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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사변 소설 선언문>과 여성적인 자연의 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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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 소설 선언문>과 여성적인 자연의 힘

OneTiger 2019. 5. 18. 23:08

[현실에는 외계 행성 식생들이 없습니다.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소설 모음집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는 여러 판타지 및 SF 소설들을 포함합니다. 어떤 것은 판타지이고, 어떤 것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어떤 것은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의 경계를 흐릿하게 넘습니다. 작가 후기에서 반다나 싱은 이것들을 '사변 소설'이라고 묶습니다. 그래서 작가 후기 제목은 <사변 소설 선언문>입니다. <사변 소설 선언문>은 왜 인류 문화에게 SF 소설을 비롯해 각종 환상 소설들이 필요한지 설명합니다. 태초에 인류는 악마, 괴수, 신, 정령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거의 모든 전통 속에서 초기 문학들은 환상 소설이나 사변 소설에 속합니다.


고대에는 <길가메시>와 <마하바라타> 같은 서시시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마술적인 사실주의, 대체 역사, 경계 소설 같은 판타지 소설들 및 SF 소설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못하거나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이것들에는 외계 행성과 로켓과 초광속 항해와 마술 지팡이가 있습니다. 거대한 강물 속에서 여자가 뱀으로 변신한다면, 사람들은 이게 현실적이지 않고 불가능하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사변 소설은 여자가 뱀으로 변신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변 소설이 유치하고 황당하다고 조롱합니다.



언뜻 이런 조롱은 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실 속에는 외계 행성 생명체가 없습니다. 소설 <우주 전쟁>은 붉은 화성 식물이 지구 생태계를 바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화성에는 지적 문명이 없습니다. 화성에서 지적 문명은 고사하고 원시적인 생명체 역시 없습니다. 적어도 아직 과학자들은 화성에 생명체가 있다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붉은 식물 같은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붉은 화성 식물이 지구 녹색 생태계를 뒤덮을 거라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이건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우주 전쟁>을 읽습니다. <우주 전쟁>은 사이언티픽 로망스이나, 21세기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온갖 외계 생태계들을 묘사합니다. 비디오 게임 <에이븐 콜로니>에는 여러 외계 식물들이 있고 거대 절지류 괴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쓸모가 있나요? 현실 속에서 아직 과학자들이 외계 식생을 찾지 못했음에도, 왜 우리가 <우주 전쟁>의 붉은 식물들을 읽고 <에이븐 콜로니> 속의 외계 식생을 바라보나요? 미래 가능성을 따지기 위해? 정말 미래 가능성을 따지기 위해 우리가 외계 식생을 바라보나요? <에이븐 콜로니>가 묘사하는 것처럼, 외계 행성에 이런 식생이 정말 존재할까요?



하드 SF 소설들은 미래 가능성들을 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이븐 콜로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미래 가능성들과 과학 고증들을 엄밀하게 따지지 않습니다. 만약 미래 가능성들이 중요하다면, SF 독자들은 오직 하드 SF 소설들만 읽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SF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들 이외에 스페이스 오페라들을 비롯해 다른 하위 장르들을 폭넓게 섭렵합니다. <에이븐 콜로니>는 하드 SF 게임이 아니나, <에이븐 콜로니>는 생태적인 상상력(외계 식생들과 거대 괴수)를 보여주고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미래 가능성은 중요한 요소이나,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미래 가능성이 전부가 아니라면, 왜 SF 팬들이 <에이븐 콜로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하나요? 반다나 싱은 '자연의 힘'을 언급합니다. 신화와 전설과 민담은 무섭고 신비롭고 우아한 자연을 이야기합니다. 신화 속에는 로크가 있습니다. 로크는 아주 거대한 새입니다. 심지어 로크는 코끼리를 낚아챌 수 있습니다. 로크는 아주 거대한 야생 동물이고, 야생 동물은 자연에 속합니다. 그래서 로크는 '자연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로크는 자연의 포악한 힘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자연에는 오직 포악한 힘만 있지 않습니다. 사실 포악함은 자연의 근본적인 힘이 아닐지 모릅니다.



