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프랑켄슈타인>의 액자 구성과 북극 탐사선 본문
메리 셸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연금술사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켄슈타인(창조자)과 인조인간(피조물)이 맺는 관계입니다. 거의 대부분 사건들은 두 등장인물에게서 비롯하죠. 하지만 몇몇 등장인물은 프랑켄슈타인이나 인조인간과 아무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특히, 로버트 월튼 선장과 탐사선 승무원들 같은 극지 탐사대는 훨씬 그렇습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액자 구성입니다. 이 소설에서 첫째 화자는 로버트 월튼 선장입니다. 월튼은 북극을 탐험하는 탐사선 대장입니다.
어느 날 북극 탐사선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만납니다. 탐사선 승무원들은 프랑켄슈타인을 구출하고, 월튼은 왜 프랑켄슈타인이 극지를 방황하는지 묻죠.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월튼은 그 이야기를 다시 자신의 누이 마가렛 월튼에게 편지로 들려줍니다. 따라서 <프랑켄슈타인>에는 액자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켄슈타인의 액자이고, 다른 하나는 로버트 월튼의 액자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월튼에게 이야기하고, 로버트 월튼은 다시 마가렛 월튼에게 이야기하죠. 왜 작가 메리 셸리가 이런 2중 액자 형식을 이용했을까요? 어쩌면 이게 신빙성을 높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만약 메리 셸리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선택했다면, 독자들은 작가의 목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자신의 시점과 목소리를 감췄습니다. 메리 셸리는 로버트 월튼의 목소리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목소리를 내세웁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두 등장인물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생생하게 목소리를 접할 수 있습니다. 소설 중반부에 인조인간 역시 자신의 관점과 목소리를 내세웁니다. 실험실에서 도망친 이후, 인조인간은 다시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고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인조인간은 셋째 액자를 구성하죠.
첫째 액자는 '로버트 월튼 → 마가렛 월튼'이고, 둘째 액자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 로버트 월튼'이고, 셋째 액자는 '인조인간 →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첫째 액자 및 둘째 액자와 달리, 셋째 액자는 아주 강렬하지 않습니다. 셋째 액자는 소설을 전반적으로 장악하지 않습니다. 로버트 월튼과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인조인간은 피조물이죠. 인조인간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종속되었고, 프랑켄슈타인보다 인조인간은 후천적입니다. 그래서 셋째 액자로서 인조인간은 프랑켄슈타인보다 먼저 나가지 못하고, 셋째 액자는 둘째 액자보다 강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조인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소설 주제를 대표할 수 있을 겁니다. 인조인간은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에서 수많은 독자들은 인조인간을 동정하고 프랑켄슈타인이 무책임하다고 비판할 겁니다. 첫째 액자 및 둘째 액자보다 셋째 액자는 강렬하지 않으나, 셋째 액자는 소설 주제를 가장 확실히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의 오만함이나 과학 만능주의를 경고하기에 좋은 소설입니다. 자연 과학자는 책임져야 합니다. 자연 과학자는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 과학자들은 그저 자신들이 진리를 연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학자가 뭔가를 연구한다면, 권력자는 그것을 폭력적으로 휘두를 수 있을 겁니다.
현대 인류 문명은 아주 억압적이고 수직적인 계급 구조입니다. 가장 거대한 권력은 거대 독점 자본들이고, 국가 정부는 거대 독점 자본들을 편듭니다. 심지어 거대 독점 자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세뇌시킵니다. 아무 의심 없이 민중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학교 교육들은 절대 끔찍한 식민지 수탈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죠. 이른바 제도권 교육에서 식민지 수탈은 그저 지나간 역사에 불과하고 수능 문제에 불과합니다. 대기업들이 비정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비정규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들을 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가 뭔가를 만든다면, 권력자는 그걸 폭력적으로 휘두를 수 있을 겁니다. 전략 무기부터 유전 공학까지, 권력자는 과학을 폭력적으로 휘두를 수 있습니다. 뭔가를 연구하거나 만들기 전에 과학자는 그걸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고립된 차원에서 과학자는 머물지 않습니다. 과학자는 억압적이고 수직적인 인류 문명에 속했습니다. 과학자가 뭔가를 만든다면, 권력자는 그걸 이용해 약자들을 짓밟을 수 있을 겁니다. 종종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객관적인 지식을 연구하고 중립을 지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억압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누가 중립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중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억압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중립은 권력에 동조합니다. 운동장이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었다면, 중립 역시 오른쪽으로 기울겠죠.
