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문학을 해석하는 상처들 본문
소설 <바보들의 결탁>은 존 케네디 툴이 쓴 블랙 코미디입니다. 소설 주인공 이그네이셔스는 꽤나 괴팍하고 황당한 등장인물입니다. 이그네이셔스는 아주 회의적이고 비판적입니다. 이그네이셔스는 언제나 세상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폄하하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 등장인물은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습니다. 이그네이셔스는 그저 입으로만 떠들 뿐이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만약 이그네이셔스가 트위터나 블로그 같은 소셜 네트워크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었다면, 적어도 온라인에서 이그네이셔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퍼뜨릴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그네이셔스는 꽤나 유명한 온라인 인사가 되었을지 모르죠.
하지만 <바보들의 결탁>은 1980년 소설이고, 이그네이셔스는 블로그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이그네이셔스는 트위터나 블로그를 외면했을지 모르죠. 트위터나 블로그에서 누군가가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이야기를 떠든다면, 그 사람은 욕설을 얻어먹거나 다른 사람들과 크게 싸워야 할 겁니다. 비록 그건 그저 온라인 말싸움에 불과하겠으나, 그런 온라인 말싸움 역시 짜증나고 피곤한 짓입니다. 왜 이걸 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 만큼, 온라인 말싸움 역시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수 있어요. 이건 일상에 영향을 미치고, 일상은 만성 노이로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그네이셔스는 그런 짜증나고 피곤한 온라인 말싸움을 회피하고 싶어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그네이셔스는 영원히 집에 머물지 못합니다. 이그네이셔스는 집 밖으로 나가고 세상과 부딪힙니다. 그런 과정은 꽤나 우스꽝스럽고 엄청난 함의를 품었습니다. 그래서 <바보들의 결탁>은 수많은 찬사들을 받았습니다. 2006년 <뉴욕 타임스>는 <바보들의 결탁>이 최고의 미국 소설이라고 선정했고, 존 케네디 툴은 토니 모리슨, 돈 드릴로, 코맥 매카시, 존 업다이크, 필립 로스 같은 쟁쟁한 소설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심지어 <바보들의 결탁>은 퓰리처 수상 작품이 되었죠. 존 케네디 툴은 엄청난 명예를 안았습니다. 작가가 이런 사실을 기뻐했을까요?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보들의 결탁>이 퓰리처 수상 작품이 되었을 때, 이미 존 케네디 툴이 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보들의 결탁>을 완성했을 때, 존 케네디 툴은 이 소설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믿었고 여러 출판사들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들은 계속 이 소설을 외면했죠. 존 케네디 툴은 소설을 출판하지 못했고 연이은 거절들 속에서 절망합니다. 안타깝게도 존 케네디 툴은 우울증과 편집증에 빠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만약 작가의 어머니가 이 원고를 투고하지 않았다면, <바보들의 결탁>은 절대 빛을 받지 못했겠죠. 결국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11년 이후, <바보들의 결탁>은 엄청난 찬사들과 함께 퓰리처 수상 작품이 됩니다. 이건 정말 기구한 운명입니다.
테리 이글턴은 세계 최고의 문학 평론가로 알려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테리 이글턴이 최고가 아니라고 부인할지 모릅니다. 특히, 재치 있게 비꼬고 풍자하는 어조 때문에 테리 이글턴은 많은 미움들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로서 테리 이글턴은 아주 유명합니다. 언젠가 테리 이글턴은 토마스 하디가 쓴 <무명의 주드>를 비평한 적이 있습니다. 그 비평문에서 테리 이글턴은 수 브라이드헤드를 혹독하게 깎아내렸습니다. 테리 이글턴은 수 브라이드헤드에게 긍정적인 구석이 별로 없다고 비판합니다. 수는 연인의 죽음을 재촉했고 또 다른 남자(주드)를 유혹했습니다.
수는 기이하게 필롯슨과 결혼했고 주드를 냉담하게 대합니다. 필롯슨을 거부한 이후 수는 다시 주드에게 돌아갑니다. 아라벨라를 질투했기 때문에 수는 주드와 결혼하기로 결심했고, 또 다시 마음을 바꾸고 필롯슨에게 돌아가고, 결국 죽어가는 주드를 내칩니다. 수는 그런 여자입니다. 독자들은 이런 여자를 동정하지 않겠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겠죠. 뉴 웨섹스 판본 <무명의 주드> 서문에서 이렇게 테리 이글턴은 수 브라이드헤드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정말 옳을까요? 아니, 이건 비판이 아니라 그저 일반적인 비방에 불과합니다.
