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화성의 왕궁에서>가 보여주는 개척 사회와 생체 공학 본문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는 화성에서 생존하는 이야기이기고, 동시에 화성을 개척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두 가지는 서로 다르지 않거나 동전의 양면일지 모릅니다. 만약 인류가 외계 행성을 개척하고 싶다면, 그 전에 외계 행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남는 동안, 인류는 외계 행성을 개척할 수 있겠죠.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로빈슨 크루소> 같은 소설처럼, 살아남기 위해 생존자는 얼마든지 개척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살아남기 원했으나, 결국 작은 개척지를 이루었죠.
<15소년 표류기>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이들은 생존자가 되어야 했으나, 생존하는 동안 다들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파리 대왕>은 꽤나 부정적인 사례이나, 생존자들이 개척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아주 부정적이고 야만적인 개척자가 되었죠. (하지만 이미 미국 같은 나라는 학살과 침략 없이 존재하지 못하는 야만적인 개척 국가입니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짜 문명이 아니죠.) <신비의 섬> 역시 생존자들이 개척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아예 유토피아 소설로 승화합니다.
생존자가 개척자가 되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인류 탐사대가 외계 행성에 갔다고 해도, 인류 탐사대는 생존자이자 개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소설들을 모아놓은 소설 모음집이 존재한다면, 그건 꽤나 재미있을 것 같군요. 저는 무조건 생존 및 개척 이야기가 외계 행성을 떠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명이 닿지 않은 오지라면, 거기가 심해나 무인도나 고산이나 사막이나 극지나 거대한 우주선이라고 해도, 그건 크게 무리가 없을 겁니다. 사막이나 극지에서 탐사대가 살아남는 이야기 역시 이질적인 감성을 선사할 수 있겠죠.
영어권 시장에 온갖 소설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편집자는 이미 그런 구상을 떠올렸을지 모르죠. 멋지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이야기가 정말 SF 소설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에서 벗어나고 다른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인류는 지구와 문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고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소설은 인류가 문명을 이루거나 자연 환경과 맞서는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보여줄 수 있겠죠. 그런 소설은 새로운 사회학과 생태학을 접목하고 어떻게 인류가 살아왔고 어떻게 인류가 살아가야 하는지 보여줄 수 있겠죠.
<화성의 왕궁에서>는 그런 종류에 속하는 소설입니다. 화성에서 미국 탐사대는 연구 기지를 차리고, 각자 임무들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연구 기지가 무너졌습니다. 몇몇 탐사 대원은 살아남았으나, 몇몇 대원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어요. 문제는 그들에게 화성을 떠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연구 기지에는 로켓이 있으나, 조종사들이 죽었기 때문에 로켓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로켓에는 여러 장치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장기간 생존을 담보하기에 부족합니다. 화성 궤도를 맴도는 우주선은 생존 물품들을 내려줄 수 있으나, 지상에 착륙하지 못합니다.
이 우주선이 지상에 착륙한다면, 다시 날아오르지 못할 겁니다. 탐사대는 구조를 요청하나, 지구가 언제 구조대를 보낼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고작 몇몇 탐사 대원을 구하기 위해 지구는 비싼 우주선을 새로 건조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지구는 새로운 우주선을 언젠가 건조하겠으나, 그게 언제일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낭만적이고 순박한 SF 작가들은 지구 사람들이 용감무쌍하고 박애적인 정신으로 구조대를 파견할 거라고 적을 겁니다. 존 발리는 그렇게 허투른 사람이 아닙니다. 지구와 화성은 이웃 사이가 아닙니다. 탐사 대원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갑작스러운 혼란이 지나간 이후, 점차 탐사 대원들은 암울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탐사 대원들은 화성을 떠나지 못합니다. 화성에서 그들은 생존해야 하고, 어쩌면 아예 개척자가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수 인원이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면, 여기에서 온갖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현대 도시 사람들이 문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명은 막대한 노동력을 요구합니다. 문명을 일군 장본인은 막대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문명을 일구는 중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왕이나 장군이나 학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노동자들이 막대한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문명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노동 가치 이론은 아주 중요하죠. 시장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하지만 화성에는 몇몇 탐사 대원이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탐사 대원들이 개척지를 만든다고 해도, 그 개척지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요. 개척지는 사회를 뜻합니다. 몇몇 대원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탐사 대원들이 개척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의식할 때, 점차 그런 문제들은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생존 및 개척 이야기에서 이런 새로운 사회학은 빠지지 못하는 요소입니다. 비단 외계 행성을 개척하는 이야기만 아니라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시 새로운 사회학을 보여줍니다. 왜 <트리피드의 날>이 어떤 사회학자를 보여주고, 일장연설을 보여주겠어요.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야 했고, 그래서 사회학자는 인장연설을 늘어놨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외계 행성을 개척하는 이야기와 다릅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외계 개척 양쪽 모두 똑같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외계 행성에 인류 문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사회는 우리가 아는 사회와 많이 다를 테고, 그래서 새로운 사회학이 필요할 겁니다. 여기에서 여러 문제들이 수면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평소에 사회 문제들은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합니다. 거대한 문명이 그런 사회 문제들을 억누르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성 차별 문제는 쉽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설사 여자들이 성 차별을 언급한다고 해도, 남자들은 두 눈을 까뒤집거나 게거품을 물고 난리법석을 떨죠. (남한 사회 역시 그런 꼬락서니를 보여주고요.)
