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형언할 수 없는 것>과 언어가 드러내는 한계 본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가 쓴 <꽃>은 꽤나 유명합니다. 어쩌면 국내에서 이 문구는 가장 유명한 첫째 구절일지 모릅니다. <꽃>은 '호명'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인식하고 싶다면, 우리는 뭔가를 호명해야 합니다.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뭔가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할 겁니다. 수많은 상황들에서 뭔가를 인식할 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야 할 겁니다.
언어 없이 인식은 없습니다. 언어가 없다면, 사람들은 뭔가를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여러 철학들은 이런 주장에 반박할 겁니다. 정말 언어가 필수적일까요? 뭔가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무조건 언어를 이용해야 할까요? 언어 없이, 우리가 뭔가를 인식하지 못할까요? 철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두고 계속 논쟁을 벌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상황들에서 분명히 인간은 언어를 이용해 대상을 인식합니다. 그건 아무르 호랑이처럼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거나 짝사랑처럼 추상적인 감성이거나 세대 우주선처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물일 수 있습니다.
아무르 호랑이와 두근거리는 짝사랑과 세대 우주선을 인식할 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언어 없이 우리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아무르 호랑이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우와, 저기에 호랑이가 있어.'라고 생각할 겁니다. 호랑이라는 언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호랑이가 호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어떤 여학생이 어떤 남학생을 바라볼 때, 여학생은 '아아, 어떻게 저렇게 멋질 수 있을까.'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멋지다'라는 언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여학생은 남학생이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멋지다'는 보편적인 용어입니다. 어떤 두 남자가 모두 멋지다고 해도, 두 남자는 서로 다르게 멋질 수 있겠죠. 분명히 톰 히들스턴과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모두 멋집니다.
하지만 톰 히들스턴과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똑같이 멋지지 않습니다. 양쪽은 서로 다르게 멋집니다. 그래서 '멋지다'는 용어는 고유한 특징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고유한 특징을 서술하고 싶다면, 우리는 훨씬 자세히 서술해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언어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는 어떤 대상을 완벽하게 서술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멋지다고 해도, 어떻게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멋진지 우리는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 누군가는 컴버배치가 멋지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누군가는 컴버배치가 '그저 잘생김을 연기할 뿐'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은 어떻게 컴버배치가 잘생김을 연기하는지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겠죠. 이렇게 언어는 충분하지 않으나, 언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SF 작가가 세대 우주선을 떠들고 싶다면, 당연히 SF 작가는 세대 우주선이라고 써야 합니다. 언어가 있기 때문에 SF 작가는 소설을 쓰고 세대 우주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SF 감독은 무성 SF 영화를 만들고 세대 우주선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성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관객들은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무성 영화가 세대 우주선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합니다. '어라, 저게 뭐지? 저게 우주선일까?' 이렇게 생각할 때, 관객들은 언어를 이용합니다. 무성 영화를 본다고 해도, 관객들은 호명해야 합니다.
아무르 호랑이를 구경할 때, 두근거리며 짝사랑을 느낄 때, 무성 영화에서 세대 우주선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언어를 이용하고 대상을 의식해야 합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이 언어 이전에 본질적인 측면을 먼저 인식한다고 말할 겁니다. 아무르 호랑이와 두근거리는 짝사랑과 세대 우주선 뒤에는 훨씬 본질적인 측면이 있을지 모릅니다. 멋진 남학생을 바라볼 때, 여학생이 멋지다고 생각하기 전에, 여학생은 훨씬 '본질적인 멋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아무르 호랑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기 전에 사람들은 아무르 호랑이 뒤에 있는 본질적인 뭔가를 느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측면이 무엇인지 규정하기는 쉽지 않죠. 심지어 이건 관념적인 말장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있고, 우리는 대상들을 서로 다르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범'과 '虎'와 '호랑이'는 모두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나, '범'과 '虎'와 '호랑이'는 서로 다른 느낌들을 풍깁니다. 범은 다소 밋밋하나, 호랑이는 훨씬 강렬합니다. 범과 호랑이를 직접 입으로 발음한다면, 사람들은 두 단어가 다르다고 느낄 겁니다. 인간이 호랑이를 범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호랑이는 범이 되지 않습니다. 호랑이는 그저 호랑이일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무르 호랑이를 Panthera tigris altaica라고 부른다고 해도, 호랑이는 그저 호랑이일 뿐입니다.
