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급진적인 인간에 관한 사이언스 픽션 본문
"인간의, 인간에 관한, 인간에 대한 SF는 없다." 예전에 이렇게 alt.SF 웹진은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2014년 8월 기사에서 alt.SF 웹진은 '결국 사이언스 픽션 역시 보편적인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주장에 크게 반박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사이언스 픽션이 자랑하는 정수를 버립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개인과 개인 수준을 넘어 인간 사회, 인류라는 종,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지성, 아니면 우주 그 자체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장르입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오직 보편적인 인간들만 이야기한다면, 이건 망원경으로 샬레를 들여다보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자랑하는 재미는 심지어 마지막 한 방울조차 SF 요소에 들었습니다. 이렇게 alt.SF 웹진은 주장하고 보편적인 인간 주제에 반박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은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오직 보편적인 인간들만 이야기한다면, 주류 문학 이외에 사이언스 픽션이 존재하기 위한 명분은 크게 줄어들 겁니다. 주류 문학은 미래 메트로폴리스 로봇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스팀펑크 도시의 골렘 제작 마법사를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외계 삼림 행성의 나무 외계인들과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작가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독자가 이런 것들을 읽고 싶다면, 작가와 독자는 사이언스 픽션을 선택해야 합니다. 미래 메트로폴리스 로봇은 로봇과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스팀펑크 도시의 골렘 제작 마법사는 양서류 종족 인간이 인간 종족에 들어간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삼림 행성의 나무 외계인들은 왜 인간 자본가들이 짧은 수명으로 열대 밀림을 벌목하고 난리법석을 부리는지 물을 겁니다. 메트로폴리스 로봇은 사이버펑크가 되고, 골렘 제작 마법사는 스팀펑크가 되고, 나무 외계인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됩니다. 모두 다른 하위 장르들에 속하나, 사이버펑크와 스팀펑크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모두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보편적인 인간보다 비인간 존재들을 늘어놓습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 비인간 존재들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실 속에는 비단 로봇만 아니라 메트로폴리스도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 골렘 제작 마법사는 파라켈수스 및 연금술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주가 넓다고 해도, 정말 우주에 삼림 행성과 나무 외계인들과 살아있는 나무 사이보그 우주선이 있을까요? 우주 생물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대답할 겁니다. 현실 속에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 이런 것들이 없음에도, 왜 SF 작가들이 로봇과 골렘 제작 마법사와 나무 외계인을 이야기하나요?
어떤 SF 작가들이나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이 사이버펑크와 스팀펑크와 스페이스 오페라와 다르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사이버펑크와 스팀펑크와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현실적이고 하드 SF 소설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하드 SF가 현실적인가요? 소설 <블라인드사이트>는 하드 SF입니다. 아무도 이걸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블라인드사이트>가 현실적인가요? 이 소설이 묘사하는 외계인들이 정말 현실적인가요? 흡혈귀와 각종 기이한 인간들이 현실적인가요? 아니, 하드 SF들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하드 SF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에 훨씬 정교한 과학 기술들을 덧붙입니다. 하드 SF들은 공학을 예찬하기 원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장대한 서사, 모험, 전쟁을 꿈꿉니다. 하드 SF에게 장대한 서사, 모험, 전쟁보다 공학 예찬은 훨씬 중요한 소재입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와 하드 SF는 다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하드 SF는 특별히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하드 SF는 모두 상상력을 이용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하드 SF 작가가 모이고 엄청난 자금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 장거리 세대 우주선을 건조하지 못할 겁니다. 장거리 세대 우주선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메트로폴리스 로봇과 골렘 제작 마법사와 나무 외계인들과 장거리 세대 우주선이 모두 비일상적인 상상력이라면, 현실 속에 이런 것들이 없다면, 왜 SF 팬들이 이런 것들을 쓰고 읽어야 하나요? 왜 SF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나요? SF 팬들이 과대 망상증 환자들인가요? SF 팬들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도피하기 원하나요? 사이언스 픽션이 현실 도피 문학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을 과장하고 싶어합니다. "바람은 아름답게 속삭이고, 시냇물은 노래하고, 나뭇잎들은 수다를 떤다." 이 문구는 엉터리입니다. 어떻게 바람이 속삭일 수 있나요?
