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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만화 <걱정 마, 잘 될 거야>와 외계 바이오 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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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걱정 마, 잘 될 거야>와 외계 바이오 돔

OneTiger 2019. 6. 22. 20:41

[만화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세 여자들, 힘든 회사 생활, 상대적인 시선들, 성 차별들을 이야기합니다.]



마스다 미리가 그린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세 여자 직원들을 이야기합니다. 오카자키 마리코, 야베 마리코, 나가사와 마리코는 똑같은 회사에 속했습니다. 사무실, 회사 복도와 화장실, 회의실, 회식 자리에서 종종 세 직원들은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나눕니다. 하지만 세 마리코들이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그들은 다른 것들을 느끼고, 고민하고, 생각합니다. 오카자키 마리코는 20대 초반이고 경력 2년차 신입 사원입니다. 오카자키 마리코에게 모든 것을 너무 낯설고 멉니다. 직원 회의에서 오카자키 마리코는 쉽게 의견을 발표하지 못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오카자키는 자신이 열심히 일한다고 모두에게 보여주기 원하나, 모든 것이 너무 낯설기 때문에, 기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카자키에게 모든 것은 너무 머나먼 우주입니다. 야베 마리코는 30대 중반이고 경력 12년차 직원입니다. 야베 마리코는 완전한 베테랑이 아니나, 적어도 야베 마리코는 어떻게 회사가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중간 위치에서 야베 마리코는 신입 사원들과 베테랑 직원들과 부장들을 바라봅니다. 야베 마리코는 신입 사원들이 서툴다고 느끼고 동시에 베테랑 직원들에게서 세대 차이를 느낍니다. 동시에 야베 마리코에게 부장들은 모순과 부조리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나가사와 마리코는 40대 초반이고 20년차 직원입니다. 오카자키에게 나가사와는 까마득한 선배입니다. 나가사와 마리코는 어떻게 회사가 돌아가는지 빠삭하게 파악하고, 급한 일감을 능숙하게 처리하고, 원활한 인맥을 자랑하고, 모든 것에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야베 마리코에게도 나가사와 마리코는 대단한 선배입니다. 문제는 야베가 나가사와를 닮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야베는 30대 중반입니다. 30대 중반 야베는 젊은 20대 직원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야베는 40대를 넘기고 아줌마나 노친네 소리를 들어야 할 겁니다. 야베 역시 마음 속으로 나가사와를 할머니라고 부릅니다.


야베가 나가사와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처럼, 야베가 40대를 넘긴다면, 다른 젊은 직원들은 야베를 아줌마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젊은 오카자키는 야베가 촌스럽고 늙었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40대 야베가 새 옷을 사거나, 맛집을 가거나, 유행가를 부를 때, 젊은 오카자키는 촌스러운 아줌마 야베가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투덜거릴지 모릅니다. 야베는 그걸 두려워합니다. 야베가 중간 위치이기 때문에, 야베는 40대 나가사와를 부정하고 동시에 20대 오카자키를 부러워합니다. 회사 남자 직원들에게 여전히 야베 마리코는 젊은 아가씨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젊은 아가씨라는 타이틀은 사라질 겁니다.



만화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오카자키, 야베, 나가사와 마리코를 번갈아 보여줍니다. 종종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다른 시선들을 이용해 똑같은 사건을 보여줍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오카자키, 야베, 나가사와가 똑같은 사건을 겪었다고 해도, 세 직원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느끼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오직 등장인물 하나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오카자키에게 초점을 맞추고, 야베를 조명하고, 나가사와가 뭐라고 느끼는지 보여줍니다. 만화는 세 등장인물들에게 골고루 비중을 할애하고, 그래서 만화 분위기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20대 신입 사원 오카자키, 30대 중반의 중간 위치 야베, 40대 초반 베테랑 나가사와는 모두 옳고 모두 틀립니다.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상대적인 시선들을 강조하고, 독자들은 세 등장인물들을 골고루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야베가 오카자키를 혼낼 때, 독자들은 "그래, 신입 사원 오카자키에게 회사 업무는 너무 어려워."라고 공감하고 동시에 "맞아, 아무 이유 없이, 야베는 오카자키를 나무라지 않았어."라고 수긍할 수 있습니다. 나가사와와 야베가 대화할 때, 독자는 "어휴, 나가사와는 너무 아줌마스러워."라고 한숨을 쉬고 동시에 "언젠가 야베 역시 아줌마스러운 말투를 구사하겠지."라고 인정할 겁니다.