동물학자가 호랑이를 Panthera tigris altaica라고 인식할 때, 동물학자는 이게 이탤릭체라는 사실을 의식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호랑이는 이탤릭체 Panthera tigris altaica로 바뀌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걸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어는 대상을 다양하게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 아가씨의 눈동자는 에메랄드이다." 이건 엉터리 문구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눈동자가 에메랄드일 수 있겠습니까?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누군가와 달리, 인간의 눈동자는 보석안이 아닙니다. 물론 이건 비유입니다. 언어는 에메랄드를 이용해 아가씨의 녹색 눈동자가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문구는 영롱한 에메랄드처럼 아가씨가 싱그럽고 풋풋하다는 뜻일 수 있겠죠.
게다가 언어는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라는 등장인물은 "나는 계집애처럼 그 남자가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이건 호명입니다. 남자가 울었을 때, 레드는 '계집애처럼' 남자가 훌쩍거렸다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남자는 그저 훌쩍거렸을 뿐입니다. 왜 남자가 훌쩍거릴 때, 그게 계집애가 되어야 합니까? 구태여 계집애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건장한 남자 역시 훌쩍거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억압적인 가부장 사회이고, 건장한 남자는 계집애 따위와 달라야 합니다. 계집애는 훌쩍거릴 수 있으나, 건장한 남자는 훌쩍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건 남자답지 못한 짓입니다. 미국이 억압적인 가부장 사회이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건장한 남자가 훌쩍거릴 때, 사람들은 계집애처럼 남자가 훌쩍거린다고 표현합니다. 어떤 현상을 가리킬 때, 이렇게 언어는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인류 사회에는 수직적인 계급 구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 역시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반영합니다. '계집애처럼 훌쩍거린다'는 표현은 성 차별입니다. 사회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언어는 성 차별을 반영할 수 있죠. 그래서 소설 작가는 언어를 뛰어넘어야 할지 모릅니다. 작가가 언어를 뛰어넘을 때, 소설은 훨씬 원대해질지 모릅니다.
단편 소설 <형언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미지의 존재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소설에서 소설 화자는 어떻게 인간이 언어로 미지의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미지의 존재가 나타났을 때, 인간이 언어로 그걸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언어가 효과적인 수단일까요? 언어는 완벽하지 않고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합니다. 언어 따위가 감히 위대한 옛 존재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비단 이 단편 소설에서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에서도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형언할 수 없다'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공포를 언어로 직접 표현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주에서 온 색채>나 <에리히 잔의 선율>처럼,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이 미지의 존재를 실질적인 뭔가로 인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러브크래프트가 '형언할 수 없다'는 표현들을 너무 남발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솔직히 러브크래프트는 이런 표현들을 너무 남발합니다. 러브크래프트 본인 역시 그걸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공포를 감히 인간의 언어 따위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문제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라는 표현 역시 언어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형용할 수 없다고 소설 화자가 말했을 때, 형용할 수 없다고 형용하기 위해 소설 화자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언어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여러 작가들은 제한적인 언어를 뛰어넘고 싶어합니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은 그런 몸부림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20세기 미국 사람이고 20세기 미국 언어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걸 형용하지 못한다고 형용해야 하겠죠. 형용하지 못한다는 표현은 형용하지 못하는 존재를 가리키기에 부족할 겁니다. 우리가 제한적인 언어를 이용하는 순간, 우리는 대상을 잘못 인식할지 모릅니다. 현실은 김춘수의 <꽃>보다 신동엽의 <오렌지>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이건 비단 크툴루 신화에만 해당하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형용하지 못할 부정적인 것들이 있으나, 형용하지 못할 아름다운 것들 역시 있을 겁니다. 여학생이 남학생을 짝사랑하거나, 두 연인이 입을 맞추고 젖가슴을 애무하거나, 섹스하는 동안 서로 하나가 될 때, 여기에도 형용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그걸 표현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걸 형용하지 못한다고 형용해야 합니다. 형용/형언하지 못한다는 표현은 형용/형언하지 못하는 대상을 정확하게 가리키지 못할 겁니다. 언어는 대상에 닿지 못할지 모릅니다. 김춘수는 꽃을 부를 수 있겠으나, 그 꽃은 그 꽃이 아닐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