나중에 테리 이글턴은 자신이 아주 크게 실수했다고 자책합니다. 수 브라이드헤드는 꽤나 독창적이고 당찬 등장인물입니다. 수 브라이드헤드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내비치나, 그건 순전히 수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빅토리아 사회가 너무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였기 때문에 수는 자신을 방어해야 했습니다. 지나친 방어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쉽게 드러내겠죠. 흑인 노예들이 백인 주인들을 극단적으로 증오한 것처럼. 농노들이 귀족들을 극단적으로 증오하는 것처럼. 원주민들이 유럽 침략자들을 찢어죽이는 것처럼.
수 브라이드헤드 역시 그저 방어적으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테리 이글턴은 그런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수 브라이드헤드를 열심히 깎아내렸습니다. 다행히 나중에 테리 이글턴은 자신의 커다란 실수를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테리 이글턴에게 이런 실수는 지워지지 않는 흑역사가 되겠죠. 소설 서문에서 가장 유명한 평론가가 엉터리 비평을 달았다면, 그건 지워지지 않는 흑역사가 될 겁니다. 테리 이글턴에게 이건 '이불킥'하는 경험이 될지 모르죠. 이렇게 유명한 문학 평론가 역시 실수, 아주 커다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비단 테리 이글턴 이외에 수많은 문학 평론가들 역시 비슷한 실수들을 저지르겠죠.
<바보들의 결탁>과 테리 이글턴의 실수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닐 겁니다. 사실 우리는 드물지 않게 이런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어떤 출판사는 어떤 작가를 거절하는 중일지 모릅니다. 이 순간에도 어떤 평론가는 어떤 소설을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함부로 추켜세울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소설이 엉터리라고 헐뜯을 수 있으나, 나중에 그 소설은 커다란 영예를 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소설이 최고라고 추켜세울 수 있으나, 나중에 그 소설은 혹독한 비판을 피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킨>은 아주 뛰어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많은 독자들은 이 소설이 공포 소설이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킨>은 정말 끔찍합니다. 귀신이 나오는 어설픈 3류 공포 소설보다 <킨>은 훨씬 무섭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백인 농장 주인에게 <킨>은 그저 허섭쓰레기 같은 불쏘시개에게 불과할지 모릅니다. 19세기 백인 농장 주인은 <킨>이 주장하는 노예 해방이 개X랄 같은 헛소리라고 일축할 겁니다. 사실 19세기에 노예 해방론자들이 인종 차별에 반대했을 때, 많은 백인 농장 주인들은 그게 개X랄 같은 헛소리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런 백인들에게 <킨>은 불쏘시개보다 못하겠죠. 그래서 <킨>이 시간 여행 이야기라는 사실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런 사례들처럼, 문학을 평가하는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문학을 평가하는 방법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바보들의 결탁>처럼, 어떤 소설은 급격하게 수면 위로 떠오를지 모릅니다. 수 브라이드헤드처럼, 어떤 등장인물은 새로운 해석으로 들어갈지 모릅니다. 소설 주인공이 자유민과 노예를 오가는 <킨>처럼, '시대에 따라' 어떤 소설은 찬사와 비아냥을 오갈지 모릅니다. 이건 문학 비평 방법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수많은 문학 평론가들은 비평 이론을 연구했고, 우리는 그걸 이용해 소설들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문학을 평가하는 방법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들은 <프래그먼트>가 <오만과 편견>보다 대단하다고 평가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생태적인 상상력을 좋아하는 SF 독자들조차 <프래그먼트>가 <오만과 편견>보다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죠. (21세기 소설이 19세기 소설보다 훨씬 얄팍하다는 사실은 불행일지 모릅니다.) <프래그먼트>와 <오만과 편견>을 비교할 때, 분명히 독자들은 문학 비평 이론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 비평 이론은 절대적이고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숱한 작가들과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왜 어떤 소설이 뛰어나거나 형편없는지 왈가왈부 싸웁니다.
문학은 설명서가 아닙니다. 문학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킨>이 보여주는 것처럼, 비단 일반적인 주류 문학만 아니라 장르 문학들,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 추리, 공포, 로맨스, 역사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이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종종 독자들은 평론가들을 믿지 못합니다. 평론가들이 문학 비평 이론으로 어떤 소설을 호평할 때, 독자들은 그 소설을 혹독하게 깎아내릴지 모릅니다. 문학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런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겁니다. 물론 해석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독자들이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을 찬양한다고 해도, 그건 정말 우주 함선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죠. 하지만 존 케네디 툴처럼, 가끔 문학을 해석하는 방법은 커다란 상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네, 이런 사례는 너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