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영화 <나의 마더>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헛소리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영화 <나의 마더>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헛소리

OneTiger 2019. 6. 12. 20:05

영화 <나의 마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인류 문명은 멸망했고, 인류 재건 계획은 인류 문명을 다시 일으키고 싶어합니다. 인류 문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폐쇄 격리 구역에서 로봇 '마더'는 배아를 키웁니다. 배아는 소녀가 되고, 마더는 소녀를 딸이라고 부릅니다. 로봇과 소녀는 엄마와 딸입니다. 소녀 역시 로봇을 계속 마더(엄마)라고 부릅니다. 폐쇄 격리 구역에는 오직 엄마 로봇과 소녀뿐입니다. 소녀는 오직 마더와 이야기하고, 마더와 함께 놀고, 마더와 함께 공부합니다. 마더는 여러 가지를 소녀에게 가르칩니다. 영화 시점은 여러 지식들 중에서 윤리학을 강조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모순적인 상황에 빠진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나요? 무엇이 윤리적인가요? 한 사람의 희생이 다른 여러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한 사람의 희생이 옳은가요? 마더는 소녀에게 묻고, 소녀는 계속 공부합니다. 소녀는 여러 지식들을 배우는 것 같으나, 영화 시점은 윤리학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소녀에게 중요한 것은 윤리학이 아닙니다. 소녀는 격리 구역을 나가고 싶어합니다. 소녀는 바깥 세상을 보고 싶어합니다. 마더는 반대합니다. 바깥 세상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더는 바깥 세상이 치명적인 독소에 오염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소녀는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소녀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격리 구역에는 온갖 물품들이 있습니다. 격리 구역은 첨단 설비입니다. 격리 구역 안에서 소녀는 안전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대부분 중요한 사건들은 격리 구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배경 무대들은 격리 구역입니다. 영화 시점은 폐쇄 공간들을 별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폐쇄 격리 구역은 갑갑합니다. 영화 시점은 연이어 복도들과 통로들과 격문들과 방들을 보여줍니다. 폐쇄 격리 구역은 갑갑한 미궁 같습니다. 격리 구역 속에서 소녀의 마음 역시 갑갑해집니다. 소녀는 드넓은 바깥 세상을 보기 원합니다.


하지만 폐쇄 공간들은 소녀를 가두고, 소녀의 마음 역시 갇힙니다.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영화 <나의 마더>는 폐쇄적입니다. <나의 마더>는 비슷한 폐쇄 공간들을 계속 늘어놓고 폐쇄적인 갑갑함에서 갈등 관계를 이끌어냅니다. 배경 무대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갈등 관계는 훨씬 아슬아슬합니다. 만약 영화가 드넓고 다양한 배경 무대들과 여러 등장인물들을 제시한다면, 갈등 관계는 여러 방법들로 긴장을 해소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의 마더>에는 다른 방법들이 없습니다. 배경 무대는 오직 격리 구역뿐이고, 등장인물들은 오직 마더와 소녀뿐입니다.



나중에 격리 구역은 다른 방문자를 받아들이나,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등장인물들은 제한적입니다. <나의 마더>는 폐쇄 공간에서 오직 마더, 소녀, 다른 방문자(성인 여자 생존자)만으로 사건을 전개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쉽게 폐쇄 공간, 제한 지역을 연출합니다. 대재앙이 인류 문명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생존자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존자는 대피소, 땅굴, 방공호, 좁은 청정 지역, 안전 가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재앙이 수많은 사람들을 없앴기 때문에, 생존자는 제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만나야 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류 문명을 없앱니다. 문명은 거대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문명과 거대함을 연결합니다. 우리는 작고 비좁은 것을 문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게임 <문명> 시리즈가 초거대 불가사의들을 늘어놓는 것처럼, 문명은 거대해야 합니다. 문명은 비단 질서만 아니라 거대함을 상징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명과 대립적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명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제한적인 것들을 연출합니다. 배경 무대, 등장인물, 소품, 다른 수많은 것들은 제한적입니다. 소설 <최후의 Z>가 보여주는 것처럼,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어린 소녀는 첨예하고 위험한 갈등에 빠질지 모릅니다.