하지만 생존자들이 소수라면, 생존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면, 그런 문제들은 더 이상 가라앉지 않을 겁니다. 그런 문제들은 적극적으로 튀어나올 겁니다. 현대 인류 문명에서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원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왜? 남자가 여자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보조해야 하기 때문에. 현대 문명에서 세상을 이끄는 주역들은 남자들입니다. 대부분 거대 재벌들은 남자들입니다. 여자들이 없지 않으나, 압도적으로 남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존중하는 위인들 역시 남자들입니다. 여자들이 없지 않으나, 압도적으로 남자들이 많습니다.
소설 <태양이 없는 땅>에서 주인공 소녀는 (백인) 남자 위인들을 줄줄이 떠들고, 왜 오직 남자들이 위인이 되는지 궁금해합니다. 그것처럼 현대 문명에서 여자들은 수동적인 위치로 굴러떨어집니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대등하지 못했습니다. 영국에서 1928년에 21세 여자들은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련되고 고상한 유럽에서 겨우 1928년에 여자들은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문제가 외계 개척지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건 이상한 현상일 겁니다.
하지만 존 발리는 그런 문제를 깊게 파고들지 않습니다. 존 발리는 그저 그런 문제를 훑어보고 대충 지나갑니다. 필력이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설마 그렇지 않겠죠. <잔상> 같은 소설은 이질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보여주고, 독자는 감탄사를 연발할 겁니다. <잔상> 이외에 <캔자스의 유령>이나 <역행하는 여름>은 얼마나 존 발리가 사회 구조를 깊이 꿰뚫는지 보여줍니다. 이런 작가가 사회 구조를 어설프게 만들 이유는 없겠죠. <화성의 왕궁>에서 존 발리가 사회 구조를 대충 넘어가는 이유는 훨씬 중요한 소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새로운 사회학을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고 해도, <화성의 왕궁>은 탐사 대원들이 부딪히는 심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을 아예 내다버리지 않습니다. 성 역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로서 존 발리는 고정적인 성 역할을 우주 밖으로 내던집니다. 여전히 여자는 임신할 수 있고,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는 좀 더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 화성 개척지에서 여자와 남자는 서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섹스할 때, 물건을 집어넣는가, 물건을 받아주는가, 그저 이런 차이가 남았을 뿐이죠.
하지만 탐사 대원들이 일차단결한다고 해도, 화성에서 살아남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무력함과 암울함은 수시로 사람들의 마음 속을 장악합니다. 다들 우울증이나 조바심을 드러내고, 외계 개척지는 침울하거나 날카로운 분위기에 빠집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이런 생존 및 개척 이야기에서 농사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농사는 지속적인 먹거리를 제공하고요. 이미 <로빈슨 크루소> 같은 고전적인 생존 및 개척 이야기부터 농사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SF 세상에는 낯선 상황에서 농사를 짓는 숱한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화성의 왕궁>에서 생존자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 논의합니다. 생물학자는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생태학자는 농사가 주변 생태계를 교란시킬 거라고 걱정합니다. 작물이 토착 생명체를 밀어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작물이 화성에 적응한다면, 과학자들이 어떤 식물을 연구한다고 해도, 과학자들은 그게 토착 생명체인지 확실히 구분하지 못할 겁니다. 생태학자는 개척지가 주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꽤나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생물학자는 농사를 지지하고, 생태학자는 주변 생태계를 걱정하죠. 이는 어떻게 생물학자와 생태학자가 다른지 보여주는 장면일지 모릅니다.
