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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사우리안>과 전자 드루이드, 레드 로자 본문

생태/문화·기술로서 자연

<사우리안>과 전자 드루이드, 레드 로자

OneTiger 2020. 5. 24. 19:51

[중생대 공룡과 홀로세 늑대는 다릅니다. 하지만 양쪽은 똑같은 조건, 지구 생물 다양성에 기반합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샌드 박스이고, 다른 하나는 오픈 월드입니다. 샌드 박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생태계를 직접 조성합니다. 화가가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채우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빈 땅에 식물상과 동물상(과 미생물상)을 채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비단 생물종들을 채울 뿐만 아니라 지형을 바꿉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언덕을 높이거나, 갯벌을 만들거나, 해안을 늘릴 수 있습니다. 많은 샌드 박스 생태계 게임들은 '테라포밍' 능력을 포함합니다. 이런 사례는 테라포밍이라는 개념이 생물 다양성, 자연 생태계를 포함한다고 증명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유명한 테라포밍 소설 <붉은 화성> 3부작을 썼습니다. 동시에 킴 스탠리 로빈슨은 소설 <퍼시픽 엣지>를 썼습니다. <퍼시픽 엣지>는 생태 유토피아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비단 테라포밍 소설만 아니라 생태 유토피아를 썼습니다. 이건 테라포밍이라는 개념이 자연 환경, 생물 다양성, 생태계를 포함한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날아가고, 개척 과학자들이 외계 소행성을 테라포밍한다고 해도, 만약 외계 소행성에서 풀씨 하나 자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이것을 테라포밍이라고 부르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이건 삭막한 테라포밍입니다.

 

 

1991년 <심어스>부터 2021년 발매 예정 <Among Ripples: Shallow Waters>까지, 이것들은 샌드 박스 생태계 게임들입니다. <심어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진화 역사를 관리하는 것처럼, 종종 샌드 박스 생태계 게임들은 대체 진화 역사를 구현합니다. <니치>, <인텔리젠트 디자인>, <스포어>, <Creatura> 같은 진화 시뮬레이터들은 여기에 속합니다. 반면,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생태계를 직접 조성하지 않습니다. 빈 땅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시작하지 않습니다. 이미 풍요로운 자연 생태계는 존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을 조종하고 자연 생태계를 탐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이 되고 어떻게 야생 동물이 살아가는지 직접 겪을 수 있습니다. 바닷속의 청어부터 창공의 날다람쥐까지, 작은 개미부터 거대한 인도 코끼리까지,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들은 다양한 야생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1986년 <오델 호수>부터 2020년 발매 예정 <AWAY: The Survival Series>까지, 이것들은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에 속합니다. 종종 오픈 월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보다 생태학 연구원을 조종합니다. <엔들리스 오션 2>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보다 잠수부를 조종합니다. 주인공 잠수부는 드넓은 바닷속을 돌아다니고 여러 해양 동물들을 관찰합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들에서 인간보다 야생 동물은 주인공을 맡습니다. 배미주 작가는 소설 <싱커>를 썼습니다. 사이버펑크 <싱커>에서 아이들은 야생 동물들에 '접속'하고 야생 동물들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이버펑크에서 등장인물이 가상 공간에 접속하고 새로운 인생, 세컨드 라이프를 살아가는 것처럼, <싱커>에서 야생 동물로서 아이들은 자연 환경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만약 가까운 미래에 야생 동물 증강 현실 기술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야생 동물이 되고 자연 환경을 새롭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들은 <싱커>와 비슷한지 모릅니다.

 

