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과 느림의 미학 본문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글쟁이들에게 이런 속담은 꽤나 치명적일지 모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은 언어적인 측면보다 시각적인 측면이 훨씬 낫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누군가가 '언어를 이용해' 어떤 대상을 멋지게 묘사한다고 해도, 그건 부족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직접 두 눈으로 봐야 할지 모릅니다. 멋지고 화려한 묘사보다 시각적인 측면은 훨씬 나을 겁니다. 아무리 누군가가 온갖 미사여구들을 붙이고 하루 종일 떠든다고 해도, 그런 언어적인 묘사는 시각적인 측면을 따라잡지 못할지 모르죠. 글쟁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글자들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글자들은 추상적인 기호들입니다.
글자들은 그저 어떤 대상을 가리킬 뿐입니다. 글자들과 어떤 대상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과를 볼 때 우리는 사과라는 단어를 연상하나, 사실 '사과'라는 단어와 사과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과'가 사과를 가리킨다고 우리가 약속했기 때문에 '사과'는 사과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런 약속이 없다면, 글자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타 워즈>에는 외계 단어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외계 단어들을 읽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외계 단어들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영화 제작진이 설정을 알려줄 때, 관객들이 설정을 받아들일 때, 마침내 외계 단어들은 어떤 대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스타 트렉>에 나오는 외계 언어를 떠든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외계 언어를 배우지 않는다면, 그들이 <스타 트렉>을 시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외계 언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하겠죠. 소설 <반지 원정대>에서 간달프가 절대 반지의 불꽃 문자를 보여줬을 때, 프로도 배긴스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불꽃 문자에 강력한 마법이 있다고 해도, 심연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불꽃 문자가 강렬한 빛을 뿜었다고 해도, 프로도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법이 존재하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조차 글자들은 기호입니다.
글자들은 그저 기호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합의하지 않을 때, 글자들에는 아무 가치가 없죠. 아무리 <스타 워즈>와 <스타 트렉>과 <반지 원정대>가 외계 언어들과 모르도르 암흑 언어들을 떠든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그저 정체 불명의 낙서들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들이 <스타 워즈>를 관람하지 않고 <스타 워즈> 설정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외계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겠죠. 사람들 앞에서 하루 종일 제가 "이야! 이야! 다곤 파탄!"이라고 떠든다고 해도, 사람들이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을 읽지 않았다면, "다곤 파탄!"에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제가 괴상한 헛소리를 떠든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타 트렉>을 직접 시청한다면, 사람들이 <크툴루의 부름: 지구의 음지>를 직접 플레이한다면, 그들은 외계 언어가 무엇을 가리키고 다곤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겠죠. <스타 트렉>은 TV 드라마이고, <크툴루의 부름: 지구의 음지>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양쪽 모두 영상 중심적인 매체입니다. 양쪽 모두 시각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시청자들은 보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게임 플레이어들은 다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다곤'이 다곤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곤을 떠든다고 해도, 사람들은 다곤이 무엇인지 당장 알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지구의 음지>를 플레이할 때, 구태여 누군가가 다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다곤이 무엇인지 알겠죠.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지구의 음지>가 다곤을 잘못 구현했다고 불만을 터뜨릴지 모르겠습니다. 종종 러브크래프트 독자들은 다곤이 물고기 거인이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지구의 음지>에서 다곤은 물고기 거인보다 양성류 거인에 가깝죠. 게임 플레이어들은 <지구의 음지>가 다곤을 잘못 묘사했다고 화를 낼지 모릅니다. '다곤'이 다곤을 직접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게임 제작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은 서로 다르게 다곤을 상상했습니다. 글자들은 그저 기호에 불과하죠.
따라서 시각적인 체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글자들을 읽지 못할 겁니다. '사과'가 사과를 가리킬 때, 우리가 사과를 시각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사과'를 읽은 이후, 우리는 사과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글자들을 읽는 행위보다 시각적인 체험은 앞섭니다. 사과가 무엇인지 우리가 시각적으로 체험하지 않았다면, '사과'를 읽는다고 해도, 우리는 사과를 연상하지 못하겠죠. 13세기 중세 사람들이 우주선이라는 단어를 읽는다고 해도, 그들은 '우주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할 겁니다. 그들이 우주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3세기 중세 시대에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13세기 중세 사람들이 우주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주선'이라는 글자에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이건 그저 낙서에 불과하죠.
