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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인류 문명의 점진적인 변화 혹은 진보 본문

SF & 판타지/유토피아

인류 문명의 점진적인 변화 혹은 진보

OneTiger 2018. 12. 24. 17:24

이른바 원형적인 SF 소설(Proto SF Novel)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이 있습니다.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나 사라 스콧이 쓴 <천년 홀과 주변국 묘사>,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는 유명한 원형적인 SF 소설들입니다. '본격적인' SF 시각에서 <유토피아>나 <천년 홀>, <걸리버 여행기> 같은 소설들은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설사 <천년 홀>이 본격적인 SF 소설이 될 수 있다고 해도, <천년 홀>은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사라 스콧은 종교를 이용해 이상향을 그리고 현실을 비판했죠.


하지만 이런 소설들이 SF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도, 토머스 모어나 사라 스콧이나 조나단 스위프트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어요. SF 울타리 안에서 그런 족적은 본격적인 SF 작가들에게 이어졌고 유토피아 SF 소설들을 만듭니다. 19세기 이후, 유토피아 소설들은 더 이상 환상적인 섬마을이나 마법에 기대지 않습니다. 대신 현대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은 외계 행성, 행성 공학, 인공 지능과 양자 컴퓨터, 친환경 사업, 생체 개조 기술과 함께 등장하죠. <빼앗긴 자들>처럼 고전적인 유토피아를 이어가거나 <에코토피아>처럼 절충적인 소설들 역시 사라지지 않았으나, 기술적 유토피아들 역시 꽤나 많아졌습니다.



고전적인 유토피아부터 기술적인 유토피아까지, 유토피아 문학 사조는 다양합니다. 첨단 기술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에게 고전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은 구닥다리일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유토피아 문학 사조에서 윌리엄 모리스는 빠지지 못하는 작가일 겁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자연 환경을 즐기는, 목가적인 사회주의를 꿈꿨습니다. 모리스는 19세기 작가였으나, 본격적인 SF 소설에 관심이 없었고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들을 추구했어요. 모리스가 쓴 <에코토피아 뉴스>에는 목가적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정말 실반 엘프나 우드 엘프 같습니다. 실반 엘프 같은 사회주의자들을 꿈꾸는 것처럼, 윌리엄 모리스는 기계 문명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모리스는 본격적인 SF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만약 윌리엄 모리스가 기술적 유토피아 소설들을 봤다면, 모리스가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모리스는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인 의식을 각성하고 직접 두 손으로 즐겁게 노동하기 원했어요. 윌리엄 모리스는 사람들이 인공 지능이나 로봇이나 개조 생명체에게 의지하기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전히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첨단 기술을 경계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와 첨단 기술이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정말 세 가지들이 서로 떨어지지 못할까요? <에코토피아 뉴스>는 자본주의 및 가부장 문화와 첨단 기술을 어느 정도 분리하나, 그렇다고 해도 <에코토피아 뉴스>는 첨단 기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유감스럽게 생각하겠으나, 어쩌면 미래 사회는 목가적인 생태 사회주의가 아니라 기술적 유토피아로 흘러갈지 모르죠. 정보화 산업이나 인공 지능, 기술적 특이점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공 지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어떤 사람은 인공 지능이 위험하다고 비판하죠. 사회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회주의자는 인공 지능이 사회주의 건설을 돕거나 자본주의 체계가 인공 지능과 양립하지 못한다고 예상해요. 이런 예상에 따른다면, 정보화 산업과 기술적 특이점이 발달했을 때, 마침내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이 열릴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정보화 기술에 열광합니다. 폴 메이슨이 쓴 <포스트 자본주의>는 그런 미래를 예상합니다. 반면, 어떤 사회주의자는 권력자들이 인공 지능을 독차지할 거라고 경고합니다. 인공 지능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지 않을 테고, 설사 무너뜨린다고 해도, 그건 사회주의를 의미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무너진다고 해도, 인공 지능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저절로 열어줄까요. 아니, 인민들이 각성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인공 지능이 발달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나 억압적인 사회는 계속 유지될지 몰라요. 그래서 여러 사회주의자들은 인공 지능을 서로 다르게 바라봅니다. 누구는 긍정하고, 누구는 경고하죠.



