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언어 너머로 SF 작가가 쉽게 넘어갈 수 있는가 본문
※ 이 게시글은 <SF 소설이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게시글(링크)을 어느 정도 보충 설명합니다.
"나우트론 레스포크 로르니 비르치." 이건 소설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아침에 노틸러스 갑판 위에서 이렇게 부관은 중얼거리죠. 소설 화자 아로낙스 박사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건 암호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새로운 언어일지 모릅니다. 네모 선장과 노틸러스 승무원들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노틸러스 승무원들에게는 국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기 원했고 새로운 공동체를 꾸렸습니다. 노틸러스는 단순한 잠수함이 아닙니다. 승무원들에게 노틸러스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에게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할 테고, 네모 선장과 승무원들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겠죠. "나우트론 레스포크 로르니 비르치."는 새로운 언어일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게 "시야에 아무것도 없음."을 뜻할지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죠. 이렇게 SF 소설들은 가상의 공동체를 선보이고 동시에 가상의 언어를 선보입니다. 어떤 SF 소설은 신조어를 만들고, 어떤 SF 소설은 아예 언어 체계를 새로 고안합니다. TV 드라마 시리즈 <스타 트렉>에 클링온 언어가 있는 것처럼, SF 장르는 외계 언어를 고안할 수 있습니다. 로봇 공학처럼, 가끔 SF 신조어는 일상 용어가 됩니다.
주류 문학들과 달리, SF 소설들은 적극적으로 신조어들과 새로운 언어들을 만듭니다. SF 소설들에게 이건 거의 필수적인 작업입니다. SF 소설들은 가능성을 상상해야 합니다. SF 소설들은 미래를 전망하고 현실에 없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현실에 없는 것을 이야기할 때, 이미 존재하는 언어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로봇 공학이라는 용어가 없다면, 로봇 공학자 역시 없을 겁니다. 로봇들을 양산하는 사회에서 로봇 공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다소 이상할 겁니다. 그래서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 공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로봇 기술들이 늘어나고 로봇 공학이 꽤나 유용한 신조어이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로봇 공학은 자연 과학 용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능성을 추구하고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SF 소설들은 신조어들을 동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소설들은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완전히 떠나지 못합니다. 쥘 베른이 가상의 언어를 고안했다고 해도, 결국 쥘 베른은 이미 존재하는 프랑스 언어를 이용해 <해저 2만리>를 썼습니다. 아무리 아이작 아시모프가 미래 로봇 사회를 묘사하기 원했다고 해도, 아시모프는 이미 존재하는 미국 영어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미래를 그린다고 해도, SF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SF 소설의 내용은 미래를 이야기하나, SF 소설의 형식은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떠나지 못합니다.
철학 서적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이게 언어의 물질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설 작가는 언어의 물질성을 떠나지 못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SF 소설들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SF 소설 역시 소설이고, 따라서 SF 소설들 역시 언어의 물질성을 떠나지 못하겠죠. 작가보다 언어는 먼저 존재하고, 작가는 언어에 종속됩니다. 한편으로 언어는 사회 및 문화에서 비롯합니다. 사회 및 문화가 바뀔 때, 언어 역시 바뀝니다. 언어는 절대적이고 완벽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언어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어는 사회적인 합의입니다.
하지만 언어가 점진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언어가 절대적이고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에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꽤나 불친절하고 비효율적인 의사 소통 수단일지 모릅니다. 언어는 추상적인 개념을 다룰 수 있으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언어는 비효율적일지 모릅니다. 소설 <사소한 정의>가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은 오직 언어로 이루어진 등장인물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언어는 추상적이죠. 추상적인 언어는 구체적인 의미를 담지 못할지 모릅니다. 언어는 추상적이고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소설 작가는 이런 추상적이고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언어를 이용해 소설을 써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게시글이 이야기한 것처럼, 원스 팬들은 트와이스 사나가 아주 예쁘다고 묘사하기 원할 겁니다. 하지만 '아주'와 '예쁘다'는 일반적인 단어입니다. 일반적인 단어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원스들이 지상 최대의 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원스들은 일반적인 단어들을 이용해야 합니다. 사나가 특별히 예쁘다고 묘사하고 싶다면, 원스들은 '예쁘다'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언어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원스 팬들이 '예쁘다'라는 단어를 새로 만든다고 해도, 그건 그저 유행어에 불과하겠죠.
