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화성의 왕궁>과 <야생종>, 유물론 본문
[자연 환경은 육체적인 측면에 속합니다. 외계 자연 환경은 육체의 정치학을 새롭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는 외계 생존 이야기입니다. 화성 탐사대는 심각한 사고에 부딪힙니다. 개척 기지가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화성 탐사대는 탐사대가 아닙니다. 화성 탐사대는 생존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화성에서 생존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개척 기지는 유일한 버팀목이었으나, 개척 기지는 무너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화성 탐사대가 살아남을 수 있나요? 만약 여기가 지구라면, 과학 탐사대가 표류한다고 해도, 그들은 생존을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지구는 생명의 요람입니다. 반면, 화성은 죽은 행성입니다. 죽은 행성에서 생명체는 살지 못합니다.
만약 화성 탐사대가 개척 기지를 간신히 수리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나요? 생명체는 영양분을 소비해야 합니다. 동물은 먹어야 합니다. 생명체, 동물로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화성에는 생명체가 없습니다. 화성에서 탐사대가 농사를 지을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식량을 먹기 위해 인간은 채집하거나 사냥하거나 낚시하거나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화성에서 채집, 사냥, 낚시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화성 탐사대가 개척 기지를 수리한다고 해도, 농사를 비롯해 먹거리 문제는 커다란 장벽입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은 자원이 됩니다.
왜 여자들이 자원이 되나요? 여자들은 임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구 구조대가 화성 탐사대를 구조하지 않는다면, 화성에서 탐사 대원들은 계속 살아가야 할지 모릅니다. 화성에서 그들은 세대를 이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화성에서 탐사 대원들이 세대를 이어가야 한다고 해도, 남자 대원들은 아기를 낳지 못합니다. 화성에서 식량 공급이 자체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이런 식량은 어린 아기에게 맞지 않을지 모릅니다. 여자 대원들은 자체적으로 아기 식량, 젖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몸은 아기 식량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 대원들(의 육체들)은 중요한 '자원'이 됩니다.
어떤 여자 대원은 발끈합니다. 자랑스러운 헬조선이 임신 가능 여자들을 통계 자료라고 취급하는 것처럼, 여자 대원들은 주체로서 인간보다 임신 가능 자원, 생체 인큐베이터, 생체 식량 공장이 됩니다. 여자가 인간보다 임신 가능 자원이 되는 순간, 여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수구 꼴통 할배들이 "아니, 임산부가 저려면 쓰나? 임산부는 아기를 생각해야 해."라고 참견하는 것처럼, 가부장적인 권력은 여자의 몸을 통제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여자 대원은 발끈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여자의 육체는 아기를 낳고 먹일 수 있습니다. 남자의 육체보다 여자의 육체는 훨씬 생태적입니다.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 화성 생존자들은 이런 것들을 논의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소설을 읽고 유물론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아랫집 수진은 이런 것들이 유물론을 강렬하게 가리킨다고 느낍니다. 왜 아랫집 수진이 유물론을 강렬하게 느끼나요? 작가 존 발리가 이것을 의도했나요? 유물론을 강렬하게 가리키기 위해 존 발리가 화성 생존자들을 이야기했나요? 어쩌면 존 발리는 유물론을 의도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존 발리는 유물론에 상관하지 않았거나 유물론을 알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존 발리가 유물론을 알지 못했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화성 생존자들이 유물론을 강렬하게 풍긴다고 느낍니다.
유물론에서 중요한 화두는 '육체'입니다. 계몽주의 이후, 서구 철학은 신보다 인간을 중시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서구 철학은 인간에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하나는 정신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서구 철학이 인간보다 신을 중시할 때, 육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은 초월적인 존재이고, 초월적인 존재에게 육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신은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신은 꼬르륵~ 소리내지 않고, 월경하지 않고, 응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육체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비단 정신만 아니라 육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 중에서 무엇이 중요한가요?
