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과 지속적인 탐구 활동 본문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만약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조건이 해결된 상태라고 가정한다면, 살면서 가장 두려운 두 가지가 권태와 허무인 듯해요. (중간 생략) 저는 권태와 허무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자 운동하는 게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위 문구는 비평 서적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이동진 평론가와 김중혁 작가가 일곱 소설들을 비평하는 서적입니다. 이 책에서 <속죄>부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까지, 이동진 평론가와 김중혁 작가는 여러 소설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이것저것 분석합니다. 일곱 소설들 중에는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있어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와, 이건 정말 멋진 제목입니다. 누구나 이런 제목에 강렬한 인상을 느끼고 쉽게 잊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렇게 멋지고 인상적인 제목을 지을 수 있을까요. 밀란 쿤데라 본인 역시 이 제목이 정말 인상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야기할 때, 이동진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조건이 사라진다면, 인생에서 권태와 허무는 가장 커다란 두려움이 될 겁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에게 권태와 허무는 가장 큰 위협이 될 테고, 권태와 허무 사이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수렴할 겁니다. 무엇을 하든 인간들은 권태와 허무를 벗어나지 못하겠죠. 충분하게 먹고 살 수 있을 때, 인간은 더 이상 노동하고 고생하지 않을 테고, 그건 권태와 허무가 될 겁니다. 노동과 고통은 권태와 허무를 내쫓거나 억누를 수 있으나, 노동과 고통이 사라질 때, 인간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때, 인간에게 권태와 허무는 가장 큰 적이고 위협이 될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이 노동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권태와 허무에 수렴할 겁니다. 이런 주장이 정말 옳을까요? 이런 사고 방식이 정말 옳을까요? 만약 이런 사고 방식이 옳다면, 이렇게 누군가는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래, 인간은 노동하고 고생해야 해.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권태와 허무에 빠질 거야. 따라서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고 자동 기계들이 모든 노동을 도맡는다고 해도, 인간은 그런 상황을 포기해야 해. 권태와 허무를 피하기 위해 인간은 계속 노동하고 고생해야 해. 인간들은 계속 치열하게 생존 경쟁해야 해." 이런 주장은 무한 생존 경쟁을 지지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생존 경쟁으로 몰아가고,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목숨들을 잃는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그게 옳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무한 경쟁 상황에서 권태와 허무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크게 두 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인간이 권태와 허무에 빠진다고 해도, 그런 상황은 무한 생존 경쟁보다 나을 겁니다. 적어도 권태와 허무를 느끼는 인간은 목숨을 잃지 않을 겁니다. 권태와 허무는 부정적인 현상이나,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면, 인간은 차별과 억압과 오염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권태와 허무는 차별과 억압과 오염보다 훨씬 낫겠죠. 권태와 허무는 충분히 먹고 살지 못하는 상황, 모든 생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보다 훨씬 낫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끊임없는 권태와 허무에 수렴한다고 해도, 인간이 구태여 무한 생존 경쟁 상황을 조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무한 생존 경쟁 상황에서 권태와 허무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권태와 허무가 뭘까요? 사전적으로 권태는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인간이 관심을 잃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허무는 인생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 상황을 가리키죠. 왜 권태와 허무가 나타날까요? 권태와 허무가 나타나는 중요한 원인들이 뭘까요? 변화가 없는 상황은 원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이 바뀌지 않을 때, 인생에서 변화가 없을 때, 쳇바퀴처럼 모든 것이 반복적일 때, 인간은 권태와 허무를 느끼겠죠.
