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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SF 장르 가치들: 보색 효과부터 근대 신화까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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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 가치들: 보색 효과부터 근대 신화까지

OneTiger 2020. 2. 22. 21:00

[대체 진화 역사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왜 SF 장르가 비일상적으로 상상하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엄마와 아빠, 두 아들은 우주선을 타고 머나먼 탐사를 떠납니다. 그들은 여러 외계 행성들을 방문하고 외계 생태계들을 조사합니다. 아니면 지구에서 인류는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전면 핵 전쟁 때문에, 인류 문명은 중세로 후퇴했고, 사람들은 우주선은 고사하고 인공 위성조차 꿈꾸지 못합니다. 비록 전면 핵 전쟁이 인류 문명을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빈부 격차를 강화할 테고, 미래 메트로폴리스는 극단적인 빈익빈 부익부가 될 겁니다. 유사 중세 문명처럼, 미래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는 너무 우울합니다. 다행히 세계화 자본주의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은 사회주의 혁명을 (소란스럽거나 조용하게) 일으키고 자본주의와 빈부 격차를 없앨지 모릅니다.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보다 모성적인 사회는 자본주의를 없앨지 모릅니다. 모성적인 사회는 비단 자본주의만 아니라 무분별한 산업 개발과 동물 학대를 없앨 겁니다. 모성 사회에서 돌봄 노동은 가장 커다란 가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 인종 차별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고 인간들을 수탈한다면, 인간들은 인종 차별을 다시 돌아볼지 모릅니다. 서구 백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끔찍하게 학살한 것처럼, 화성 외계인들은 지구 인간들을 끔찍하게 학살합니다.



만약 화성 외계인들이 인간들을 학살하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산업 자본주의가 계속 발달한다면, 인간들은 퇴보할지 모릅니다. 만약 산업 자본주의가 계속 발달한다면, 미래 인류 문명은 암울한 메트로폴리스보다 대량 멸종일지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수많은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 대립을 경고한 것처럼, 미래 인류는 두 부류로 갈라지고 대립할지 모릅니다. 인류는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나, 장대한 생명 진화 역사는 이것을 비웃을 겁니다. 아니면 인류에게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잠재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인류는 잠재력을 각성하고 승천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류가 승천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면, 생명 진화 역사보다 인류는 훨씬 장대할 겁니다. 외계인들이 거대한 원통 우주선을 보내는 것처럼, 우주는 경이롭습니다. 비단 외계인들만 아니라 거대 괴수 역시 경이로울지 모릅니다. 모성적인 엄마 괴수는 인류에게 유전 형질을 나눠주고, 인류는 새롭게 도약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구 자연 환경이 너무 크게 바뀐다고 해도, 엄마 괴수와 새로운 인류는 여기에 적응할 겁니다. 새로운 인류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엄마 괴수가 보여주는 것처럼, 거대 괴수는 모성적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행성 그 자체는 모성적일지 모릅니다.



가족 우주선부터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미래 진화 역사와 거대한 원통 우주선과 엄마 거대 괴수와 대대적인 환경 변화와 모성적인 행성까지, 이것들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SF 평론가들은 이런 설정들이 SF 장르에 속한다고 분류합니다. 언뜻 이런 분류는 오류 같습니다. 어떻게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엄마 거대 괴수가 비슷한 범주가 될 수 있나요? 어떻게 거대한 원통 우주선과 대대적인 환경 변화가 비슷한 범주가 될 수 있나요? 암울한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와 유사 중세 문명이 비슷한 SF 장르인가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양쪽 모두 부정적인 미래를 묘사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미래 묘사가 SF 장르에 속하나요?


만약 부정적인 미래 묘사가 SF 장르에 속한다면, 고대 북유럽 신화가 부정적인 미래(라그나로크)를 예견하기 때문에, 고대 북유럽 신화가 SF 장르에 속하나요? 하지만 SF 평론가들은 고대 북유럽 신화가 SF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고 분류할 겁니다. 왜 암울한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가 SF 장르에 속하고, 왜 라그나로크가 SF 장르에 속하지 않나요? SF 장르가 무엇인가요? 가족 우주선부터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미래 진화 역사와 거대한 원통 우주선과 엄마 거대 괴수와 대대적인 환경 변화와 모성적인 행성까지, 여기에서 유사성이 무엇인가요? 여기에서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들은 SF 장르에 속할 겁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모성적인 거대 괴수는 SF 장르에 함께 속하고, SF 평론가들은 이것을 인정하나, 양쪽은 너무 다릅니다. 고전 유토피아 소설과 슈트 액션 특수 촬영 영화는 너무 다릅니다. SF 평론가들이 SF 장르를 분류하는 동안, 이건 심각한 걸림돌이 됩니다.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SF 팬들은 SF 장르가 존재한다고 인식합니다. 문제는 SF 장르가 너무 다양한 설정들을 뒤섞는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문단과 둘째 문단은 여러 SF 설정들을 언급하나, SF 장르는 이것들 이외에 수많은 설정들을 포함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SF 소설들,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영화들, 연극들, 게임들이 있습니다.


만약 SF 평론가들이 근본적인 유사성을 분석하지 못한다면, 가족 우주선부터 모성적인 행성까지, 단편 소설부터 블록버스터 비디오 게임까지,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사방팔방 흩어질 겁니다. 다행히 SF 평론가들은 근본적인 유사성을 주장합니다. 서구 근대화와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근본적인 유사성입니다. SF 장르는 서구 근대화를 덧붙이고 비일상적으로 상상합니다. 가족 우주선부터 모성적인 행성까지, 여기에는 서구 근대화와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있습니다. 라그나로크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이나, 여기에는 서구 근대화가 없습니다. 고대 북유럽 사회는 대규모 산업 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고대 북유럽 사회와 달리,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대규모 산업 단지를 압니다. 산업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에, 미래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계급 착취를 없앱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대규모 산업 단지를 이용하고 엄청난 산업 폐기물들을 버립니다. 생물 다양성은 크게 감소하고, 지구 환경은 대대적으로 바뀝니다. 엄마 괴수는 환경 오염들을 정화하고 인류에게 유전 형질을 나눠줍니다. 새로운 지구 환경에서 새로운 인류는 적응합니다. 새로운 인류는 산업 자본주의를 버립니다. 미래 사회주의 문명과 엄마 거대 괴수는 모두 비일상적인 상상력이고, 양쪽은 모두 서구 근대화에 기반합니다.


현실에서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세력들을 학살하고, 탄압하고, 고립시키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들은 움츠러들고 타락합니다. 현실에서 엄마 거대 괴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마존 열대 밀림 어딘가에서 엄마 거대 괴수는 잠자는 중인지 모르나, 아직 생태학자들은 엄마 거대 괴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북유럽 신화에서 프레이야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인 것처럼, 엄마 거대 괴수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하지만 고대 신화 프레이야와 달리, 엄마 거대 괴수는 산업 자본주의 오염에 저항합니다. 프레이야는 핵 발전소 폐기물(과 불타는 금요일)을 알지 못합니다.