어떻게 시냇물이 노래하나요? 나뭇잎들에게 정말 입이 있나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 문구가 시적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 문구는 현실을 과장하고, 의인화 장치를 동원하고,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합니다. 풍경이 서정적이기 때문에, 이런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현실을 과장하기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구가 아름답다고 느낄 겁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나무 외계인들이 황당무계하다고 말합니다. 이건 꽤나 희한한 모순입니다. 만약 서정시 속에서 나뭇잎들이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왜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 속에서 나무 외계인들이 우주로 항해하지 못하나요?
현실 속에서 나뭇잎들은 수다를 떨지 못합니다. 하지만 서정시는 나뭇잎들이 수다를 떤다고 말합니다. 이건 비유이고, 의인화이고, 과장입니다. 이건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수다를 떠는 나뭇잎들처럼, 나무 외계인들 역시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사람들은 나무가 장대하고, 생산적이고, 평화롭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무를 동경한다. 나무의 자세를, 나무의 삶을 본받고 싶어 한다." 이렇게 <나무예찬>이라는 서적은 주장합니다. 비단 <나무예찬>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들과 문학들은 나무를 예찬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감성을 확장하고 싶다면, 우리는 나무 외계인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굵고 거대한 나무 줄기들이 외계 행성을 휘감을 때, 높은 나무 외계인들이 은하계 문명을 논의할 때, 생체 우주선들이 우주를 가로지를 때,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적으로' 나무를 예찬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굉장한 예찬입니다. 어떤 예술들과 문학들이 우주적으로 나무를 예찬할 수 있습니까? 다른 예술들과 문학들은 우주를 말하지 못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나무 외계인과 살아있는 식물 우주선을 이용해 나무를 예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무계하다고 무시해야 한다면, 우리는 온갖 문학적인 장치들을 함께 무시해야 할 겁니다.
과장이라는 문학적인 장치와 함께,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또 다른 미덕이 있습니다. 그건 전복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지배적인 것을 전복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고 싶다면, 우리는 지배적인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배적인 현실을 뛰어넘고 싶다면,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지배적인 현실을 뛰어넘고, 현실을 뒤엎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흑인 노예들이 노예 제도를 뒤엎지 않는다면, 어떻게 흑인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여자들이 가부장 문화를 몰아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자들이 평등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인민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끝장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류 사회가 대규모 착취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전복을 꿈꾸어야 합니다. alt.SF 웹진은 <다이버전트>가 사람들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이버전트>가 멍청하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alt.SF 웹진은 하나를 빼먹었습니다. <다이버전트>는 사람들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이버전트>는 자유주의 인간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다이버전트>는 좋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지배적인 사상을 찬양한다면,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멍청해집니다. 그랜드 마스터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alt.SF 웹진은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alt.SF 웹진은 틀렸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소설 <킨>은 훌륭한 SF 소설입니다. 심지어 alt.SF 웹진조차 <킨>이 훌륭한 SF 소설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왜 <킨>이 훌륭한 SF 소설이 되나요? 이 소설이 인간들을 이야기함에도, 왜 이 소설이 훌륭한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여기에 전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흑인 여자 자유민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19세기 흑인 노예 마을 속의 20세기 흑인 여자 자유민입니다. 19세기 노예 마을에게 20세기 여자 자유민은 전복적입니다.
소설 <킨>은 시대적인 격차를 보여줍니다. 19세기에 노예 제도는 지배적이었으나, 언젠가 지배적인 것은 무너집니다. 지배적인 것은 영원불멸하지 않습니다. 착취와 폭력과 수탈은 무너집니다. 흔히 사람들은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고 착각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역사의 종언이나 대안 없는 세상을 떠듭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뀝니다. 소설 <킨>은 타임 슬립을 이용해 어떻게 시대가 바뀌는지 보여줍니다. 소설 <다이버전트>가 좋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하고 소설 <킨>이 훌륭한 이유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살 떨리는 천재적인 필력과 함께) <킨>이 시대적인 격차와 전복을 훨씬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alt.SF 웹진은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인간? 인간이 모두 똑같은 인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는 여러 사상들이 있습니다. 여러 사상들 때문에 인간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동합니다. 이건 그저 개인적인 차이와 사소한 다툼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사상들이 다르기 때문에, 더 정확히 보수 우파가 사회주의 및 페미니즘을 학살하고 탄압하기 때문에, 20세기 인류 문명은 제국주의 수탈,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냉전을 겪어야 했습니다. 보수 우파가 사회주의 및 페미니즘을 학살하고 탄압하기 때문에, 21세기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라는 행성급 환경 재앙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는 지구 지리를 바꿀지 모르고, 우리는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보수 우파가 사회주의 및 페미니즘을 학살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라는 행성급 환경 재앙이 나타남에도, alt.SF 웹진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alt.SF 웹진은 생물종과 행성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열심히 떠드나, 사실 alt.SF 웹진은 행성급 환경 오염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alt.SF 웹진은 인간이 모두 똑같다고 간주합니다. 이건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alt.SF 웹진은 사이언스 픽션을 빙자하고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합니다.