비록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들이 증강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이런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 이외에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야생 동물이 될 수 있나요? 현실에서 우리는 드루이드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어로 변신하지 못하고, 늑대로 변신하지 못하고, 기러기로 변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1994년 <울프> 표지 그림이 늑대 얼굴 절반과 인간 얼굴 절반을 합친 것처럼,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과 일심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은 이런 신선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소설 <야생종>을 썼습니다. 소설 주인공 안얀우는 치유사, 변신술사입니다. 가부장 식민지에서 안얀우는 벗어나고, 야생 동물로 변신하고, 자연 환경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만약 안얀우가 중세 유럽 판타지에 들어간다면, 안얀우에게 치유 능력과 변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중세 판타지 사람들은 안얀우가 드루이드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안얀우와 드루이드 사이에는 여러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안얀우와 달리, 현실에서 우리는 야생 동물로 변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들은 이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전자 동물 변신술사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에코 페미니즘은 이런 '전자 드루이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은 비디오 게임입니다. 수많은 비디오 게임들은 폭력적입니다. <둠 이터널>처럼, 어떤 게임들은 폭력을 노골적으로 자랑합니다. 비록 <둠 이터널>이 다소 특별한 사례라고 해도, 분명히 수많은 게임들은 폭력을 선사합니다. "와, 씨발! 빨리 죽여! 씨발, 죽어라, 죽어!"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들은 저도 모르게 소리칩니다. 비디오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피를 봐야 합니다. 결국 게임 플레이어는 누군가를 죽이고 쾌감을 얻습니다. 그래서 에코 페미니즘은 비디오 게임이 폭력적이라고 간주합니다.

 

 

1994년 게임 <울프> 역시 비디오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늑대가 되고 사슴을 죽입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살육이 쾌감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심지어 게임 플레이어는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고 사슴 학살자가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에코 페미니즘은 이런 전자 드루이드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해석들은 무궁무진합니다. 심지어 소설 <싱커>와 <야생종> 역시 폭력적인 장면들을 선사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야생종>을 읽고 가부장 남자가 변신술사 여자를 폭행하는 장면을 즐겁게 해석할지 모릅니다. 독자들은 소설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옥타비아 버틀러는 이것을 막지 못합니다.

 

이 관점에서 <야생종>보다 <울프>는 훨씬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울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성 폭력을 저지르지 못합니다. 아무리 야생 늑대가 사슴을 죽인다고 해도, 이건 먹이 그물망입니다. <둠 이터널>과 달리, <울프>는 폭력을 노골적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울프>는 그저 먹이 그물망을 구현할 뿐입니다. 게다가 <울프>는 드문 경험(야생 동물 되기)을 제공합니다. 많은 비디오 게임들, 심지어 SF 게임들, 판타지 게임들에서조차 주인공은 인간, 유사 인간입니다. SF/판타지는 비인간 존재를 묘사하나, 게임 주인공은 인간, 유사 인간입니다. 이런 SF/판타지 게임들과 달리, <울프>에서 주인공은 야생 동물입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비인간 존재를 구현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SF 장르보다 이건 'SF'에 가깝습니다.]

 

 

이 관점에서 이런 SF 게임들보다 <울프>는 SF 장르에 훨씬 가깝습니다. 둠 가이는 엄청난 인간이나, 그렇다고 해도 둠 가이는 인간입니다. 반면, 늑대는 야생 동물입니다. 인간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야생 늑대보다 둠 가이에게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둠 이터널>보다 <울프>는 훨씬 이질적인 감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인간보다 생물 다양성이 장대하고 원초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울프>는 장대하고 원초적인 감성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건 과대 평가가 아닐 겁니다. 비록 <울프>는 유명한 클래식 게임이 아니나, 21세기 초반 오늘날, <울프>에게는 재평가를 받기 위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에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이 되고 자연 환경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장르는 다양한 변주들을 보여줍니다.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이라는 울타리는 다양한 변주들을 포함합니다. <쉘터 2>는 전형적인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입니다. 하지만 <쉘터> 1편은 오픈 월드가 아닙니다. 1편 게임에는 스테이지(stage) 개념이 있습니다. <쉘터>와 <쉘터 2>가 오픈 월드 생태계에 똑같이 속할 수 있나요?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고개를 끄덕일 테고,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고개를 저을 겁니다. 해석들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양쪽은 옳습니다.

 

 

이른바 동물 시뮬레이터들은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어떤 동물 시뮬레이터들은 상당히 우스꽝스럽습니다. 이런 게임들은 동물 생태를 진지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게임들은 동물을 빙자하고 난리법석을 부립니다. <Catlateral Damage> 같은 게임과 <쉘터 2>가 똑같은 범주에 속할 수 있나요? 양쪽 비디오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동물(고양이, 스라소니)을 조종합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난리법석을 부리고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대자연을 독특한 모자이크 기법으로 묘사합니다. 어떻게 두 게임이 똑같은 범주에 속할 수 있나요?