프레이야가 핵 발전소 폐기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 거대 괴수가 산업 자본주의 오염을 정화하기 때문에, SF 평론가는 프레이야가 SF 장르에 속하지 않고 엄마 거대 괴수가 SF 장르에 속한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SF 평론가가 근본적인 유사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SF 장르를 분류하기 위한 토론을 평화롭게 마무리지을 수… 있나요? 이게 평화로운 마무리가 되나요? 분명히 SF 평론가는 서구 근대화와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근본적인 유사성이라고 분석하나, 시끄러운 토론 속에서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SF 장르가 중구난방이라고 지적할 겁니다. 장거리 유인 탐사 우주선은 SF 설정입니다.


하지만 단편 소설과 블록버스터 비디오 게임 속에서 유인 탐사 우주선은 다르게 존재합니다. 단편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 매체를 쓰기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아무리 유인 탐사 우주선이 첨단 장비라고 해도, 글자 매체는 탐사 우주선을 쉽게 적을 수 있습니다. 글자는 지배적인/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글자를 평균적으로 씁니다. 남한 사회를 보세요. 남한 사회에는 표준화(標準畵)가 없으나, 표준어(標準語)는 존재합니다. 표준어처럼, 글자는 평균적이고, 글자를 쓰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뛰어난 필력은 훌륭한 문학을 쓸 수 있으나, 뛰어난 필력 없이, 사회 구성원들은 글자를 씁니다.



반면, 블록버스터 비디오 게임은 비싼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탐사 우주선을 구현할 겁니다. 글자 매체는 탐사 우주선을 간단하게 적을 수 있으나, 탐사 우주선을 구현하기 위해 블록버스터 비디오 게임은 비싼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SF 단편 소설보다 SF 블록버스터 비디오 게임은 훨씬 비싼 제작 비용을 요구합니다. 여기에서 오직 제작 비용만 문제가 아닙니다. 탐사 우주선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미래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엄마 거대 괴수처럼, 현실에서 탐사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인 우주 탐사 로봇은 존재하나, 유인 탐사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탐사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단편 소설이 탐사 우주선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됩니다. 글자는 추상적입니다. 글자는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글자가 평균적인 기호이기 때문에, 기호는 평균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글자는 특정한 뭔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SF 단편 소설은 '복잡하고 정교한 탐사 우주선'이라고 쓸 수 있으나, 이 문구에서 수식어 '복잡하고 정교한'은 글자입니다. 글자가 평균적이기 때문에, 사실 수식어 '복잡하고 정교한'은 복잡하지 않고 정교하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독자는 이 수식어가 복잡하고 정교한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이건 주관적입니다.



글자가 평균적이기 때문에, 사실 수식어 '복잡하고 정교한'은 복잡하고 정교하기보다 평균적입니다. 글자 매체로서 단편 소설에게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SF 글자 매체에게 이건 너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주류 문학은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만약 어떤 주류 문학이 수마트라 호랑이를 묘사한다면, 아무리 글자가 수마트라 호랑이를 평균적이고 추상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이건 치명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수마트라 호랑이는 멸종 위기 동물이나, 다행히 여전히 현실 속에서 소수 수마트라 호랑이들은 존재합니다.


만약 너무 애석하게도 모든 수마트라 호랑이가 멸종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한때 수마트라 호랑이들이 존재했고, 여러 기록들, 사진들, 동영상들이 수마트라 호랑이들을 표현하기 때문에, 주류 문학 독자는 현실을 참고하고 주류 문학을 읽을 수 있습니다. SF 단편 소설 독자에게 이건 불가능한 해석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와 달리, 현실에서 장거리 유인 탐사 우주선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SF 독자는 현실을 참고하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시각적으로 확인하지 못합니다. SF 단편 소설과 달리, SF 비디오 게임은 장거리 유인 탐사 우주선이 복잡하고 정교하다고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장면과 달리, 글자 매체는 복잡하고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묘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SF 게임이 탐사 우주선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여전히 SF 설정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SF 게임이 탐사 우주선을 제대로 설계할 수 있나요? 아직 과학자들은 장거리 유인 탐사 우주선을 설계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어떻게 장거리 유인 탐사 우주선이 항해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아무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SF 게임이 장거리 유인 우주 탐사선을 설계할 수 있나요? 이건 허풍, 거짓말, 사기, 구라입니다. SF 장르는 허풍, 거짓말, 사기, 구라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SF 비디오 게임이 거짓말하고 구라를 늘어놓고 사기친다고 고발해야 합니다.


비단 장거리 유인 우주선만 아니라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엄마 거대 괴수 역시 허풍, 거짓말, 사기, 구라입니다. 이건 그저 소설과 게임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지껄여댑니다.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지배 계급을 떠받들고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지껄여댑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오직 자본주의 시장 경제만 옳다고 주장하고, 학교 경제학 교과서들 역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예찬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정말 옳은가요?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을 착취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자는 착취 대상이 됩니다.



여자가 착취 대상이기 때문에, 여자는 보조적이고 열등하고 미천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들은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예뻐야 합니다. 남자에게 주된 특성은 능력이나, 여자에게 주된 특성은 외모입니다. 왜 여자에게 주된 특성이 능력이 아닌가요? 사회 구조가 여자 무급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는 가부장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가부장 사회들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육아와 가사는 여자 역할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여자들이 열심히 노동(육아 노동, 가사 노동)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댓가를 지급하지 않습니다.


만약 남자가 육아와 가사를 맡는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댓가를 지급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육아와 가사는 노동이 아닙니다. 이건 의무입니다. 이건 '여자' '의무'입니다. 육아와 가사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여자들은 댓가를 받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합니다. 남자는 돈을 벌 수 있으나, 육아와 가사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여자들은 돈을 벌지 못합니다. 육아와 가사 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비롯해) 인류 사회는 자신을 유지하지 못하나, 육아와 가사는 노동이 되지 못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여자 노동을 착취하고 막대한 이득을 얻습니다. 여자 무급 노동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부유합니다.



남자는 돈을 벌고, 비싼 차를 굴리고, "야, 타!"라고 소리칠 수 있으나, 여자는 돈을 벌어서는 안 되고, 비싼 차를 굴려서는 안 되고, "야, 타!"라고 소리쳐서는 안 됩니다. 남자가 돈을 벌고, 비싼 차를 굴리고, "야, 타!"라고 소리칠 때까지, 여자는 조신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돌봄 노동이 댓가를 받는다면,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을 착취하지 못할 테고, 자본가 계급은 막대한 손해를 입거나, 심지어 자본주의는 무너질지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이 옳다고 세뇌해야 합니다. 경제학 교과서들은 여자 무급 노동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능력이고 여자는 외모'입니다.


아무리 아스트로 차은우가 얼굴 천재라고 해도, 레드 벨벳 아이린처럼, 남자보다 여자는 외모입니다. 여자 무급 노동이 옳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여자 무급 노동을 없애기 원하나, 보수 우파 지식인들과 학교 경제학 교과서들은 여자 무급 노동이 옳다고 지껄여댑니다. 이렇게 SF 설정은 그저 소설과 게임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장거리 유인 탐사 우주선과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거대 엄마 괴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SF 장르는 허풍, 거짓말, 사기, 구라입니다. 하지만 SF 팬들은 SF 장르를 좋아합니다. 만약 SF 장르가 허풍과 구라라면, SF 팬들이 허풍선이, 구라쟁이인가요?