무한 생존 경쟁 상황은 이런 쳇바퀴를 조장할 겁니다. 무한 생존 경쟁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은 계속 경쟁에 매달려야 합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다시 싸울 겁니다. 무한 경쟁이기 때문에 경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경쟁은 반복됩니다. 쳇바퀴처럼 경쟁은 반복합니다. 이 세상은 만인이 만인과 싸우는 전장입니다.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무한 경쟁이 활기를 조성한다고 주장해요. 하지만 정말 무한 경쟁이 활기를 조성하나요? 그건 망상입니다. 이 세상에 아주 수직적인 계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직적인 계급 속에서 강자는 약자를 쉽게 짓밟을 수 있습니다. 무한 경쟁 상황에서 약자는 계속 강자와 경쟁해야 하고, 강자는 계속 약자를 짓밟을 겁니다. 약자는 계속 짓밟힐 겁니다. 이런 상황은 인간(약자)을 권태와 허무로 몰고 갈 겁니다. 현대 도시 생활은 바쁘고 지치고 피곤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현대 도시 생활이 부정적이라고 여깁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현대 도시 생활이 권태롭고 허무하다고 느낍니다. 다들 월요일을 싫어합니다. 다들 월요일이 지겹고 짜증나는 쳇바퀴라고 여깁니다. 무한 생존 경쟁이 쳇바퀴이기 때문입니다. 무한 생존 경쟁이 지칠 때까지 사람들을 몰아붙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한 생존 경쟁이 당연하고 이게 필수적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한 생존 경쟁이 당연하고 필수적이라는 논리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인류 문명에서 숱한 무한 경쟁 상황들은 당연한 현상이 아니라 차별과 억압이었죠. 자유 시장 경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동진 평론가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인간이 무한 생존 경쟁을 환영할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때, 인간이 권태와 허무를 느낀다면, 그건 무한 생존 경쟁보다 훨씬 낫습니다. 적어도 권태와 허무 속에서 강자는 약자를 짓밟지 못할 겁니다.
무엇보다 정말 이동진 평론가가 옳게 주장했을까요? 정말 인간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면,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이 노동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권태와 허무로 향할까요? 하지만 그건 인간을 과소평가하는 사고 방식일지 모릅니다. 고전 자유주의 철학자 빌헬름 훔볼트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게 탐구하고 스스로 완벽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인간은 탐구하고 창조한다. 이런 활동은 영혼의 내면에서 솟아오르고 절대 외부 조건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인간은 장인이 될 수 있고, 지식을 함양하고, 특성을 고귀하게 갈고 닦고, 즐거움을 고양하고 개선한다." 빌헬름 훔볼트는 인간의 본질이 자유로운 탐구와 창조라고 간주했습니다.
사실 이건 특별하지 않은 시각일 겁니다. 계몽주의 이후, 고전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유롭고 끊임없이 뭔가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창조적인 능력은 영혼에서 비롯합니다. 따라서 자유 시장 경제는 인간의 본질, 자유로운 창조를 막습니다. 임금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얽매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운 창조를 영혼에서 우러낼 수 있겠습니까. 자유주의 철학은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자유주의는 왜곡되었고, 심지어 신자유주의는 거대 독점 자본을 떠받들죠. 만약 빌헬름 훔볼트가 20세기 신자유주의를 봤다면, 훔볼트는 분노로 펄펄 뛰었을 겁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런 고전 자유주의 철학을 비판했습니다.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롭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을 뒤집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고정되지 않았어요.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관계들 속에서 인간의 본질은 계속 바뀔 겁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런 인간관을 계속 유지합니다. 당연히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이런 인간관을 유지하고 인간의 본질이 자유라는 고전 자유주의 철학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훔볼트를 비판한다고 해도, 훔볼트와 마르크스에게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훔볼트와 마르크스는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훔볼트가 20세기를 살아갔다면, 훔볼트는 자본주의가 자유로운 창조 활동들을 억압한다고 분노했을 겁니다. 게다가 훔볼트와 마르크스는 인간이 창조하고 탐구하고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훔볼트는 탐구하고 창조하는 인간관을 칭송했고, 마르크스 역시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필요에 따라 노동하고, 낚시하고, 책을 읽고, 철학을 토론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하고 탐구할 때, 훔볼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인간을 호의적으로 평가할 겁니다.