게오르크 헤겔이 '절대 정신'을 주장한 것처럼, 어떤 철학자는 정신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이건 관념론입니다. 정신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에서 정신은 파생합니다. 정신은 육체에 속합니다. 육체는 원초적이고, 정신은 후천적입니다. 인간에게 육체가 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물질, 재화, 식량은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물질, 재화, 식량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신에는 한계가 없는지 모르나, 물질, 재화, 식량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이 물질, 재화, 식량을 이용할지 논의해야 합니다.
이런 논의는 규칙을 만듭니다. 사람들은 규칙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은 도덕이 됩니다. 사람들은 규칙에 신성을 부여하고, 이것은 종교가 됩니다. 사람들은 규칙에 권력을 부여하고, 이것은 법이 됩니다. 사람들은 규칙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이것은 교육이 됩니다. 사람들은 규칙과 일상을 합치고, 이것은 문학이 됩니다. 최종적으로 국가는 규칙을 지배합니다. 도덕, 종교, 법, 교육, 문학, 국가는 파생적입니다. 이런 것들은 정신적인 측면에 가깝습니다. 반면, 육체, 물질, 재화, 식량은 원초적입니다. 육체, 물질, 재화, 식량 때문에, 도덕, 종교, 법, 교육, 문학, 국가는 나타납니다. 육체적인 것들에서 도덕 같은 정신적인 것들은 파생합니다.
이렇게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유물론을 정리합니다. 유물론은 육체를 중시합니다. 육체에서 정신은 파생합니다. 그 자체로서 도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체적인 것들에서 도덕은 파생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성, 도덕, 윤리, 선행을 떠듭니다. 하지만 인성, 도덕, 윤리, 선행은 원초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으나,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개인의 자유는 정신적인 측면입니다. 육체적인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측면이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것을 배우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개인의 진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육체적인 것이 원초적이고, 종교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 역시 파생적입니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이 신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신을 만드나, 신이 너무 완벽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부러워합니다. 인간은 신을 만드나, 인간은 신을 부러워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을 부러워합니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이것을 '소외'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신을 만드나, 오히려 신은 인간을 지배합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지배하고, 이건 소외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포이에르바하는 유물론을 정리했습니다.
이런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유물론, 육체를 중시합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식량을 얻어야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식량을 얻을 수 있나요? 만약 시골 할머니들이 꿀벌들을 친다면, 할머니들은 꿀을 얻고 물물교환할 겁니다. 어떻게 꿀벌들이 꿀을 만드나요? 삼림과 초원에 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꽃들이 피나요? 식물이 광합성하고 영양분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연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골 할머니들은 식량(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가공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건 '노동'이 됩니다.
육체적인 존재로서 시골 할머니들은 먹고 살아야 하고, 그래서 할머니들은 자연 환경을 가공(노동)하고 식량(꿀)을 얻습니다. 육체적으로 존재로서 할머니들에게는 자연과 식량이 필요합니다. 이건 필수적입니다. 여기에서 예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외 없이, 인간에게 자연과 식량은 필수적입니다. 만약 시골 할머니들이 자연을 풍족한 모성이라고 느낀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닙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처럼, 자연 환경 덕분에, 할머니들은 꿀을 얻습니다. 이건 정말 젖과 꿀입니다. 만약 할머니들이 대지모신을 숭배한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육체(자연, 노동, 식량)에서 정신(대지모신)은 파생합니다.