만약 SF 팬들이 구라쟁이가 아니라면, 왜 SF 팬들이 SF 장르를 좋아하나요? 가장 쉬운 대답은 미래 예측입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암울한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처럼, SF 장르는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SF 작가들은 과학 기술들과 미래학들을 고민합니다. 미래 예측처럼, 과학 계몽은 SF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너무 쉽습니다. 이런 대답이 너무 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런 대답에 반박할 겁니다. SF 장르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합니다. SF 작가들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비록 SF 장르가 미래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허구에 불과합니다.


SF 소설은 예언서가 아니고, SF 영화는 비전 영상이 아니고, SF 게임 규칙은 신비로운 주문이 아닙니다. SF 장르는 자연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노라 제미신이 천문학자들에게 사과(?)한 것처럼, SF 장르는 자연 과학 지식들을 과장하고, 뻥튀기하고, 부풀리고, 왜곡합니다. 고생물학자들이 영화 <쥬라기 공원>을 싫어하는 것처럼, 어슐라 르 귄이 양성 전환 종족을 믿지 않는 것처럼, SF 장르는 자연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어슐라 르 귄이 양성 전환 종족을 구상하는 동안, 어슐라 르 귄은 자신이 자연 과학 논문보다 소설을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SF 장르는 그저 허구에 불과합니다.



이건 SF 장르가 자연 과학 논문과 완전히 동떨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노라 제미신이 천문학 강의를 듣는 것처럼, SF 작가들에게 자연 과학 지식들은 중요한 원천이 됩니다. 심지어 피터 왓츠처럼, SF 작가는 과학자일 수 있고, 과학자는 SF 작가일 수 있습니다. 만약 SF 작가가 하드 SF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소설 <오로라>를 쓰기 위해 킴 스탠리 로빈슨이 과학자들을 인터뷰한 것처럼, SF 작가는 첨단 과학 기술들을 연구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SF 장르가 미래학, 자연 과학 지식들을 응용하고 활용하기 때문에, 분명히 SF 장르와 자연 과학 논문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어느 정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설 <오로라>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논문이 아닙니다. 소설 <오로라>는 허구입니다. 아무리 이 소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정교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결국 이건 그저 허구에 불과합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하드 SF보다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고, 그래서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훨씬 허구입니다. 아무리 과학자들이 <오로라>와 <다섯 번째 계절>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과학자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대지 조절 오벨리스크를 설계하지 못합니다. SF 장르는 자연 과학 지식들을 응용하나, 오히려 미래 예측보다 시대 격차는 훨씬 중요한 목적입니다.



16세기와 20세기는 다릅니다. 16세기 사람들은 인공 위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16세기 사람들은 국가 정부가 공공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20세기 사람들은 인공 위성을 압니다. 20세기 사람들은 경이로운 삐, 삐, 삐, 삐-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20세기 사람(여자)들은 국가 정부가 공공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대대적으로 주장합니다. 인류 문명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16세기와 20세기가 다른 것처럼, 20세기와 24세기는 다를 겁니다. 20세기와 24세기가 다른 것처럼, (만약 28세기 인류 문명이 존재한다면) 24세기와 28세기는 다를 겁니다.


어쩌면 28세기에서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사회주의 혁명은 성공할지 모릅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인류 문명 종착역이라고 지껄여대나,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역사의 종언을 떠벌였을 때, 그들은 기후 변화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16세기와 20세기가 다른 것처럼, 인류 문명은 바뀝니다. 비단 인류 문명만 아니라 자연 환경 역시 바뀝니다. 20세기 인류는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를 만나지 못합니다. 쥐라기 생태계와 홀로세 생태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쥐라기 생태계와 홀로세 생태계가 다른 것처럼, 미래 자연 환경은 바뀔 겁니다. 20세기 자연 환경과 미래 자연 환경은 다를 겁니다.



심지어 우주조차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언젠가 우주 현상은 평형 상태에 도달할지 모르고, 우주는 소멸할지 모릅니다. 크고 작은 관점들에서 문명, 자연, 우주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문명, 자연, 우주는 바뀝니다. 아무도 어떻게 문명, 자연, 우주가 바뀔지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나, 문명, 자연, 우주는 바뀔 겁니다. SF 장르는 여기에 주목합니다. 만약 16세기 사람들이 20세기 인공 위성을 구경한다면, 16세기 사람들은 아찔하다고 느낄 겁니다. 시대 격차는 아찔합니다. 16세기 사람들은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고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정 관념 역시 존재하지 못합니다.


시대 격차는 고정 관념을 깨뜨립니다. SF 장르는 시대 격차를 제시하고,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거시적으로 전망합니다. 인식의 지평선은 넓어집니다. 아민더 달리왈이 그린 그래픽 노블 <우먼 월드: 여자만 남은 세상>처럼, 만약 남자들이 사라지고 오직 여자 공동체만 존재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성 해방 운동이 무슨 역할을 맡아야 하나요? 성 해방 운동이 고정적인가요? 성 해방 운동이 오직 여자와 남자 관계만 주목해야 하나요? 백인 여자와 흑인 여자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흑인 여자들 사이에서 트랜스젠더가 고초를 겪지 않나요? 여자 공동체에서 성 해방 운동이 또 다른 역할을 맡아야 하나요?



그래픽 노블 <우먼 월드: 여자만 남은 세상>이 묻는 것처럼, SF 장르에서 인식의 지평선은 넓어집니다.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지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이 아주 아찔하기 때문에, 아찔함을 느끼기 위해 SF 팬들은 SF 장르를 좋아합니다. 비록 SF 장르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고 해도, 심지어 하드 SF 작가조차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직접 설계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찔한 깨달음, 시대 격차, 인식의 지평선입니다. 그래서 시끄러운 토론이 끝날 수 있나요? 시대 격차를 제시하기 위해 SF 장르가 비일상적으로 상상하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제시하나요?


아니, 아직 시끄러운 토론은 끝나지 않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구라이기 때문에, 구라는 고정 관념을 돌파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비(非)현실'입니다. 왜 SF 팬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 비현실을 고민하고 고정 관념을 돌파해야 하나요? 만약 SF 팬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고 비현실이 현실이라고 간주한다면, 이게 또 다른 고정 관념이 되지 않나요? 문명, 자연, 우주는 바뀔 겁니다. 변화 그 자체는 사실이나,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 SF 장르가 변화 그 자체보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제시하나요?



[위성 도시는 시대 격차이나, 결국 위성 도시는 허구입니다. 허구가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나요?]