 

BBC <살아있는 지구>는 웅장한 자연 다큐멘터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아있는 지구>가 웅장하다고 해도, 시청자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일방적으로 바라봅니다. 반면, <쉘터 2>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엄마 스라소니를 직접 조종합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일방적이나, 오픈 월드 생태계는 쌍방향입니다.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은 무한한 자유를 선사하지 못하나, 적어도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스라소니와 직접 동화할 수 있습니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야생 동물이 올무에 걸릴 때, 시청자는 "야생 동물은 올무에 걸렸어."라고 말합니다. 반면, 오픈 월드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을 이입합니다.

 

 

게임 <울프>에서 사냥꾼이 늑대에게 엽총을 쏘고 늑대가 죽을 때, 게임 플레이어는 "늑대는 총에 맞았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망할, 나는 총에 맞았어!"라고 말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인간이나, <울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이 되고, 사냥꾼이 총을 쏘고 야생 동물이 죽을 때, 게임 플레이어는 사냥꾼(인간)보다 야생 동물에게 자신을 이입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전자 드루이드가 됩니다. 자연 다큐멘터리 역시 이런 경험을 선사할 수 있으나, 동물 조종 게임은 훨씬 직접적인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래서 동물 조종 게임에게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Catlateral Damage> 역시 동물 조종 게임이고, <쉘터 2> 역시 동물 조종 게임입니다. 양쪽이 비슷한가요?

 

<쉘터 2>는 <살아있는 지구>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야생 환경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집고양이는 야생 환경이 아닙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Catlateral Damage>와 <쉘터 2>가 너무 다르다고 분리할 겁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양쪽이 똑같은 범주라고 묶을 겁니다. 두 해석은 대조적이나, 독자들이 소설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들은 <Catlateral Damage>와 <쉘터 2>를 떨어뜨리거나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 <2001 우주 대장정>과 변신술사 소설 <야생종>이 똑같은 SF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Catlateral Damage>와 <쉘터 2>는 똑같은 범주에 속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집고양이가 야생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두 게임은 완전히 다른 범주에 속합니다.

 

 

아무리 <2001 우주 대장정>과 <야생종>이 똑같은 SF 울타리에 속한다고 해도, <2001 우주 대장정>은 여자들에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결국 별의 아이는 서구 백인 상류층 남자입니다. 오랜 동안, SF 장르에서 서구 백인 남자들이 주체였던 것처럼, 상투적인 백인 남자 신화에서 <2001 우주 대장정>은 벗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야생종>은 제3세계 흑인 여자를 주목하고, 제3세계 흑인 여자는 우주선과 인공 지능 같은 첨단 기술보다 치유와 야생 동물 같은 원초적인 측면을 바라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야생종>은 아주 강렬한 야생 분위기를 풍깁니다. <2001 우주 대장정>과 <야생종>은 대조적입니다.

 

아무리 <2001 우주 대장정>과 <야생종>이 똑같은 SF 울타리에 속한다고 해도, 양쪽이 대조적인 것처럼, 아무리 <Catlateral Damage>와 <쉘터 2>가 똑같은 동물 조종 게임이라고 해도, 양쪽은 대조적입니다. 이 관점에서 양쪽은 똑같지 않습니다. 이 해석 역시 틀리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Catlateral Damage>와 <쉘터 2>를 분리할 수 있습니다. 만약 <Catlateral Damage>와 <쉘터 2>가 다르다면, <모래 언덕 바다 Dune Sea>는 어떤가요? 게임 플레이어는 기러기를 조종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오픈 월드보다 사이드 스크롤, 측면 진행 시점에 가깝습니다. <모래 언덕 바다>는 아케이드 게임 분위기를 풍깁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모래 언덕 바다>가 <울프>보다 <그라디우스>에 가깝다고 분류할 겁니다. <모래 언덕 바다>에서 게임 주인공은 야생 기러기이나, 이 게임은 자연 생태계를 시뮬레이션하지 않습니다. <울프>는 다양한 시뮬레이션 요소들을 제공하나, <모래 언덕 바다>는 비행 아케이드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래서 <울프>와 <모래 언덕 바다>는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생 기러기는 우주 전투기가 아닙니다. 우주 전투기는 적기들을 파괴하고 폭력을 선사하나, <모래 언덕 바다>는 광활한 자연 환경과 야생 기러기 무리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울프>와 <모래 언덕 바다>는 비슷합니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버드 위크>가 생태계 시뮬레이션에 속한다고 분류합니다. 이 게임 플레이 동영상(링크)을 보세요. <버드 위크>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될 수 있나요? <버드 위크>와 <울프>와 <쉘터 2>가 비슷한 범주에 속하나요? 만약 <버드 위크>와 <울프>와 <쉘터 2>가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면, <모래 언덕 바다>와 <울프>는 비슷한 범주에 속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양쪽 게임이 광활한 자연 환경과 야생 동물들을 똑같이 묘사한다고 묶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게임 플레이어는 <모래 언덕 바다>가 비행 아케이드 게임에 가깝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양쪽 분류는 틀리지 않습니다.

