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Creatura'와 비주류 사이언스 픽션들 본문
[이 장면은 새로운 식물, 새로운 자연, 대체 진화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게 SF 장르에 속하나요?]
전혜진 작가는 <순정 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를 썼습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평론은 국내 로맨스 만화들 중에서 SF 장르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국내 로맨스 만화들은 SF 장르에 속하고, 이것들은 로맨스 장르와 SF 장르를 함께 갖추었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국내 만화들이 로맨스 장르와 SF 장르를 함께 갖추었는지 분류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책의 서두는 '나의 오랜 억울함에 대하여'입니다. 본격적인 분류 전에, 전혜진 작가는 오랜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무엇이 억울한가요? 왜 전혜진 작가가 억울함을 호소하나요? 분류, 평론이 미비했기 때문입니다.
황미나 작가는 <레드문>을 그렸습니다. 황미나 작가와 <레드문>이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이 만화는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레드문>은 드문 사례입니다. 다른 많은 로맨스 SF 만화들은 어중간합니다. 로맨스 만화는 많은 오해들을 받습니다. 주된 편견은 로맨스 만화가 단순한 연애를 그리고 여성 판타지에 빠진다고 비난합니다. SF 장르 역시 주류가 아닙니다. SF 장르가 비주류이기 때문에, 많은 오해들에서 SF 장르 역시 자유롭지 않습니다. '공상 과학'은 아주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로맨스 만화와 SF 장르는 많은 오해들에 부딪히고, 그래서 전혜진 작가는 오래된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평론 서적 <순정 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처럼, 비주류는 주류 범주에 쉽게 들어가지 못합니다. <순정 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는 사실 비주류가 주류라고 주장하고 어떻게 비주류가 주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분류하고 증명합니다. 비단 로맨스 SF 만화만 아니라 다른 여러 문화 범주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SF 울타리에서 어떤 사이언스 픽션들은 억울한 비주류일 겁니다. 국내 문화에서 로맨스 SF 만화들이 비주류이고, 그래서 전혜진 작가가 오랜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처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사실 비주류는 비주류가 아닐지 모릅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어떤가요? 1991년 게임 <심어스>부터 발매 미정 게임 <Adapt>까지, 진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들은 (나름대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고유한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심어스>부터 <Adapt>까지, 일반적으로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범주에 속합니다. 진화 생물학자들이 생물 다양성을 연구하는 것처럼, 진화 이론과 생물 다양성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생명체들이 다른 생명체들과 상호 작용하는 동안, 생명체들은 진화합니다. 상호 작용이 협동이든 대립이든, 다양한 상호 작용들은 수많은 생명체들의 진화들로 이어집니다.
꿀벌과 꽃송이는 대표적인 상호 작용 관계입니다. 꿀벌과 꽃송이는 공진화를 대표합니다. 꽃송이 없이, 사람들은 꿀벌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합니다. 꽃송이에게는 꿀벌이 필요합니다. 꿀벌은 꽃송이를 찾고 꿀과 꽃가루를 모읍니다. 먹고 살기 위해 꿀벌은 꽃송이를 찾습니다. 다양한 상호 작용들은 영양분 순환 체계를 구성합니다. 호랑이에게는 검은 줄무늬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는 진화했습니다. 호랑이는 검은 줄무늬들을 이용하고, 수풀 속에서 잠복하고, 사슴을 사냥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영양분 순환 체계와 진화 과정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연 생태계 순환과 진화 과정은 맞물립니다.
자연 생태계 순환과 진화 과정이 맞물리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들 역시 자연 생태계 순환을 구현합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에서 핵심 주제가 진화이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 순환은 작은 비중을 차지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자연 생태계 순환을 구현하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에게 속합니다. 하지만 역(逆)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에게 속하나,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진화 시뮬레이션이 반드시 되지 않습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은 하위 범주이고,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상위 범주입니다. 왜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상위 범주인가요?