만약 변화 그 자체, 시대 격차가 중요하다면, SF 장르보다 변증법 철학은 훨씬 나을 겁니다. 변증법 철학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함부로 떠들지 않습니다. 변증법 철학은 변화 그 자체를 논리적으로 분석합니다. 만약 시대 격차가 중요하다면, SF 팬들은 우주 탐사 소설을 읽기보다 변증법 철학 서적들을 읽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 격차가 중요하다고 해도, SF 팬들은 변증법 서적보다 우주 탐사 소설을 읽기 원할 겁니다. SF 장르에게 시대 격차는 중요한 미덕이 될 수 있으나, 이건 완전한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심라이프> 같은 게임조차 그저 재미있는 생태계 시뮬레이션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심라이프>, <인텔리젠트 디자인>, <니치>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대체 진화 역사를 제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조합할 수 있습니다. 대체 진화 역사는 시대 격차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심라이프>, <인텔리젠트 디자인>, <니치>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대체 진화 역사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심라이프>를 플레이하고 장대한 시대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와~, 생명 진화 역사는 정말 장대해! 언젠가 홀로세 생태계는 사라지고, 또 다른 미래 생태계는 나타날 거야! 우리는 경이로운 어머니 자연을 찬양해야 해!"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들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비디오 게임 <니치>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육상 동물들을 없애고 오직 수중 동물들만 조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니치>에서 수중 동물들은 허구입니다. 왜 시대 격차를 느끼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이 허구를 상정해야 하나요? 시대 격차가 정말 중요한가요? 만약 시대 격차가 정말 중요하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니치>를 플레이하기보다 변증법 철학을 배워야 할 겁니다. <니치>보다 변증법 철학은 변화 그 자체를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니치>보다 변증법 철학이 시대 격차에 주목한다고 해도, <니치>와 달리, 변증법 철학 서적은 SF 장르에 속하지 않습니다.


만약 시대 격차와 짜릿한 감성이 목적이라면, SF 평론가들은 변증법 철학 서적들을 SF 범주에 집어넣어야 할 겁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카를 마르크스가 최고의 유물론자라고 평가했고,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는 최고의 SF 작가가 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카를 마르크스는 SF 작가가 되지 않습니다. SF 장르는 미래를 묘사하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과 유물론)이 미래를 묘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미래 청사진이 공상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대 격차가 대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SF 장르에서 시대 격차보다 외부 시선은 훨씬 중요합니다.



SF 장르는 외부 시선을 상정합니다. 숲 속에서 숲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숲 외부에서 숲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숲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외부 시선이 필요합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살아가나, 숲 속에서 숲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우리는 현실 전체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일부 현실만 파악합니다. 현실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현실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현실 외부에서 우리는 현실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현실 외부를 향해 나가기 위해 우리는 '비(非)현실'을 상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비일상적으로 상상합니다.


가족 우주선과 미래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대대적인 지구 환경 변화는 외부 시선입니다. 만약 우주 탐사대가 외계인을 디비딥~♬ 만난다면, 우주 탐사대는 인간과 외계인이 너무 다르다고 느낄 겁니다. 인간과 외계인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우주 탐사대는 인간과 외계인을 대조하고 "인간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외계인 없이, 우주 탐사대는 인간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으나, 외계인 덕분에, 우주 탐사대는 인간이 무엇인지 훨씬 뚜렷하게 깨닫습니다. 보색 효과가 빨간색과 녹색을 대조하는 것처럼, 녹색 덕분에, 빨간색이 훨씬 두드러지는 것처럼, SF 장르는 보색 효과를 연출합니다.



가족 우주선이 보색 효과인 것처럼,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대대적인 환경 변화는 보색 효과입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부각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반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유토피아 없이,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본질적으로 가부장 제도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대립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훨씬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대대적인 환경 변화는 홀로세 생태계를 부각합니다. 대대적인 환경 변화 없이, 우리는 홀로세 생태계를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대적인 환경 변화와 홀로세 생태계가 대립하기 때문에, 우리는 홀로세 생태계를 훨씬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시대 격차에게 중요한 목적은 변화 그 자체보다 보색 효과입니다. 시대 격차가 보색 효과를 연출하기 때문에, SF 장르는 비현실, 가족 우주선, 사회주의 유토피아, 대대적인 환경 변화를 상상합니다. 비현실이 현실을 훨씬 뚜렷하게 부각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비현실 그 자체보다 현실입니다. 이른바 주류 문학은 비현실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현실을 뚜렷하게 부각하지 못합니다. 사변(思辨), 사고 실험(思考 實驗)으로서 SF 장르는 현실을 부각할 수 있습니다.



비단 SF 장르만 아니라 '메리의 방' 같은 여러 사고 실험들은 비일상적으로 상상합니다. 사고 실험들, 인지 시험들은 "만약 뭔가가 뭔가를 한다면?"이라고 묻습니다. SF 장르 역시 "만약 뭔가가 뭔가를 한다면?"이라고 묻습니다. SF 장르와 '메리의 방'에게 이른바 'What If'는 모두 중요한 물음입니다. 사고 실험이 'What If'를 묻는 것처럼, 그래픽 노블 <우먼 월드>는 "만약 남자들이 사라지고 오직 여자 공동체만 존재한다면?"이라고 묻습니다. 이건 SF 설정이고, 동시에 이건 사고 실험입니다. 이런 물음, <우먼 월드>는 성 해방 운동을 훨씬 뚜렷하게 부각합니다. <우먼 월드>는 보색 효과, 외부 시선이 됩니다.


SF 장르에게 보색 효과는 아주 근본적인 미덕입니다. SF 장르는 그저 황당무계한 공상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SF 장르는 허풍, 거짓말, 사기, 구라가 아닙니다. 만약 SF 장르가 허풍, 거짓말, 사기, 구라라면, 사고 실험들 역시 허풍, 거짓말, 사기, 구라가 될 겁니다. 철학자들은 '메리의 방'이 허풍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메리의 방'이 허풍이 아닌 것처럼, <우먼 월드>는 허풍이 아닙니다. 아민더 달리왈은 구라쟁이가 아닙니다. 구라를 치기 위해 아민더 달리왈은 <우먼 월드>를 그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픽 노블 독자들은 <우먼 월드>가 성 해방 운동과 가부장적인 편견들을 부각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SF 장르가 외부 시선을 상정하고 현실을 부각하기 때문에, SF 장르는 비일상적으로 상상합니다. 대체 진화 역사는 시대 격차보다 외부 시선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심라이프>를 플레이하고 생명 진화 역사가 정말 경이롭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와, 세상에! 이게 가능해? 어떻게 이 생명체가 저 생명체로 바뀔 수 있지? 생명 진화 역사는 정말 놀라워!"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낸시 크레스는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를 썼을 겁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외계인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방인(외계인)은 외부 시선이 됩니다.


만약 단편 소설 독자가 소외를 느낀다면, 단편 소설 독자는 이방인에게 감정을 이입할지 모릅니다. 만약 단편 소설 독자가 트랜스젠더거나 소수 민족이거나 사회주의자라면, 지배 계급은 독자(트랜스젠더, 소수 민족, 사회주의자)를 짓밟거나 배척하거나 차별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지배 계급은 독자를 죽일지 모릅니다. 단편 소설 독자는 이방인이 되고, 이방인으로서 독자는 단편 소설 속의 외계인에게 감정을 이입할지 모릅니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외부 시선, 보색 효과가 되고, 그래서 낸시 크레스는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를 썼을 겁니다. SF 장르에게는 이런 미덕, 보색 효과가 있습니다.