어떤 전래 동화에서 사악한 거인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용감한 청년은 사악한 거인을 물리치고 싶어합니다. 청년은 숲으로 들어갑니다. 숲 속에 거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숲 속에는 오직 사악한 거인만 있지 않습니다. 숲 속에는 낯선 할머니 역시 있습니다. 할머니는 청년을 도와주고 산삼 같은 약초를 건넵니다. 청년은 약초를 먹고, 괴력을 발휘하고, 거인을 물리치고, 평화를 찾습니다. 여기에서 '숲 속의 할머니와 희한한 약초'는 신비롭고 영검한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인간이나, 할머니는 마을보다 숲 속에 속합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이런 구전 문학에는 온갖 판본들이 있습니다. 숲 속의 할머니는 그저 일부 판본들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숲 속의 할머니는 의미심장합니다. 특히, 할머니는 여자이고, 여자는 쉽게 자연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든 여자이고, 과거 세계에서 노인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할머니는 지혜로운 여자, 지혜로운 자연입니다. 지혜로운 자연은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고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건 동아시아 전래 동화이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는 비슷한 구도를 보여줍니다. <모아나>에서 부족 할머니-모아나-테 피티는 지혜로움, 신성함, 여자, 자연을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아나> 역시 고대 오세아니아 신화입니다. <포카혼타스> 역시 나무 정령이 지혜로운 할머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할머니 나무 정령은 지혜로움, 여자, 자연입니다.



[고대 신화 속(의 현대적인 해석)에는 풍성한 자연과 비인간 생명, 여성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모아나>와 <포카혼타스>는 아주 얄팍한 미국 상업 애니메이션에 불과합니다. 여기에는 특별하고 깊은 가치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모아나>와 <포카혼타스>는 심지어 얄팍한 미국 상업 애니메이션조차 신화와 전설을 이용해 자연의 힘을 아주 중요하게 묘사한다고 반증할 수 있습니다. 반다나 싱은 신화, 전설, 민담과 달리 모더니티, 근대성이 자연의 힘을 밀어낸다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근대성이 자연의 힘을 밀어내나요? 근대성에도 자연의 힘이 있을지 모릅니다. 근대적인 생태학 역시 자연의 힘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생태학은 영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세계적인 석학이고 아주 대표적인 동물학자입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동물학자는 영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동물학자는 영성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근대성이 자연의 힘을 밀어낸다는 주장은 옳은지 모릅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동물학자와 달리, 나무 할머니 정령과 테 피티에는 영성이 있습니다.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 역시 자연의 힘에 영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설 <빛의 세계>는 기이한 자연 생태계를 묘사합니다. 기이한 자연 생태계는 웅장하고 신비롭고 풍요로운 영성을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두꺼비와 지네 전래 동화 역시 자연의 힘을 가리킬 수 있을 겁니다. 두꺼비와 지네 동화는 꽤나 유명합니다. 언제나 전래 동화가 그런 것처럼, 어떤 마을에는 착한 소녀가 있습니다. 어느 날, 부엌에서 소녀는 작은 두꺼비를 만납니다. 두꺼비는 그저 야생 동물에 불과하나, 소녀는 두꺼비를 친근하게 여기고 밥을 먹입니다. 두꺼비는 넙죽넙죽 밥을 먹고 쑥쑥 큽니다. 두꺼비는 아주 커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전래 동화가 그런 것처럼, 이제 동화는 악당을 보여줍니다. 무시무시한 거대 지네는 악당입니다. 거대 지네는 마을을 습격하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지네는 제물을 요구하고, 소녀(아니면 소녀의 가족)는 제물이 됩니다.