영화 <나의 마더>에서 좁은 공간 속에 오직 몇몇 등장인물만 있기 때문에, 갈등 관계는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영화 시점은 소녀를 주목합니다. 대부분 영화 시점들은 소녀를 따라갑니다. 마더 및 방문자와 달리, 소녀는 바깥 세상을 알지 못합니다. 마더와 방문자는 바깥 세상을 알고, 소녀는 알지 못합니다. 소녀는 바깥 세상을 보기 원하고, 마더는 반대하고, 방문자는 바깥 세상을 알고, 이건 살벌한 갈등으로 확장합니다. 마더가 소녀를 보호하기 원할 때, 이 장면은 엄마가 딸을 과잉 보호하는 것 같습니다.


마더가 소녀를 딸이라고 부르고 소녀가 로봇을 엄마(마더)라고 부르기 때문에, 마더와 소녀는 유사 모녀 관계를 맺습니다. 로봇은 엄마입니다. 엄마로서 로봇은 소녀(딸)를 보호합니다. "내가 틀린 적이 있니? 이제까지 나는 너를 무사히 키웠고 가르쳤어. 너는 나를 믿어야 해." 엄마는 말합니다. 하지만 소녀는 엄마를 벗어나고 바깥 세상을 보고 싶어합니다. 영화 <나의 마더>는 폐쇄 공간들과 로봇, 소녀를 이용해 엄마의 과잉 보호와 사춘기 딸을 연출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시청자들은 <나의 마더>가 엄마, 과잉 보호, 딸, 독립, 사춘기, 여자들의 갈등을 비유한다고 해석할 겁니다. 로봇이 성인 여자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등장인물들은 여자들입니다.



방문자가 마더와 소녀 사이에 끼어들 때, 유사 모녀 관계는 마더와 소녀에서 방문자와 소녀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방문자 역시 완전한 엄마가 되지 못하고, 양쪽 유사 엄마 사이에서 소녀는 갈등합니다. 로봇 (유사) 엄마는 바깥이 위험하다고 반대합니다. 인간 (유사) 엄마는 바깥 세상을 압니다. 소녀에게는 아무 정보가 없고, 영화 시점이 소녀를 따르기 때문에, 시청자들 역시 갑갑한 심정으로 소녀를 지켜봅니다. 시청자들은 마더와 방문자보다 소녀와 사회 관계를 맺습니다. 시청자들은 마음 속으로 물어볼 겁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행동해야 하나? 내가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을 수 있나?" 좋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런 물음을 이끌어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인류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인류 문명은 소녀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소녀는 자유롭습니다. 소녀는 너무 자유롭습니다. 자유는 막중한 책임입니다. 문명 속에서 우리는 이미 문명이 구축한 질서를 따릅니다. 반면, 소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이미 문명이 구축한 질서를 따를 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문명은 우리를 제도권 질서에 밀어넣고 제도권 질서를 가르칩니다.



제도권 질서가 옳은지 우리가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제도권 질서가 옳다고 배워야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옳은지 우리가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가 옳다고 배워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걸 의심한다면, 그 사람은 빨갱이 소리를 듣고, 국가 보안법에 걸리고, 철컹철컹 반짝거리는 은팔찌를 차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우리는 가부장 문화가 옳다고 배웁니다. 우리가 가부장 문화를 의심하고 싶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부장 문화를 의심하고 싶다면, 우리는 페미니즘을 이해해야 합니다. 페미니즘은 가부장 문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빨갱이라고 왜곡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 속에서 페미니즘은 숱한 왜곡들에 부딪힙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페미니즘을 빙자하고 남자에게서 권력을 빼앗는다고 오해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오직 여자만을 위한 사상이라고 오해합니다. 여자 CEO들이 늘어날 때, 사람들은 이게 페미니즘이라고 오해합니다. 유명한 여자 배우들이 당당한 정체성을 외칠 때, 사람들은 이게 페미니즘이라고 오해합니다. 보수 우파 정당이 여자들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이게 페미니즘이라고 오해합니다.