인간은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보수 우파가 사회주의 및 페미니즘을 학살하기 때문에, 현실에는 엄청난 빈곤들과 환경 오염들이 있습니다. 심심하면 소리를 꽥꽥 지르고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무시하고 차별하는 수구 꼴통 할아버지와 밤낮으로 거리에서 시위하고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는 좌파 여자 당원이 똑같은 인간입니까? 수구 꼴통 할아버지는 좌파 여자 당원이 사악한 빨갱이 악마라고 생각할 겁니다. 좌파 여자 당원은 수구 꼴통 할아버지가 자본주의에 세뇌를 당한 좀비라고 생각할 겁니다. 인간은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보수 우파 세력이 좌파를 학살하고 억압하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가 다른 것처럼, 수구 꼴통 할아버지와 좌파 여자 당원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킨>은 훌륭한 사이언스 픽션이 됩니다. <킨>이 다소 부족한 사례라면, 박문영이 쓴 <지상의 여자들>은 훨씬 적합한 사례가 될 겁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처럼, 소설이 여자들의 공동체를 보여줄 때,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등장인물들이 외계인들을 떠들기 때문이고, 동시에 가부장 문화에서 여자가 이방인, 외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류 문명에는 외계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alt.SF 웹진은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간주하고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소설이 공산주의 문명을 이야기한다면, 여기에 외계인이 없다고 해도, 공산주의 문명은 외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정치인들에게 공산주의 문명은 외계인입니다. 공산주의 문명에서 여자들이 부엌을 뛰쳐나올 때, 동성애인들이 합법적으로 결혼할 때, 노동자들이 일터를 통제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풍족한 문화 생활을 향유할 때, 이건 외계 문명이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없애야 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1차 세계 대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2차 세계 대전은 서쪽보다 동쪽으로 뻗었습니다. 만약 나치 군대가 동유럽보다 프랑스를 먼저 공격했고 정복했다면, 유럽과 미국 자본가 계급은 2차 세계 대전에 반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나치 군대는 프랑스보다 동유럽을 먼저 공격했고 정복했습니다. 동유럽 너머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있었고, 그래서 유럽과 미국 자본가 계급은 나치 군대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이 2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유럽 문명을 구했음에도,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고 민중들을 세뇌시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현실 사회주의는 이질적입니다. 식민지들을 수탈해야 하는 자본주의에게 식민지 해방 투쟁을 지원하는 현실 사회주의는 이질적입니다. 만약 자본주의 국가에서 좌파적인 시민이 살아간다면, 좌파적인 시민은 정말 깊은 고독을 느낄 겁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좌파적인 시민은 온갖 모욕들과 수모들을 겪고 자신이 정말 외계인과 다르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이렇게 인류 문명에는 이미 외계인이 있습니다. 인류 문명에 이미 외계인들이 있음에도, alt.SF 웹진은 이걸 외면하고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alt.SF 웹진이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이 똑같나요? 이건 헛소리입니다. 이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늘어놓는 전형적인 망상입니다. 모든 인간(의 사상)이 똑같다는 발언은 아주 위험합니다. 이런 발언이 행성급 환경 오염을 부채질하기 때문입니다. 수두룩한 자연 과학자들은 탐욕스러운 인류가 온실 가스를 뿜고 지구를 뜨겁게 만든다고 염병지랄을 떱니다. 수두룩한 과학자들에게 굶어죽는 수많은 빈민들과 소수 독점 자본가들은 똑같은 인간입니다. 이건 지랄 맞은 헛소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고전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 <프랑켄슈타인>과 <모로 박사의 섬>부터 오늘날 각종 하드 SF 소설들까지, 사이언스 픽션에서 과학자들은 중요한 역할들을 맡습니다. 현실 속에서 자연 과학자들이 헛소리를 나불거릴 때, <프랑켄슈타인>과 <모로 박사의 섬>이 그랬던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과학자들이 헛소리를 씨부린다고 비판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들이 헛소리를 씨부리는 것처럼, alt.SF 웹진은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간주합니다. 이런 발언은 위험합니다. 이런 발언은 너무 위험합니다. 이런 발언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위험합니다.