종종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은 진화 과정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심파크>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이 게임은 진화 과정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은 그저 다양한 북아메리카 생물 다양성을 조성할 뿐입니다. <쉘터 2>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이 게임 역시 진화 과정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에서 엄마 스라소니는 그저 아기들과 함께 장대한 자연 환경을 탐험할 뿐입니다. <심파크>와 <쉘터 2>를 비롯해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진화는 핵심 소재가 아닙니다. 왜 진화가 핵심 소재가 아닌가요? 우리 인간들이 진화 과정을 가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대형 동물들은 가시적인 진화 과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형 동물들에게) 생명 진화 과정은 아주 느린 현상이고, 이건 인간적인 기준을 아득하게 뛰어넘습니다. 유구한 생명 진화 역사가 자랑하는 것처럼, 이건 너무 아득합니다. 과학자들이 급진적인 진화 과정과 점진적인 진화 과정을 합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진화 과정을 목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심파크>와 <쉘터 2>처럼,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진화 과정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진화 과정과 자연 생태계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진화 게임들은 자연 생태계를 구현하나, 진화가 너무 아득하기 때문에, 종종 생태계 게임들은 진화 과정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니치>는 자연 생태계를 구현하나, 생태계 시뮬레이션 <심파크>는 진화 과정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자연 생태계를 구현하나, 생태계 시뮬레이션 <울프>는 진화 과정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화 시뮬레이션보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훨씬 폭넓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보다 진화 시뮬레이션은 협소합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이 협소하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생태계 시뮬레이션과 달리, 진화 시뮬레이션은 새로운 자연, 낯선 자연, 기이한 자연을 묘사합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은 대체 진화 역사를 묘사합니다.
<Creatura> 같은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은 현실 속의 진화 역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여러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샌드 박스에 속합니다. 샌드 박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뭔가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생명체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창조신이 되고, 창조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새로운 생명체들을 키웁니다. 새로운 생명체들은 새로운 자연 환경을 조성합니다. 그래서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새로운 자연 환경들을 묘사합니다. 새로운 자연 환경은 SF 설정입니다. <Creatura> 같은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 대체 진화 역사, 새로운 자연 환경은 SF 울타리에 들어갑니다.
[이 장면은 SF 장르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새로운 자연+진화 이론을 보여줍니다.]
SF 장르에서 가장 커다란 특징은 비(非)현실입니다. 현실에서 뭔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이건 비현실이 됩니다. <Creatura>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새로운 생명체들을 키우고, 새로운 생명체들은 새로운 자연 환경을 조성합니다. 현실에서 이 생명체들, 이 자연 환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자연 환경은 비(非)현실입니다. 다족 보행 트럭과 변신 전투기와 텔레파시 초능력자가 비현실인 것처럼, 새로운 자연 환경은 비현실입니다. 이건 모든 새로운 자연 환경이 비현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역시 새로운 자연 환경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중세 판타지와 진화 시뮬레이션은 다릅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은 서구 근대화를 반영합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에서 진화 이론은 아주 혁신적인 자연 철학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진화 이론을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허버트 웰즈가 진화 생물학을 공부한 것처럼, 19세기 서구 근대화에서 진화 이론은 유물론 자연 철학을 대표합니다. 이게 너무 혁신적이었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진화 이론을 왜곡하고 우생학을 퍼뜨립니다. 여전히 엉터리 사회 생물학은 여자들이 가정적으로 진화했다고 거짓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게 진화 생물학이라고 믿습니다. 이 착각은 너무 안타까우나, 그렇다고 해도 서구 근대화에서 진화 이론은 아주 혁신적이었습니다.
이건 진화 이론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만능 열쇠라는 뜻이 아닙니다. 엉터리 사회 생물학이 우생학에 빠지는 것처럼, 진화 생물학은 엉터리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찰스 다윈은 가장 대표적인 진화 생물학자이나, 찰스 다윈은 무한 경쟁 시장을 옹호했고 수많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차별했습니다. 만약 20세기 후반에서 찰스 다윈이 살았다면, 찰스 다윈은 끔찍한 신자유주의에 찬성했을지 모릅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허버트 웰즈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화 이론이 인간 중심주의를 뒤집었다고 생각하나, 진화 이론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공유 사회들은 생물 다양성을 존중했습니다.
