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 바이오펑크의 매력과 두근두근 인조인간 연애 이야기 본문
소설 모음집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는 8편의 장르 단편 소설들을 담았습니다. 2편은 공포 소설이고, 6편은 SF 소설들입니다. 구성에서 책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건 SF 소설들에 힘을 주는 모음집이군요. 책을 읽는다면, 독자들 역시 SF 소설들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제일 처음에 실린 단편 <풀잎 위의 개미> 역시 SF 소설이고요. SF 소설들을 추구하는 모음집으로서 이 책은 전건우 작가가 쓰는 머릿말로 시작합니다.
머릿말에서 전건우는 인공 지능이 소설을 쓰는 시대가 왔으나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쓰는 소설에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 소설을 써야 할지 모릅니다. 수많은 인문학자들이나 소설가들은 인공 지능이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죠. 수많은 사람들은 그게 인간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할 거라고 두려워해요. 하지만 저는 그게 별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공 지능과 인간이 쓰는 소설에는 서로 다른 장점이 있을 테고, 우리는 그런 장점들을 함께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인공 지능이 소설을 쓴다고 해도, 다른 몇몇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인간 소설가들이 필요할 겁니다.
여기에서 저는 그런 것들을 일일이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보다 저는 소설 모음집이 수록한 SF 소설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어떤 것은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고, 어떤 것은 섬뜩하고 무섭습니다. <풀잎 위의 개미>는 기생충을 공생 생물로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바이오펑크의 매력(?)을 듬뿍 담았어요. 과학자들은 놀라운 생체 개조 기술을 연구했고, 기생충을 공생 생물로 바꾸었습니다. 공생 생물들은 수명과 근력을 늘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공생 생물을 받아들입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이런 신체 개조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은 별로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공생 생물을 시술하는 의사이고, 동시에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위험한 소재를 연구합니다. 다른 시도들은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 소설 주인공은 극단적인 방법에 손을 댑니다. 그건 극단적이고 위험한 동시에 끔찍한 방법입니다. <풀잎 위의 개미>를 사로잡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소름이 끼치는 충격입니다. 아무리 기생충이 공생 생물로 바뀌었다고 해도, 그런 생물들이 몸 속에 붙어있다면…. 별로 기분이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생체 개조 기술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공생 생물이 곱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아요. 존 발리가 쓴 <노래하라, 춤추라> 같은 소설이 괴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이재옥이 쓴 <Owner’s Mate>는 자유 의지를 깨달은 인조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속에서 모든 인조인간은 인간 주인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인간 주인은 오직 하나의 인조인간을 소유할 수 있고, 인간 주인 없이 인조인간은 살지 못합니다. 인간 주인이 사라진다면, 회사는 인조인간을 폐기할 테고, 회사가 폐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정상 인조인간은 제대로 살지 못해요. 문제는 소설 주인공 인조인간이 인간 주인에게 반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사랑을 갈구하나, 인간 주인은 소설 주인공에게 무심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기 위해 소설 주인공은 계략을 짜기 시작했고, 인간 주인의 생활을 주무르기 시작합니다. <Owner’s Mate>는 인조인간의 관점에서 어떻게 인간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요. 이 소설은 인조인간을 빙자해 인간의 감정을 해부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소설이 집에 갇힌 여자와 밖으로 돌아다니는 남자를 담았다고 해석할지 모르겠어요. 이재옥이 그걸 의도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가 그걸 의도했다고 해도, <Owner’s Mate>는 성별 억압이나 가사 노동 수탈을 별로 자세히 분석하지 않는 것 같아요.
김성희가 쓴 <사랑예방백신백신>은 풍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동화처럼 작가는 존댓말로 서술합니다. 존대말로 서술하는 성인 소설은 좀 어색하군요. 그 덕분에 작가가 원하는 해학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설정 역시 살짝 골 때립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건 생존을 위해 불필요한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사랑 바이러스를 박멸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 세상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릇 문명인은 사랑을 몰라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문명인이 있다면, 야만인 역시 존재할 겁니다.