문제는 토건 사업입니다. 토지 주인은 관광 유흥 업소를 짓기 원합니다. 토지 주인은 토건 업체와 계약하고, 토건 업체는 삼림을 밀어내고 초원을 파헤칩니다. 꽃들은 사라지고, 꿀벌들은 꿀을 얻지 못합니다. 시골 할머니들은 굶주립니다. 더 이상 시골 할머니들은 물물교환하지 못합니다. 시골 할머니들은 국가 정부에 탄원하나, 국가 정부는 들어처먹지 않습니다. 평소에 국가 정부는 자신이 국민들을 위한다고 지껄여대나, 시골 할머니들이 탄원한다고 해도, 국가 정부는 귓등으로도 들어처먹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 정부는 시골 할머니들보다 토건 사업을 편듭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본주의는 경제 현상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가 계급은 생산 수단을 차지하고,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고, 이윤을 얻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단계, 생산 수단은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토건 업체가 삼림을 밀어내기 때문에, 꿀벌들이 꿀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은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자본주의는 물질, 재화, 식량 측면에 속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도덕, 문학, 종교, 법, 국가 정부는 파생합니다. 국가 정부는 정신적인 측면입니다. 정신이 육체에 속하기 때문에,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에 속합니다. 국가 정부는 할머니들과 토건 사업 중에서 무엇이 자본주의에 유리한지 파악합니다.
국가 정부가 자본주의에 속하기 때문에,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원합니다. 국가 정부가 굵직한 사안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자본주의입니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 정부는 대기업들을 정리합니다. 대기업보다 자본주의가 훨씬 커다란 범주이기 때문에, 대기업이 감히 자본주의를 위협할 때, 국가 정부는 대기업보다 자본주의를 편듭니다. 물론 대기업들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때문에, 많은 상황들에서 국가 정부는 대기업을 편듭니다. 적어도 무산자 계급과 거대 자본가 계급이 부딪힐 때, 국가 정부는 자본가 계급을 편듭니다. 그래서 시골 할머니들은 굶주려야 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연을 골고루 소유할 수 있나요? 누가 자연을 소유하나요?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누가 자연을 소유하나요? 거대 자본가 계급은 막대한 자연 환경을 소유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킵니다. 국가 정부는 거대 자본가 계급을 편들고 자본주의를 관리합니다. 자본가 계급이 육체적인 것(자연 환경)을 차지하기 때문에, 국가 정부(정신적인 것)는 자본가 계급을 편듭니다. 자본가 계급이 육체적인 것을 차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는 온갖 해괴하고 미친 짓거리들이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이 소중한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미혼모는 굶어뒈져야 하나, 부짓집 강아지는 잘 먹고 잘 삽니다. 동물보다 인간이 소중하다고 해도, 부잣집 강아지가 비싼 사료를 처묵처묵하는 동안, 가난한 미혼모는 굶주려야 합니다. 위대하신 헬조선 대통령께서는 '사람이 먼저다'라고 근엄하게 말씀하시나, 부잣집 강아지와 가난한 미혼모 앞에서 이런 근엄하신 말씀은 그저 염병할 미친 짓거리에 불과합니다. 이건 강아지가 굶주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잣집 강아지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가축들은 끔찍한 고통들에 시달립니다. 생명체는 육체적인 존재이나, 자본가 계급이 육체적인 측면(자연 환경)을 차지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인간 필요 욕구, 생명체보다 자본가 계급, 이윤 극대화입니다.