이게 만족스러운 대답인가요? 분명히 보색 효과는 근본적인 미덕이고, 이건 만족스러운 대답입니다. SF 평론가는 보색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낸시 크레스가 비일상적으로 상상한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낸시 크레스가 구라쟁이라고 반박한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보색 효과라고 대답하고 토론을 평화롭게 마무리지을 수 있습니다. 아니, 잠깐. 하지만 아직 보색 효과에게는 부족한 측면이 있습니다. 인류 문화에서 고대 신화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먼 월드>처럼, 고대 신화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화염 드래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현실에서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SF 설정과 고대 신화는 비슷합니다. 고지라는 SF 장르에 속하나, 고지라와 화염 드래곤은 아주 비슷합니다. 드래곤과 고지라는 똑같이 거대 파충류 괴수입니다. 드래곤과 고지라는 아가리를 벌리고 화염을 뿜습니다. 드래곤과 고지라는 인류 문명을 파괴합니다. 인류 문명은 드래곤과 고지라에게 대적하지 못합니다. 드래곤과 고지라는 쌍둥이입니다. 1954년 영화 <고지라>에서 고지라는 해안 지역 전설에 속합니다. 고지라는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비단 고지라만 아니라 스페이스 오페라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스텔라리스> 역시 (우주) 드래곤과 크라켄을 아주 노골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렇게 SF 장르는 신화를 노골적으로 모방합니다. 하지만 신화가 외부 시선, 보색 효과인가요? 외부 시선을 상정하고 보색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온갖 신화들이 신격들, 괴물들, 마법들을 이야기하나요? 북유럽 신화에서 프레이야가 외부 시선인가요? 그리스 신화에서 가이아가 보색 효과인가요? 어쩌면 수메르 신화는 외부 시선을 상정하는지 모릅니다. 외부 시선을 상정하고 보색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어떤 신화들은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신화들은 보색 효과보다 명분, 정당성에 가깝습니다. 보색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원, 절, 교회, 성지에 가지 않을 겁니다.


종교 지배 계급이 과학자를 탄압했을 때, 보색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종교 지배 계급은 과학자를 화형에 처하지 않았을 겁니다. 종교 지배 계급에게 신화는 명분, 정당성입니다. 왕권 신수설이 "신은 나를 선택했다. 그래서 나는 고귀한 혈통, 왕이다!"라고 선언할 때, 이건 보색 효과보다 명분, 정당성입니다. 엄마들은 황새가 아기를 데려온다고 이야기하나, 황새는 아기를 데려오지 않습니다. 이건 민담(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이런 민담은 보색 효과를 연출하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탈라 할머니는 테 피티가 풍요로운 생명 현상을 퍼뜨렸고 마우이가 심장을 훔쳤다고 설명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풍요로운 생명 현상을 퍼뜨립니다. 신화는 어떻게 세상이 나타나는지 설명합니다.]



마우이가 심장을 훔쳤기 때문에, 모투누이 섬은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부족장 딸로서 모아나는 마우이를 이끌고 심장을 어머니 자연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탈라 할머니는 신화를 설명합니다. 신화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명분, 정당성입니다. 신화는 보색 효과를 연출하지 않거나, 신화에서 보색 효과는 근본적인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만약 신화가 보색 효과가 아니고, SF 장르가 신화를 모방한다면, SF 장르 역시 보색 효과가 아닐 겁니다. 만약 SF 장르가 보색 효과라고 해도, SF 장르에게는 보색 효과 이외에 다른 가치들이 있을 겁니다. 왜 <스텔라리스>가 신화를 모방하나요?


SF 평론가는 낸시 크레스가 보색 효과를 연출한다고 대답할 수 있으나, 이 대답은 왜 <스텔라리스>가 신화를 (노골적으로) 모방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SF 평론가는 신화와 SF 장르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신화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명분, 정당성입니다. 군주는 왜 자신이 고귀한 혈통인지 증명해야 합니다. 성직자는 왜 사람들이 성지를 찾아야 하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엄마는 왜 아기가 나타나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탈라 할머니는 왜 모투누이 섬이 위기에 부딪혔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심지어 인간은 왜 삼라만상이 존재하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삼라만상은 너무 광대합니다.



인간보다 삼라만상을 너무 광대합니다. 인간은 삼라만상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불완전한 존재는 삼라만상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불완전한 존재 인간은 그저 삼라만상을 엿볼 뿐입니다. 삼라만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은 훨씬 전능한 존재를 상정해야 합니다. 신(격)은 전능합니다. 신은 삼라만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신은 삼라만상을 창조하거나 신 그 자체는 삼라만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만약 신 때문에 삼라만상이 존재한다면, 무엇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가?" 이런 물음은 옳지 않습니다. 신은 신 그 자체에 기반합니다. 그 자체로서 신(격)은 존재합니다.


신(격)이 존재하는 기반 원리는 신(격) 그 자체입니다. 신이 전능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신은 존재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은 신(격)을 만듭니다.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 전설, 민담은 나타납니다. 오랜 옛날부터 인류 문화들은 많은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을 만들었습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비록 신화가 힘을 잃었다고 해도, 서구 근대화는 그저 꼬꼬마에 불과합니다. 아직 서구 근대화는 300~500년을 넘기지 못했으나, 꼬꼬마 서구 근대화와 달리, 신화는 무려 몇 천 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신화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스텔라리스>는 신화를 계승하는지 모릅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근대 철학과 과학은 신화를 밀어내기 시작하나, 신화가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신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근대 철학과 과학은 이성, 계몽을 자랑하나, 이성과 계몽은 삼라만상을 밝히지 못합니다. 여전히 인류보다 자연과 우주는 거대합니다. 심지어 이성과 계몽은 인류가 삼라만상을 밝히지 못할지 모른다고 설명합니다. 관찰자가 현상을 관측하는 순간, 중립 상황에서 현상은 벗어날 테고, 관찰자는 그 자체로서 현상을 절대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관찰자가 그 자체로서 현상을 절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성과 계몽은 삼라만상을 밝히지 못합니다.


이성과 계몽이 삼라만상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인류는 영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쩌면 신화에서 인류는 절대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인류는 영성을 반드시 추구해야 할지 모릅니다. 인류가 신화, 영성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SF 장르는 신화를 계승하고 신화를 모방하는지 모릅니다. 하드 SF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가 흡혈귀 우주선 선장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심지어 하드 SF 소설조차 전설을 빌립니다. SF 장르는 근대 신화입니다. 그래서 엄마 거대 괴수는 자연의 여신이 됩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테 피티가 자연의 여신인 것처럼, 엄마 거대 괴수는 (서구 근대적인) 자연의 여신입니다.