독자들은 오카자키, 야베, 나가사와를 동시에 인정하고 동시에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만화 시선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만화 시선이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계속 새로운 사고 방식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독자는 신입 사원 오카자키에게 공감하고 동시에 야베를 응원하고 동시에 나가사와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화 시선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여기에는 고정 관념이 없습니다. 만화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인식을 넓힙니다. 특히, 다이얼 전화기와 삐삐와 휴대 전화 에피소드는 이른바 세대 격차를 강조합니다. 젊은 오카자키는 다이얼 전화기를 알지 못합니다.


젊은 오카자키는 삐삐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30대 중반 야베가 학생이었을 때, 야베는 삐삐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야베는 다이얼 전화기가 무엇인지 기억하나, 다이얼 전화기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40대 초반 나가사와는 다이얼 전화기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나가사와는 다이얼 전화기 시대를 그리워하고 향수를 느낍니다. 야베는 왜 다이얼 전화기 시대가 향수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야베는 삐삐 시대를 그리워하고 향수를 느끼나, 오카자키는 왜 삐삐 시대가 향수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카자키는 야베와 나가사와에게 세대 격차를 느낍니다. 하지만 오카자키는 언젠가 자신이 늙은 세대가 되고 젊은 세대가 자신을 늙은이 취급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대는 흐르고 기술은 바뀝니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기술은 상상력이고, 누군가에게 이건 일상입니다.]



나가사와가 학생이었을 때,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나가사와는 약속을 잡아야 했습니다. 약속 없이, 나가사와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가사와와 친구들이 공원에 놀러가고 싶다면, 그들은 약속을 잡아야 했습니다. 오카자키에게 이런 상황은 낯섭니다. 오카자키가 학생이었을 때, 이미 휴대 전화는 존재했습니다. 구태여 오카자키와 친구들이 약속을 잡지 않았다고 해도, 오카자키와 친구들은 휴대 전화로 연락하고 만날 수 있습니다. 친구가 외출했다고 해도, 간단한 휴대 전화 통화로 오카자키는 어디에 친구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가사와가 학생이었을 때, 이런 상황은 불가능했습니다. 나가사와가 학생이었을 때, 휴대 전화는 사이언스 픽션과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휴대 전화가 대중화했을 때, 다들 휴대 전화를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휴대 전화를 장난감 취급하나, 예전에 휴대 전화는 아주 신기한 물품이었습니다. 노인들에게 아직 휴대 전화는 어렵고 낯선 장비이나, 아이들에게 휴대 전화는 휴대 게임 기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7살짜리 아이들조차 가정용 인공 지능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합니다. 노인들에게 가정용 인공 지능은 낯선 장비이나, 7살짜리 아이들에게 가정용 인공 지능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노인들은 가정용 인공 지능을 향해 "아이고, 세상 참 오래 살 일이네."라고 말하나, 아이들은 "어이, 재미있는 코코멜론 애니메이션을 보여줘."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노인들이 7살 아이였을 때, 가정용 인공 지능은 사이언스 픽션과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7살 아이들에게 가정용 인공 지능은 현실입니다. 가정용 인공 지능은 아주 당연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7살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늙을 겁니다. 7살 아이들은 백발 노인들이 될 겁니다. 그때 새로운 장비는 나타날 테고, (한때 어린 아이들이었던) 백발 노인들은 새로운 장비를 신기하게 여길 겁니다. 그때 (새로운 세대) 아이들은 새로운 장비를 당연한 현실이라고 여길 겁니다. 만약 미래에 로봇 하인이 나타난다면, 새로운 세대 아이들에게 로봇 하인은 당연한 현실이 될 겁니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로봇 하인은 사이언스 픽션이나, 미래 아이들에게 로봇 하인은 당연한 현실입니다.