 

 

<버드 위크>와 <울프>와 <쉘터 2>와 <모래 언덕 바다>는 똑같은 범주(야생 동물 되기)에 속합니다. 아니면 <울프>와 <쉘터 2>는 비슷하나, <버드 위크>와 <모래 언덕 바다>는 다릅니다. <울프>와 <쉘터 2>는 전자 드루이드, 전자 안얀우를 구현하나, <버드 위크>와 <모래 언덕 바다>는 그저 액션 게임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들은 대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양쪽 해석은 틀리지 않습니다. <버드 위크>와 <모래 언덕 바다>보다 <사우리안>은 전자 드루이드에 훨씬 가깝습니다. 오픈 월드 <사우리안>은 시뮬레이션 요소들을 구현합니다. 이건 그저 액션 게임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우리안>에서 게임 주인공은 공룡들입니다. 유타랩터와 늑대는 다릅니다. 유타랩터와 늑대는 똑같은 야생 동물이나, 늑대는 홀로세 생태계에 속하고, 유타랩터는 중생대 생태계에 속합니다. 현실에서 생태학자는 살아있는 야생 늑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반면, 현실에서 생태학자는 살아있는 유타랩터를 관찰하지 못합니다. 만약 생태학자가 살아있는 유타랩터를 관찰한다면, 이건 SF 설정일 겁니다. 이건 <사우리안>이 SF 게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 SF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에서 공룡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공룡은 현실 동물, 홀로세 동물이 아닙니다. 유타랩터와 늑대는 너무 다릅니다.

 

 

[이 장면은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보다 아케이드 게임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것과 <울프>가 비슷한가요?]

 

 

만약 어떤 게임 플레이어가 <사우리안>을 좋아한다면, 이 게임 플레이어가 <울프>와 <쉘터 2>를 함께 좋아할 수 있나요? 어쩌면 게임 플레이어는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보다 공룡 게임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파카라사우루스 Parkasaurus>는 오픈 월드 생태계가 아닙니다. 이건 동물원 건설/경영 게임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다양한 공룡들을 보여주고, <사우리안> 역시 다양한 공룡들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공룡들 덕분에, 게임 플레이어는 <파카라사우루스>와 <사우리안>을 함께 좋아할지 모릅니다. 이 게임 플레이어는 <울프>와 <쉘터 2>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울프>와 <쉘터 2>가 야생 늑대와 야생 스라소니를 보여주기 때문에, 양쪽에게 공룡이 없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울프> 및 <쉘터 2>와 <파카라사우루스> 및 <사우리안>이 다르다고 분류할 겁니다. 이 게임 플레이어는 <오델 호수>와 <버드 위크>와 <모래 언덕 바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주 타이쿤>과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동물원 건설/경영 게임이나, 두 게임이 유전 공학을 이용하고 공룡들을 복제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파카라사우루스>와 <사우리안>과 <주 타이쿤>과 <와일드라이프 파크>가 비슷하다고 묶을지 모릅니다. 이게 타당한 분류인가요? 네, 이건 타당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사우리안>과 <주 타이쿤>과 <와일드라이프 파크>와 <파카라사우루스>를 함께 묶고 <울프>와 <쉘터 2>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건 타당한 분류입니다. 한편으로 게임 플레이어는 <사우리안>과 <울프>와 <쉘터 2>가 비슷하다고 묶을 수 있습니다. 세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을 조종합니다. 이것 역시 타당한 분류입니다. 만약 이게 타당한 분류라면, <개더링 스카이 Gathering Sky>는 어떤가요? <개더링 스카이> 역시 생태계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조류 무리를 조종합니다. 이건 오픈 월드입니다. <개더링 스카이>와 <울프>가 비슷한가요?