여전히 수많은 생물학 교과서들은 탐욕스러운 인간이 생물 다양성을 파괴한다고 거짓말하고 학생들을 세뇌시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보수 우파가 사회주의 및 페미니즘을 학살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줄어듭니다. alt.SF 웹진은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간주하나, SF 팬들은 보수 우파 인간과 에코 페미니즘 인간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유주의 인간과 에코 페미니즘 인간은 다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에코 페미니즘 여자는 외계인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에코 페미니즘 여자는 정말 뼈에 사무치는 처절한 고독과 소외를 느낄 겁니다.
심지어 에코 페미니즘 여자에게 외계인이라는 비유는 너무 미약할지 모릅니다. 에코 페미니즘 여자는 너무 지독한 소외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소외는 정말 미쳐버리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런 소외는 정신병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자가 미치고 개X랄을 떤다고 해도, 이건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어떻게 문학이 이런 지독한 소외를 표현할 수 있나요? 절절한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메리 셸리는 <최후의 인간>을 썼습니다. 지구에서 모든 인간이 절멸하고 오직 소설 주인공 하나만 남는다면, 이건 사무치는 외로움을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주류 문학은 이런 과장을 동원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지구에서 모든 인간이 사라진다고 과장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할 수 있습니다. 에코 페미니즘 여자는 최후의 인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수한 좀비들 속의 최후 생존자처럼,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속에서 에코 페미니즘 여자는 최후의 생존자가 되고 지독한 외로움에 몸부림을 칩니다. 단편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소설 주인공이 자신을 전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에코 페미니즘 여자는 너무 전설적인 소외를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주의적인 표현은 이런 지독한 외로움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외계인과 최후의 생존자보다 사실주의적인 표현이 낫다고 여길지 모르나, 또 다른 독자들은 사실주의적인 표현보다 훨씬 극단적인 과장을 원할 겁니다. 문학이 좀비 무리와 최후의 생존자를 말하지 않는다면, 문학은 감히 에코 페미니즘 여자가 느끼는 처절한 외로움을 표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소설 <킨>은 타임 슬립을 동원해 이런 사실을 날카롭고 무시무시하게 포착합니다. 그래서 <킨>은 훌륭한 SF 소설입니다. alt.SF 웹진 역시 이걸 인정합니다. 하지만 alt.SF 웹진은 이걸 인정하고 동시에 이걸 부정합니다.
alt.SF 웹진은 <킨>이 훌륭한 SF 소설이라고 인정하고 동시에 인간들의 이야기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alt.SF 웹진은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들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얼마든지 이질적인 인간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변 소설 선언문>에서 반다나 싱이 말하는 것처럼, 이질적인 인간은 외계인이 됩니다. 반다나 싱은 <지상의 여자들>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반다나 싱이 쓴 단편 소설 <허기>는 왜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들을 말하는지 보여줍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두 똑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문영 작가가 실종 그 자체보다 '실종 이후'를 말한다고 해도, <지상의 여자들>은 SF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alt.SF 웹진은 단편 소설 <허기>를 무시하고 고작 <지상의 여자들> 따위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alt.SF 웹진은 하드한 우주 구축함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우주 구축함이 없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결국 우주 구축함은 비유이고 과장입니다. 하드 SF 소설 속의 우주 구축함은 정교하게 공학을 예찬하는 비유입니다.
하드한 우주 구축함이 비유라면, 실종 이후 여자들의 공동체 역시 비유가 되고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하드한 우주 구축함과 여자들의 공동체에는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여자들의 공동체는 정교하게 공학을 예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자들의 공동체에는 근대적인 진보와 전복이 있고, 따라서 여자들의 공동체는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공동체는 '인간'을 말합니다. alt.SF 웹진은 아주 열심히 인간을 부정하나,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지배적인 인간을 비판하고 이질적인 인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더 넓게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에서 이건 유구한 전통입니다.
alt.SF 웹진이 모든 인간을 똑같이 간주하는 것처럼, 과학자들이 탐욕스러운 인류를 주절거리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자유주의 역시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거짓말을 뻥뻥 떠듭니다. 우리가 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alt.SF 웹진과 과학자들처럼, 우리는 커다란 착각 속에 빠질 겁니다. 자유주의는 헛소리입니다. 노예 제도 사회보다 자유주의 사회는 낫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헛소리는 헛소리입니다. 저 헛소리보다 이 헛소리가 좀 더 낫다고 해도, 헛소리는 그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비평은 이런 헛소리를 지적해야 합니다.
