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일상적인 언어와 비일상적인 상상력 본문
"아, 권수혁은 나른하고 섹시하고…. 어떻게 이런 나른 섹시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권수혁은 인간이 아닙니다. 작가님 그림체는 정말 화보집과 다르지 않아요." 이건 권수혁을 향해 만화 독자들이 보내는 찬사입니다. 권수혁은 보바리 작가가 그린 <남의 BL만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입니다. 제목처럼, <남의 BL 만화>는 로맨스 장르이고, 권수혁은 로맨스를 이끄는 등장인물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로맨스 장르에는 여러 연인 유형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서툴고 풋풋하고, 누군가는 연애를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상대에게 집착합니다.
누군가는 속마음을 감추고, 누군가는 능숙하게 연애를 주도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고, 로맨스 장르는 여러 유형들을 보여줍니다. 권수혁은 능숙하게 연애를 주도하는 유형에 가깝습니다. 훤칠한 키, 탄탄한 몸매, 검은 머리카락, 느긋하고 여유로운 얼굴. 게다가 권수혁은 쉽게 화를 내거나 질투하거나 토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연인이 곁에 있다고 해도, 권수혁은 별로 얼굴을 붉히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만화 독자들은 권수혁을 이른바 '나른 섹시'라고 부르나, 어떤 독자들은 권수혁이 홍조를 띄우기 바랄지 모릅니다.
로맨스 만화에서 홍조는 꽤나 중요한 상징입니다. 홍조는 대사 없이 등장인물의 속마음을 직접 보여줄 수 있습니다. 야마모리 미카가 그린 <한낮의 유성>에서 요사노 스즈메가 마무라 다이키에게 다가갈 때, 마무라 다이키는 크게 얼굴을 붉힙니다. 심지어 스즈메가 마무라의 손을 잡는다면, 붉은 마그마 화산처럼 마무라는 폭발할 겁니다. 시시오 사츠키는 유들유들하게 속마음을 감출 수 있으나, 마무라는 그렇게 하지 못해요. 독자는 뭐라고 마무라가 느끼고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 있고 마무라에게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평소에 마무라 다이키가 꽤나 까칠하기 때문에, 마무라가 얼굴을 붉힐 때, 이건 환상적인 갭 모에가 될 수 있습니다.
사키사카 이오가 그린 <아오하라이드>에 나오는 키쿠치 토우마 역시 환상적인 홍조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아니, 마무라 다이키보다 키쿠치 토우마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마무라보다 토우마는 선배일지 모릅니다. 마무라는 다소 거칠고 냉소적이나, 키쿠치 토우마는 훨씬 부드럽고 요시오카 후타바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갑니다. 마무라와 토우마는 꽤나 다르나, 양쪽 모두 신나게 얼굴을 붉힙니다. 좋아하는 스즈메와 후타바 앞에서 마무라와 토우마가 얼굴을 붉힐 때, 이런 장면들은 대사 없이 속마음을 직접 드러내고, 이런 장면들은 달달한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습니다.
마무라 다이키와 키쿠치 토우마와 달리, 권수혁에게는 이런 홍조가 없습니다. 열정적인 화산처럼 마무라와 토우마가 폭발하는 것과 달리, 권수혁은 꽤나 여유롭고 느긋합니다. 어떤 만화 독자들에게 이건 나른 섹시가 되겠으나, 어떤 독자들에게 이건 불만이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로맨스 만화 등장인물이 반드시 홍조를 띄워야 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권수혁이 나긋하게 미소를 지을 때, 어떤 독자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볼 겁니다. 심지어 어떤 독자들은 아예 내용보다 그림에 푹 빠질지 모릅니다. <남의 BL 만화> 독자들이 그림체를 찬양하는 것처럼, 그림체는 권수혁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제목과 달리) <남의 BL 만화>가 만화가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독자들은 권수혁이 잘 생겼다고 찬양하거나 그림체를 칭찬하지 못했을 겁니다. 독자가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등장인물이 잘 생겼는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그저 글자들을 읽고 상상할 뿐입니다. 만화는 권수혁의 외모를 보여줄 수 있으나, 소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소설은 그저 글자들을 이용해 묘사할 뿐입니다. 소설은 직접 보여주지 못합니다. 소설은 글자들을 이용해 단서들을 늘어놓고, 독자는 단서들을 이용해 상상해야 합니다. '직접 보여주기'와 '단서 제공하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스테프니 메이어가 쓴 <트와일라잇>에서 에드워드 컬렌은 굉장한 미소년일지 모릅니다. 아니, 에드워드 컬렌은 흡혈귀이고, 꽤나 나이가 많고, 그래서 에드워드 컬렌은 미'소년'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에드워드의 겉모습은 미소년입니다. 벨라 스완은 1인칭 시점으로 얼마나 에드워드 컬렌이 멋진지 열심히 칭찬합니다. 에드워드 컬렌을 향한 미사여구들은 하늘을 꿰뚫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벨라 스완이 에드워드를 칭찬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에드워드의 얼굴을 직접 구경하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그저 글자들을 읽을 뿐입니다. 문제는 글자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에드워드 컬렌이라는 이름은 고유 명사입니다.