위대하신 헬조선 대통령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생명체보다 자본주의입니다. 심지어 무산자 계급이 이런 미친 짓거리를 뒤집기 원할 때, 자본주의는 혁명 세력을 탄압하고, 짓밟고, 학살하고, 고립시킵니다. 혁명 세력은 고립되고, 고립은 고인 물이 되고, 결국 고인 물은 썩습니다. 탄압, 학살, 고립은 독재 정부를 위한 아주 이상적인 조건, 환경입니다. 자본주의는 독재 정부를 위한 아주 이상적인 조건, 환경을 만듭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미친 짓거리에서 벗어나기 원한다면, 우리는 육체적인 측면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 노동, 식량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얄팍하게 천재적인 진보 지식인들께서는 육체적인 것보다 오직 정신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헛소리들을 날려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논리, 육체적인 측면이 다소 당황스럽다고 느낄지 모르나, 이건 아주 간단한 이론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자연 없이, 인간은 먹고 살지 못합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사이언스 픽션은 어머니 행성을 떠들지 않습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어머니와 생명의 요람을 연결하나요? 엄마가 생명체를 먹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행성은 자연 환경 없이 인간이 먹고 살지 못한다고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께서는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랫집 수진은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이 사이언스 픽션과 어머니 행성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연, 노동, 식량은 육체적인 측면, 유물론에 속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오직 식량만으로 살 수 있나요? 식량이 육체적인 측면과 유물론의 전부인가요? 종종 마르크스주의는 식량이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화성의 왕궁>에서 여자 대원들이 임신 가능 자원이 되는 것처럼, 재생산 역시 육체적인 것, 유물론입니다. 월경, 섹스, 임신, 출산, 수유, 육아 역시 육체적인 것, 유물론입니다. 월경, 섹스, 임신, 출산, 수유, 육아는 '몸'에 속합니다. 뭐, 여기에는 길다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섹스는 '몸'입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요?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 나를 가져." 이 간단한 문구는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먹고 삽니다. 살아있는 행성은 모성입니다. 테라포밍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떤 여자는 월경하고, 섹스하고,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하고, 육아 노동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여자가 월경한다고 해도, 여자는 생리대를 구입해야 합니다. 가난한 여자는 생리대를 구하지 못합니다. 만약 여자가 임신하기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월경이 육체적인 측면이고,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여자는 월경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이건 여자가 육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여자가 소유하는 것을 친구에게 빌려줄 수 있습니다. 여자는 예쁜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을 고생물학 덕후 친구에게 빌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의 육체를 빌려주지 못합니다.
여자는 여자의 육체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여자의 육체를 소유한다고 해도, 이건 '대여 불가능 소유'입니다. "이건 내 몸이야." 이렇게 여자가 말한다고 해도, 이건 소유보다 운명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만약 평생 동안 여자가 임신하지 않기 원한다고 해도, 여자는 월경해야 합니다. 이게 육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자는 월경을 피하지 못합니다. 비단 월경만 아니라 섹스, 임신, 출산, 수유는 모두 육체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특히, 여자는 이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2세를 합의한다고 해도, 결국 아내는 임신하고 출산해야 합니다. 아내는 이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뭐야, 나는 임신하기 싫어. 남편아, 나 대신 임신해~." 이렇게 아내는 말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남편이 마느님을 모시기 원한다고 해도, 마느님 대신 남편은 임신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미래 생체 개조 기술은 성별을 바꿀지 모릅니다. 남자 임신과 시험관 아기는 보편적으로 퍼질지 모릅니다. 존 발리는 비단 <화성의 왕궁에서>만 아니라 이런 바이오펑크 소설들, 성별 개조 이야기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건 SF 영역입니다. 현실 속에서 남자는 여자가 되지 못하고, 남자는 임신하지 못하고, 시험관 아기는 실험적입니다. 아내는 임신해야 합니다. 아내가 임신하기 때문에, 인류 사회는 여자가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내가 "나는 엄마보다 인간이야!"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인류 사회는 들어처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내가 자신이 주체라고 소리친다고 해도, 인류 사회는 귓등으로도 들어처먹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지껄여대나, 여자가 임산부가 되는 순간, 개인의 자유고 씨발이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더 이상 임산부는 개인이 아닙니다. 