과학 역사 서적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여러 공유 사회들이 야생 보호 구역을 원했고 생물 다양성을 존중했다고 설명합니다. 비록 이런 공유 사회들이 유물론보다 관념론에 치우쳤다고 해도, 공유지가 평등한 사회 구조를 이룩하기 때문에, 공유 사회들은 생물 다양성을 존중했습니다. 어쩌면 찰스 다윈보다 이런 공유 사회들의 사상들과 업적들은 훨씬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진화 이론은 서구 근대화 자연 철학을 대표합니다. <Creatura> 같은 진화 시뮬레이션은 진화 이론, 서구 근대화를 반영합니다. 반면, 중세 유럽 판타지는 서구 근대화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중세와 근대는 다릅니다. 양쪽은 대립합니다.
생태 유토피아 소설에서 윌리엄 모리스가 산업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목가적인 중세 마을을 묘사하는 것처럼, 중세와 근대는 대립합니다. 이건 윌리엄 모리스가 진보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 속의 목가적인 중세 마을은 미래 중세 마을입니다. 미래 중세 마을 사람들은 신을 떠받들기보다 인간 이성, 계몽주의를 믿습니다. 이 소설은 관념론보다 유물론에 기반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윌리엄 모리스가 보여주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중세와 근대가 대립한다고 간주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역시 근대와 대립합니다. 진화 이론은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와 진화 이론은 대립합니다.
아무리 중세 유럽 판타지가 새로운 자연 환경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 자연 환경은 진화 이론에 기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 판타지와 진화 시뮬레이션은 다릅니다. 진화 시뮬레이션이 근대 생태학, 진화 이론, 서구 근대화에 기반하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은 우주선 바이오 돔에 훨씬 가깝습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 역시 서구 근대화 생태학에 기반합니다. 진화 시뮬레이션과 우주선 바이오 돔은 똑같은 새로운 자연 환경을 제시하고 똑같은 서구 근대화 생태학에 기반합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은 SF 설정입니다. 진화 시뮬레이션과 우주선 바이오 돔이 비슷하고, 우주선 바이오 돔은 SF 설정이기 때문에, 진화 시뮬레이션 역시 SF 울타리에 속합니다.
<Creatura> 같은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하지만 국내 SF 문화가 로맨스 SF 만화들을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어떤 SF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은 <Creatura>가 SF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아서 클라크는 <라마와의 랑데부>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수많은 SF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은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새로운 생명체들, 새로운 생태계, 대체 진화 역사를 보여줍니다. <Creatura>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라마와의 랑데부>와 <Creatura>가 비슷한가요? <라마와의 랑데부>처럼, <Creatura>가 SF 장르에 속할 수 있나요?
분명히 비디오 게임 <Creatura>는 비현실(새로운 자연 환경)과 서구 근대화(진화 이론)를 연결합니다. 비현실과 서구 근대화는 SF 장르를 만듭니다. <Creatura>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비록 이 게임이 어설픈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해도, 분명히 이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생명체가 나타날 수 있지? 어머니 자연은 정말 경이로워!"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는 감탄하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이건 이른바 센스 오브 원더입니다. SF 장르에서 센스 오브 원더는 가장 중요한 미덕입니다. <Creatura>는 가장 중요한 SF 미덕, 센스 오브 원더를 구현하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힙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생명체가!" 이렇게 <Creatura>는 인식의 지평선을 넓히고 SF 장르에 속합니다. "뭐야! 이게 무슨 헛소리야? 어떻게 고작 진화 게임 따위가 SF 장르에 속하지? 나는 동의하지 않아!" 이렇게 <Creatura>는 감히 SF 장르에 속하지 못합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과 달리, <라마와의 랑데부>와 달리, <심어스>부터 <Adapt>까지, 진화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SF 장르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고정적인 영역, 절대적인 영역이 아닙니다. SF 팬들은 SF 장르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토론하고, 이 토론들 속에서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SF 장르는 다양한 토론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SF 팬들이 다양하게 토론한다고 해도, SF 팬들은 서구 근대화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초기 서구 근대화가 마가렛 캐번디시와 <불타는 세계>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합니다. 서구 근대화 때문에, 허버트 웰즈는 사이언티픽 로망스 <타임 머신>을 썼습니다. <타임 머신>은 진화 이론을 비롯해 서구 근대화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계몽주의라는 찬란한 용어와 달리, <타임 머신>이 암울한 미래 문명을 전망하는 것처럼, 언제나 서구 근대화는 찬란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서구 자연 철학자들은 제3세계 생물 다양성을 연구했고 진화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서구 자연 철학자들은 제3세계 생물 다양성을 연구했으나, 반면, 제3세계 사람들은 서구 문명을 자유롭게 들락거리지 못했습니다. 