비평은 무엇이 창작물을 만드는지 파악하고 생산 과정 속에서 헛소리가 끼어든다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평가는 싸움닭이고 욕쟁이입니다. 비평가에게 이건 숙명인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비평'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비평가는 욕쟁이가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평가는 '자신이 무엇(지배적인 관념)을 욕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비평가가 이걸 파악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욕설들과 험한 소리들이 난무한다고 해도, 이건 비평이 되지 못합니다. 사이어스 픽션이 자유주의 인간을 찬양할 때, SF 비평가는 이걸 욕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좌파적인 SF 비평가는 훨씬 통렬한 욕쟁이가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지배적인 관념을 때려부수고 이질적인 인간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우주선과 외계인과 로봇을 떠든다고 해도, 이런 이질적인 특성이 없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꽤나 시시해질지 모릅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세요. 이 영화는 우주 항해를 아주 열심히 떠드나, 결국 이 영화는 미국 중산층 가족에 기반합니다. 문제는 중산층 가족이 헛소리라는 사실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가정 주부화시키기 때문에, 중산층 가족이라는 이상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숱한 사회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은 가족 개념을 공격합니다. 이른바 한남충은 자랑스러운 21세기 대한민국의 특산품이 아닙니다. 이미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도 숱한 놈팽이들은 여자들을 착취하고 폭행하기 원했고 온갖 헛소리들을 떠벌였습니다. 오늘날처럼 빅토리아 시대에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온갖 헛소리들을 열심히 부추겼습니다. 솔직히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지식인이라는 인간들이 그저 지식인보다 글쟁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헛소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좀비처럼 사람들은 헛소리를 따릅니다. 영화 <인터스텔라> 역시 헛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중산층 가족 개념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걸 찬양합니다. 이 영화는 비단 지구만 아니라 외계 행성에 중산층 가족 개념을 퍼뜨리기 원합니다. <인터스텔라>는 꽤나 진부하고 동시에 끔찍합니다. 비단 지구만 아니라 외계 행성조차 가부장 문화에 오염되어야 한다면, 이건 너무 끔찍할 겁니다. 이렇게 하드 SF 영화조차 진부한 헛소리에 빠집니다.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네,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인간(지배적인 사상에 물든 인간)과 공산주의 인간(이질적이고 전복적인 인간)은 다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을 이야기할 때, 사이언스 픽션은 자유주의 인간보다 공산주의 인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이걸 외면한다면, 근본적인 전복은 없을 겁니다. 보편적인 인간을 운운하는 주장은 이걸 놓칩니다.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주장은 사이언스 픽션이 이질적인 인간을 비유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질적인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 정당 당원들은 국가 보안법에 걸릴 겁니다. 만약 결국 모든 인간이 똑같이 인간이라면, 왜 공산당 당원들이 국가 보안법에 걸려야 합니까?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을 이야기할 때, 사이언스 픽션은 '이질적인' 인간을 비유합니다.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주장은 이걸 놓칩니다.
이건 보편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편적인 인간은 존재합니다. 우리 모두는 먹고 살아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우리 모두는 자연 환경을 가공하고 식량을 생산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연 환경(생산 수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보편성이 있고, 그래서 보편적인 인간은 존재합니다. 문제는 인류 문명이 계급 투쟁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끊임없이 학살하고 억압하고 세뇌시킵니다. 그래서 지배적인 계급 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악질적으로 둔갑합니다. 이질적인 인간은 여기에 반박하나, 많은 사람들은 지배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주장 역시 지배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alt.SF 웹진은 이걸 지적해야 했으나, alt.SF 웹진 역시 이걸 놓쳤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을 운운하는 주장처럼, alt.SF 웹진 역시 지배적인 인간과 보편적인 인간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이것을 구분할 때,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 SF 작가가 인간이기 때문에, 솔직히 SF 작가는 인간 이외에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결국 SF 작가는 오직 인간만을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SF 작가가 엄중하고 과학적으로 외계인을 묘사한다고 해도, 결국 이건 인간 중심적인 시각을 절대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완벽하게 다른 관점에서 우리 인간이 다른 존재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이게 정말 가능한가요? 결국 우리는 인간이고,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어려운 과학 용어들을 떠들면서 외계인을 보여준다고 해도, 여기에서 인간 중심적인 시선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다양한 존재들보다 다양한 인간들(을 비유하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을 이야기할 때, SF 팬들은 그 인간이 무슨 인간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alt.SF 웹진의 주장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이 지배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구분한다면, 인간의, 인간에 관한, 인간을 위한 사이언스 픽션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