미래 노인들은 로봇 하인을 신기하게 바라볼 겁니다. 만약 미래에 생체 잠수정이 나타난다면, 새로운 세대 아이들에게 생체 잠수정은 당연한 현실이 될 겁니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생체 잠수정은 사이언스 픽션이나, 미래 아이들에게 생체 잠수정은 당연한 현실입니다. 미래 노인들은 생체 잠수정을 신기하게 바라볼 겁니다. 심지어 우주 정거장의 수경 생태계 속에서 미래 아이들은 살아갈지 모릅니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우주 정거장의 수경 생태계는 사이언스 픽션이나, 미래 아이들에게 이건 당연한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미래 노인들과 달리, 미래 아이들은 우주 정거장의 수경 생태계가 당연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2019년 인류 문명에게 우주 정거장의 수경 생태계는 아직 사변입니다. 과학자들은 수경 재배 실험을 진행하나, 아직 수경 재배 생태계 속에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일상을 꾸린 적이 없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여러 세대 우주선들은 폐쇄 인공 생태계들을 보여줍니다. 닫힌 공간 속에서 폐쇄 생태계는 계속 순환합니다. 폐쇄 생태계는 계속 스스로 영양분을 생산하고, 폐기물을 정화하고, 각종 균형들을 유지해야 합니다. 닫힌 공간 속에서 기계는 스스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 현상은 다릅니다. 기계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기계에게는 복잡한 신진 대사가 없습니다. 기계는 훨씬 단순하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세대 우주선이 첨단 설비라고 해도, 미생물보다 세대 우주선은 훨씬 단순한지 모릅니다. 생명체에게 신진 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진 대사는 생명체를 정의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기준입니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는 유명한 농담이나, 대부분 생명체들은 "살기 위해 먹는다."고 대답할 겁니다. 이렇게 생명 현상에게 신진 대사는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가혹한 우주 환경에서 복잡한 신진 대사가 계속 돌아갈 수 있나요? 닫힌 공간 속에서 폐쇄 생태계가 계속 영양분을 생산하고, 신진 대사를 유지하고,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나요? 공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언젠가 이런 흐름이 막히지 않을까요?



사이언스 픽션들은 폐쇄 인공 생태계가 가능하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심지어 하드 SF 작가들조차 폐쇄 인공 생태계가 정말 가능한지 대답하지 못합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세대 우주선을 날린다면, 세대 우주선은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세대 우주선 속의 폐쇄 인공 생태계가 노폐물들을 제대로 정화하지 못한다면? 갑자기 전염병이 퍼진다면? 폐쇄 인공 생태계 속에서 생물 다양성은 제한적일 테고, 제한적인 생물 다양성은 전염병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할 겁니다. 전염병이 세대 우주선 생태계를 무너뜨린다면, 세대 우주선 사람들은 굶어죽을 겁니다.


세대 우주선은 새로운 문명을 위한 빛나는 전망보다 끔찍한 아비규환이 될 겁니다. 심지어 우주선 승무원들은 서로 잡아먹을지 모릅니다. 세대 우주선은 미래의 에섹스 포경선이 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폐쇄 인공 생태계는 진정한 생태계가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제한적인 공간 속에서 자연 생태계가 스스로 순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로봇들은 자연 생태계를 보조해야 할 겁니다. 작은 로봇들이 자연 생태계를 보조한다면, 이게 진정한 생태계인가요? 아니, 이미 우주선 속에 생태계가 있기 때문에, 작은 로봇들이 생태계를 보조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진정한 자연 생태계가 아닐지 모릅니다. 오직 행성 생태계만 자연 생태계가 될지 모릅니다.



[생물학자들은 바이오 돔을 관리합니다. 그래서 바이오 돔 속의 농장이 자연 생태계가 될 수 있나요?]