온갖 사람들은, 심지어 국가 정부조차 임산부에게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임산부는 인간보다 걸어다니는 생체 인큐베이터가 됩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은 이후, 여자는 육아를 억지로 맡습니다. 육아는 힘든 노동이나, 엄마는 노동자가 되지 못합니다. 왜 이런 억압적인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자본주의 사회가 빌어처먹을 가부장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독차지하기 원합니다. 만약 월경, 섹스, 임신, 출산, 수유, 육아가 댓가를 받는다면, 자본주의는 이윤을 독차지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수많은 여자들이 '무상으로' 생리대를 사용할 수 있다면, 영리 기업들은 자유로운 시장 경제가 무너진다고 게거품을 물고 지랄발광할 겁니다. 만약 육아 노동자들이 댓가를 받는다면, 많은 직장인들은 육아 노동자들이 되기 원할지 모르고, 영리 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많은 직장인들이 육아 노동자들이 된다면, 심지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월경, 섹스, 임신, 출산, 수유, 육아에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월경, 섹스, 임신, 출산, 수유, 육아를 착취합니다. 이건 착/취/입니다. 이건 '착취'입니다. 착취 경제로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적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여자(의 육체)를 무시합니다. 환경 저널리스트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아기를 먹이기 위해 젖가슴이 발달했는지 모른다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고 해도, 브래지어를 벗는 여자는 성 차별 대상이 됩니다. 여자는 갑갑한 브래지어를 억지로 입어야 합니다. 가난한 미혼모가 국가 정부에 탄원한다고 해도, 국가 정부는 들어처먹지 않습니다. 허름하고 비좁은 방에서 미혼모가 서러움에 벅차 피눈물을 흘린다고 해도, 국가 정부는 절대 들어처먹지 않습니다. 국가 정부가 자본주의를 편들기 때문입니다.
시골 할머니들이 꿀을 얻을 때, 시골 할머니들은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쩌면 시골 할머니들이 여자이기 때문에, 시골 할머니들은 이런 장면을 훨씬 구체적으로 느끼는지 모릅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먹고 살기 때문에, 시골 할머니들이 자연과 여자를 함께 바라본다고 해도, 할머니들이 그들의 젖꼭지들을 이용해 자연 환경을 느낀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자연 없이, 인간은 살지 못합니다. 자연과 여자가 비슷한 것처럼, 여자의 육체 없이, 인류는 살지 못합니다. 사회적인 재생산 없이, 인류는 살지 못합니다. 이건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사회적인 재생산이 몸, 육체, 유물론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유물론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식량을 주장하고, 에코 페미니즘은 재생산을 주장합니다. 유물론으로서 양쪽은 똑같이 자연을 주장합니다. 이건 마르크스주의가 재생산을 완전히 무시하고 에코 페미니즘이 식량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재생산에 많은 관심들을 기울이고, 에코 페미니즘 역시 지속 가능한 경제를 중요하게 연구합니다. 비록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은 대립하나, 양쪽에는 단점들과 한계들이 있고, 양쪽은 서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유물론 울타리 안에서 자연, 식량, 육체, 재생산은 상호 작용합니다. 인간(여자)이 육체를 바라볼 때, 인간(여자)은 자연, 식량, 재생산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유물론은 자연이 육체적인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자연이 육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행성 환경 역시 육체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21세기 초반 오늘날 육체적인 측면, 가장 거대하고 가장 육체적인 측면, 행성 환경이 심각한 위기에 부딪힌다는 사실입니다. 기후 변화를 비롯해 각종 환경 오염들은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무엇이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켰나요? 많은 과학자들은 산업 자본주의를 지적합니다. 19세기 서구 문맹 노동자들이 더듬거리며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는 동안, 미약한 페미니즘이 기지개를 펴는 동안, 이미 대규모 산업 자본주의는 대기 오염, 온실 가스, 수질 오염, 열대 밀림 파괴를 신나게 저질렀습니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 오염은 21세기 초반 기후 변화로 확장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천재적이고 잘나신 보수 우파 지식인들께서 산업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손바닥만한 반도 국가 북한이 독재라고 길길이 날뛰고 게거품을 무는 보수 우파 지식인들께서 산업 자본주의, 가장 거대하고 가장 육체적인 문제, 행성급 환경 오염을 강력하게 비판하나요? 아니, 보수 우파 지식인들께서는 산업 자본주의를 절대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분명히 북한 독재는 비극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북한 독재를 강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정말 손바닥만한 반도 국가입니다. 반쪽짜리 한반도 지역보다 지구 행성 전체는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이이이이이이이이인 거대합니다.