훔볼트는 인간의 본질이 자유라고 고정했고, 마르크스는 사회적인 관계들이 인간의 본질을 바꾼다고 주장했습니다. 양쪽은 인간의 본질을 다르게 주장했으나, 양쪽 모두 자유로운 탐구와 연구와 창조를 칭찬했습니다. 이런 탐구와 연구와 창조를 위해 인간은 영혼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인간을 압박한다면, 고통스러운 노동이 인간을 압박한다면, 인간은 오직 외부 세계에만 매달리고 영혼의 내면을 파악하지 못하겠죠. 특히, 자유 시장 경제처럼, 상품으로서 인간이 자신을 판매해야 한다면, 인간은 영혼의 내면보다 상품화에 치중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탐구와 연구와 창조는 존재하지 않겠죠. 진정한 탐구와 창조를 위해 고통스러운 노동은 사라져야 합니다. 계급 구조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진정한 탐구자가 되고 진정한 창조자가 될 수 있겠죠. 노동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노동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창조자로서 인간은 쾌락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억압적인 계급 구조가 사라진다면, 노동은 탐구와 창조와 쾌락이 될 겁니다. 빌헬름 훔볼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나, 이런 이상에 동의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전 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공산주의가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신자유주의는 고전 자유주의를 계승하지 못합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가정한 것처럼, 만약 인간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면, 인간은 탐구와 창조에 매진할 수 있습니다. 아직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인간이 탐구와 창조에 매진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걸 장담한다면, 그건 헛소리가 되겠죠. 빌헬름 훔볼트와 카를 마르크스 역시 함부로 그걸 장담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누군가는 전세계의 소설들을 독파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누군가는 전세계의 모든 작물을 키우기 원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누군가는 전세계의 수많은 이성들과 섹스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흠, 만약 제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면, <심라이프>부터 <크레아투아>까지, 저는 모든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 속에서 저는 수많은 가상의 생태계들을 창조할 수 있겠죠. 이건 문자 그대로 끊임없고 자유로운 창조 활동이 될 겁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도래한다면, 이런 블로그 따위에서 저는 자본주의를 까느라 험한 소리를 내뱉지 않을 겁니다. 수많은 생태계들을 창조하고, 창조하고, 창조하고, 다시 창조하는 동안 저는 생물 다양성에 계속 감탄할 겁니다. 비단 저에게만 이런 포부가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저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어떤 창조 활동에 몰두하고 싶을 겁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결국 그런 창조 활동이 권태와 허무에 빠질 거라고 주장합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아무리 인간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인간의 창조 활동이 권태와 허무에 수렴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제가 끊임없는 생태계 창조에 싫증낼까요? 언젠가 이런 생태계 창조 활동들이 벽에 부딪힐까요? 아무도 그걸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아직 인류 문명은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SF 작가들은 유토피아를 사변했습니다. 비록 그런 유토피아들이 그저 사변에 불과하다고 해도, 우리는 자유로운 창조 활동이 무엇인지 살짝 엿볼 수 있을 겁니다.
이반 예프레모프가 쓴 <안드로메다 성운>을 볼까요. 이런 유토피아 사회에서 권태와 허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 철학자들, 과학자들, 예술가들은 계속 자신들의 활동들에 매진하고 권태와 허무를 느끼지 못합니다. 노동하는 기쁨, 율동하는 기쁨, 진리를 파헤치는 기쁨이 아주 충만하기 때문에 권태와 허무는 파고들지 못합니다. 이런 기쁨들을 제외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억압과 차별 없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충만한 사랑과 섹스는 권태와 허무를 멀리 날려버릴 겁니다. 노동, 여가, 탐험, 창작, 사랑과 섹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때, 인간들은 이런 쾌락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훔볼트와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시각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훔볼트와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보다 현재 문제에 치중하기 원하겠죠. 그렇다고 해도 양쪽 모두는 자유로운 노동, 여가, 탐험, 창작, 사랑과 섹스를 호의적으로 평가할 겁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이런 활동들은 벽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간들은 지구의 모든 진리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아주 이상적인 공산주의 유토피아조차 지구의 모든 진리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지구는 아주 광대하고, 인간들은 아직 지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노동, 탐험, 창작, 창조 활동들은 벽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아직 갈 길은 멉니다. 인간은 나나나나나나나~♬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그 길을 즐겁게 걸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우주에서 오직 지구만 행성일까요. 우주는 넓습니다. 우리는 우주로 진출할 수 있으나, 우주는 아주 넓습니다. 거의 무한한 우주는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주에는 불모지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불모지들을 개척하고 거기에 생명의 씨앗을 심을 수 있습니다. 이건 너무 암울한 생각이나, 어쩌면 이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는 혼자일지 모릅니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는 유일한 생명의 요람일지 모릅니다. 지구는 유일한 어머니 자연일지 모릅니다. 만약 지구가 유일한 어머니 자연이라면, 우리는 생명의 씨앗들을 우주에 퍼뜨려야 할지 모릅니다. 그건 우리의 역사적인 사명인지 모르죠.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에는 불만족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이상적인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도달했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불만을 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불만은 권태와 허무가 아닙니다. 설사 누군가가 권태와 허무를 느낀다고 해도, 그건 사회 전반적으로 번지지 않을 겁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우주가 아주 넓기 때문에 누군가는 섣불리 탐험하고 실패합니다. 그건 아주 치명적인 실패입니다. 우주가 무한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빨리 탐험하고 싶어했고 결국 치명적으로 실패했습니다. 비록 이건 부정적인 사례이나, 이건 탐구와 창조 활동이 벽에 부딪히지 않을 거라는 반증입니다.
