로> 시리즈는 외계인들, 비인간 존재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정말 엉고이와 지랄하네가 비인간 존재들인가요? 상헬리가 정말 이방인입니까? 스타니스와프 렘이 지적한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들은 그저 외관이 다를 뿐인지 모릅니다. 외관이 다르다고 해도, 아무리 코버넌트 외계인들이 기이하다고 해도, 그들은 인간(지적 존재)일 겁니다. 그들이 친숙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저 유별날 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일로> 시리즈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어떤 지적 존재가 정말 이질적이라면, 사람들은 그 지적 존재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무서워하고 쫓아낼 겁니다. 반다나 싱이 쓴 단편 소설 <허기>에서 주인공은 SF 소설들을 좋아합니다. SF 소설들에 외계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계인들은 이질적입니다. 소설 주인공 역시 이질적입니다. 소설 주인공이 인류 문명의 부조리들과 모순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은 굶주립니다. 이 세상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이 굶주림에도, 인류 문명은 으리으리한 건물들을 짓고, 화려한 상품들을 팔아먹고, 애완 동물들에게 비싼 옷들을 입히고, 음식물들을 낭비합니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주림에도, 다른 한쪽에서 백화점들은 화려한 상품들을 팝니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주림에도, 다른 한쪽에서 건축 회사들은 비싼 고급 아파트들을 짓습니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주림에도, 다른 한쪽에서 부잣집 강아지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사람들이 굶어뒈지든 말든, 인류 문명은 비용을 펑펑 낭비합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심각한 빈부 격차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너무 미친 짓거리입니다. 이건 너무 개X랄 같은 헛짓거리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왜 인류 문명이 개X랄 같은 미친 헛짓거리를 저질러야 합니까? 환경 오염들 역시 이런 미친 헛짓거리에 속합니다.

 

비디오 게임 <심파크>에는 심각한 환경 오염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가 컴퓨터 화면 속의 자연 생태계에서 시선을 돌리고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를 바라본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각종 환경 오염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심파크> 속의 국립 공원에 들어가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게임 속의 평온한 국립 공원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심파크>를 플레이해야 합니다. 아무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환경 오염들을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게임들은 먹이 그물망을 묘사합니다. 먹이 그물망은 드넓은 야생 보호 구역을 요구합니다. 현실 속에서 드넓은 야생 보호 구역이 나타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드넓은 야생 보호 구역보다 경제 개발이 중요하다고 말할 겁니다. 경제 개발? 왜 경제 개발이 중요합니까? 이게 누구를 위한 경제 개발입니까?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도, 경제 발전이 수두룩한 빈민들을 먹일 수 있습니까? 아니, 경제 발전은 빈민들을 먹이지 못합니다. 이게 자본주의 경제 발전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오직 이윤 극대화만 노립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게 유일무이한 작동 원리는 이윤 극대화입니다. 다른 것들은 작동 원리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굶어뒈지든, 여자들이 끔찍하게 폭행을 당하든, 생물 다양성이 줄어줄든, 대기 오염이 심각해지든,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오직 이윤 극대화만 추구합니다.

 

이윤 때문에 자본주의는 발전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작동 원리가 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윤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개무시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으리으리한 건물들과 화려한 상품들과 비싼 사료들에게 투자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파괴합니다. 영리 기업들이 산업 폐기물들을 버린다고 해도,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는 이걸 외부 비용이라고 부릅니다. 외부 비용? 이게 무슨 염병할 헛소리입니까? 자연 생태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연 생태계에 '외부'가 있습니까? 자연 생태계 없이 인류 문명이 존재하지 못하고, 인류 문명 없이 개인들이 존재하지 못함에도, 어떻게 우리가 외부를 규정할 수 있나요?

 

 

이윤 극대화를 위해 영리 기업들이 산업 폐기물 정화 비용을 무시해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학은 자연 환경을 외부라고 취급합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외부를 이야기하나, 자연 생태계에는 외부가 없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자연 생태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대형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만들고, 우주 정거장 속의 폐쇄 생태계를 조성하고, 외계 행성을 지구화한다고 해도, 여전히 (새로운) 자연 생태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무르 래퍼티가 쓴 소설 <식스 웨이크>는 장거리 우주선을 보여줍니다. 장거리 우주선에는 내부 인공 생태계가 있습니다.