 

<개더링 스카이>와 <오델 호수>와 <울프>와 <사우리안>이 전자 드루이드를 구현하나요? 만약 <엔들리스 오션>이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이라면, 온갖 낚시 게임들, 사냥 게임들이 오픈 월드 생태계에 속하나요? <대물 낚시광> 같은 게임이 <엔들리스 오션>과 비슷한가요? 발매 미정일 <맨이터>는 어떤가요? 이 폭력적이고 피비린내가 쩌는 스크린샷들(링크)은 웅장하고 원초적인 자연 환경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둠 이터널>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개더링 스카이>와 <오델 호수>와 <울프>와 <사우리안>과 <맨이터>는 모두 야생 동물 조종 게임입니다. 이것들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노라 제미신은 <다섯 번째 계절>을 썼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초인 소설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소설 주인공 초인은 흑인 엄마입니다. 노라 제미신은 영어 문화 흑인 여자 작가입니다. 그래서 <야생종>과 <다섯 번째 계절>에는 여러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와 노라 제미신은 영어 문화 흑인 여자 작가입니다. 양쪽 모두 SF 그랜드 데임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야생종>과 <다섯 번째 계절>은 초인 소설입니다. 안얀우와 에쑨은 흑인 엄마입니다. 두 소설은 가부장에 반대하고 성 해방을 꿈꿉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행성 환경(대지불)을 중시합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야생종>이 야생 환경을 묘사하는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은 행성 환경을 중시합니다. 만약 <야생종>이 어머니 자연에 가깝다면, <다섯 번째 계절>은 아버지 대지에 가까울 겁니다. SF 독자들은 근본적인 공통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양쪽은 너무 다릅니다. <야생종>에서 동물 변신술사 안얀우는 거의 일방적인 피해자입니다. <야생종>은 액션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에서 오로진 에쑨을 비롯해 다른 초인들은 과감한 액션 장면들을 연출합니다. <야생종>은 암울하고 갑갑하나, <다섯 번째 계절>은 신나고 과감합니다.

 

 

두 소설 분위기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야생종>과 <다섯 번째 계절>이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안얀우가 표범으로 변신한다고 해도, 안얀우는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지 않으나, 에쑨은 차가운 고리를 돌리고 마을 전체에 지진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안얀우와 에쑨은 너무 다릅니다. 안얀우는 다소 순종적이나, 에쑨은 훨씬 사납습니다. (이건 새로운 여성 서사 문학이 가학성에 주목한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야생종>과 <다섯 번째 계절>이 비슷한가요, 아니면 대조적인가요? 양쪽 해석은 똑같이 타당합니다. <맨이터>와 <오델 호수>와 <울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맨이터>는 <개더링 스카이>와 <오델 호수>와 <울프>와 <사우리안>과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학 해석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생태계 게임 해석에는 정답이 없을 겁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맨이터>가 너무 폭력적이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에코 페미니스트 밸 플럼우드는 악어에게 습격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악어는 밸 플럼우드를 잡아먹지 못했으나, 악어 습격 덕분에, 밸 플럼우드는 자연과 문명을 새롭게 바라봤습니다. 어쩌면 게임 플레이어는 <맨이터>를 플레이하고 자연과 문명을 새롭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심지어 게임 플레이어는 자본주의를 비판할지 모릅니다.

 

 

<맨이터>는 <개더링 스카이>와 <오델 호수>와 <울프>와 <사우리안>과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을 수 있으나, 이런 '전자 드루이드'들에게는 비슷한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와인 소믈리에가 포도 품종과 토질과 기후를 파악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들은 전자 드루이드 생산 조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생태학자들은 자연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을 연구합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은 이것을 반영합니다. 현실에서 생태학자들이 자연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을 연구하기 때문에,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은 전자 드루이드를 구현합니다. 분명히 유타랩터와 바다 악어와 늑대는 똑같은 야생 동물들입니다.