서구 문명이 제3세계들을 착취했고, 수탈했고,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제3세계 식민지에서 서구 근대화는 비롯했습니다. 서구 근대화와 제3세계 식민지 수탈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산업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산업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은 절대 떨어지지 못합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제3세계에게 일방적으로 기생하기 때문입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열대 밀림들을 반드시 파괴하고 수탈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진보 진영들조차 식민지 수탈을 외면합니다. 심지어 진보 진영들조차 식민지 수탈들을 아주 열심히 외면합니다. 많은 진보 진영들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존경합니다. 아무리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혁명보다 개혁을 주장했다고 해도, 이 양반이 진보 정당 시초이기 때문에, 어떤 측면들에서 이 양반이 상당히 전투적인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많은 진보 진영들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존경합니다. 문제는 식민지 수탈입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식민지 수탈에 찬성했습니다. 심지어 이 양반은 우월한 서구 백인 문명이 열대 밀림들을 수탈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열대 밀림 파괴가 착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아니, 이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많은 진보 진영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처럼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전투적인 사회주의자였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벤치마킹하는 것처럼,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전투적인 사회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수탈은 베른슈타인의 전투적인 사회주의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래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게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식민지 수탈에서 자본주의가 비롯했고, 베른슈타인이 식민지 수탈에 찬성했기 때문에, 아무리 베른슈타인이 전투적이라고 해도, 이 전투적인 사회주의에게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제3세계에게 기생한다고 증명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흡혈귀입니다. 흡혈귀가 사람들을 해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열대 밀림들을 파괴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1세기 초반 기후 정의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합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모순이 주변 국가들로 옮긴다고 말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제3세계들을 끔찍한 곤경에 빠뜨렸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오늘날 신자유주의 상황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선견지명을 갖추었다고 증명합니다. 블리디미르 레닌은 뛰어난 안목을 보여줬습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어떤가요? 이 양반은 기후 정의와 뛰어난 안목보다 수구 꼴통 인종 차별을 드러냈습니다. 이 양반이 착한 제국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이 양반은 식민지 근대화 이론의 원조입니다. 먹자 골목에서 원조 맛집이 존재하는 것처럼,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착한 제국주의 이론은 원조 식민지 근대화 이론입니다. 그래서 로자&레닌과 베른슈타인은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아무리 로자와 레닌과 베른슈타인이 똑같은 전투적인 사회주의자라고 해도, 원주민 학살과 열대 밀림 파괴 때문에, 로자&레닌과 베른슈타인은 다릅니다. 심지어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제3세계 독립 운동들을 지원했습니다.
코민테른은 뻘짓/삽질 집단이었으나, 적어도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3세계 모순들을 인식했습니다. 진보 진영들은 이오시프 스탈린과 악마가 동급이라고 비난하나, 오히려 베른슈타인은 제국주의를 옹호했고, 코민테른은 독립 운동들을 지원했습니다. (심지어 조선 독립 운동가들조차 코민테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흔히 진보 진영들이 로자와 베른슈타인을 대조할 때, 진보 진영들은 수정주의와 총파업과 1차 세계 대전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식민지 수탈에서 자본주의가 비롯했기 때문에,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식민지 논쟁일 겁니다. 심지어 개량이냐 혁명이냐 논쟁보다 식민지 논쟁은 중요한지 모릅니다.
20세기 초반 로자 룩셈부르크부터 오늘날의 기후 정의까지, 비단 생태 사회주의만 아니라 진보 운동 역사에서 식민지 논쟁은 가장 첨예한 논쟁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 민주주의부터 페미니즘까지, 많은 진보 진영들은 이것을 무시합니다. 유럽 중심주의는 너무 심각한 고정 관념입니다. 여기에서 SF 팬들이 예외인가요? 유럽 중심주의에서 SF 팬들이 예외인가요? 마가렛 캐번디시가 <불타는 세계>를 쓴 것처럼, SF 장르는 유럽 출신입니다. SF 장르를 논의하기 위해 평론가들은 서구 근대화를 빠뜨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유럽 중심주의에서 얼마나 SF 팬들이 자유로운가요?
※ <Green Jungle> 사진 출처: George Ho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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