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홍수>의 정원사들과 <이 폐허를 응시하라> 본문
필립 호세 파머는 <리버월드> 시리즈라고 불리는 여러 장편들과 단편들을 썼습니다. 이 소설 시리즈에서 사람들은 풍족한 재화를 누립니다. 과학 기술이 아주 발달하고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다면,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막대한 생산량 증가는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기술적인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그걸 그리는 SF 소설들 역시 있습니다. 하지만 필립 파머는 기술적인 유토피아에 반박하고 물질적인 풍요가 무조건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리버월드> 시리즈에서 충분한 재화들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짓밟습니다. 물질적인 조건은 기술적인 유토피아를 충족하나, 여전히 수탈은 존재합니다. 필립 파머는 인간이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 욕구에 끝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물질적인 조건이 풍부한다고 해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원한다면, 전쟁과 착취와 수탈은 끊이지 않을 겁니다. 모든 사람이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면, 남자들이 더 이상 여자들을 강간하지 않거나 차별하지 않을까요. 그저 물질적인 조건이 사람들의 관념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닐지 모릅니다. 물질적인 조건은 많은 것을 바꾸겠으나, 그건 전부가 아닐지 모릅니다.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는 <리버월드> 시리즈와 정반대 같습니다. 소설 <홍수>에서 신의 정원사들은 주연 집단입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소박하고 가난합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너무 많은 잉여 생산물들을 축적하지 않고, 재활용품들을 사용하고, 버려진 집들에 삽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해치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수탈하지 않습니다. 정원사들은 평등한 공동체를 구성합니다. 비단 인간만 아니라 야생 동물들과 가축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 신의 정원사들은 애씁니다. 정원사들은 작은 동물부터 거대한 대왕 오징어까지 모두에게 나름대로 존재할 가치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물질적인 부를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정원사들이 당장 서로 싸우고 좀 더 많은 부를 가지기 위해 서로 다툰다고 해도, 그건 절대 이상하지 않습니다.
<리버월드> 시리즈를 비롯해 수많은 창작물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환경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신의 정원사들은 서로 싸우고 죽여야 합니다. 인간이 정말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면, 본질에 따라 신의 정원사들은 서로 죽이거나 수탈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원사들은 만물이 평등하다는 기치를 절대 어기지 않고, 때때로 몇몇 구성원이 탈선한다고 해도, 전반적인 사상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물질적인 부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부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수탈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필립 호세 파머가 지적한 권력? 네, 권력은 막강한 탐욕이죠.
하지만 권력 구조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구조입니다. 다수가 소수에게 대항한다면, 권력 구조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소수는 온갖 신화들을 지어냅니다. 그들은 신이 왕을 점지했고, 백인이 흑인이나 원주민보다 우월하고, 남자보다 여자가 수동적이고, 자본가보다 노동자가 게으르고, 국가가 국민의 안녕을 지킨다고 거짓말합니다. 소수 지배자는 필수적으로 거짓말들을 늘어놔야 합니다. 신이 왕을 점지했나요? 아니, 아무도 신을 증명하지 못하죠. 백인이 원주민보다 우월한가요? 그건 전형적인 제국주의 논리죠.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게으른가요? 예나 지금이나 하루 종일 위험하고 오염된 작업 환경에서 노동자들은 일합니다. 그게 나태인가요?
남자보다 여자가 수동적인가요? 그건 왜곡된 사회 생물학입니다. 난자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여자가 수동적이라는 논리는 웃기지 않는 헛소리입니다. 국가가 국민의 안녕을 지킬까요? 하지만 국가는 멀쩡한 국민을 빨갱이로 몰고 학살하고 탄압합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몰려왔을 때, 공권력 백인 경찰들은 가난한 흑인 난민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자본가를 편들기 위해 국가는 지역 공동체를 짓밟습니다. 올림픽에서 국가 대표 선수가 금메달을 딴다고 해도, 산업 재해 노동자들이나 멸종 위기 동물에게는 땡전 한푼도 돌아가지 않아요. 하지만 자꾸 지배 계급은 국가가 신성하다고 세뇌시키죠. 인민들을 국가라는 허상에 복종하는 노예로 만들기 위해.
