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화재감시원> - 과거라는 또 다른 현재 본문
소설 <화재감시원>은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과거로 떠나고, 과거 사람들과 함께 어울립니다. 소설 주인공은 다양한 과거 사람들과 부딪히고 대화하고 울고 웃고 떠듭니다. 이런 관점에서 <화재감시원>은 다른 숱한 시간 여행 이야기들과 비슷합니다. 숱한 시간 여행 이야기들 속에서 소설 주인공은 다른 시대로 떠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딪히고 대화하고 울고 웃고 떠듭니다. 하지만 <화재감시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아요. <화재감시원>은 그들을 그저 지나간 과거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라고 간주합니다.
<화재감시원>에 지나간 과거 역사 따위는 없습니다. 모든 순간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재이고,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사람들은 생생하게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그저 죽은 것이라고 여기나, <화재감시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과거는 죽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저 과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뿐입니다. 현재 사람들이 과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과거 사람들은 분명히 생생하게 살아있었습니다. 현재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본다고 해도, 그런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살아있는 또 다른 현재입니다.
현재로서 현재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현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로서 2018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이 몇 천 년을 거쳤고, 인류 역사가 몇 십 만 년을 거쳤고, 자연 생태계가 몇 십 억 년을 거쳤기 때문에 2018년 역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저 인류 문명이 흐른 역사만 간주한다고 해도, 역사가 몇 천 년을 거쳤기 때문에 2018년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몇 천 년을 흐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울고 웃고 떠들었을 겁니다. 2018년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죽은 과거이고,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지 않았다면, 2018년 사람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과거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거는 또 다른 현재입니다. 그런 현재들이 계속 쌓였기 때문에 2018년 역시 존재할 수 있어요. 이 세상에서 역사적이지 않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인류 문명에서 역사적이지 않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인류 문명에서 모든 것은 역사적인 것이고 역사를 거친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계속 바뀌었고, 그런 과정에서 2018년 역시 나타났습니다.
흔히 수많은 사람들은 역사적인 흐름을 쉽게 무시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저 현재로서 현재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역사적인 것이 없고 갑자기 현재로서 현재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건 굉장히 형이상학적인 믿음입니다. 이른바 지적 설계론 지지자들은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적 존재(신)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간주하고 수많은 생명체들이 끊임없이 진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까치는 또 다른 공룡이 아니라 그저 조류에 불과합니다. 비단 저런 사람들만 이런 형이상학적인 믿음을 유지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현재로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어마어마한 폭력들을 거쳤고 몇 백 년에 걸쳐 나타났습니다. 자본가는 처음부터 자본가가 아니었고, 임금 노동자 역시 처음부터 임금 노동자가 아니었습니다. 임금 노동자들을 만들고 훈련시키기 위해 사실 자본가들은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 전근대적인 농민이 근대적인 임금 노동자가 되는 과정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주류 경제학, 부르주아 경제학은 이런 역사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일반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본가가 그저 자본가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과거가 그저 죽은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울고 웃고 떠들었으나, 사람들은 그런 과거가 아예 사라졌다고 생각해요. 심지어 사람들은 그런 과거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흐름 없이 현재가 살아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언제나 역사는 흐르고 바뀝니다. 우리는 2018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재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2018년 역시 언젠가 과거가 될 겁니다. 만약 인류가 2400년대까지 생존할 수 있다면, 2400년대 사람들은 2018년을 머나먼 과거라고 생각하겠죠. 2400년대 사람들은 2018년을 죽은 역사라고 생각하고, 2018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아요.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2018년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재입니다. 2018년을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에게 2018년은 죽은 역사가 아니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 아닙니다. 2018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2018년은 시시껄렁한 역사 교과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현재입니다. 이것처럼 죽은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요. 과거는 언제나 또 다른 현재이고, 사람들에게 역사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순간입니다. 2400년대 사람들은 2018년을 죽은 과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2018년 사람들은 1886년이 죽은 과거라고 생각하겠죠. 1886년 사람들은 또 다른 과거를 죽은 과거라고 생각할 테고요. 하지만 모두 틀렸습니다. 적어도 <화재감시원>은 그게 아니라고 말해요.