소녀는 닭똥 같은 눈물들을 뚝뚝 흘리고 자신이 더 이상 두꺼비를 먹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소녀가 거대 지네를 찾아갈 때, 두꺼비 역시 소녀와 동행합니다. 거대 지네가 소녀를 덮치는 순간, 두꺼비는 독을 뿜고 지네를 공격합니다. 거대 지네 역시 독을 뿜고 두꺼비와 싸웁니다. 두 괴수가 독을 뿜고 싸움박질을 벌이는 동안, 소녀는 독에 취하고 기절합니다. 나중에 소녀가 깨어날 때, 소녀는 두꺼비가 거대 지네와 함께 동귀어진했다고 깨닫습니다. 소녀가 두꺼비를 친절하게 대하고 밥을 먹였기 때문에, 두꺼비는 은혜를 갚고 거대 지네를 물리쳤습니다. (구비 문학으로서 이 전래 동화에도 온갖 판본들이 있습니다.)



거대 지네와 거대 두꺼비는 야생 동물입니다. 야생 동물은 자연에 속하고, 이건 자연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는 거대 괴수를 내세우고 자연의 힘(The Force of Nature)을 강조했으나, 이미 전래 동화에는 괴수 대결전과 자연의 힘이 있습니다. 거대 괴수와 자연의 힘은 오직 21세기 블록버스터 영화의 전유물만이 아닙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여성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거대 두꺼비는 선한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녀(여자)는 두꺼비를 먹입니다. 이렇게 전래 동화는 여자, 돌봄 노동, 선한 자연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숲 속의 할머니와 희한한 산삼과 마을 소녀와 거대 두꺼비는 비슷한 요소들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사변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편 소설 <갈증>에서 반다나 싱은 여자, 뱀, 임신을 보여주고 폭력적인 가부장 문화를 비판합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패트리스 머피는 식물 아내와 외계 식생을 이용해 가부장적인 플랜테이션 농업을 타파합니다. 여자와 뱀과 임신, 외계 식생과 식물 아내 역시 여자, 돌봄 노동, 선한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두꺼비를 먹이는 소녀와 외계 행성의 식물 아내 사이에는 커다란 시대 격차와 사상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양쪽에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자연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자연의 힘'은 오직 울창한 숲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여러 의미들이 있습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은 울창한 숲이 멋지다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플랜테이션 농업이 울창한 숲을 파괴한다고 해도, 수구 꼴통 정치인은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수구 꼴통 정치인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적극적으로 숭배할 겁니다. 보수 우파 정치인 역시 플랜테이션 농업을 적극적으로 숭배할 겁니다. 하지만 에코 페미니즘 할머니는 가부장적인 플랜테이션 농업을 비판할 겁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과 보수 우파 정치인과 에코 페미니즘 할머니가 똑같이 울창한 숲에 감탄한다고 해도, 세 사람들은 다른 자연을 말합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과 보수 우파 정치인은 피상적인 자연을 말합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과 보수 우파 정치인은 이분법으로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을 나눕니다. 반면, 에코 페미니스트 할머니는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파악합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은 비단 밀림만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이미 17세기부터 플랜테이션 농업은 원주민 학살 및 노예 무역 및 가정 주부화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여자 노예들은 임신하지 않겠다고 '임신 파업'에 돌입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힘'은 오직 피상적인 자연 환경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자연의 힘은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숲 속의 할머니가 희한한 산삼을 건네는 것처럼, 마을 소녀가 두꺼비에게 밥을 먹이는 것처럼, 모아나가 테 피티를 돕는 것처럼, 여자가 가부장 문화를 벗어나고 뱀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식물 아내가 가부장적인 농민을 몰아내고 외계 식생과 어울리는 것처럼, 에코 페미니즘 할머니가 플랜테이션 농업을 비판하는 것처럼, 자연의 힘에는 여성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메카 고지라가 나타날 때, 거대 괴수 덕후들은 이게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고 외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메카 고지라는 전투 기계입니다. 여기에는 생명 현상이 없고 여성적인 측면이 없습니다. 영화 <퍼시픽 림>에서 거대한 나이프 헤드가 작은 어선을 위협할 때, 거대 괴수 덕후들은 이게 자연의 힘이라고 외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이프 헤드는 생체 병기이고, 이건 종속-해방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자연의 힘이 없습니다. 식물 아내가 가부장적인 농민을 몰아내고 외계 식생과 함께 해방을 추구하는 것처럼, 자연의 힘은 해방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 <퍼시픽 림>은 해방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생체 괴수 병기는 노예와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영화 <퍼시픽 림>에게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 <퍼시픽 림>에서 나이프 헤드를 비롯해 거대 괴수들은 생체 병기입니다. 거대 괴수들은 외계인에게 종속됩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이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나이프 헤드는 외계인들에게 종속됩니다. 인조인간은 해방을 추구했고,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이건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영화 <퍼시픽 림>에서 아무도 나이프 헤드가 종속되었다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는 종속되었으나, 아무도 그걸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습니다. 다들 오직 거대 괴수를 때려잡기 원할 뿐입니다. 관객들 역시 나이프 헤드가 노예라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집시 데인저가 나이프 헤드의 죽빵을 신나게 날린다면, 관객들은 그게 좋다고 느낄 겁니다. 반면,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식물 아내는 외계 식생과 조화를 이루고 해방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소설 <프랑켄슈타인>과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바이오펑크와 개조 생명체를 이용해 종속-해방 관계를 고민합니다. 영화 <퍼시픽 림>에서 나이프 헤드가 바이오펑크 개조 생명체임에도, <퍼시픽 림>은 종속-해방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건 자연의 힘이 아닙니다. 이게 자연의 힘이라고 해도, <식물 아내>와 <퍼시픽 림>은 다르게 자연의 힘을 보여줍니다.