 

고리 형태 내부 생태계는 아주 거대합니다. 장거리 우주선은 외계 행성을 향하나, 장거리 우주선은 혼자 외계 행성을 개척하지 못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자연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장거리 우주선은 내부 생태계를 품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건 우리 인류가 자연 생태계를 떠나지 못한다는 반증인지 모릅니다.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미래 인류가 장거리 우주선을 타고 외계 행성으로 떠난다고 해도, 장거리 우주선은 생태계를 품어야 합니다. <식스 웨이크>에서 생태적인 상상력과 내부 생태계 설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나, 무르 래퍼티가 이걸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식스 웨이크>는 생태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미래 인류 문명이 외계 행성을 지구화한다고 해도, 외계 행성 생태계에는 외부가 없을 겁니다.]

 

 

자연 생태계에는 외부가 없습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멍청하게 헛소리를 주절거리나, 우리는 외부를 만들지 못합니다. 이건 망상입니다. 이건 비열한 망상입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외부를 상정하고 폐기물 정화 비용을 아끼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굶어죽음에도, 생물 다양성이 줄어듬에도, 자본주의 경제는 엉뚱한 곳들에 어마어마한 비용을 낭비합니다. 이윤이 아니라 필요를 위해 인류 문명은 생산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 경제는 이윤보다 필요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굶주린다면, 인류 문명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거리들을 제공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은 외부를 상정하지 못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류 문명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와 인류 문명은 동일한 운명입니다. 결국 지구는 아주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입니다. 바이오스피어 건물에서 과학자들이 조심스럽게 내부 생태계를 관리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폐기물들을 정화하고 재활용해야 합니다. 이미 19세기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필요를 위한 생산'과 '유기적인 재활용'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필요를 위한 생산'과 '유기적인 재활용'을 추구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좌파 정당 여자 당원이 '필요를 위한 생산'과 '유기적인 재활용'을 외친다고 해도, 보수 우파들은 좌파 여자 당원을 비웃을 겁니다.

 

 

오히려 보수 우파들은 "악랄한 빨갱이는 닥쳐라.", "계집년은 고작 육아 따위를 맡아라.", "페미 나치 씨발년은 짜져라."라고 조롱할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사람들이 굶어죽고 자연 환경이 시든다고 해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걸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숭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 여자 당원은 소외를 당합니다. 좌파 여자 당원은 이방인이 됩니다. 삐까번쩍한 백화점에서 좌파 여자 당원이 굶주리는 사람들과 환경 오염들을 고민하는 동안, 좌파 여자 당원은 지극히 쓸쓸한 외계인이 됩니다. 반다나 싱이 쓴 단편 소설 <허기>에서 소설 주인공이 외계인에게 공감하는 것처럼, 좌파 여자 당원은 외계인이 됩니다. 좌파 여자 당원은 너무 이질적입니다.

 

미쳐버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좌파 여자 당원은 이질적인 외계인입니다. <허기>는 그저 단편 소설에 불과하나,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 연대기들보다 <허기>는 훨씬 인상적입니다. 단편 소설 <허기>는 왜 사이언스 픽션에서 외계인들이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외계인들을 보고 싶어하나, 이미 현실에는 외계인들이 있습니다. 외계인들은 이질적이고 전복적입니다. SF 독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전복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나, 정말 SF 독자들이 전복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나요? 좌파 여자 당원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전복시키기 원합니다. SF 독자들은 좌파 여자 당원이 악랄한 빨갱이, 미천한 계집년, 페미 나치 씨발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게 전복적인 사고 방식인가요?

 

 

우리는 좌파 여자 당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는 좌파 여자 당원이 있습니다. 현실에는 좌파 여자 당원을 비롯해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있습니다. <헤일로>의 엉고이와 지랄하네와 달리,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인간들입니다. 엉고이와 지랄하네는 스페이스 오페라 외계인이나, 사회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누가 훨씬 이질적인가요? 누가 정말 외계인입니까? 지랄하네보다 좌파 여자 당원은 훨씬 외계인일 겁니다. 현실에 좌파 여자 당원이 있다고 해도, 좌파 여자 당원이 호모 사피엔스라고 해도, 지랄하네보다 좌파 여자 당원은 훨씬 외계인에 가깝습니다.