우주가 무한하다면, 어떻게 탐구와 창조가 벽에 부딪힐 수 있겠습니까. 무한한 우주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탐구와 창조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언제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는 끝날지 모릅니다. 이 우주가 소멸한다면, 우리는 다른 우주로 떠나야 할 겁니다. 우리가 정말 다른 우주로 떠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 우주와 함께 우리가 소멸해야 할까요? 우주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멸종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몇 백 년 이후, 생물적인 특이점이 인간성을 없애고 인류가 자발적으로 사라지지 않을까요? 아무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여러 미래들에는 권태와 허무가 없겠죠.
소설 <타임십>에서 어떤 우주 학자 종족은 탐구가 끝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불확정성 원리는 정확한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관찰자가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관찰자는 대상에게 영향을 미치고, 정확한 관찰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진리 탐구에는 끝이 없습니다. 관찰자가 관찰할 때마다 현상이 달라진다면, 관찰자는 무한히 관찰해야 할 테고, 진리 탐구에는 끝이 없겠죠. 따라서 인간은 권태와 허무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인간은 무한히 탐구할 수 있고 무한히 창조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불확정성 원리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사실 여러 사람들은 불확정성 원리에 반박하죠. 하지만 불확정성 원리가 옳지 않다고 해도, <안드로메다 성운>과 <타임십> 모두 우주가 엄청나게 넓다고 인정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다른 우주로 건너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무한한 평행 우주에서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들을 탐구하고 창조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태와 허무는 존재하지 않겠죠. 어떤 사람은 반문할지 모릅니다. "결국 인간이 모든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런 무한한 탐구에 무슨 가치가 있지? 무한한 탐구는 무한한 쳇바퀴야. 무한한 쳇바퀴는 권태와 허무에 빠질 거야. 만약 불확정성 원리가 진리라면, 무한한 탐구는 무한한 쳇바퀴가 될 거야."
언뜻 이런 반문은 옳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문은 결과론적입니다. 이런 반문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에 치중합니다. 우주와 자연과 문명과 인생이 결과에 귀속해야 하나요? 왜 결과가 모든 것을 판명해야 합니까? 우주와 자연과 문명과 인생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결과에 고정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바뀌는 연속적인 과정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탐구하고, 끊임없이 세상을 바꾸고, 끊임없이 관념을 바꿀 때, 그런 지속적인 변화는 우리를 자극할 겁니다. 그런 자극 속에서 우리는 권태와 허무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진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진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나나나나나나~♬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즐겁게 걸을 수 있습니다. 비록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적어도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안, 우리는 그런 미래가 이상적일 거라고 희망을 품을 수 있죠.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약자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중입니다. 그런 저항과 투쟁이 지치고 힘들 때, 사람들은 살짝 미래를 꿈꾸고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미래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탐구하고 영혼의 내면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진보는 그런 것이겠죠.
이동진 평론가는 이런 진보를 거부합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런 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결국 진보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권태와 허무에 빠질 거라고 말합니다. 아니, 왜 이동진 평론가가 진보를 거부하나요? 이동진 평론가가 진보를 거부한다고 해도, 그건 사상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에는 진보를 거부하는 논리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아무 근거 없이 그저 진보를 거부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이런 발언은 상당히 위험할지 모릅니다. 남한 사회는 꽤나 보수적입니다. 남한 사회는 진보를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남한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탐구하고 창조하는 상황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짓밟습니다.
비단 남한만 아니라 숱한 자본주의 강대국들 역시 끊임없는 탐구와 창조를 모욕하죠. 이런 상황에서 이동진 평론가처럼 대중적인 지식인이 진보를 거부한다면, 그건 보수에게 이득이 될지 모릅니다. 이건 이동진 평론가가 차별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진보를 거부했으나, 그건 그저 사소한 실수에 불과할 겁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넓은 포용력과 공정성을 보여주는 좋은 평론가입니다.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이동진 평론가에게 가차 없는 비판을 받을 이유는 없겠죠.
하지만 이렇게 포용력이 넓고 대중적인 평론가가 진보를 거부한다면, 보수가 사람들을 짓밟는 상황에서 대중적인 평론가가 진보를 거부한다면, 그건 너무 위험한 발언이 아닐까요. 저는 <빨간책방> 팟캐스트를 모두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을 읽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다른 팟캐스트에서 이동진 평론가는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래서 저는 이동진 평론가가 진보를 거부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는 착각했을지 모르죠.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이동진 평론가가 아니라 저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에는 진보를 거부해야 하는 논리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이런 문제를 고민해야 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