에드워드 컬렌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는 동명 이인들이 많고, 그래서 이 세상에는 또 다른 에드워드 컬렌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벨라 스완이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에드워드!"라고 부를 때, 이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컬렌 가족의 흡혈귀 '에드워드 컬렌'을 가리킵니다. 에드워드가 벨라를 '너는 나를 위한 마약'이라고 지정한 것처럼, 벨라가 에드워드를 부를 때,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컬렌 가족의 흡혈귀 에드워드를 가리킵니다. 이건 고유 명사입니다. 이건 이 세상에 오직 하나인 에드워드 컬렌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입니다. 벨라가 "에드워드!"라고 불렀을 때, 벨라는 미국 농장이나 영국 소도시의 에드워드 컬렌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유 명사 에드워드를 묘사하기 위해 벨라 스완은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벨라가 언어를 동원할 때, 벨라는 고유 명사들이 아니라 보편적인 단어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에드워드 컬렌은 유일무이한 고유 명사이나, 에드워드 컬렌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보편적입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보편적인 단어들은 고유한 에드워드 컬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고유한 에드워드 컬렌을 설명하기 위해 벨라 스완은 고유한 단어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사실 '에드워드 컬렌'을 가리키는 이름 에드워드 컬렌이 고유 명사라고 해도, 에드워드와 컬렌이라는 두 단어 그 자체는 보편적입니다. 소설 <어스시의 마법사> 설정처럼, 진명(true name)은 오직 하나일지 모르나, 에드워드 컬렌이라는 두 단어는 보편적입니다.
에드워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드워드는 벨라 스완이 '자신을 위한 마약'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약은 보편적인 단어입니다. 에드워드는 마약이라는 단어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서 마약은 보편적인 단어입니다. 사실 단어들은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언어는 사회적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할 때, 언어로서 언어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하지 않는다면, 언어는 그저 신기한 기호에 불과합니다. 코난 도일이 쓴 <춤추는 인형>에서 셜록 홈즈는 인형 암호를 열심히 풉니다. 인형 암호는 언어가 아니라 암호입니다. 수많은 영국 사람들은 인형 암호를 사용하자고 합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영국 제도권 교육은 인형 암호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영국 제도권 교육은 영어를 가르칩니다.
소설 <춤추는 인형>에서 인형 암호는 언어가 아니라 암호입니다. 춤추는 인형 그림들이 언어가 될 수 있다고 해도, 이건 꽤나 비좁은 언어입니다. 셜록 홈즈가 예리하게 분석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것들이 그저 낙서에 불과하다고 여겼을 겁니다. 춤추는 인형 그림이 언어라고 해도, 오직 춤추는 인형 그림을 합의한 사람들에게만 이건 언어가 됩니다. <춤추는 인형>이 보여주는 것처럼, 언어는 선험적이지 않습니다. 인간 이전에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춤추는 인형 그림을 합의하지 않았다면, 춤추는 인형 그림은 언어가 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인형 그림을 대충 그린다고 해도, 이건 언어가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만듭니다. 몇몇 사람이 춤추는 인형 그림을 만드는 것처럼, 사람들은 언어를 만듭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클링온 언어 같은 가상의 종족 언어를 만듭니다. 사람들이 언어를 만들 때,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언어를 만듭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스타 트렉> 팬덤은 일종의 공동체입니다.) 언어는 사회적입니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언어를 이용해 소통하고, 그러는 동안 언어는 나타나고 사라지고 바뀝니다. 게다가 수많은 사회 구조들에는 수직적인 계급들이 있습니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장악하고, 그래서 지배 계급은 언어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지배 계급이 언어를 장악할 때, 피지배 계급은 이런 언어를 이용하고 지배 계급의 관념을 따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낙태'와 '실업'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낙태와 실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낙태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임산부가 아기를 지우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낙태는 문자 그대로 아기를 떨어뜨린다는 뜻입니다. 이건 아기에게 초점을 마춥니다. 하지만 왜 낙태가 반드시 낙태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낙태가 아니라 '임신 중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임신 중절은 아기보다 임산부를 가리킵니다. 임신 중절은 여자에게 임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임신 중절은 여자의 몸이 여자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자의 몸은 여자의 것입니다.