 

SF 팬들이 지랄하네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닐지 모릅니다. SF 팬들이 좌파 여자 당원에게 공감한다면,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될지 모릅니다. 외계인은 외계인이 아니고, 외계인이 아닌 것은 외계인이 됩니다. 그래서 야생 늑대가 외계인이 아니라고 해도, 야생 늑대는 사이언스 픽션이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색다른 시각으로 검수리와 아무르 호랑이와 장수 거북을 바라볼 때,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될지 모릅니다. 단편 소설 <허기>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님에도, <허기>는 사이언스 픽션을 말할 수 있습니다. <허기>처럼, 우리는 검수리와 아무르 호랑이와 장수 거북으로 사이언스 픽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가 1994년 <울프>를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인, 이방인, 이질적인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야생 늑대가 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 사냥꾼이 총을 쏘고 늑대가 죽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인간과 동물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FPS 게임들에서 지적 존재들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총에 맞습니다. <헤일로>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1994년 게임 <울프>에서 이질적인 존재(야생 늑대)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총에 맞습니다. 그래서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들보다 <울프>는 훨씬 충격적이고 전복적일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울프>를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 게임 플레이어는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울프>를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게임 플레이어가 엉뚱하고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떻게 일반적인 지구 자연 생태계와 일반적인 야생 동물들이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하지만 <울프>에는 특정한 시점이 있습니다. 소설, 만화, 연극, 영화 같은 창작물들에 특정한 시점들이 있는 것처럼, <울프>에는 특정한 시점(야생 동물 시점)이 있습니다. <울프>는 생태계 게임이고, 게임 플레이어는 생태계 게임을 이용해 자연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울프>는 야생 동물 시각을 담을 수 있고, 그래서 <울프>는 이질적인 창작물이 됩니다.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보다 <울프>는 훨씬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이런 생태계 게임에는 장대한 영성이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이런 영성은 훨씬 이질적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달밤에 늑대가 에어로빅하는 헛소리야! 생태계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울 수 있나? 어떻게 <헤일로>보다 <울프>가 훨씬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울 수 있지? 이건 말이 안 돼!"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1994년 <울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이질적이고 전복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으나, 이건 생태계 게임들이 반드시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다는 뜻이 아닙니다. 1994년 <울프>를 비롯해 여러 생태계 게임들은 게임 플레이어가 야생 동물이 된다고 묘사합니다. 최근에 <쉘터> 시리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겁니다. 작은 오소리부터 거대한 코끼리까지,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야생 동물들이 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잠재력에 가깝습니다. 생태계 게임들은 이질적이고 전복적인 감성을 품으나, 게임 플레이어는 그걸 직접 찾고 느껴야 합니다. <울프>에서 사냥꾼이 늑대를 쏘고 죽인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에이, 씨발, 죽었네."라고 투덜거리고 다시 게임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창작물에 전복적인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걸 끌어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전복적인 잠재력을 해석하지 못한다면, 잠재력은 던전 속의 보물 상자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모험가 일행이 직접 던전을 탐험하고 보물 상자를 찾는 것처럼, 우리는 창작물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잠재력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깊고 깊은 던전 속의 보물 상자처럼, 깊고 깊은 창작물 속에서 잠재력은 해석을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사실 아무리 SF 소설들이 전복적이라고 해도, 독자들이 형식과 의미를 해석하지 않는다면, SF 소설들은 그저 글자 나부랭이에 불과할 겁니다. 하얀 것은 그저 종이에 불과하고, 검은 것은 그저 글자에 불과할 겁니다. 비평 서적 <명작을 읽을 권리>에서 한윤정 저자가 "독자는 적극적으로 소설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적극적으로 소설을 해석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 역시 생태계 게임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쉘터 2>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가 스라소니가 되고, 싱그러운 숲 속을 누비고, 하얀 설원과 오로라를 바라보고, 광대한 빙하와 극지 바다에 닿을 때, 게임 플레이어는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보다 이런 영성은 훨씬 이질적이고 웅장할 수 있습니다. (이건 다소 비약적인 주장이나…, 심지어 어떤 관점에서 아서 클라크 소설들보다 <쉘터 2>는 훨씬 초월적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는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보다 <쉘터 2>가 훨씬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다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 게임 <오델 다운 언더> 스크린샷 출저: Dr. Brontosaurus, https://youtu.be/2KUwjzzmA2k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