만인이 잘 살기 위해 물질적인 조건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그건 중요합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유토피아, 오직 물질적인 풍요만 뒷받침하는 유토피아는 반쪽짜리 유토피아일지 모릅니다. 물질적인 조건이 충족된다고 해도,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여전히 짓밟을지 모릅니다. 물질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계급 구조를 파악해야 하고 계급 의식을 각성해야 할 겁니다. 장 지글러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 문명은 엄청난 식량을 생산합니다. 사람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계급 구조를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죠. <리버월드> 시리즈와 <홍수>를 비교한다면, 독자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이건 우리가 물질적인 조건을 외면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조건은 우리의 관념을 바꿀지 모릅니다. 우리가 관념을 바꾼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형성할 수 있고, 그런 사회 구조 안에서 우리는 서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겠죠. 그게 무슨 모습이 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꾸준히 권력을 서로 나누고 평등한 사상을 인식해야 할 겁니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서 화폐는 권력을 대변할 수 있고, 그래서 완전한 기본 소득은 권력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권력을 나누고 사회가 평등해질 때, 평등한 사회는 또 다시 평등한 인간상을 낳을 수 있겠죠.
어떤 독자들은 <홍수>와 신의 정원사들이 비현실적인 설정이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런 독자들은 <리버월드> 시리즈에서 서로 짓밟는 인간들이 현실적인 설정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그런 독자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고 믿겠죠. 하지만 정말 인간이 본질적으로 탐욕스러울까요? 환경 아포칼립스 속에서 모든 인간이 야만 상태로 빠져들고 서로 착취하고 수탈해야 할까요? 레베카 솔닛이 쓴 재난 사회학 서적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그런 주장이 편견이라고 주장합니다.
재난 사회학자들은 재난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공동체를 구성하는지 연구합니다. 레베카 솔닛은 다양한 재난 상황들을 둘러보고 재난 사회학자들과 이야기합니다. 재난 사회학자들은 처참한 폐허 속에서 사람들이 얼마든지 평등한 공동체를 이룩하고 공유지를 설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질적인 부가 풍족하다면, 사람들은 훨씬 쉽게 평등한 공동체를 이룩하고 공유지를 설정할 수 있겠죠. 물질적인 부는 얼마든지 평등한 공동체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레베카 솔닛은 오직 너무 긍정적인 사례들만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탐욕스럽다는 편견에 반박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탐욕스럽다는 편견은 지배 계급에게 아주 유리합니다. 아주 거대한 비극이 터진다고 해도, 지배 계급이 그런 비극을 일으킨다고 해도, 지배 계급은 그걸 인간의 본질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는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사회 구조보다 인간의 본질을 운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억압적인 수직 계급 구조는 사라집니다. 오직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질만 남겠죠. 버스 운전 기사가 교통 사고를 일으킨다면, 그건 버스를 성급하게 운전한 기사의 잘못이 됩니다. 버스 운전 기사가 빨리 쉬고 싶어했기 때문에, 버스 운전 기사는 성급하게 운전했고 교통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버스 기사의 개인적인 잘못을 욕하겠죠.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버스 회사가 운전 기사들을 해고하고, 개인적인 업무량이 과다하게 늘어나고, 버스 운전 기사들이 과로하는 상황은 절대 문제가 되지 않죠. 왜? 개인적인 잘못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문제이기 때문에. 설사 사람들이 버스 회사 사장을 개인적으로 욕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 구조를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지배 계급이 막대한 이윤을 축적하고 비극들을 일으킨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걸 절대 비판하지 않습니다.
억압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누군가가 인간의 본질을 강조한다면, 그 사람은 지배 계급의 나팔수가 될 겁니다.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저도 모르게 지배 계급의 나팔수가 되겠죠. 무엇보다 인간의 본질은 절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성향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인간의 성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미 고대 혈거인들 역시 각종 사상들을 터득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죠. 사회 구조가 바뀔 때,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등한 공동체를 이룩한다면, 평등한 공동체는 평등한 인간 군상을 낳을 테고, 그런 인간 군상은 다시 훨씬 평등한 공동체를 이룩하겠죠. 그렇게 우리는 계속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설사 이게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우리는 그런 미래를 시도할 수 있겠죠. 왜 시도조차 하지 않고 어리석은 광신 때문에 우리가 포기해야 할까요. 적어도 우리는 시도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