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과 영화, 게임의 대중성 본문
예전에 어떤 팟캐스트를 듣던 중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진행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몇몇 SF 창작물을 늘어놓는데, 하필 죄다 블록버스터 영화였습니다. 그 중에 소설은 하나도 없었어요. 어차피 그 팟캐스트는 사이언스 픽션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행자가 아주 짧게 언급했을 뿐이지만, 왜 하필 블록버스터 영화들만 늘어놨는지 의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진행자는 '블록버스터 영화 =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블록버스터 영화만으로 SF 장르를 평가하는 경우가 왕왕 있죠.
예전에 그런 기사를 봤습니다. <어벤저스>나 <인터스텔라>가 크게 흥행하자 어떤 기자는 우리나라 관객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게 사실일까요. <어벤저스>나 <인터스텔라>가 사이언스 픽션을 대표할만한 사례일까요. <인터스텔라>가 개봉했을 당시에 자리가 없어서 <인터스텔라>를 못 본다는 사람은 많았으나, 불새 출판사는 몇 번씩이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또한 사이언스 픽션을 논하자는 자리에서 소설은 뒷전이고 영화나 게임 이야기만 줄창 늘어놓는 경우도 봤습니다. 사이버펑크 소설은 언급도 되지 않으면서 <매트릭스>가 최고의 SF 작품으로 꼽히는 경우도 봤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로서 세상에 자기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19세기 이전의 유토피아 소설은 물론이고, 19세기의 초기 SF 소설들, 20세기 이후 본격적인 SF 소설들까지, 소설은 언제나 사이언스 픽션의 상상력을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21세기 지금도 사정은 그리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SF 영화의 상상력과 발상은 SF 소설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저도 SF 소설과 영화를 결코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장담할 수 없지만, 유명한 SF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 언제나 SF 작가들의 상상력이 영화보다 빨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이언스 픽션을 논하면, 대부분 영화만을 언급합니다.
마치 영화가 사이언스 픽션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시사 잡지, 텔레비전 뉴스, 팟캐스트, 교양 서적까지 SF 영화만을 위주로 언급하는 논의가 많습니다. 소설 위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영화만을 논의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더군요. 이게 그저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할까요. 아, 물론 소설보다 영화가 훨씬 대중적입니다. 영화는 종합 매체입니다. 텍스트보다 영상과 음악이 훨씬 받아들이기 좋은 수단입니다. 텍스트는 글을 읽고 상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귀찮죠. 영상과 소리는 보고 듣는 즉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편한 수단입니다. 비디오 게임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영화나 비디오 게임이 대중적이라고 해서 영화나 게임만을 논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화나 비디오 게임을 뛰어넘는 SF 소설들이 많고 많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사이언스 픽션의 본질을 논의하고 싶다면, 영화가 아니라 소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나 비디오 게임을 완전히 배척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와 비디오 게임도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저도 SF 비디오 게임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도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나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 같은 게임들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선 순위가 있고, 소설이 영화나 비디오 게임보다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소설과 영화, 게임을 골고루 이야기해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