어쩌면 미래 생태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논의할지 모릅니다. 세대 우주선 속에서 폐쇄 생태계가 순환할 때, 미래 생태학자들은 생태계를 다시 정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2019년 생태학자들에게 이건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2019년 생태학자들이 세대 우주선 속의 폐쇄 생태계를 논의한다고 해도, 2019년 생태학자들은 세대 우주선 속의 폐쇄 생태계를 직접 관찰하지 못합니다. 2019년 일반적인 시민들에게 세대 우주선 속의 폐쇄 생태계는 사이언스 픽션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세대 우주선 속의 폐쇄 생태계를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을 겁니다. 우주선 생태계는 격차입니다.


우주선 생태계는 격차를 만듭니다. 다이얼 전화기와 삐삐와 휴대 전화가 격차를 만드는 것처럼, 오카자키와 야베와 나가사와가 격차를 느끼는 것처럼, 노인들이 가정용 인공 지능을 신기하게 여기고 아이들이 가정용 인공 지능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시대는 바뀌고 변화는 격차를 만듭니다. 이 세대와 저 세대는 격차를 느끼고, 저 세대는 또 다른 세대와 격차를 느낍니다. 흔히 우리는 역사가 돌고 돈다고 말하나, 이건 틀렸습니다. 역사는 돌고 돌지 않습니다. 18세기 사람들에게 잠수정은 일상적이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사람들에게 잠수정은 아주 일상적입니다. 20세기 사람들에게 화성 바이오스피어는 비일상적입니다. 23세기 사람들에게 화성 바이오스피어는 일상일지 모릅니다.



18세기 사람들은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18세기 사람들에게 생태학은 아직 낯선 학문이었습니다. 19세기 진화 이론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진화 이론 없이, 생태학은 없습니다. 18세기 사람들은 외계 행성에서 인류가 폐쇄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20세기 사람들에게 더 이상 생태학은 낯선 학문이 아닙니다. 20세기 사람들은 외계 행성을 관찰하고,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고, 우주 망원경을 띄우고, 그래서 20세기 사람들은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미 20세기 초반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외계 개척 생태계를 논의했습니다.


20세기 후반 SF 소설들에게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은 낯선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사람들, 적어도 이른바 문명인들은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을 낯설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인류 문명은 우주로 나가고 외계 바이오 돔을 만들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20세기 사람들에게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은 비일상적입니다. 외계 행성 바이오 돔에서 20세기 사람들은 살아간 적이 없습니다. 20세기 사람들은 머나먼 겨울 행성에 있는 거대하고 투명하고 단단한 강화 유리 돔 안에서 유전자 조작 꿀벌들이 붕붕거리며 적응력이 강한 꽃송이들을 찾아다니는 광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20세기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그저 상상할 뿐입니다. 반면, 23세기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직접 구경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 꿀벌들을 돌봐야 할지 모릅니다. 양봉 농민들이 꿀벌들을 관리하는 것처럼, 23세기 겨울 행성의 강화 유리 돔 안에서 미래 농민들은 유전자 조작 꿀벌들을 돌봐야 할지 모릅니다. 20세기 사람들이 이런 광경을 상상했을 때, 그들은 짜릿함을 느꼈을 겁니다. 언젠가 이건 가능할지 모르나, 아직 이건 현실이 아닙니다. 미래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직접 마주칠 겁니다. 그들은 새롭게 사고할 겁니다.


미래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사고 방식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자연은 웅장하고 거대한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이 웅장하고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대 괴수를 꿈꿉니다. '자연의 힘'은 작아서는 안 됩니다. 비디오 게임 <레우스>에서 거대한 갑각류 괴수가 바다의 신이 되는 것처럼, 고대 신화는 자연을 웅장하게 포장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런 신화를 재현하기 원합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의 고지라 어스는 이런 신화에 속합니다. 고지라 어스는 21세기 신화입니다. 자연은 웅장해야 하고, 그래서 (지구 생태계를 장악한) 고지라 어스 역시 웅장해야 합니다.