만약 문명인이 그런 야만인과 사랑에 빠진다면? 사랑을 박멸하는 세상에서 문명인이 야만인과 사랑에 빠진다면? <사랑예방백신백신>은 통상적인 SF 소설이 아니고, 하드 SF 소설은 더욱 아닙니다. 이 소설 모음집에 하드 SF 소설과 가까운 소설은 없어요. 만약 하드 SF 소설이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예방백신백신>은 어떻게 풍자 소설이 SF 소설과 만날 수 있는지 우스꽝스럽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욱 빛나는 것 같습니다. <사랑예방백신백신>은 디스토피아와 풍자를 뒤섞은 연애 소설에 가까워요. 그래서 독자는 신나게 웃을 수 있고, 이 소설 모음집에서 <사랑예방백신백신>은 제일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소설인 것 같군요. ("오빠, 미쳤어요?"는 나름대로 명대사일지도….)
신스틱이 쓴 <미래의 이브>는 오귀스트 릴라당이 쓴 동명 소설에서 제목을 빌렸습니다. 릴라당이 쓴 <미래의 이브>에는 두 남자와 여자 인조인간 하나가 등장합니다. 미래의 이브는 여자 인조인간을 가리키죠. 신스틱이 쓴 <미래의 이브>는 정반대입니다. 주연 등장인물들은 넷이고, 그들 중 셋은 남자 인조인간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인간 여자고요. 다른 몇몇 인조인간이 있으나, 그들은 오직 조연에 불과하고 별로 비중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 여자가 최후의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미래의 이브>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고, 대부분 인류는 사라졌습니다. 오직 여자 하나만 안전한 장소로 대피할 수 있었죠. 다른 인조인간들은 최후의 인간이자 최후의 여자를 보살피고 위로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여자는 듬직하고 잘생긴 남자 인조인간과 사랑에 빠지나, 어느 날 인조인간들은 어떤 인간 남자를 발견합니다. 최후의 여자, 잘생긴 인조인간, 최후의 남자. 후대를 잇기 위해 최후의 여자와 최후의 남자는 서로 사랑해야 할 것 같으나, 상황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3각 관계는 시작하고, 따라서 <미래의 이브>는 일종의 연애 소설입니다. 이건 마음이 콩닥콩닥, 두근거리는 연애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소설로서 <미래의 이브>는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의 이브>는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본분에 충실합니다. 하지만 그런 본분을 각성하기 전에 <미래의 이브>는 풋풋하고 설레는 연애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습니다. 연애 이야기가 신나기 때문에 <미래의 이브>가 사이언스 픽션으로 각성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신스틱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리를 세심하고 절절하게 묘사하고, 그때마다 독자의 감정 역시 사방으로 멋지거나 우울하게 날아갈 겁니다.
<미래의 이브>는 SF 소설 모음집에 들어갈 수 있으나, 이게 연애 소설 모음집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건 아주 잘 어울릴 겁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묘사하는 대목은 청아하고 화기애애하고 유쾌합니다. 신스틱은 전지적 시점이나 관찰자 시점을 버리고, 1인칭 화자 시점을 선택했어요.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화사한 봄의 여신으로 치장하기 위해서겠죠. 하지만 결국 사이언스 픽션으로서 <미래의 이브>는 어떻게 인간이 비인간적인 존재와 만나는지 이야기해요. 인간과 비인간. 그들이 이루는 모순적이고 이상한 관계. 결국 SF 소설에서 장점은 비인간적이고 비주류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겠어요.
서재우가 쓴 <일곱 번째 남편>은 암울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기후 변화 덕분에 인류는 지하 동굴로 들어가고, 생존을 위해 비참하고 매정하게 살아갑니다. 생존이라는 단어 앞에서 인간은 인간성을 버려야 합니다. 지하 동굴 도시에서 인간성은 절대 중요한 요소가 아니고, 인간 역시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제목처럼 <일곱 번째 남편>은 그런 비참한 상황을 결혼과 연결하고, 왜 인간이 인간을 도구로서 바라보는지 묘사합니다. 소설이 묘사하는 지하 동굴 도시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구조와 정반대이고, 누군가는 그런 점을 주목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특징이 있다고 해도 <일곱 번째 남편>은 여자들이 억압을 받는 현대 사회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암울한 도시를 묘사하기 위해 서재우는 가부장적 구조를 바꿨을 뿐이죠. 소재 그 자체는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들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서재우는 그걸 기이한 결혼 생활과 연결했고, 그래서 이 소설이 훨씬 충격적인 것 같군요. 하지만 <일곱 번째 남편>은 오직 충격적인 상황만 묘사할 뿐이고, 디스토피아를 자세히 분석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그걸 원했다고 해도, 분량은 너무 짧죠. 저는 작가들이 디스토피아를 분석적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런 소설이 아쉽다고 느낍니다.
