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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SF 소설의 독특한 작문법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SF 소설의 독특한 작문법

OneTiger 2017. 4. 24. 20:00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을 보면, 온갖 차원의 별별 희한한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작가는 소설 속의 도시를 수많은 존재들이 복잡하게 어울리는 곳으로 설정했습니다. 그 중에 외계 거미(?)도 있는데, 이 거미는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나열합니다. 이 거미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밑도 끝도 없이 웅얼거립니다. 그래서 외계 거미의 대사는 다른 인물들의 대사와 다릅니다. 아니, 그냥 설정만 다르지 않고, 아예 문장 부호와 글자체까지 다릅니다. 다른 인물들은 이야기를 할 때 큰 따옴표("")를 사용하지만, 외계 거미는 말줄임표(……)를 사용합니다. 다른 인물들은 명조체를 사용하지만, 외계 거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글꼴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평범한 명조체를 사용하지 않아요. 그리고 <스타타이드 라이징>을 보면, 유전자 개조 돌고래들이 등장합니다. 이 신종 돌고래들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합니다. 이들은 개조 과정을 거쳐 인간처럼 똑똑해졌습니다. 덕분에 이들은 인간과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으나, 돌고래답게 자기들끼리 노래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 노래 언어는 삼진어라고 불립니다. 평범한 대화는 꺾쇠 표시(「」)를 사용하지만, 돌고래들의 삼진어는 곱하기 표시(**)를 사용합니다.


이처럼 SF 소설들은 비인간적인 존재들을 이야기하고, 때때로 그들의 음성을 독특한 방법으로 표시합니다. 그냥 묘사나 설명으로만 표시하는 경우가 많으나, 때때로 특이한 부호를 사용하거나 글자체를 사용합니다. 혹은 일부러 문법을 틀리거나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 존재가 인간이 아니며 보다 독특한 존재라는 걸 강조하죠. 마치 만화에서 특별한 말풍선을 사용하는 것처럼요. 사실 영화나 비디오 게임은 음성 효과를 집어넣을 수 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에서 '하얀 건 종이이고 검은 건 글씨'입니다. 소설이 뭔가 기이한 음성 효과를 보여주고 싶다면, 문장 부호나 글자체를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물론 이건 전형적인 작문법에 어긋납니다. 전형적인 작문법을 따른다면, 등장인물의 대사는 큰 따옴표로 표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비일상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싶다면, 전형적인 작문법을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저런 작문법은 어디까지나 일상적인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존재할 테니까요. 물론 전형적인 작문법만으로 비일상적인 상황을 묘사할 수 있겠으나, 아무래도 표현의 제약이 있겠죠. 만약 저 외계 거미가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말했다면, 뭔가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SF 소설은 '아이디어의 문학'이라고 불립니다. 그냥 아이디어가 아니라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장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파격적인 발상만이 전부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파격적인 아이디어는 파격적인 표현법이 필요하고, 따라서 가끔 SF 작가는 전형적인 작문법을 깨뜨립니다. <파괴된 사나이>를 보세요. 이 소설은 어떻게 초능력자들이 소통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사방팔방에 산문시를 날립니다. 만약 그런 산만한 산문시가 아니었더라도 <파괴된 사나이>는 파격적으로 보였을 테지만, 그 산문시 덕분에 훨씬 파격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알프레드 베스터는 <타이거! 타이거!>에서 아예 그림까지 동원했죠. 이건 대사가 아니라 공간 도약 묘사지만, 어쨌든 <타이거! 타이거!>는 어떻게 SF 소설이 기존 작문법을 뛰어넘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작문법은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곳에 적당히 사용한다면 파격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남발하거나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저 치기 어린 행동으로 보일 수 있죠. 가끔 부족한 발상과 설정과 필력을 감추기 위해 이런 꼼수(?)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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