어떤 괴수물 팬들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가 도시 파괴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깝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에서 도시 파괴는 미덕이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도시 파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이 몰락했고, 인류가 우주로 도망쳤고, 고지라 어스가 지구 생태계를 장악했기 때문에, 더 이상 거대 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메카 고지라 도시는 확장하는 중이나, 메카 고지라 도시는 인간 없는 도시입니다. 사실 이건 나노 로봇 도시입니다. 우리는 도시가 인간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하나, 메카 고지라 도시는 인간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지구인들은 메카 고지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외계인들은 메카 고지라를 만들었고, 메카 고지라 도시는 외계 공간입니다.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도시 파괴를 보여주지 않고, 어떤 괴수물 팬들은 불만을 품습니다. 하지만 도시가 없기 때문에, 사방이 이질적인 밀림이기 때문에, 고지라 어스는 정말 자연의 힘 같습니다. 도시가 없기 때문에, 고지라 어스는 정말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분명히 괴수물로서 고지라 어스는 낙제점을 받아야 할지 모르나, 도심 속의 고지라와 달리, 고지라 어스는 자신이 자연의 힘이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고지라 어스는 아주 거대하고, 자연의 힘 역시 아주 거대해집니다. 자연은 거대해야 합니다.



[인류 마을을 지켜보는 거대한 자연의 화신들. 우리는 거대한 자연의 힘을 신에 비유합니다.]



<고지라: 괴수 행성>이 '행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자연은 행성 생태계입니다. 행성 생태계가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은 거대합니다. 하지만 겨울 행성 개척자들에게 자연이 행성 생태계가 될 수 있나요? 겨울 행성은 혹독합니다. 여기에는 생명체가 없습니다. 적어도 여기에는 인간이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자연 생태계가 없습니다. 개척자들이 튼튼한 강화 유리 돔을 짓지 않는다면, 자연 생태계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개척자들은 투명하고 커다란 돔을 짓고 돔 안에 숲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겨울 행성에 이런 바이오 돔들이 널리 퍼진다면, 겨울 행성 사람들은 이것들이 자연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개척자 후손들은 행성 생태계를 본 적이 없을 겁니다.


개척자 후손들이 행성 생태계를 보고 싶다고 해도, 그들은 사진들과 동영상들, 설명들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들이 지구와 다른 테라포밍 행성들에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행성 생태계를 직접 구경하지 못할 겁니다. 개척자 후손들에게 자연은 '수많은 바이오 돔들'일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자연은 울창한 밀림과 웅장한 산호초이나, 겨울 행성 사람들에게 자연은 수많은 바이오 돔들일 겁니다. 겨울 행성에서 자연이라는 개념은 크게 바뀝니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크게 바뀔 수 있습니다. 사고 방식은 바뀌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얄팍하고 안락한 환경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자연은 절대 고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사고 방식이 확장할 때,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질 때, 이건 정말 짜릿합니다.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진다'는 표현 역시 정말 멋스럽지 않습니까. 저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는 용어가 정말 멋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블랙홀 내부 사건이 블랙홀 외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건의 지평선은 다소 폐쇄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감은 정말 멋집니다. 사건의 지평선처럼, 인식의 지평선은 멋진 용어입니다. 인식의 지평선은 정말 사이언스 픽션에게 딱 어울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들을 좋아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방법들을 이용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특별합니다.


오직 사이언스 픽션만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진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생태학, 유전자 조작, 외계 행성, 우주선. 이런 것들은 근대적인 진보에 속합니다. 근대적인 진보 이전에 사람들은 생태학, 유전자 조작, 외계 행성, 우주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이것들을 이용해 인식의 지평선을 넓혔기 때문에,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나타났고,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사이언스 픽션으로 발전했습니다. 중세 판타지 역시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으나, 중세 판타지는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을 말하지 못합니다. 중세 판타지가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을 말하고 싶다면, 중세 판타지는 스팀펑크를 빌리고 근대적인 진보를 묘사해야 합니다.



이건 오직 하드 SF 장르만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힌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르 래퍼티가 쓴 <식스 웨이크>와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오로라>처럼, 세대 우주선 속의 폐쇄 인공 생태계는 하드 SF 장르이나, 스페이스 오페라, 사이언스 판타지, 스팀펑크 역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증기 기관 기술이 바이오 돔을 만들고, 증기 기관 바이오 돔 안에서 드워프 삼림 레인저 악셀리아가 개조 꿀벌들을 관찰한다면, 이것 역시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드워프 삼림 레인저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 속하나, 여러 중세 판타지들은 스팀펑크들을 도입합니다.