이건 <퍼시픽 림>보다 <식물 아내>가 반드시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시 데인저가 나이프 헤드를 엘보 로켓으로 두들겨팬다고 해도, 관객들이 신이 난다고 환호를 지른다고 해도, 이건 그저 창작의 자유에 불과하고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합니다. 창작의 자유와 취향 존중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창작물을 소비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식물 아내>를 읽고 <퍼시픽 림>을 관람합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무참하게 파괴하는 중입니다. 현실 없이 창작물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나이프 헤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생물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고블린 상어를 비롯해 해양 생태계가 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나이프 헤드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 속의 자연과 창작물 속의 자연을 연결하고 싶다면, <퍼시픽 림>보다 <식물 아내>는 훨씬 나을 겁니다. 비디오 게임 <에이븐 콜로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이븐 콜로니>는 경이롭고 신비한 외계 식생들과 거대 괴수를 보여줍니다. 이건 자연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 이런 외계 식생들과 거대 괴수가 여성적인 측면을 포함하나요? 여기에 영성이 있나요? 사람들이 인류 문명보다 원대한 자연 환경에 감탄하나요?



이건 생태적인 상상력이 반드시 여성적인 측면과 영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태적인 상상력은 여성적인 측면과 영성을 제외하고 원초적인 전투나 거대함이나 무시무시함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창작물이 여성적인 측면과 영성을 제외한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창작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우리가 창작물을 소비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태적인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비평하고 싶다면, 여성적인 측면은 필수적인 기준이 될 겁니다. 애석하게도 <에이븐 콜로니>의 신비로운 외계 식생들에는 여성적인 측면과 영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다행히 SF 울타리 안에서 여러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여성적인 측면과 영성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다른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 판타지들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면, 여성적이고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훨씬 넓어질 겁니다. SF 팬들은 이런 여성적인 자연과 함께 <에이븐 콜로니>의 외계 식생들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신화와 전설과 민담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 역시 '자연의 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반다나 싱은 판타지 소설과 SF 소설을 함께 사변 소설로 묶었습니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과 SF 소설은 다릅니다.