아이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보여주고 자애로운 모성을 외칠 때, 사람들은 이게 페미니즘이라고 오해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근본적인 저항 운동들을 탄압하고 짓밟고 감추고 왜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얄팍하고 안락하고 1차원적인 페미니즘이 저항 운동이라고 오해합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근본적으로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싶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출발했는지 따져야 할 겁니다. 우리는 왜 세계 여성의 날이 나타났는지 따지고, 클라라 체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따지고,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과 중국 인민 공사를 따지고, 왜 반다나 시바가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지 따져야 합니다. 하지만 안락한 페미니즘은 이런 것들을 따지지 않습니다.


제3세계에서 아이들이 병들고 굶주린다고 해도, 가난한 엄마들이 서럽게 울부짖고 상처를 입은 동물처럼 몸부림친다고 해도, 안락한 페미니즘은 이것을 제대로 논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안락한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페미니즘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무시합니다. 제도권 질서, 가부장 문화가 페미니즘을 탄압하기 때문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페미니즘을 탄압한다고 해도, 우리는 가부장 문화보다 페미니즘을 욕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제도권 질서를 따릅니다. 우리와 달리, 제도권 질서는 소녀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소녀에게는 공권력보다 마더가 질서, 관습, 전통입니다. 마더는 소녀를 구속하고, 마더는 제도권 질서와 비슷합니다.



영화 속에서 마더는 좀 우스꽝스럽습니다. 마더는 로봇이나, 사람처럼 마더는 움직입니다. 마더는 표정을 짓는 것 같으나, 이게 표정인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더가 '입꼬리를 올릴 때', 이런 미소는 다소 기이합니다. 마더의 발에는 완충 장치가 있으나, 이건 하이힐 같습니다. 마더가 엄마이고 엄마가 여자이기 때문에, 어떤 시청자들은 완충 장치가 하이힐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영화 제작자들은 완충 장치가 그저 완충 장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떤 관객들은 이게 하이힐이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마더가 필사적으로 뛴다고 해도, 동작은 좀 엉성합니다.


정말 인간형 로봇이 마더와 비슷한가요? 마더가 인간형 로봇을 엄중하게 고증하나요? 현실에 인간형 로봇이 없기 때문에, 적어도 현실에 마더 같은 인간형 로봇이 없기 때문에, 이건 애매한 문제입니다. 달빠(DARPA) 연구원들은 마더를 호평하거나 비판할지 모릅니다. 달빠 연구원들과 달리, 시청자들에게는 로봇 공학 지식들이 없을 겁니다. 어떤 시청자들은 기술적 특이점과 로봇 공학을 빠싹하게 알지 모르나, 훨씬 많은 시청자들은 로봇 공학 지식들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겁니다. 이런 시청자들은 '상식'으로 마더 외관을 평가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시청자들은 마더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마더가 우스꽝스럽다고 해도, 마더는 소녀를 구속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폐쇄 격리 구역에는 문명이 없습니다. 적어도 여기에는 우리가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제도권 질서가 없습니다. 마더가 소녀를 구속한다고 해도, 우리보다 소녀는 자유로울지 모릅니다. 문명이 소녀를 구속하지 않기 때문에, 소녀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라고 물을 겁니다.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인류 문명을 무너뜨리고 이런 물음을 이끌어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왜 인류 문명이 멸망하는가? 여기에서 영화 <나의 마더>는 진부하고 편협한 함정에 빠집니다. <나의 마더>는 인류가 자기 파괴적이고 스스로 몰락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아주 진부한 주장입니다. "탐욕스러운 인류는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 "탐욕스러운 인류는 계속 권력을 추구한다!", "탐욕스러운 인류는 끔찍한 전쟁을 일으킨다!", "인류가 탐욕스럽기 때문에, 문명은 야만이다!" 이런 주장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적극적으로 인류가 탐욕스럽다고 주장합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을 보세요. <고지라: 괴수왕>은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중에서 환경 아포칼립스는 환경 오염들을 강조합니다. <고지라: 괴수왕> 역시 인류가 병균이라고 진부한 주장을 늘어놓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여기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합니다.