중세 판타지와 스팀펑크의 만남은 드물지 않습니다. 스팀펑크는 17~19세기 유럽을 모방합니다. 스팀펑크는 어떻게 근대적인 진보가 나타났는지 회고할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는 중세 판타지와 근대적인 진보를 합치고 과도기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근대적인 진보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근대적인 진보는 과도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쓴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처럼, 심지어 근대적인 진보는 아주 폭력적인 과도기를 거쳐야 했고 여전히 폭력을 휘두릅니다. 우리는 근대적인 진보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고 여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산업 혁명과 만날 때, 이건 근대적인 진보가 됩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산업 강대국이었으나, 소비에트 연방이 현실 사회주의였기 때문에, 이건 근대적인 진보가 되지 못합니다. 노엄 촘스키, 토니 클리프 같은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국가 자본주의라고 말합니다. 국내에서 김수행 교수님 역시 소비에트 연방이 국가 자본주의라고 말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정말 국가 자본주의인가요? 뭐, '가증스러운 배신자' 카를 카우츠키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으나,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는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현실 사회주의든 국가 자본주의든, 분명히 소비에트 연방은 서구 자본주의와 다르고, 그래서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이 근대적인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근대적인 진보를 언급할 때,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런던과 베를린과 시카고와 파리를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런던과 베를린과 시카고와 파리에서 자본주의는 절대 평화롭게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파리 코뮌을 학살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아이들을 탄광에 처박았습니다. 자본주의는 소녀들을 공장들에 밀어넣었고 죽였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이게 시장 경제의 자유이고 보이지 않는 손이고 경제 발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장 경제의 자유를 운운하는 지식인들치고 대가리 속이 정상인 사람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동안, 숱한 여자 노동자들은 죽어나가야 했습니다.



[이게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아니면 판타지인가요? 스팀펑크에는 근대화와 근대화 이전이 모두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여자의 근력이 약하기 때문에 여자가 산업 노동에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건 헛소리입니다.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숱한 여자 노예들과 여자 농민들과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은 죽어나갔습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은 다른 무엇보다 죽어나간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기립니다. 사실 여자 노동자들이 죽어나가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절대 발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여자가 산업 노동에 필요하지 않다고 착각하나, 이건 그저 여자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가 모두 사라진다면, 내일 당장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너질지 모릅니다. 이렇게 스팀펑크는 근대적인 진보가 나타나는 상황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근대적인 진보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근대적인 진보에는 과도기가 있습니다. 근대적인 진보가 발달하는 동안, '근대화'와 '근대화 이전'은 어지럽게 뒤섞였습니다. 19세기 런던은 근대화 도시이나, 코니 윌리스가 쓴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19세기 유럽 사회와 강령술을 말합니다. '근대화'와 '근대화 이전'이 뒤섞이기 때문에, 스팀펑크 판타지에서 드워프 삼림 레인저 악셀리아는 증기 기관으로 구동하는 외계 바이오 돔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는 이걸 묘사할 수 있으나, 하드 SF 장르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드 SF 장르와 스팀펑크에는 서로 다른 장점들이 있습니다. 하드 SF 장르부터 스팀펑크 판타지까지,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만화 <걱정 마, 잘 될 거야>에서 오카자키는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카자키는 다이얼 전화기, 삐삐, 휴대 전화를 이용해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카자키는 언제가 미래 세대가 자신을 할머니라고 여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슬픈 격차입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이 진화 이론을 거부한 것처럼, 근대적인 진보는 슬픈 격차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계속 흐르고 바뀐다면, 왜 이게 슬픈 현상이 되어야 하나요? 우리는 훨씬 폭넓은 시각과 총체적인 사상으로 격차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없이, 오카자키는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카자키가 SF 소설들을 읽는다면, 오카자키는 훨씬 넓은 격차를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오카자키는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오카자키는 격차가 인류 문명을 바꾸고 변화 속에서 희망이 생길 거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진보, 전진이 반드시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인류 문명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변화를 위해 우리가 노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폭넓은 격차를 묘사하기 때문에, 좁은 시선에서 우리는 벗어나고 훨씬 넓고 멀리 바라볼 수 있습니다. 20대 오카자키와 30대 중반 야베와 40대 초반 나가사와는 상대적인 시선들을 드러내나, 언제나 세 여자들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훨씬 보편적인 모순과 부딪힙니다.