 

지구 자연 환경에서 생물 다양성이 살아가기 때문에, 전자 드루이드들은 지구 자연 환경을 반영합니다. 아무리 <사우리안>과 <울프>와 <맨이터>가 다르다고 해도, 결국 세 게임들에게는 똑같은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지구 자연 환경은 똑같은 생산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생산 조건(지구 자연 환경)은 심각한 위기에 부딪힙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수탈하고,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기후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언론 매체들이 온갖 쓰레기들, 기후 변화를 보도할 때, 많은 사람들은 윤리적인 소비, 친환경적인 소비를 운운합니다.

 

 

하지만 소비가 정말 문제인가요? 만약 사람들이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으로 소비한다면, 환경 오염들이 사라지나요? 그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온갖 상품들이 뚝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상품 물신주의입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게 상품 물신주의라고 강렬하게 비판할 겁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온갖 상품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훨씬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훨씬 많이 판매하고, 훨씬 많이 판매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훨씬 많이 생산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무분별하게 생산하고, 무분별한 생산들은 온갖 환경 오염들을 일으킵니다.

 

만약 자본가 계급이 플라스틱 상품들을 만들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은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버리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소비자들이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버리기 원한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이 만들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버리지 못합니다. 소비보다 생산은 우선합니다. 생산 없이, 소비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생산 없이 소비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비를 줄이자고 외칩니다. 이건 너무 커다란 오해입니다. 소비가 줄어야 하나요? 소비가 정말 줄어야 하나요? 이건 근본적인 대안이 아닙니다. 이미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생산량 대비 소비량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에게 지구 환경은 생산 조건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생산 조건을 무분별하게 수탈합니다.]

 

 

훨씬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훨씬 많이 생산하기 원합니다. 훨씬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낮은 임금을 주기 원합니다. 심지어 자본가 계급은 육아 노동에게 댓가를 절대 지불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제도로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엄청난 상품들을 생산하나, 임금들이 낮고 무급 노동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비량은 생산량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과잉 생산으로 흘러가고, 이건 거품 경제가 됩니다. 언젠가 거품은 펑~ 터집니다. 거의 주기적으로 자본주의는 경제 공황에 빠집니다. 자본주의 경제 공황은 필연입니다.

 

아무리 무산자 민중들이 소비를 줄인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은 필연적으로 과잉 생산합니다. 소비와 상관없이, 자본가 계급은 과잉 생산해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에게 오직 이윤 창출만 유일무이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에 명품 의류 기업 버버리는 수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상품들을 폐기했습니다. 상품 브랜드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할인 없이, 영리 기업은 수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상품들을 폐기합니다. 규모는 훨씬 작으나, 개인적으로 저는 비슷한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 지인들 중에는 GS 마트 직원이 있었습니다. GS 마트는 신선 상품들(농산물, 축산물, 수산물)을 판매합니다. 이것들 역시 폐기 대상입니다.

 

 

신선 상품들이 충분히 팔리지 않을 때, GS 마트는 신선 상품들을 할인합니다. 하지만 재고들이 너무 남을 때, GS 마트는 이것들을 폐기합니다. 이건 대형 할인점이 멀쩡하고 신선한 음식 재료들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굶주리나, 영리 기업은 멀쩡하고 신선한 음식 재료들을 버립니다. 이건 그저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 논픽션 매체들은 얼마나 영리 기업들이 무분별하게 낭비하는지 고발합니다. 아무리 소비자들이 소비를 줄인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은 무분별하게 낭비합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량은 소비량을 추월합니다.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입니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과잉 생산이라고 분석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사람들이 윤리적인 소비를 떠들기 전에, 이미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과잉 생산이라고 선구적으로 분석했습니다. 만약 로자 룩셈부르크가 21세기 초반 윤리적인 소비를 듣는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게 너무 커다란 착각, 심각한 망상이라고 분노할 겁니다. 이런 커다란 착각, 심각한 망상 때문에,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환경 오염들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생산 조건(지구 자연 환경)은 위기에 빠집니다. 전자 드루이드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나, 현실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들이 전자 드루이드, 전자 안얀우를 좋아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맨이터>와 <개더링 스카이>와 <오델 호수>와 <울프>와 <사우리안>이 다르다고 해도, 전자 드루이드들에게 비슷한 생산 조건이 있고, 거대 자본가 계급이 생산 조건들을 무분별하게 수탈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전자 안얀우는 로자 룩셈부르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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