전건우가 쓴 <할망구 17호>는 사이언스 픽션보다 경계 소설 같습니다. 이 소설에는 로봇이 등장하나, 로봇은 그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 뿐입니다. 로봇은 그저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 보살피고 관계를 맺는지 보여줄 뿐이고, 독자적인 역할을 맡지 않아요. <Owner’s Mate>나 <미래의 이브>에 비해 <할망구 17호>는 로봇에게 비중을 할애하지 않아요. 대신 이 소설은 넉넉한 인심을 강조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그립니다. 그런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으나, 저는 로봇이 좀 더 독립적인 역할을 맡기 바랐습니다.
솔직히 로봇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건 전개에 별로 무리가 없을 겁니다. 로봇 대신 다른 인간 할머니가 등장했다고 해도, 소설의 주제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SF 소설을 평가할 때, 저는 이런 기준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어떤 창작물에서 SF 설정을 뺀다면, 그 창작물이 계속 주제나 사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가? <미래의 이브>는 연애 소설처럼 보이나, SF 설정은 절대 빠지지 못합니다. 반면, <할망구 17호>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할망구 17호>는 <미래의 이브>보다 주류 문학에 훨씬 가깝겠죠. 넉넉한 인심은 좋으나, 저는 그 부분이 좀 아쉬웠습니다.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와 <오늘의 사건사고>는 공포 소설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소설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두 소설은 SF 소설이 아니고, 아울러 생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이 블로그에 어울리는 소설이 아닌 것 같군요. 전반적으로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가 수록한 여섯 SF 소설들은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특히, 저는 <풀잎 위의 개미>와 <미래의 이브>를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풀잎 위의 개미>는 시각적인 충격을 강조하고 그걸 세상이 뒤집어지는 악몽으로 승화합니다. 독자들은 이런 악몽을 잊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이 머릿속에 무엇을 담았을지 궁금합니다. 우리 인간이 동물이기 때문에 동물을 자르고 파헤치고 찢고 빨아먹는 이야기는 소름이 끼치는 감성으로 이어지겠죠. 여러 SF 하위 장르들 중 바이오펑크는 그걸 제일 잘 하는 장르고요. <미래의 이브>는 콩닥콩닥 연애 이야기를 풋풋하게 살렸습니다. 동시에 신스틱은 인간과 비인간이 교차하는 충격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연애 부분이 콩닥콩닥하기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이 교차하는 외로움은 더욱 커질 수 있겠군요. 게다가 <미래의 이브>는 이 세상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요. 이런 기분 때문에 독자들은 SF 소설을 계속 읽게 되겠죠.
저는 연애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가 필력이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연애 이야기는 콩깍지입니다. 사랑은 아주 달콤하고 살살 녹는 감정이고, 그래서 사람은 콩깍지를 덮어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작가조차 콩깍지를 쓸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 풋풋하고 달콤하고 살살 녹는 감정을 소설 속에 집어넣기 위해 작가는 콩깍지를 쓸 테고, 그런 콩깍지는 유치하고 어설픈 묘사로 이어질지 몰라요. 작가는 활화산처럼 터지는 로망을 글에 쏟아붓는 동시에 어느 정도 글과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콩깍지를 쓴다면, 글과 거리를 두지 못할 테고, 그건 유치한 장난으로 이어질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연애 이야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그렇게 사랑이 두근거리는 감정이라면, 그런 사랑이 세계 멸망과 이어졌을 때, 훨씬 커다란 충격을 미칠 수 있겠죠. 저는 <미래의 이브>가 그런 점을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이브>는 설레고 두근거리는 연애 소설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사랑이라는 아주 당혹스럽고 달콤한 감정을 파국적인 세계로 연결했습니다. 하나는 더없이 긍정적인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더없이 부정적인 상황이나, 긍정적인 감정은 부정적인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승화했죠. SF 소설 이외에 무슨 소설이 이런 승화를 연출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