<고지라: 괴수왕>에서 등장인물들은 인류가 병균이라는 주장에 반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적으로 반박합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왜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이 심각한지 증명하지 못합니다. 결국 <고지라: 괴수왕>은 인류가 탐욕스럽다고 동의합니다. 하지만 <나의 마더>와 <고지라: 괴수왕>과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인류가 탐욕스럽다고 주장할 때, 인류가 누구입니까? 누가 인류입니까? 제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수많은 여자들은 성 폭행들에 시달렸을 겁니다. 여자들이 뒷골목을 걸을 때마다,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 숨바꼭질을 벌여야 합니다.


세상의 절반이 남자들임에도, 여자들은 남자들이 잠재적인 강간범이라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겁에 질린 여자들이 탐욕스럽습니까? 두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자들이 탐욕스럽습니까? 수많은 아내들은 가정 폭력들에 시달립니다. 피투성이, 멍투성이 아내들이 탐욕스럽습니까?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은 온갖 수모들을 당하고 서럽게 웁니다. 술자리에서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은 울어야 합니다. 그들의 회식 자리는 아주 쉽게 눈물 바다가 됩니다. 회식은 회식보다 눈물 바다입니다. 이런 눈물 바다가 탐욕스럽습니까? 인생이 아주 빌어먹게 좆 같다고 울부짖는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이 탐욕스럽습니까?



[라돈 공중 습격 장면은 정말 장관입니다. 이걸 위해 숱한 제3세계 아이들은 병들어야 했을 겁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이 비싼 돈을 꼴아박고 라돈 시각 효과를 연출하는 동안, 제3세계에서 아이들은 굶어죽었을 겁니다. 비싼 시각 효과는 무시무시한 라돈이 날렵하게 전투기 편대를 격추시킨다고 연출하나, 제3세계 아이들은 병들어야 합니다. 병든 아이들 앞에서 동물처럼 엄마들은 울부짖습니다. 이런 아이들과 엄마들이 탐욕스럽습니까? 인류가 누구입니까? 영화 <나의 마더>가 비난하는 인류, 영화 <고지라: 괴수왕>이 비난하는 인류, 온갖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비난하는 인류가 누구입니까? 인류 문명에는 피지배 계급들이 있고, 지배 계급은 잔악하게 피지배 계급들을 수탈합니다.


왜 <나의 마더>와 <고지라: 괴수왕>과 온갖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착취와 수탈과 오염을 개무시하고 피지배 계급에게 죄를 뒤집어씌웁니까? 왜 피지배 계급이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 힘이 없기 때문에? 피지배 계급이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피지배 계급이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 <고지라: 괴수왕>은 비싼 돈을 꼴아박고 비싼 시각 효과로 라돈을 만듭니다. 어디에서 그 돈이 나타났습니까? 세계 시장 경제가 스스로 돈을 만듭니까? 하늘에서 비싼 돈이 뚝 떨어집니까? 왜 과거에 식민지들을 착취했던 서구 문명이 부유하고, 왜 과거에 식민지였던 제3세계가 가난합니까? 서구 문명과 제3세계가 똑같이 인류입니까? 미국 중산층 백인 남자와 부르키나파소 흑인 엄마가 똑같이 인류입니까?