그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입니다. 오카자키와 야베와 나가사와가 상대적인 시선들을 드러낸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똑같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느낍니다. 오카자키와 야베와 나가사와는 똑같이 모순을 느낍니다. "왜 여자가 임원이 되지 못하지? 왜 여자가 커피를 대접해야 하지? 왜 여자가 술 시중을 들어야 하지? 왜 여자가 성 희롱을 참아야 하지? 왜 육아 휴가를 사용하기 위해 여자가 눈치를 봐야 하지? 왜 여자가 결혼과 업무 중에서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하지? 왜 여자 사원이 아재 부장에게 항의하지 못하지? 왜 남자들이 여자 부장을 견제하지? 왜 여자 직원이 '여자이기 때문에'라는 단서를 달아야 하지?" 끊임없이 오카자키와 야베와 나가사와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와 부딪힙니다.


초반부터 중반까지, 만화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상대적인 시선들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점차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상대적인 시선들보다 보편적인 모순(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카자키, 야베, 나가사와는 서로 상대적입니다. 그들에게는 상대적인 시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그들을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만화 초반부가 상대적인 시선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만화 후반부에서 보편적인 모순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오카자키, 야베, 나가사와에게 상대적인 시선들이 있다고 해도, 세 여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 선언>은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쳤을 겁니다.



여자 노동자들은 단결하고 억압적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타파해야 합니다. 물론 이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어려운 과정입니다. 오카자키, 야베, 나가사와에게 상대적인 시선들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시선들은 단결을 막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걱정 마, 잘 될 거야>는 어떻게 세 여자들이 연대감을 느끼고 하나가 되는지 보여줍니다. 여자들은 하나가 되고, 자본주의를 뒤집고, 새로운 사회 구조를 고민해야 합니다. 마스다 미리는 여자 노동자들에게 "걱정 마, 잘 될 거야."라고 위로를 건넵니다. 이런 위로는 따뜻하나, 위로는 사회 구조를 바꾸지 못합니다. 사회 구조가 여자 노동자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여자 노동자들은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피지배 계급으로서 여자들이 사회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사회 구조는 계속 여자들을 억압할 겁니다. 사소한 바람은 폭력적인 자본주의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오래 전부터 성 해방 투쟁은 목숨을 걸고 거리에 피를 뿌렸습니다. 성 해방 투쟁이 급진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장벽은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여자들이 자본주의 장벽을 무너뜨릴 때,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여자들은 감바스 알 아히요에 포도주를 곁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바라봐야 합니다. 나가사와 마리코는 "새로운 단어, 새로운 개념이 생겼기 때문에 여자들은 성 희롱에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을 논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자유 시장 경제를 끝장내야 할 겁니다.]



나가사와가 말한 것처럼, 여자들은 새로운 단어를 말해야 합니다. 새로운 단어를 말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단어, 새로운 개념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에는 전복을 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인류 문명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외계 행성 바이오스피어 역시 문제에 부딪힐 겁니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를 보세요. 이 아재는 시장 경제가 외계 행성 개척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망상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오로라>는 이게 망상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아직 기후 변화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시장 경제가 외계 행성으로 나간다면, 시장 경제는 테라포밍, 바이오스피어, 바이오 돔을 착취하고 수탈하고 파괴하고 오염시킬 겁니다. 인류 문명이 평등한 사회 구조를 이룩하기 전에,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은 없습니다. 인류 문명이 평등한 사회 구조를 이룩했을 때, 마침내 사람들은 (감바스 알 아히요에 포도주를 곁들이고)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이 옳은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스크린샷 <Strong city is strong> 출처: Bo-On,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14755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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