문제는 SF 장르가 Science Fiction 장르라는 사실입니다. Science는 과학, 이성, 계몽입니다. 과학, 이성, 계몽과 신화는 대립합니다. 과학, 이성, 계몽은 신화를 밀어내야 합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 이성, 계몽이라면, 왜 SF 장르가 신화를 모방하고 계승하나요? 근대 신화는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SF 평론가는 왜 '사이언스' 픽션이 신화를 모방하고 계승하는지 대답해야 합니다. 어떻게 SF 평론가가 대답할 수 있나요? SF 평론가는 수사학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비유를 좋아합니다. 적어도 특정한 인류 문화들(SF 장르가 나타난 문화들)은 비유를 이용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아름다운 영혼들을 소유한다." 이 문구는 비유입니다. 이 문구는 사회주의자들이 정말 영혼들을 소유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사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복숭아와 태블릿 PC와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을 소유할 수 있으나, 인간은 영혼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영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신화적인 개념입니다. 신은 영혼을 만들고 육체에 집어넣습니다. 육체가 죽은 이후, 영혼은 신에게 돌아갑니다. 육체는 필멸이나, 영혼은 불멸입니다. 필멸하는 육체보다 불멸하는 영혼은 훨씬 고귀합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측면보다 정신적인 측면을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정신적인 측면을 높게 평가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인간이고, 사회주의자들은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영혼들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위 문구는 사회주의자들이 영혼들을 소유한다고 말하나, 이건 정의가 아닙니다. 정의는 참과 거짓을 판단합니다. "스테고사우루스는 홀로세 육식 동물이다." 이건 거짓입니다. 스테고사우루스는 쥐라기 초식 동물입니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아름다운 영혼들을 소유한다."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비유로서 이 문구는 참과 거짓이 아닙니다. 이 문구는 옳거나 틀리지 않습니다.


비록 사회주의자들이 영혼들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해도, 이 문구는 거짓이 아닙니다. 고생물학 덕후가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을 소유하는 것처럼, 이 문구는 사회주의자들이 영혼들을 소유한다고 비유합니다. 이 문구는 "훨씬 나은 세상을 위해 사회주의자들은 용감하게 투쟁한다."는 뜻입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그저 악랄하고 광신적인 빨갱이들에 불과하다고 모욕하나, 보수 우파 지식인들과 상관없이, 이 문구는 너무 이상합니다.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훨씬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왜 이 문구가 이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나요? 왜 이 문구가 비유를 동원하나요?



우리는 뭔가를 직접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훨씬 나은 세상을 만들기 원한다." 이 문구는 내용을 직접 표현합니다. 이 문구는 우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훨씬 나은 세상을 만들기 원한다."보다 "사회주의자들은 아름다운 영혼들을 소유한다."는 훨씬 고귀한 표현입니다. '영혼'이 신화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보다 영혼은 훨씬 신화적입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으나, 인간은 영혼을 만들지 못합니다. 오직 전능한 신만 영혼을 만듭니다. 인간이 영혼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전능한 신만 영혼을 만들기 때문에, 세상보다 영혼은 훨씬 고귀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내용을 직접 말하기보다 이것(훨씬 나은 세상)과 저것(아름다운 영혼)을 연결합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비유는 유사성을 찾고 양쪽을 연결합니다. 훨씬 나은 세상과 아름다운 영혼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양쪽이 모두 좋은 것이라고 해도, 아름다운 영혼이 훨씬 신화적이기 때문에, 비유는 양쪽을 연결하고 훨씬 나은 세상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말합니다. 전능한 신이 영혼을 만들기 때문에, 아름다운 영혼은 사회주의자를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뭔가를 강조하기 원할 때, 언어는 그것을 직접 표현하지 않습니다. '맹금류 같은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유입니다.



이 문구는 맹금류와 용맹함과 로자 룩셈부르크를 연결합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용맹하다고 직접 말할 수 있으나, 이건 너무 밋밋하고 시시합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목숨을 걸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결사항쟁을 강조해야 했습니다. 결사항쟁을 강조하기 위해 블라디미르 레닌은 맹금류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연결합니다. '맹금류 같은 로자 룩셈부르크'는 훨씬 입체적입니다. 게다가 이건 훨씬 감각적입니다. 용맹함은 감성입니다. 이건 추상적입니다. 용맹함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용맹함을 직접 만지지 못합니다. 용맹함은 정신적인 측면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정신적인 측면을 직접 만지지 못합니다. 우리가 용맹함을 직접 만지지 못하기 때문에, 단어 용맹함은 감각적이지 않습니다. 반면, 맹금류 물수리는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처럼, 물수리는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과 물수리가 똑같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물수리는 훨씬 감각적입니다. 우리는 물수리를 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수리를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추상은 감각으로 전환합니다. '맹금류 같은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추상(용맹함)은 감각(맹금류)이 됩니다.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용맹하다'는 너무 밋밋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비유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영혼이 사물이라고 간주하고 사회주의자가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다고 표현하는지 모릅니다.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처럼, 아름다운 영혼은 사물이 되고, 고생물학 덕후가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을 소유하는 것처럼, 사회주의자는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합니다. 비유에는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SF 장르는 비유가 되고 장점을 얻습니다. '자연'은 거대하고 원초적이고 살아있습니다. '자연'은 인류 문명을 초월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추상적입니다. 우리는 원초적인 것을 만지지 못합니다. 원초적인 것은 추상적입니다.


우리는 원초적이라는 개념, 정신적인 측면을 만지지 못합니다. 반면, 우리는 엄마 거대 괴수를 만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SF 애니메이션에서 새로운 소녀는 엄마 거대 괴수를 직접 만질 수 있습니다. 엄마 거대 괴수와 새로운 소녀는 모두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심지어 엄마 거대 괴수는 유전 형질을 나눠주고, 인간은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엄마 거대 괴수는 훨씬 감각적인 비유입니다. 엄마 거대 괴수는 '자연'을 상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어가 내용을 직접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솔직히 언어 그 자체는 비유와 비슷합니다. 비유는 이것과 저것을 연결합니다. 언어 역시 이것과 저것을 연결합니다.



[새로운 소녀는 신격으로서 거대 괴수를 숭배합니다. 동시에 엄마 거대 괴수는 '자연'을 상징합니다.]



언어는 동물 수마트라 호랑이와 단어 수마트라 호랑이를 연결합니다. 이런 연결이 임시적이기 때문에, 언제든 연결은 끊어질지 모릅니다. 동물 수마트라 호랑이는 단어 수마트라 호랑이가 필연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류 문화에서 많은 사어(死語)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언어는 그저 임시적인 연결 고리에 불과합니다. 언어보다 비유로서 엄마 거대 괴수는 훨씬 튼튼한 연결 고리입니다. 언어보다 엄마 거대 괴수는 낫습니다. 심지어 어떤 언어학자는 인간 사고 방식이 비유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인간 사고 방식이 정말 비유와 비슷하다면, 아무리 SF 장르가 비유라고 해도, 이건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수많은 관념들을 비유적으로 생각한다면, SF 장르는 예외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낸시 크레스는 비일상적인 것들을 상상합니다. 이건 그저 황당무계한 공상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보다 "나는 네 수호 천사가 되기 원해."는 훨씬 고귀한 사랑 고백입니다. 현실에서 수호 천사는 존재하지 않으나, 연인은 수호 천사를 언급하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신화적인 표현(비일상적인 표현)은 고귀한 사랑을 강조합니다. 비일상적인 표현이 사랑을 강조하는 것처럼,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주제를 강조합니다. SF 평론가는 SF 장르가 황당무계한 공상보다 비일상적인 비유라고 대답합니다.