반쪽짜리 한반도 지역보다 지구 행성 전체가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이이이이이이이이인 거대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북한 독재를 향해 길길이 날뛰고 지랄발광하는 보수 우파 지식인들께서는 지금 당장 산업 자본주의가 폭싹 망해야 한다고 치성을 드려야 할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정말 천재적이신 보수 우파 지식인들께서 치성을 드리나요? 아니, 그들이 북한 독재를 비난할 때와 달리,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태도를 180도 바꾸고 "아아, 지구는 너무 아파요."라고 감상적으로 중얼거립니다. 이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이상한 현상입니다.
왜 반쪽짜리 한반도 문제가 천인공노할 범죄가 되고, 왜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이이이이이이이이인 심각한 행성급 환경 오염이 감상적인 중얼거림인가요? 아무리 아랫집 수진이 계산기를 단순하게 두드린다고 해도, 이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너무 천재적입니다. 그들이 너무 천재적이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아랫집 수진은 보수 우파 논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합니다. 거대 자본가 계급은 가장 육체적이고 거대한 측면, 행성 환경을 소유합니다. 심지어 자본가 계급은 화성 테라포밍을 나불거리고 외계 자연 환경까지 소유하기 원합니다.
한때, 어쩌면 여전히 국내에서 몸의 정치학, 육체의 정치학은 많은 인기들을 끌었거나 끄는 중입니다. 해외에서도 몸의 정치학, 육체의 정치학은 많은 인기들을 끌었거나 끄는 중입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은 육체적인 것, 자연, 식량, 재생산을 중시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을 등한시한다면, 사람들은 육체적인 측면을 제대로 논의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중시하나요? 에코 페미니즘이 목소리를 크게 외칠 수 있나요? 어쩌면 사람들은 육체라는 정신을 쫓는 중인지 모릅니다. 이건 육체의 정치학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화성 생존자들이 유물론 분위기를 강렬하게 풍긴다고 느낍니다. 죽은 행성에서 생명체로서 화성 탐사대는 존재해야 합니다. 화성 탐사대는 먹고 살아야 합니다. 화성 탐사대는 섹스하고,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하고, 육아 노동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화성의 왕궁에서>는 비단 이것들만 아니라 다른 육체적인 것들을 계속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이것은 아주 놀라운 생체 공학을 향해 이어집니다. 생체 공학, 생체는 육체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생체 공학, 육체적인 영역과 자연 환경은 별개가 아닙니다. 이것들과 자연은 상호 작용합니다.
존 발리는 이런 것들이 유물론 분위기를 풍긴다고 파악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서 육체적인 것들, 유물론은 아주 중요합니다. 현실 속에서 자연, 식량, 육체, 재생산은 인류 문명을 뒷받침합니다. 육체적인 것들에서 정신적인 것들이 파생하는 것처럼, 자연, 식량, 육체, 재생산은 인류 문명을 근본적으로 뒷받침합니다. 화성에서 탐사대는 작은 문명을 이룩해야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화성 탐사대는 먹고 섹스해야 하고, 이건 작은 문명이 됩니다. 인류 문명에게 육체적인 측면들, 자연, 식량, 재생산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존 발리가 유물론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존 발리는 강렬한 유물론 분위기를 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아랫집 수진이 <화성의 왕궁>을 읽고 강렬한 유물론 분위기를 느끼나요? 왜 아랫집 수진이 다른 서적들보다 SF 소설을 읽고 강렬한 유물론 분위기를 느끼나요? 아랫집 수진은 일상적인 자연, 식량, 재생산을 바라보고 유물론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성은 비일상적인 환경, 외계 불모지, 죽은 행성입니다. 화성에서 자연, 식량, 재생산은 훨씬 특별한 차원을 향해 승화합니다. 만약 화성에서 이유식을 구하기가 어렵다면, 여자 탐사 대원이 아기에게 젖꼭지를 내밀 때, 이건 훨씬 특별한 장면이 될 겁니다. 화성에서 풍족하고 건강한 식량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쩌면 어른 탐사 대원 역시 젖꼭지를 빨아야 할지 모릅니다.