테 피티와 식물 아내는 모두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하지만 테 피티는 판타지(고대 어머니 자연 신화)에 속하고, 식물 아내는 사이언스 픽션(외계 개척 생태계와 바이오펑크)에 속합니다. 테 피티는 녹색 식물 여자입니다. 식물 아내 역시 나무 여자입니다. 테 피티와 식물 아내는 비슷합니다. 사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여자들은 심장을 중시합니다. 부족 할머니와 모아나는 심장을 중시합니다. 모아나 어머니는 심장을 운반하는 모아나를 격려합니다. 바다가 여자인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갈증>에서 여자가 강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많은 지역들에서 물, 부드러움, 유동성, 곡선은 여성적인 측면을 가리킵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칼립소가 바다이고 여자인 것처럼, 애니메이션 <아바타: 아앙의 전설>에서 카타라가 워터 벤더와 치유를 대표하는 것처럼, <모아나>에서 바다는 여자인지 모릅니다. 소설 <뉴욕 2140>이 어머니 바다를 언급하는 것처럼, 물은 여자이고 <모아나>에서 바다는 여자인지 모릅니다. 바다가 여자가 아니라고 해도, 부족 할머니, 모아나 어머니, 모아나 같은 여자들은 심장을 중시합니다. 반면, 부족장, 마우이, 타마토아, 카카모라 같은 남자들은 심장을 빼앗기 원하거나 무시합니다. 마우이는 모아나를 도와주나, 모아나가 먼저 마우이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마우이는 심장을 운반하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히 이런 외계 식생들은 진화 역사를 거쳤을 겁니다. 하지만 모아나는 이걸 알지 못해요.]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이런 구도를 의식했을까요?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의도적으로 여자들과 (자연 여신의) 심장을 연결했을까요? <모아나>에서 환영 속의 남자 부족장은 목걸이를 걸었으나, 이제 더 이상 남자 부족장은 목걸이를 걸지 않고 어머니 섬을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모아나>는 그저 디즈니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에 불과합니다. 문학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으나, 관객들이 <모아나>에 너무 지나친 의미들을 부여한다면, 이건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비단 <모아나>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게시글은 마을 소녀와 거대 두꺼비가 선한 자연과 여성적인 측면을 상징한다고 이야기하나, 여기에는 다른 수많은 해석들이 있을 겁니다. 마을 소녀와 거대 두꺼비는 선한 자연과 여성적인 측면 이외에 다른 것들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풍요로운 자연과 여성적인 측면을 연결하기 때문에, 이 게시글의 해석은 완전히 틀리지 않을 겁니다. <모아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아나>에서 여자들이 (자연 여신의) 심장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건 의미심장한 구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물 아내>에서 식물 아내(여자)와 플랜테이션 농민(남자)은 대립적인 구도를 이룹니다.