자, 이게 완전한 대답이 되나요? 이게 정답인가요? SF 평론가가 시끄러운 토론을 평화롭게 마무리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반박할 테고, 시끄러운 토론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왜 SF 장르가 비일상적으로 상상하는가?" SF 평론가는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 게시글은 여러 대답들을 제시하나, 다른 사람들은 이 게시글을 비판할지 모릅니다. 엄마 거대 괴수는 테 피티를 (서구 근대적으로) 계승합니다. 신화와 SF 장르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SF 장르, 엄마 거대 괴수는 근대 신화입니다. 비단 SF 장르만 아니라 다른 근대적인 측면들 역시 신화를 모방하는지 모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인' 사회주의입니다.


하지만 민중 해방 운동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신화적인 수사학(기독교 수사학)을 빌립니다. 까막눈 민중들에게 어려운 변증법과 유물론보다 신화는 훨씬 친근합니다. 인류 문화에서 신화가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과학적인 사회주의는 신화를 만납니다. 신화적인 수사학에서 미래 공산주의 문명은 천년 왕국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봉기는 심판의 날입니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사도들입니다. 메시아는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아나빔)을 돌봤고,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도 수구 꼴통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씹어대나, 아무리 예수가 고대 사회에 속함에도,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절대 욕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의 날이 닥치고, 부자들이 천국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천년 왕국이 강림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봉기는 성공하고, 부르주아들은 무너지고, 미래 공산주의 문명은 해방을 약속합니다. 사회학자 미카엘 뢰비가 라틴 아메리카 해방 신학을 언급하는 것처럼, 민중 해방 운동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신화적인 수사학과 가깝게 만납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신화적인 수사학을 빌리고 해방 신학과 만나는 것처럼, SF 장르는 신화적인 수사학을 빌리고, 엄마 거대 괴수는 어머니 자연 테 피티를 계승합니다. 이게 논리적인 SF 평론인가요? 아니, 많은 사람들은 이게 그저 지랄 옆차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겁니다.


이 게시글은 비단 근대 신화만 아니라 미래 예측, 시대 격차, 보색 효과, 과장된 비유를 제시하나, 다른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지랄 옆차기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이런 비판은 타당합니다. SF 장르가 아주 거대한 범주이기 때문에, 이 게시글은 지랄 옆차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고정적인 실체보다 시끄러운 토론입니다. 시끄러운 토론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시끄러운 토론은 SF 장르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시끄러운 토론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에 합의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단어 사이언스 픽션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능한 신은 신 그 자체에 기반하나, SF 장르는 신이 아닙니다.



전능한 신과 달리, 단어 사이언스 픽션은 그 자체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중세 문학 작가들은 단어 사이언스 픽션을 알지 못했습니다. 메리 셸리 역시 단어 사이언스 픽션을 알지 못했습니다.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는 사이언티픽 로망스라고 말했습니다. 단어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어떤 단계들을 거쳤고 단어 사이언스 픽션이 되었습니다. 이건 하늘에서 단어 사이언스 픽션이 뚝 떨어지지 않았다고 증명합니다. 비록 시끄러운 토론이 왜 SF 장르가 비일상적으로 상상하는지 합의하지 못한다고 해도, 시끄러운 토론은 하늘에서 단어 사이언스 픽션이 뚝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의할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에서 어떤 특정한 사건들 때문에 단어 사이언스 픽션은 나타났습니다. 고대 수메르 신화는 비일상적으로 상상했으나, 고대 수메르 신화는 사이언스 픽션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인류 문화에서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유구한 흐름이라고 해도, 어떤 특정한 사건 때문에, 단어 사이언스 픽션은 나타났습니다. 만약 시끄러운 토론이 '이 사건'을 분석한다면, 시끄러운 토론은 왜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으로 상상하는지 대답할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복잡한 현상을 파악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SF 장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사건'인가요? 인류 문화에서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유구한 흐름이나, 왜 단어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났나요?  게시글에서 넷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대답은 '19세기 서구 근대화'입니다. 분명히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인류 문화에서 단어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나타났고, 이건 단어 사이언스 픽션이 되었습니다. 시끄러운 토론은 이 사실에 합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만약 단어 사이언스 픽션이 서구 근대화에 기반한다면, 서구 근대화가 무엇에 기반하나요? 서구 근대화는 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전능한 신은 신 그 자체에 기반하나, 서구 근대화는 신이 아닙니다.


전능한 신과 달리,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뭔가에 기반해야 합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에서 단어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비롯한 것처럼, 뭔가에서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비롯했을 겁니다.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날 수 있었나요? 시끄러운 토론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만약 시끄러운 토론이 이것을 파악한다면, 시끄러운 토론은 어떻게 단어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분석할 테고, 시끄러운 토론은 왜 SF 장르가 비일상적으로 상상하는지 대답할지 모릅니다. 비록 이런 분석이 정답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시끄러운 토론은 무엇이 출발점이 되는지 합의할 수 있습니다.



학문에서 생산 조건은 근본적인 작업입니다. 학문은 어떻게 뭔가가 나타났는지 묻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어떤 현상이 뚝 떨어지거나, 갑자기 허공에서 어떤 현상이 번쩍 나타나거나, 갑자기 땅에서 어떤 현상이 불쑥 솟지 않기 때문에, 학문은 어떻게 뭔가가 나타났는지 물어야 합니다. 인류보다 자연과 우주가 훨씬 거대하기 때문에, 인류가 삼라만상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학문은 기원을 분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뭔가가 나타났는지 묻기 위해 학문은 시도할 수 있습니다. SF 장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장르에게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생산 조건입니다.