생물학자는 개별적인 생물 현상을 연구합니다. 반면, 생태학자는 생명체들이 이룩한 총체적인 그물망을 연구하죠. 생물학자는 개별적인 생물에게 주목할 수 있으나, 생태학자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생태학자는 전체를 봐야 하고, 그물망을 봐야 합니다. 개별적인 생물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못합니다. 전체 그물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생물 역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생물학과 생태학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두 가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사실 비슷한 점들이 아예 없지 않아요. 생물학과 생태학은 긴밀한 관계를 맺었죠. 우리가 생물학이 없는 생태학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급진적인 사회주의라고 해도 개인을 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총체적인 생태학이라고 해도 개개의 생물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물학과 생태학은 엄연히 다릅니다. 특히, 전체 그물망이라는 개념은 생태주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겠죠. 생태학자가 걱정한 것처럼, 탐사 대원들은 정말 토착 생명체를 발견합니다. 비록 탐사 대원들은 화성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그들은 외계 생명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존 발리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외계 생태계를 전개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화성의 왕궁에서>는 그렇게 평범하게 나가지 않습니다.
여러 소설들에서 존 발리는 다양한 생체 개조들을 강조했습니다. 남한에서 번역된 영미권 SF 작가들 중 존 발리는 생체 개조를 가장 강조하는 작가들 중 하나일 겁니다. 프랭크 허버트나 옥타비아 버틀러 역시 그런 설정을 자주 이용하고, 존 발리는 프랭크 허버트나 옥타비아 버틀러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옥타비아 버틀러를 존 발리보다 높게 평가할 겁니다. 저 역시 옥타비아 버틀러가 정말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야생종>이 보여주는 생체 변신이나 <블러드 차일드>가 보여주는 수술 장면은 정말 인상적입니다. SF 독자들이 생체 우주선을 논의할 때, <제노제네시스> 시리즈는 빠지지 않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생체 공학 사업이라는 관점에서 존 발리는 설정을 야심차게 밀고 나갑니다. 똑같이 생체 개조를 중시한다고 해도, 프랭크 허버트와 옥타비아 버틀러와 존 발리는 서로 달라요. 프랭크 허버트는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뭔가 이계적인 감성을 풍기죠. 존 발리는 공학적인 측면을 중시합니다. <공습>이나 <노래하라 춤추라>나 <분지 속에서>는 그런 생체 공학을 잘 드러냅니다. 이런 생체 공학과 인공 생태계가 가장 중후장대하게 펼쳐지는 존 발리의 소설은 <가이아 3부작>인 것 같습니다.
결국 <화성의 왕궁에서>는 생체 개조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결국 <화성의 왕궁에서>는 우주 탐사와 생존과 개척을 거치고, 생체 개조 이야기가 됩니다. 이를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생체 마을? 생체 개척지? 저는 생체 개척지가 가장 그럴 듯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 이건 정말 근사하군요. 생체 개척지. 외계 행성을 개척하는 이야기들은 많으나, 생체 개척지는 상대적으로 별로 없을 것 같군요. 비단 SF 소설들만 아니라 SF 비디오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죠. 숱한 외계 개척 게임들을 보세요.
<서브노티카>부터 <에이븐 콜로니> 같은 게임들에 생체 개척지가 등장하나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화성의 왕궁에서>는 별로 길지 않은 소설입니다. 존 발리는 신비한 생체 공학을 시도하는 것 같으나, 독자는 그걸 충분히 즐기지 못할 겁니다. 뭔가가 시작하려는 순간, 소설은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만약 <화성의 왕궁에서>가 장편 소설이었다면, 이렇게 섭섭하지 않았을 것 같군요. 하지만 비록 짧다고 해도, <화성의 왕궁에서>는 생체 개척지라는 독특한 설정을 충분히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