여자의 몸은 남편의 것이 아니고, 의사의 것이 아니고, 국가 정부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공유 사회를 열심히 부르짖는 사람들조차 사람들이 육체들을 공유해야 한다고 외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임신 중절보다 낙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낙태라는 단어가 짧고 편리하기 때문에? 임신 중절이라는 단어가 어려운 한자어이기 때문에? 그건 아닐 겁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남한이라는 짧고 편리한 단어보다 대한민국이라는 길다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축구 경기를 격렬하게 응원할 때조차, 사람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길다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남한 선수들'보다 '대한민국 선수들'이 훨씬 길고 불편함에도, 사람들은 구태여 대한민국이라고 외칩니다.
사람들이 임신 중절이 아니라 낙태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지배적인 관념, 가부장적인 관념이 있습니다. 여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자의 몸이 여자의 것이 된다면, 지배 계급은 인구를 조절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국가 정부가 임신이 가능한 여자들을 조사할 때, 지배 계급은 인구를 조절하기 원합니다. 지배 계급이 인구를 조절하지 못할 때, 지배 계급은 힘을 잃을 겁니다. 전략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착실하게 식량과 자원과 인구를 조절하는 것처럼, 지배 계급은 인구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 인구가 함부로 늘어난다면?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인구를 조절하지 못한다면? 마을 회관 건물이 스스로 유닛들을 생산하거나 생산하지 않는다면? 만약 비디오 게임 <문명>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열심히 일꾼 생산 단추를 누른다고 해도, 도시가 일꾼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이런 전략 게임들은 망할 겁니다.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생물량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생물량은 스스로 번성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그저 그것을 관리할 뿐입니다. <심파크> 같은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생물량을 일일이 조절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전략 게임은 인구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인구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 속의 지배 계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실 속의 지배 계급에게 무산자 민중 여자들은 유닛들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유닛 숫자를 조절하는 것처럼, 지배 계급은 인구를 조절하기 원합니다. 여자들의 자궁들은 여자들의 것이 아닙니다. 지배 계급은 여자들의 자궁들을 소유하고 조절하기 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배 계급은 동성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동성애 연인은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동성애 연인들이 늘어날 때, 지배 계급은 훨씬 힘들게 인구를 관리해야 할 겁니다. 낙태라는 단어는 이런 억압적인 사회 구조에서 비롯합니다. 그 자체로서 낙태는 낙태가 아닙니다. 낙태는 억압적인 계급 구조에서 파생합니다. 사람들이 낙태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낙태라는 단어와 함께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함께 받아들입니다.
'실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실업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실업은 문제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자본가 계급이 생산 수단을 독차지하기 때문에 실업은 문제가 됩니다. 노동 시간이 하루 4시간으로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비정규직들이 사라지고, 노동 조합들이 힘을 얻고, 누구나 시민 배당을 받는다면, 실업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은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힘들게 야근하고, 비정규직들이 늘어나고, 노동 조합이 몰매를 맞고, 보잘것없는 월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스펙에 매달릴 때, 자본가 계급은 쉽게 이윤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실업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왜 자본가 계급이 토지와 해안과 회사와 공장 같은 생산 수단을 독차지해야 합니까? 자본가 계급이 혼자 그것들을 만들었습니까? 공장 사장이 혼자 공장을 만들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공장 사장이 혼자 공장을 만들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공장 사장이 공장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당연하지 않음에도, 사실 이게 아주 불합리함에도, 사람들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업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산자 민중들은 반드시 자본가 계급에게 복종해야 하고, 그래서 실업은 당연합니다. 사람들이 실업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함께 받아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언어는 비단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지배적입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기가 옹알이하고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아기는 낙태와 실업이라는 단어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언어는 보편적이고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수직 계급 구조가 사라진다고 해도, 더 이상 언어가 지배적이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언어는 보편적이어야 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들로 소통한다면, 이건 바벨탑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바벨탑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들로 소통했고, 이건 커다란 혼란이 되었습니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언어는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이건 언어가 완벽하게 보편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원시적인 혈거인들과 20세기 도시 시민들은 똑같이 호모 사피엔스들입니다. 원시적인 혈거인들과 20세기 도시 시민들은 생물적으로 똑같습니다. 원시적인 혈거인들과 20세기 도시 시민들은 생물적으로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도시 시민들은 자신들이 원시적인 혈거인들과 아주 다르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것 역시 사실입니다. 원시 혈거인들은 태블릿 PC를 사용하지 못했고 유전자 가위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원시 혈거인들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바뀝니다. 인류 사회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언어가 사회적인 기호라면, 인류 사회가 바뀔 때, 언어 역시 바뀔 겁니다. 