SF 장르에게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가장 커다란 특징이나, 이미 고대 신화들이 비일상적으로 상상했기 때문에,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SF 장르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약 시끄러운 토론이 SF 장르를 파악하기 원한다면, 시끄러운 토론은 비단 비일상적인 상상력만 아니라 서구 근대화를 함께 분석해야 합니다. 어쩌면 비일상적인 상상력보다 서구 근대화는 훨씬 중요한 특징인지 모릅니다. 고대 신화와 SF 장르를 구분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근거가 서구 근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대 사람들이 홍수 방주 설화를 놀랍게 상상했다고 해도, 여기에는 서구 근대화가 없었습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나타났고,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사이언스 픽션이 됩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사이언티픽 로망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가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되짚을 때, SF 평론가는 19세기 서구 근대화를 빠뜨리지 못할 겁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액자 구성이고, 메리 셸리는 액자 테두리로서 비경 탐험을 집어넣었습니다. 쥘 베른은 비경 탐험 소설들을 전문적으로 썼고, 허버트 웰즈 역시 비경 탐험을 중시했습니다. 왜 초기 SF 작가들, 메리 셸리, 쥘 베른, 허버트 웰즈가 비경 탐험을 공통적으로 중시했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19세기 서구 문명은 식민지들을 적극적으로 '개척'했습니다. 알프레드 월리스와 말레이 제도처럼,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비경 탐험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서구 문명은 '비경'을 상상했고, 비디오 게임 <대항해 시대 III>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건 비일상적인 설정들로 이어집니다. "우와, 저기 머나먼 열대 밀림에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열대 밀림 속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야수가 돌아다니지 않을까?" 이런 호기심은 열대 밀림 공룡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비경 탐험 소설이 공룡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공룡 탐험 소설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류 문명에서 최초로 19세기 서구 사람들은 대규모 공장을 목격합니다. 이건 엄청난 충격입니다. 이런 충격은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향해 이어집니다. "우와, 이제 기계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갈 거야! 만약 기계들이 훨씬 발달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서구 근대화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에 영향을 미칩니다. 비단 SF 장르만 아니라 수많은 분야들에서 생산 조건은 중요합니다. 외계 행성을 안전하게 연구하기 위해 우주 탐사대는 어떻게 생명 현상이 발생하는지 인식해야 합니다. 만약 우주 탐사대가 생명체 발생 조건을 알지 못한다면, 우주 탐사대는 외계 생명체를 판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비록 외계 행성에서 어떤 존재가 생명체라고 해도, 우주 탐사대가 어떻게 생명체가 나타나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주 탐사대는 외계 생명체를 판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생명체인가, 아니면 그저 단순한 화학 반응에 불과한가?" 우주 탐사대는 대답해야 합니다. 만약 우주 탐사대가 대답하지 못한다면, 심지어 우주 탐사대는 외계 행성을 함부로 개척하고, 토착 생명체들은 멸종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물학자들은 몇몇 화학 물질을 조합하고 어떻게 유기체가 나타나는지 실험합니다. 이건 생산 조건입니다. SF 장르를 파악하기 위해 SF 평론가 역시 생산 조건을 물어야 합니다.



[이런 장면에는 장대하고 신화적인 감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화적인 감성은 전부가 아닐 겁니다.]



"이것이 생명체인가, 아니면 단순한 화학 반응인가?" 이렇게 우주 탐사대가 묻는 것처럼, SF 평론가는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SF 장르인가, 아니면 다른 비일상적인 상상력인가?" 어떤 관객들은 영화 <반지 원정대>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오해합니다. SF 장르와 <반지 원정대> 사이에 많은 유사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평론가들이 <스타 워즈> 클래식 3부작을 20세기 미국 신화라고 부르는 것처럼, <스타 워즈>는 유사 신화입니다. <반지 원정대> 역시 신화, 전설, 민담에 기반합니다. <실마릴리온>은 소설보다 (유사) 신화에 가깝습니다. 신화에서 드워프는 비롯했습니다.


이미 고대 신화가 드워프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영화 <반지 원정대> 같은 중세 유럽 판타지는 드워프를 근대적으로 모방하고 계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 판타지는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 문화들은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을 만들었다. 인류 문화에서 신화, 전설, 민담은 유구한 문학이다. 이것들이 유구한 문학이기 때문에, 중세 유럽 판타지는 이것들에게 근대적인 측면들을 덧붙이고 계승한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황당무계한 공상이 아니다. 만약 사람들이 중세 유럽 판타지를 조롱한다면, 이런 조롱은 유구한 문학으로서 신화 역시 무시할 것이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자신이 신화 계승자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신화, 전설, 민담이 유구한 문학이기 때문에, 황당무계한 공상에서 중세 유럽 판타지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여전히 근대 인류 문화는 신화, 전설, 민담을 가공하고 유지합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는 이것을 증명합니다.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아나>와 <이집트 왕자>는 그저 상업 애니메이션에 불과하고, 양쪽은 크게 다르나, 양쪽 모두 고대 신화를 근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가공합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역시 비슷할지 모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메시아 예수가 수난들을 거친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극장에서 어떤 영어 문화 관객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관람하고 "Oh, Jesus…."라고 중얼거린다면, 이게 무슨 뜻인가요? 영어 문화에서 'Oh, Jesus'는 감탄사입니다. 영화가 너무 처절하기 때문에, 관객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말했나요? 아니면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해 나사렛 예수가 붉은 피를 뿌리기 때문에, 관객이 영화 등장인물 이름을 중얼거렸나요? 이런 상황은 신화에서 근대 문화가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증명합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서도 영어 문화 관객은 "Oh, Jesus…."라고 중얼거립니다. 이게 처절한 감탄사인가요, 아니면 영화 등장인물 이름을 가리키나요? 왜 이런 혼동이 나타납니까?



나사렛 예수는 신화적인 인물이나, 영어 문화에서 예수는 일상적인 감탄사입니다. 유구한 문학으로서 신화가 일상에 깊게 스몄기 때문입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신화를 너무 혐오할지 모르나, 만약 그들이 영어를 사용한다면, 심지어 그들조차 "What the hell…!"이라고 욕할지 모릅니다. 21세기 초반 남한 사람들은 "자유 한국당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처자빠졌어. 이야, 자유 한국당은 너무 멋진 헬조선 정당이야."라고 개그를 칩니다. 과학 시대, 계몽 시대에서 남한 사람들은 귀신지옥(헬조선)을 언급합니다. 21세기 초반 서구 근대화 문명에서도 귀신과 지옥은 유효합니다.


이미 신화가 일상에 깊게 스몄기 때문에, 여전히 근대 문화에서도 신화 계승/모방은 유효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자신이 신화를 계승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SF 장르는 어떤가요? 중세 유럽 판타지가 신화 계승자를 자처하는 것처럼, SF 장르가 신화를 계승하나요? 테 피티와 엄마 거대 괴수가 자연의 여신이 똑같이 되는 것처럼,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가 흡혈귀 우주선 선장을 묘사하는 것처럼, SF 장르가 신화 계승자가 되나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홍수 방주 설화를 계승하나요? 하지만 테 피티와 엄마 거대 괴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 19세기 서구 근대화가 있습니다.



핵 폐기물은 고대 문명보다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자연 과학과 대규모 산업은 발달했고, 산업 자본주의는 핵 폐기물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결정적인 차이가 되기 때문에, 테 피티는 핵 폐기물을 알지 못하나, 엄마 거대 괴수는 핵 폐기물을 정화합니다. 엄마 거대 괴수가 핵 폐기물을 정화하기 때문에, SF 평론가와 시끄러운 토론은 19세기 서구 근대화를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SF 평론가와 시끄러운 토론이 정말 서구 근대화를 따질 수 있나요? 서구 제국주의 속에서 이게 가능한가요? 근대 인류 문명에서 서구 제국주의는 너무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적인 해방 신학이 되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서구 제국주의는 폭력적인 세뇌, 광신입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너무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듭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과학 문명, 계몽 문명이 절대 아닙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억압적인 세뇌가 되었고, 사람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듭니다. 서구 제국주의 광신에서 아직 인류 문명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시끄러운 토론이 SF 장르를 근본적으로 논의하고 엄마 거대 괴수를 제대로 바라보기 원한다면, 시끄러운 토론은 제국주의 광신을 떨쳐야 합니다.



※ 게임 <니치> 스크린샷 출처: JessiMew,

https://www.youtube.com/watch?v=S3PJxA-mk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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