모든 사람에게는 고유한 아름다움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수많은 고유한 아름다움들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수많은 유행어들과 신조어들을 새로 만들어야 할까요?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수많은 유행어들과 신조어들이 나온다면, 의사 소통은 불가능해질 겁니다. 이건 바벨탑이 무너졌을 때보다 훨씬 골치가 아픈 상황이 되겠죠. 그래서 언어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엉뚱하고 비효율적입니다. 소설 작가는 이런 언어를 써야 합니다. 소설은 텍스트 매체이고, 소설 작가는 오직 언어만을 써야 합니다. 소설을 쓸 때, 소설 작가는 이런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소설 작가는 언어 너머로 나가야 합니다. 언어가 충분하지 않고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설 작가는 언어 너머로 나가야 합니다. 소설 작가는 글쟁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글쟁이는 그저 언어를 이용할 뿐입니다. 글쟁이는 언어 너머로 나가지 않습니다. 언어가 효율적이지 않다고 해도, 글쟁이는 거기에 만족합니다. 반면, 언어 너머로 진정한 작가는 나가야 합니다. 언어 너머로 나갈 때, 작가는 이상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언어 너머로 작가가 나가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작가는 지배 계급을 넘어설 수 있을 겁니다.
언어가 사회 및 문화에서 비롯했다면, 언어 역시 지배 계급에게 영향을 받겠죠. 어떤 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관념은 지배 계급에게 유리한 관념입니다. 그런 관념은 언어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사람들이 낙태, 실업, 인간의 탐욕 운운하는 이유는 낙태와 실업과 인간의 탐욕이 정말 문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지배적인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에 유리하기 때문이죠. 사실 낙태는 굉장히 편파적인 단어이고 약자들을 배제합니다. 하지만 이게 가부장 문화를 떠받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낙태를 언급합니다. 언어 너머로 작가가 나갈 때, 작가는 지배적인 관념을 넘어설 수 있을지 모릅니다.
작가가 언어 너머로 나갈 때, 이런 여정을 밀어주는 원동력이 있을까요? 어떻게 언어 너머로 소설 작가가 멀리, 훨씬 멀리 나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언어 너머로 나갈 때, 소설 작가가 훨씬 쉽게 지배적인 관념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어쩌면 SF 소설은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SF 작가들은 신조어들과 새로운 언어 체계들을 고안해야 합니다. 둘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이건 거의 필수적인 작업입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아나레스 사람들은 새로운 언어를 고안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사회에서 그들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물질성은 사회 및 문화에서 비롯했습니다. 사회 및 문화가 바뀔 때, 언어 역시 바뀌어야 합니다. 새 술을 새 항아리에 담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는 동안 SF 작가는 언어 너머로 나갈지 모릅니다. 새로운 언어를 고안한다면, 이미 존재하는 언어 너머로 SF 작가는 훨씬 쉽게 나갈 수 있겠죠. 이건 언어 너머로 SF 작가가 무조건 쉽게 나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언어 너머로 작가가 넘어가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건 절대 쉽지 않겠죠.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이상이 이상이 되는 이유는 이상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짝사랑에게 커플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고 이상입니다. 이상적인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작가가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이용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모순입니다. 작가는 이런 모순을 통과해야 합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갈등이 있겠죠. 이미 존재하는 언어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상 사이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을 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SF 작가 역시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SF 작가는 훨씬 쉽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SF 작가에게 그건 주된 역할입니다. SF 작가는 거의 필수적으로 새로운 언어를 상상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류 문학 작가보다 SF 작가는 훨씬 쉽게 언어 너머로 나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논증은 언어의 물질성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일지 모릅니다. <SF 소설이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게시글 역시 언어의 물질성을 너무 시대적인 의미로 한정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소설들이 새로운 사회들과 새로운 언어들을 고안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