그래서 언어는 계속 바뀝니다. 심지어 우리가 이런 거창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사소한 변화들을 겪을 수 있습니다. "거절은 거절한다." 이런 문구는 다소 이상합니다. 거절이 거절할 수 있나요? 거절이 주체가 될 수 있나요? 사실 이 문구는 "나는 네 거절을 거절한다."입니다. 주체로서 나는 거절할 수 있습니다. 거절은 주체가 되지 못해요. 거절은 주체인 '나'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거절은 거절한다."라고 말합니다. 다들 이런 문구를 이해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들을 새로 만듭니다. "어머, 지금 나는 그 남자애와 썸타는 중이야."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연인이 썸을 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20년 전에 남한 사람들은 연인이 썸을 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유행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들을 만듭니다. 이런 유행어는 다소 국지적이고 극단적인 사례이나, 훨씬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말들을 만듭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국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고, 남한 사람들이 김치와 불고기와 된장국을 먹는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이른바) 한국적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남한 사회는 서구 제국주의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받았습니다. 남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국적인 사고 방식보다 서구 제국주의가 있습니다. 일본 수구 꼴통들처럼, 남한 사람들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찬성합니다. 일본 수구 꼴통들과 남한 사람들은 그저 공허한 민족 문제로 다툴 뿐입니다. 양쪽은 똑같이 서구 제국주의에 동조합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제국주의 침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21세기 남한 사람들은 사회 계약론을 떠들 수 있으나, 조선 시대 선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고 방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21세기 남한 시민과 조선 시대 선비는 대화하지 못할 겁니다. 언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어가 바뀐다고 해도, 언어는 당장 바뀌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언어가 뚝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점차 언어는 바뀝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언어는 모습을 바꾸지 않습니다. 아무리 낙태와 실업이 억압적인 상징이라고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낙태와 실업이라는 단어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남한 사회가 페미니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거친다고 해도, 갑자기 낙태와 실업이라는 단어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언어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일상적입니다. 이런 보편적인 단어가 고유한 에드워드 컬렌을 설명할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반면, 그림은 가능합니다. <남의 BL 만화>가 권수혁을 보여줄 때, <한낮의 유성>이 마무라 다이키를 보여줄 때, 만화 독자는 권수혁과 마무라의 고유한 겉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만화 그림체가 권수혁과 마무라를 완벽하게 보여주지 못한다고 해도, 만화 독자는 수많은 시각적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이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트와일라잇>에서 벨라 스완이 열심히 에드워드 컬렌의 미모를 예찬한다고 해도, 소설 독자는 시각적인 정보(고유한 정보)를 얻지 못합니다. 독자는 보편적인 단어들을 이용해 고유한 미모를 연상해야 합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이게 모순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번거로운 연상 과정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에드워드 컬렌은 낫습니다. 이 세상에는 숱한 서구 훈남들이 있습니다. 소설 독자들은 숱한 서구 훈남들을 에드워드 컬렌에게 대입할 수 있습니다. 실사 영화 때문에 에드워드 컬렌은 로버트 패틴슨으로 굳어졌으나, 어떤 독자들은 로버트 패틴슨과 에드워드 컬렌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에드워드 컬렌 삽화들은 로버트 패틴슨과 별로 닮지 않았습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문제라고 해도, 이 세상에는 숱한 서구 훈남들이 있고, 독자들은 쉽게 그들을 에드워드 컬렌에게 대입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에드워드 컬렌이 흡혈귀이고 흡혈귀가 비일상적인 요소라고 해도, 서구 훈남은 비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서구 훈남은 일상적입니다.
서구 훈남들이 아주 흔하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서구 훈남들은 일상적입니다. 서구 훈남들을 찾기 위해 우리는 다른 차원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서구 훈남들과 일상적인 언어를 이용해 에드워드 컬렌을 칭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에서 일상적인 언어는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언어는 일상적입니다. SF 소설은 일상적인 언어를 동원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쳐야 합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일상적인 언어와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대조적입니다. SF 소설이 일상적인 언어를 동원해 비일상적인 우주선 바이오 돔을 묘사할 수 있나요? 서구 훈남은 일상적이나, 우주선 바이오 돔은 절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SF 소설이 일상적인 언어를 동원하고 비일상적인 우주선 바이오 돔을 묘사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해도 장거리 우주선 속의 바이오스피어 돔을 묘사하기 위해 SF 작가는 일상적인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언어가 낡고 닮아빠졌다고 해도, 작가가 언어에 신물이 난다고 해도, 작가는 일상적인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주선 바이오 돔이 고유하고 비일상적이라고 해도, 작가는 일상적인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SF 소설은 작가가 상상하는 측면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할 겁니다. 독자가 SF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작가가 상상하는 측면과 다른 것들을 연상할 겁니다. 소설 모음집 <종이 동물원>에서 켄 리우가 말한 것처럼, 독서는 번역일지 모릅니다.
특히, SF 독서는 번역일지 모릅니다. SF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뭐라고 작가가 상상했는지 '번역'해야 합니다. 이런 번역은 까다롭고 번거롭습니다. 장거리 우주선 속의 바이오스피어 돔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독자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비일상적인 내용을 번역해야 하고, 이건 번거롭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SF 소설이 어렵다고 느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