과학자들은 중립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는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인으로서 과학자는 책임져야 합니다. 이렇게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 만능주의를 경고할 수 있죠. 물론 <프랑켄슈타인>은 비단 과학 만능주의만이 아니라 무책임한 창조주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가 결과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아주 유용한 해석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연이어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합니다. 어쩌면 21세기 이후에도 미래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프랑켄슈타인>이 그저 과학 만능주의와 무책임한 창조주를 경고할 뿐일까요? 여기에 다른 주제가 없을까요?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주로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이야기를 열고 닫는 화자는 로버트 월튼 선장입니다. 로버트 월튼은 탐사선 선장이고 다른 승무원들과 갈등을 겪는 중입니다. 승무원들은 탐사를 포기하고 싶어합니다.
로버트 월튼은 북극을 탐험하고 명예로운 탐험가가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북극 탐험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귀항하자고 주장합니다. 선장과 승무원들은 옥신각신 싸웁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월튼 선장이 '행복을 추구하고 야망을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선장은 항복하고, 탐사선은 북극을 벗어납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이런 갈등은 많이 나오지 않으나, 분명히 북극 탐사는 <프랑켄슈타인>의 일부입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이런 특징에 주목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본격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이고 탐험을 이야기합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장르입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오직 인류 문명 내부만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비경 탐험과 우주 탐사로 쉽게 이어질 수 있죠. 게다가 갈등하는 선장과 승무원들은 많은 것들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선장과 승무원들의 갈등은 어지러운 사회를 암시할 수 있죠. 선박은 쉽게 사회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선박 안에서 선장과 승무원들은 '한 배를 타는 운명'입니다. 선장은 지도자가 될 수 있고, 항해사들은 관료들이 될 수 있고, 승무원들은 국민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북극 탐사선이 국가라면, 선내 갈등은 어지러운 사회를 암시할 수 있겠죠.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 소설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19세기 초반 소설이죠. 19세기 초반에 유럽은 아직 프랑스 혁명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실 19세기 후반까지 유럽은 프랑스 혁명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프랑스 혁명은 대략 1789년~1799년 사건입니다. 1818년에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출판했을 때, 프랑스 혁명은 별로 머나먼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프랑스 혁명은 아주 가까운 과거였죠. (나중에 프랑스에서는 1830년, 1848년, 1871년 혁명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따라서 메리 셸리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에서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대부분 유럽 지식인들과 작가들은 프랑스 혁명에게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사회는 꽤나 어지러웠습니다. 모두를 위한 자유, 평등, 박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고, 부르주아는 수많은 권력들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유색인종들과 여자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을 착취했습니다. 메리 셸리는 어지러운 사회에 주목했고 그걸 표현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계몽과 지식이 좋다고 해도, 권력자들은 계몽과 지식을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할 수 있겠죠.
문학 평론 서적 <로쟈의 세계 문학 다시 읽기>에서 로쟈 이현우는 <프랑켄슈타인>이 프랑스 혁명과 어지러운 사회를 비유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는 꽤나 혼란스러웠고, <프랑켄슈타인>은 어지러운 사회를 비유하는지 모릅니다. 방황하는 인조인간, 방황하는 탐사선 승무원들, 방황하는 유럽 사회는 모두 비슷한 처지일지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세계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떠받듭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사람들을 학살하고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해도, 신주단지를 떠받드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떠받듭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해야 하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