이게 아주 뚜렷한 대립 구도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길다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모아나>에서 모아나(소녀)는 자연의 여신을 돕고, 자연의 여신은 오염된 환경을 복원합니다. <식물 아내>에서 플랜테이션 농민이 외계 식생을 파괴할 때, 식물 아내는 플랜테이션 농민을 막고 외계 식생을 보살핍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 생산, 치유, 복원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아나와 테 피티, 식물 아내와 외계 식생에는 뚜렷한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아나와 식물 아내에게는 뚜렷한 차이점들도 있습니다. 가장 커다란 차이점들 중에서 하나는 진화 이론일 겁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는 식물학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단편 소설이 식물학자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 속에 식물학자가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류 문명은 외계 식생을 개척하고, 식물 종족을 만들고, 외계 농장을 짓습니다. 이런 외계 개척 문명에 식물학자가 없다면, 이건 꽤나 엉뚱한 설정일 겁니다. 그리고 식물학자는 진화 이론을 이해할 겁니다. 5월 16일 게시글이 엘리 새틀러를 언급하는 것처럼, 식물학자는 진화 때문에 생물 다양성이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아무리 모아나가 테 피티를 돕는다고 해도, 모아나는 진화 이론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모아나>에서 생물 다양성은 진화 역사에서 비롯하지 않았습니다. 초반부에서 부족 할머니가 설명하는 것처럼, 자연의 여신 테 피티는 생명체들을 만들었습니다. 테 피티의 심장에는 번성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갑각류의 번성을 위해 타마토아는 심장을 노립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생물 다양성은 진화 이론보다 테 피티의 심장에서 비롯합니다. <모아나>가 진화 이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모아나>에서 자연 생태계는 고정적일지 모릅니다. 반면, <식물 아내>가 진화 이론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식물 아내>는 자연 생태계가 유동적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은 모두 상상력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에는 근대적인 진보가 있습니다. 그래서 판타지와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진화 이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근대적인 진보는 사회주의와 페미니즘 같은 좌파 운동을 일으킵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 여성의 날에서 비롯했습니다. 동시에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최초의 무산자 민중 계급 혁명입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파리 코뮌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파리 코뮌에서 가난한 여자들은 적극적으로 코뮌 정부를 지지했고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근대적인 진보가 세상을 엄청나게 바꾸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근대적인 진보에는 혁명적인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이걸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다나 싱은 사변 소설에 자연의 힘과 혁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20세기 초반에 로케야 사카와트 호사인은 페미니즘 유토피아 소설 <술타나의 꿈>을 썼습니다. 여전히 여러 유토피아 소설들,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해방과 혁명을 꿈꿉니다. SF 소설은 자연의 힘을 말하고 동시에 해방을 꿈꿀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힘을 느끼고 혁명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사이언스 픽션을 만나야 하나요? 우리가 마리아 미스 같은 에코 페미니즘 학자를 살펴본다면, 사이언스 픽션 없이, 우리는 얼마든지 자연의 힘을 느끼고 혁명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구태여 사이언스 픽션을 만나야 하나요? 반다나 싱은 칼 융을 언급하고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소설들에 상징과 은유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칼 융은 상징과 은유가 언어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할 때, 우리는 상징과 은유를 이용합니다. 우리가 칼 융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일상 속에서 이미 우리는 숱한 상징들과 은유들을 이용합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에게 "어머, 봄바람은 마음을 살랑살랑 간지럽혀."라고 말한다면, 이게 무슨 뜻인가요? 어떻게 봄바람이 마음을 간지럽힐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마음이 없습니다. 사실 마음(정신)은 심장이 아니라 두뇌입니다. 봄바람이 두개골 속의 두뇌를 간지럽힐 수 있나요? 이웃집 영희가 봄바람이 두개골 속의 두뇌를 간지럽힌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영희는 그저 화사한 날씨에 자신이 설레는 연애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옆동네 철수가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니라면, 철수는 영희의 손을 사랑스럽게 잡을 수 있을 거에요.



[현실 속에 이런 판타지들 및 사이언스 픽션들이 없다고 해도, 여기에는 여러 가치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변 소설 선언문>은 왜 우리에게 판타지 및 사이언스 픽션이 필요한지 설명합니다. 자연의 힘과 영성, 혁명과 전복, 영성을 상징하는 은유. 판타지 및 사이언스 픽션은 이 세 가지를 포함합니다. 이건 모든 사변 창작물이 세 가지를 포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변 창작물은 자연보다 기계를 예찬하고, 혁명보다 지배적인 것에 충성하고, 진부한 비유들을 남발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변 창작물에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마을 소녀가 두꺼비를 먹이는 것처럼, 식물 아내가 외계 식생을 보살피는 것처럼, 여성적인 노동은 누군가를 먹이고 키우고 보살피는 행위입니다.


만약 인류 사회 전체가 여성이 된다면, 인류 사회는 빈곤과 환경 오염을 몰아내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먹이고, 자연 환경을 보살필 수 있을 겁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돌봄 노동들은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여성적인 사회는 혁명해야 합니다. 판타지 및 사이언스 픽션은 이걸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계 행성 식생이 유치하고 황당무계하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외계 식생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황당무계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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