비단 <화성의 왕궁>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식량과 인구는 긴밀한 연결 고리를 맺습니다. 만약 개척 세력이 농장들을 늘린다면, 식량들은 늘어날 테고, 풍족한 식량들은 많은 인구를 향해 이어질 겁니다. 자연, 식량, 재생산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합니다. 특히, 조화 친화도는 식량, 인구에 몰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반적인 자연, 식량, 재생산이 아닙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외계 자연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외계 자연 생태계에서 조화 친화도는 육체를 바꿉니다. 조화 친화도는 외계 유전 형질을 받아들입니다.
육체적으로 조화 친화도는 외계 자연과 조화를 이룹니다. 이건 이질적이고 육체적인 조화입니다. 심지어 조화 친화도는 제노 타이탄 같은 떡대 생체 병기를 키웁니다. 생체 개조는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떡대 생체 병기 제노 타이탄은 육체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육중한 육체를 내밀고 묵직하게 증명합니다. 조화 친화도는 자연, 식량, 재생산, 떡대 괴수를 이용해 육체적인 것들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제노 타이탄이 강렬한 유물론 분위기를 풍긴다고 느낍니다. 일상적인 자연보다 떡대 갯가재 괴수는 훨씬 강렬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에도 강렬한 유물론 향기가 있습니다.
소설 <야생종>에서 안얀우는 엄마입니다. 엄마로서 안얀우는 여러 남자들과 섹스하고, 여러 아기들을 낳고, 여러 아기들을 먹입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제3세계 여자들을 가축이라고 취급하는 것처럼, 자랑스러운 헬조선이 임신 가능 여자들을 조사하고 통계 자료를 만드는 것처럼, 가부장적인 남자 초인은 안얀우를 가축이라고 취급합니다. 안얀우는 계속 섹스하고, 계속 임신하고, 계속 출산하고, 계속 수유합니다. 안얀우가 초인이기 때문에, 안얀우는 이것들을 지겹게 반복합니다. 소설 <야생종>은 어떻게 가부장 폭력이 육체적인 것을 지배하는지 신물이 나게 보여줍니다. 가부장 문화는 육체적인 것을 끔찍하게 통제합니다. 이건 너무 강렬한 유물론 분위기입니다.
아랫집 수진은 '너무'가 부정적인 강조라고 생각하나, <야생종>은 너무 걸작입니다. 초인으로서 안얀우는 동물 변신술사입니다. 안얀우는 '육체'를 바꿉니다. 조화 친화도가 육체를 바꾸는 것처럼, 안얀우 역시 표범이 될 수 있습니다. 안얀우가 동물 변신술사이기 때문에, 다른 초인들보다 안얀우는 육체적인 것을 드러냅니다. 야생 동물로서 안얀우는 자연 환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화 친화도가 외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야생 동물로서 안얀우는 자연 환경에 속할 수 있습니다. 떡대 괴수로서 제노 타이탄에게 회복 능력이 있는 것처럼, 안얀우는 치유사입니다. 사실 사이언스 픽션에서 거대 괴수, 생체 병기, 변신술사에게 회복 및 재생 능력은 기본 옵션입니다.
[조화 친화도는 육체적인 측면, 자연, 식량, 재생산을 증명합니다. 누가 감히 떡대 갯가재 괴수에게 대드나요?]