<화재감시원>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 소설이 과거를 죽은 역사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재감시원>에서 소설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갑니다. 거기에서 소설 주인공은 과거 사람들이 (죽은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과거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미래에서 왔고, 미래로 돌아갈 수 있고, 미래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이 미래로 돌아간다고 해도, 역사 속에서 과거 사람들은 울고 웃고 사랑하고 떠들겠죠. 소설 주인공이 어디로 돌아가든, 그런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설 주인공이 미래에서 왔다고 해도, 과거 사람들은 현재로서 존재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그 사실을 깨닫고 괴로워합니다. 과거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해도, 소설 주인공은 훌쩍 미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미래에서 소설 주인공은 과거 사람들이 죽은 역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그게 틀린 생각이라고 깨닫습니다. 소설 주인공이 미래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거는 죽지 않을 겁니다. 과거는 또 다른 현재로서 존재할 테고, 사람들은 울고 웃고 사랑하고 떠들 겁니다. 이런 깨달음은 <화재감시원>을 꿰뚫는 핵심일 겁니다. 그래서 <화재감시원>은 다른 시간 여행 이야기들과 다르겠죠.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면, 역사를 죽은 과거라고 단순하게 바라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 역사가 점점 더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고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낙관적인 긍정론을 믿고,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주장합니다. 좌파적이거나 우파적이거나 어디에나 그런 낙관적인 긍정론은 존재합니다. 만약 정말 인류 역사가 점점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고 가정하죠. 언젠가 정말 유토피아가 나타난다고 가정하죠. 어쩌면 몇 백 년 이후, 인류 역사는 유토피아를 만들지 몰라요. 그때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침략 전쟁이나 환경 오염이나 대규모 빈곤은 모두 날아갈지 모르죠. 저는 제발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발 인류 역사가 유토피아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은 역사 위에서 그런 유토피아는 서있을 겁니다. 만약 내일 당장 유토피아가 나타난다고 가정하죠. 하지만 내일 당장 유토피아가 나타난다고 해도, 인류 역사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내일 당장 유토피아가 나타난다고 해도, 과거는 바뀌지 않아요. 내일 당장 유토피아가 나타난다고 해도,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노예들, 빈민들, 가난한 노동자들, 폭행을 당한 여자들, 학살을 당한 부족민들이 존재했고, 그런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런 폭력과 억압 위에 유토피아는 서있습니다. 그래서 유토피아 역시 그 자체로서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저는 인류 역사가 유토피아를 만든다고 해도, 과거를 죽은 역사라고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과거를 너무 쉽게 묻습니다.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쉽게 따라갑니다. 다들 당장 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우리는 두 눈을 중시하죠. 그래서 두 눈이 볼 수 없는 것들(역사적인 흐름)은 우리의 인식 속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 체계는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선호해요. 자본주의 체계는 역사적인 것을 묻기 원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것을 잊으라고 세뇌시킵니다.
여러 경제학 원론들은 역사적인 것을 지우고, 오직 자본주의만 설명합니다.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들은 현재를 그저 현재로서 포장합니다. 이건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무조건 자본주의의 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이 역사적인 흐름을 무시한다면, 사람들 역시 그런 것을 따르겠죠. 만약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유토피아가 나타난다면, 이런 형이상학적인 믿음이 쉽게 없어질까요. 사람들이 역사적인 흐름을 중시하고, 과거를 또 다른 현재라고 생각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무엇이 현대 문명을 제대로 분석하는 방법인지 지적할 뿐입니다. 그리고 현대 문명은 과거를 죽은 역사라고 가르치고, 역사적인 흐름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유토피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역사적인 것을 중시해야 하겠죠. 모든 것은 역사적인 것이고,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따로 고립시키지 말아야 할 겁니다. 인류 역사는 군도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는 사슬이나 그물에 가깝습니다. 모든 것은 서로 이어졌고, 따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인 것을 느끼고 싶다면, SF 소설들은 좋은 수단이 될지 모릅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나 대체 역사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을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SF 독자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살필 수 있고, 역사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겠죠. 이 글에서 저는 <화재감시원>을 호평했으나, 다른 좋은 소설들 역시 많습니다. 그런 시간 여행이나 대체 역사를 읽을 때마다, 저는 현재가 고정되거나 고립되지 않았고, 역사가 언제나 바뀌고, 그런 변화들이 서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과거는 바뀌지 않습니다. 글쎄요. 우리가 타임 머신을 만든다면,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요. 과거로 돌아가고, 노예를 해방하고, 식민지를 해방하고, 여자들을 해방하고….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인류 역사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주적인 의지는 그걸 허락하지 않을지 모르죠. <화재감시원>이 설정한 것처럼,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억압적인 과거는 바뀌지 않을지 모르죠.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바꾸지 못한다고 해도, 과거를 잘못된 시각으로 바라볼 이유는 없습니다. <화재감시원>에서 소설 주인공이 깨달은 것처럼 우리 역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죽은 과거>라는 시간 여행 소설을 썼습니다. <화재감시원>과 달리, <죽은 과거>는 감동적이거나 따뜻한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죽은 과거> 역시 과거를 죽은 역사나 고립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과거는 또 다른 현재이고, 그런 현재들이 모이기 때문에 역사는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 현대 문명 역시 존재합니다. 저는 이런 시각이 현대 문명을 제대로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SF 소설들 역시 비슷한 시각을 보여주고요. 이건 제가 코니 윌리스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해석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코니 윌리스나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해도, <화재감시원>이나 <죽은 과거>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고, 근본적으로 그런 통찰은 틀리지 않습니다. 저는 코니 윌리스나 아이작 아시모프가 좀 더 급진적이고 좀 더 전복적으로 나갔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도 <화재감시원>이나 <죽은 과거>는 대단한 소설이고, 어떻게 우리가 과거를 바라봐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어쩌면 역사 교과서들보다 이런 SF 소설들이 훨씬 나을지 몰라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죽은 과거를 배워야 한다면, <화재감시원>이나 <죽은 과거>는 역사 교과서들보다 나을지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