만약 긍정적인 예측이 옳고, 인공 지능이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해도, 그건 아주 머나먼 미래일지 모릅니다. 100년이나 200년, 심지어 300년이나 400년이 지나야 할지 모르죠. 수많은 사람들은 이른바 4차 혁명이 당장 세상을 뒤집을 거라고 떠드나, 역사적으로 인류 사회는 천천히 바뀌었습니다. 부족 사회, 봉건 제도, 공화국, 자본주의 시장 경제 모두 몇 백 년을 걸쳤고 점진적으로 정착했습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학자들은 300년~500년에 걸쳐 자본주의가 정착했다고 이야기하죠. 만약 미래 문명이 사회주의로 바뀐다면, 다른 사회 구조들처럼 사회주의 역시 천천히 정착할 겁니다.


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사회주의 운동은 앞으로 몇 백 년을 더 걸어가야 할지 몰라요. 어떤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망했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소비에트 연방을 둘러싼 평가들은 서로 엇갈리나, 소비에트 연방이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도, 소비에트 연방이 망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사회주의 운동이 그저 막 시작했을 뿐이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첫걸음에 해당하겠죠. 여전히 제3세계에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숱한 운동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지지부진하나, 솔직히 사회주의가 하루 아침에 건설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겁니다. 그렇게 인류 역사는 흐르지 않았어요.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가 하루 아침에 정착했나요? 그렇지 않죠.



만약 이제까지 여러 인류 사회들이 '천천히' 바뀌었다면, 왜 구태여 오직 사회주의만 '빨리' 도래해야 할까요? 아무리 사회주의가 논리적이라고 해도, 오직 사회주의만 '지금 당장' 도래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어떤 짧은 전기에서 프랜시스 윈은 카를 마르크스가 혁명을 빨리 보기 원했다고 적었습니다. 이건 다소 이상한 태도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인류 사회들이 천천히 바뀌었다고 분석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역시 천천히 바뀔지 모릅니다. 인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고 과학 기술이 그걸 뒷받침한다고 해도, 그런 미래에는 오랜 기간, 몇 백 년이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사고 방식을 바꾸지 못합니다. 인간은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 편견은 꽤나 끈덕집니다. 편견이 인간을 휘어잡는다면, 그걸 떨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심지어 인간은 아예 편견을 떨치지 못할지 모릅니다. 편견을 떨치기는 죽기보다 어려울지 모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지배적이고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지배적이고 익숙한 것은 진리가 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미개하고 원시적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유럽 백인들에게 이건 진리였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백인들에게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미개하다는 주장은 이른바 '팩트'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팩트'에 열광합니다. 다들 팩트를 주장하고, 팩트를 운운하고, 팩트를 내세웁니다. 하지만 정말 팩트가 존재할까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미개하다고 주장할 때, 유럽 백인들은 그게 팩트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걸 눈꼽만큼도 의심하지 않았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살했습니다. 과거에 백인 남자들이 여자들의 참정 권리를 부정했을 때, 남자들은 그걸 눈꼽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투표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팩트'였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오늘날에 그런 팩트들은 더 이상 팩트가 아닙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형식적으로 그런 것들은 팩트가 되지 못하죠.


왜 그럴까요? 계몽주의 시대와 21세기 사이에서 인간들이 진화했기 때문에? 몇 세기 동안 인간의 본질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약자들이 투쟁했고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에, 팩트 역시 바뀌었습니다. 팩트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팩트가 아니라 약자들의 투쟁이죠. 약자들이 처절하게 저항할 때, 팩트는 얼마든지 바뀝니다. 하지만 약자들의 투쟁은 지지부진합니다. 약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약자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가진 것이 없고, 그들은 쉽게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회 구조와 사고 방식은 천천히 바뀝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또 다른 사회가 될 때까지, 인류 문명은 천천히 흐를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느린 변화를 부정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비극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비극들이 너무 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인류 사회가 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윌리엄 모리스 역시 그랬습니다. 말년에 윌리엄 모리스는 꽤나 절망적이었습니다. 자신이 꿈꾸었던 생태 사회주의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윌리엄 모리스는 단편적인 시각을 드러냈을지 모릅니다. 언제나 인류 문명은 점진적으로 바뀌었고, (만약 미래가 사회주의 문명이 된다면) 사회주의 문명 역시 점진적으로 정착하겠죠. 정말 슬픈 것은…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너무 느리게 바뀐다는 사실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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