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헤게모니에 관한 개인적인 푸념 본문
※ 이 글은 일기장 수준의 개인적인 푸념입니다. 뭐, 이 블로그의 모든 글은 개인적인 잡담이고 수다입니다. 하지만 이 글은 훨씬 푸념에 가까울 것 같군요.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꽤나 비판적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블로그 따위가 절대 비판적이지 않다고 야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블로그가 비판적이라고 생각하고, 저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생물 다양성이 무자비하게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블로그에서 제가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은 생물 다양성과 생태적인 상상입니다. 자연 생태계, 먹이 그물망, 장대한 생명 진화, 우주 생물학. 그리고 거대 괴수, 행성 공학, 폐쇄 생태계, 개조 생명체, 생체 장비.
문제는 현실 속에서 생물 다양성이 계속 줄어들고 결국 절반 가량이 파괴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거대 괴수나 개조 생명체나 생체 장비를 막연하게 떠든다면, 그건 너무 피상적인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먹이 그물망이 찢어짐에도, 제가 오직 가상의 먹이 그물망을 떠든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래서 저는 생태적인 상상을 비평하는 이야기가 환경 보존을 중시하는 목소리로 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생물 다양성이 대대적으로 줄어들까요? 대답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계가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거짓말들이 숱하게 널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거짓말들을 믿고,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에 복종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이바지합니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닐 겁니다. 피지배 계급은 억압을 당하나, 그건 피지배 계급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복종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계는 무너지지 않아요.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하는 행위는 그저 선의, 연민, 동정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지배적인 관념을 철저하게 공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꽤나 괴로운 행위일지 모릅니다. 텔레비전을 볼까요. 텔레비전에서 국제 구호 단체들은 불쌍한 아이들을 돕자고 광고합니다. 그런 광고는 삐쩍 마른 흑인 아이를 보여주고, 우리가 그런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광고는 동정과 연민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삐쩍 마른 흑인 아이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표시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저는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흑인 아이들이 삐쩍 말랐을까요? 왜 그렇게 흑인 아이들이 굶주리고, 고통을 겪고, 죽음을 당할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유럽 강대국들이 식민지 대륙들을 수탈했기 때문입니다. 대항해 시대 때, 유럽 강대국들은 식민지 대륙들을 수탈했고, 이후 계속 끔찍한 수탈들을 저질렀습니다. 여전히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제3세계를 무자비하게 수탈합니다. 따라서 흑인 아이들은 그저 불쌍한 약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피해자입니다. 그들은 수탈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수탈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흑인 아이들을 동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기득권들에게 처먹은 것들을 다시 토해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기득권이 수탈을 멈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기득권을 때려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국제 구호 단체들의 홍보 광고에는 이런 내용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홍보 광고들은 흑인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들이 불쌍한지 홍보 광고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홍보 광고들은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수탈한다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민 운동들은 그런 방식입니다. 그런 홍보 광고들에게 감동하는 사람들 역시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홍보 광고들이 일부 아이들을 돕는다고 해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시민 운동가들을 존경합니다. 매연 속에서, 열악한 자금난 속에서, 온갖 질타들과 모욕들과 조롱들 속에서, 비정상적인 폭염 속에서, 유치장 속에서, 온갖 어려움들 속에서 시민 운동가들은 굳건한 사명감으로 노력합니다. 저는 그런 사명감을 정말 존중합니다. 한때 저 역시 시민 단체들에 가입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민 운동들에 결정적이고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뭔가가 빠졌다고 느꼈습니다. 그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분석하는 시각입니다. 그게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막연하게 흑인 아이들을 동정합니다. 그런 동정은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은폐하고 지배 계급의 폭력을 은폐합니다. 우리는 지배적인 관념에 복종하고, 지배적인 관념은 더 많은 흑인 아이들을 수탈하죠.
이건 인종 차별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이건 인종 차별입니다. 우리가 지배적인 관념에 복종한다면, 그건 약자를 차별하는 행위일 겁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약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량한 사회 운동이 저도 모르게 자본가 계급의 앞잡이가 된다고 경고했겠죠. 여전히 그런 경고는 유효합니다. 아니, 선량한 사회 운동이 강화된다면, 그런 경고는 더욱 중요해질 겁니다. 왜 대기업들이 돈을 흥청망청 쓰는 상황에서 시민 단체들이 열악하게 쪼들려야 하나요?
따라서 우리는 지배적인 관념을 꿰뚫어보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선량한 홍보 광고가 인종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량한 사회 운동이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될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쉽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기득권의 나팔수가 되었다는 생각. 누구나 그걸 쉽게 인정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헤게모니의 악순환은 계속 돌아갈 겁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오랜 동안 이 블로그에서 저는 얼굴 마담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얼굴 마담은 성 차별적인 용어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가 아주 지배적이기 때문에 저는 그걸 깨닫지 못했고 계속 성 차별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성 차별에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아주 열심히 성 차별에 이바지했습니다. 입으로는 성 평등을 격렬하게 외쳤으나, 아주 바보처럼, 저는 성 차별에 이바지했습니다. 그건 저의 개인적인 잘못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게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성 차별을 저질렀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또 다른 지배적인 관념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지지하는 생태 사회주의 역시 지배적인 관념일지 모르죠. 저는 세뇌를 당한 녹색 빨갱이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세뇌를 당하지 않았고 약자를 배제하지 않았다고 외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돈 욕심을 버리고 착하게 살자고 말한다면, 그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주장일까요? 숱한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수구 세력들조차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돈 욕심을 버리자. 돈에 연연하지 말자. 황금 만능주의는 나쁘다. 누가 여기에 반대하겠어요.
하지만 제가 대기업들에게 돈을 와아아아앙차아아아아앙 뜯자고 말한다면, 다들 난리법석을 떨 겁니다. 그게 계급 투쟁이고, 진짜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득권을 공격하는 주장이기 때문이죠. (이게 안 된다면, 기본 소득 역시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사람들은 돈 욕심을 버리자고 운운하죠. 그건 세뇌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지적한다면, 사람들은 그게 폭언이나 망상이라고 반응할지 모릅니다. (솔직히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건 당연한 반응입니다. 누가 자신이 세뇌를 당했다고 쉽게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우리는 그걸 솔직히 직면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게 폭언이나 망상처럼 들린다고 해도.
※ 따라서 고지라를 좋아하는 여러분들, 대기업들에게 돈을 왕창 뜯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