영화 <나의 마더>는 병들고 굶주리는 제3세계 아이들이 탐욕스럽다고 말합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눈물 바다를 이루는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이 탐욕스럽다고 말합니다. 온갖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성 폭행 피해자들이 탐욕스럽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진짜 범죄를 은폐합니다. 왜 기후 변화가 나타납니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산업 혁명과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지배 계급은 자본가 계급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열심히 산업 폐기물들을 버리는 동안, 임금 노동자들은 병들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서구 자본가 계급이 열심히 부를 축적하는 동안, 식민지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고 착취를 당했습니다. 여전히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자연 환경을 수탈하고 파괴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기후 변화를 책임져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이 이것을 지적하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는 마르크스주의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에코 페미니즘이 염병할 계집년이라고 조롱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에코 페미니즘은 병신 머저리 같은 페미 나치가 되어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킴에도, 폭염 속에서 남한 사람들은 자본주의보다 '악랄한 빨갱이'와 '페미 나치'를 욕합니다.



사람들은 제도권 질서(를 빙자하는 지배 계급 폭력)보다 저항 운동을 욕합니다. 지배 계급의 관념이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억압적인 사회 환경은 억압적인 계급 구조가 당연하다고 세뇌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리고 민중들을 세뇌시킵니다. 영화 <나의 마더>와 영화 <고지라: 괴수왕>과 온갖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역시 한심하고 멍청한 세뇌를 따릅니다. 이건 다소 거친 표현이나, 주둥아리가 지껄인다고 해도, 그건 말이 아닙니다. 대가리가 굴러간다고 해도, 그건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말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좀비가 아닙니다. 인간은 주둥아리로 지껄이지 말고 입으로 말해야 합니다. 인간은 대가리를 굴리지 말고 머리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쉽지 않습니다. 지배적인 환경과 사고 방식과 언어가 긴밀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환경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항 운동들이 한계에 부딪히고 극단적으로 타락한다고 해도, 저항 운동들은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저항 운동들이 극단적이라고 해도, 저항 운동들이 계속 전진한다면, 수직적인 계급 구조는 약해질 테고, 지배적인 환경과 지배적인 관념은 사라질 겁니다. 그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헛소리를 떠들지 않을 겁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고지라: 괴수왕>처럼, 왜 생태적인 상상력들이 헛소리를 떠들어야 합니까? 왜 생태적인 상상력들이 첨단 바이오 돔, 행성 공학, 폐쇄 인공 생태계, 생체 우주선, 거대 괴수, 외계 생태계 탐험, 삼림 건물을 이용해 무식하고 한심하고 멍청한 헛소리를 떠들어야 합니까? 왜 생태학 SF 덕후들이 헛소리를 들어야 하나요? 이 게시글은 울부짖는 제3세계 엄마들을 언급하나, 수많은 생태학 SF 덕후들은 제3세계 가난한 엄마들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왜 생태학 SF 덕후들이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부르키나파소 흑인 엄마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요? 생태학 SF 덕후들은 박애주의 운동가가 아닙니다.


어떤 덕후들은 이기적이고 성깔이 더러운 사람들일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는 박애 정신이나 그런 것 따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태학 SF 덕후들은 생태적인 상상력들이 헛소리를 떠드는 상황을 참지 못할 겁니다. 거의 대부분 덕후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씨발 좆도 모르는 것들이 지랄한다."는 심리입니다. 대부분 덕후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곡해하는 상황을 참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스타크래프트>를 표절했다고 떠들 때, SF 덕후들은 "씨발 좆도 모르는 것들이 지랄한다."고 투덜거릴 겁니다.



생태학 SF 덕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민중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에,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헛소리를 떠들어야 합니다. 생태학 SF 덕후들은 "씨발 좆도 모르는 우파 지식인 새끼들이 지랄한다."고 투덜거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생태학 SF들을 위해, 덕후들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할 겁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