회복 및 재생 능력은 육체를 살립니다. 어쩌면 안얀우의 젖에는 치유 효과가 있는지 모릅니다. 치유사 초인으로서 안얀우는 젖을 먹이고 육체를 살릴 수 있는지 모릅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이것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런 설정(치유 행위로서 수유)은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야생종>이 아주 강렬하고 원초적인 유물론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옥타비아 버틀러가 유물론을 의식했나요? 옥타비아 버틀러가 유물론을 연구했나요? <문명: 비욘드 어스>는 어떤가요? 조화 친화도를 설정하기 위해 게임 제작자들이 유물론을 연구했나요? 게임 제작자들이 유물론을 의식했나요?
어쩌면 옥타비아 버틀러는 유물론을 의식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게임 제작자들은 유물론을 알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자연, 식량, 재생산은 아주 근본적인 사항입니다. 우리가 인류 문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연, 식량, 재생산을 빠뜨리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인류 문명을 근본적으로 이야기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소설 <화성의 왕궁>과 소설 <야생종>과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는 자연, 식량, 재생산을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소설 작가들과 게임 제작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유물론을 느낍니다.
비단 <화성의 왕궁에서>와 <문명: 비욘드 어스>와 <야생종>만 아니라 생태학 SF 장르는 육체적인 측면, 유물론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생체 개조를 거치고 여자가 되는 것처럼, 조화 친화도가 외계 유전 형질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새로운 자연에서 새로운 문명이 나타나는 것처럼, 생태학 SF 장르는 육체적인 측면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SF 팬들은 엄청난 시대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은 근본적이나, 이것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미래 인류 문명에서 성별과 임신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임신은 여자에게 너무 아픈 멍에를 씌웁니다. 여자는 인간보다 암소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체 개조, 새로운 자연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자가 계속 임신해야 하고 인류 문명이 지구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겁니다. 특히, 심층 생태주의는 생체 개조, 새로운 자연에 크게 반대할 겁니다. 하지만 여자가 계속 임신해야 하나요? 여자에게 임신이 멍에가 아닌가요? 새로운 자연 개척이 반드시 침략이 되나요? 오직 지구에서만 인류 문명이 머물러야 하나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의견들은 육체적인 측면을 공통적으로 중시합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엄청난 시대 격차를 제안하고 육체적인 측면을 새롭게 고민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팬들은 중세 판타지 역시 유물론을 강조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드루이드가 표범으로 변신하거나, 풍요로운 자연을 예찬하거나, 생태계 순환을 연구하거나, 부상자를 치유할 때, 중세 판타지 팬들은 육체적인 측면을 느낄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중세 판타지에는 신이 있습니다. 중세 판타지에는 문자 그대로 신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거대 괴수와 어머니 행성이 자연의 여신이 된다고 해도, 이건 비유적인 의미입니다. 하지만 중세 판타지에서 신은 문자 그대로 신입니다. 신은 정신적인 측면, 관념론에 속합니다.
마틴 루터 킹이 카를 마르크스를 인정하는 동시에 역사 유물 관점을 (예의바르게) 부정하는 것처럼, 많은 상황들에서 신은 관념론에 속합니다. 물론 정신 대 육체, 관념론 대 유물론, 유신론 대 무신론은 너무 단순한 이분법입니다. 철학자들은 이런 대립 구도가 너무 단순하다고 비판할 겁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엥겔스조차 이런 이분법이 너무 조야하다고 비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상황들에서 신이 정신적인 측면, 관념론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리 드루이드가 표범으로 변신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예찬하고, 부상자를 치유한다고 해도, 중세 판타지는 유물론을 강조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중세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유물론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장르는 매력적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 환경에서 우리가 비롯하기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살고 섹스하기 때문에, 이것들이 육체적인 측면에 속하기 때문에, 생태학 SF 장르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새로운 육체, 새로운 자연을 제시하고 육체의 정치학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블로그가 생태학 SF 장르를 열심히 떠벌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블로그 역시 정말 매력적인지 모릅니다.)
※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 스크린샷 출처: selereth,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535758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