반면, 19세기 사람들은 산업 발달과 과학 혁명을 지켜봤고 우주선을 연상할 수 있었습니다. 19세기 산업 시대에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19세기 사람들이 과학 혁명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들은 우주선을 상상하고 SF 소설을 쓰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은 그저 속담에 불과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건 가독(글자들을 읽는 행위)보다 시각적인 측면이 선행한다는 개념일지 모릅니다. 글쟁이들에게 이런 현상은 치명적일지 모릅니다. 시각적이지 않기 때문에 글자들은 생생하지 않을 겁니다. 글쟁이들은 생생하지 않은 글자들을 이용해야 합니다. 이건 꽤나 불리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나 테리 이글턴 같은 쟁쟁한 문학 평론가들은 글자들에게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고 말했을 겁니다.
물론 글자들이 생생하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은 쉽게 글자들을 읽고 이해합니다. 작가와 독자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면, 독자는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SF 작가들입니다. SF 작가들은 비일상적인 것들을 묘사해야 합니다. SF 작가들에게 이건 숙명입니다. 하지만 독자가 비일상적인 묘사를 마주한다면, 독자는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13세기 중세 사람들에게 '우주선'이 낙서가 되는 것처럼, 독자에게 SF 소설은 낙서가 될지 모릅니다. 이건 모든 SF 소설이 낙서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작가들 역시 그런 상황을 인지합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은 쉬운 단계부터 어려운 단계로 나가죠. 다행히 SF 독자들은 13세기 중세 사람들이 아닙니다. 중세 사람들보다 SF 독자들은 훨씬 낫습니다.
SF 작가들과 SF 독자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감성을 공유합니다. SF 소설들은 당장 비일상적인 묘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먼저 SF 소설들은 일상을 이야기하고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나갑니다. 비일상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소설들은 독자들에게 여유를 줍니다. 여유가 있을 때, 독자들은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나갈 수 있겠죠. 종종 하드 SF 소설들은 이런 여유를 생략하거나 여유를 너무 빨리 건너뜁니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가 너무 멀기 때문에 하드 SF 소설들은 그 간격을 채우지 못합니다. 아니면 하드 SF 소설들은 의도적으로 여유를 생략할지 모릅니다. 독자가 당장 비일상을 마주친다면, 그건 크나큰 충격이 될 테고, (독자가 그 소설을 끝까지 읽는다면) 독자는 훨씬 커다란 감명을 받겠죠. 하지만 이런 하드 SF 소설들과 달리, 많은 SF 소설들은 여유를 주기 원합니다.
게다가 SF 독자들은 장르 공식들을 압니다. SF 세상에는 특정한 장르 공식들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작가들이 그런 공식들을 사용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장르는 순간이 아닙니다. 장르는 누적이죠. 다양한 작가들이 공식들을 형성할 때, 평론가들은 장르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장르 공식들 위에서 장르 작가들은 장르 소설들을 씁니다. 독자들은 장르 공식들을 섭렵하고 장르 소설들을 읽습니다. 그래서 SF 장르 소설을 읽기는 까다로울지 모르나,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가 궤도 정거장을 어렵게 묘사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그걸 따라갈 수 있죠.
무엇보다 우리에게 시각적인 측면처럼 추상적인 측면은 중요합니다. 관념, 사고 방식, 감정, 사상, 세계관. 이런 것들은 추상적이죠. 심지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해도, 우리는 두 눈으로 관념과 사고 방식과 감정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분야에서 그림 매체들과 영상 중심적인 매체들보다 소설은 유리합니다. SF 장르는 인간의 관념이 극적으로 바뀐다고 이야기해야 하고, 따라서 다른 SF 매체들보다 SF '소설'은 훨씬 유리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SF 소설은 가장 SF 장르에 적합한 매체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웅장하고 우아한 수 백 권의 SF 소설들보다 멋진 SF 그림 하나는 훨씬 인상적일지 모릅니다. 시각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설은 느린 매체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사람들은 기호(글자들)를 해독하고 기호가 만드는 세상을 연상해야 합니다. SF 소설이 비일상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SF 소설은 훨씬 느린 매체가 될 겁니다. 반면, 시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그림이나 영화나 게임은 다를 겁니다. 사람들은 멋진 SF 그림을 당장 받아들일 수 있겠죠. 그래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소설보다 영화나 게임 같은 영상 매체는 훨씬 편하고 친숙할 겁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지친 사람들에게 소설을 해독하는 여유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SF 소설이 '느림의 미학'을 자랑한다면, 사람들은 SF 소설들을 훨씬 멀리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