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억압적인 사회 구조와 개인적인 선행 본문
착하게 살아라. 이는 아주 좋은 말입니다. 착하게 살아라. 누가 이걸 부정하겠습니까. 착하게 살아라. 네, 모두 착하게 산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지겠죠. 문제는 뭐가 착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뭐가 착할까요? 누군가가 약자들을 동정하자고 말한다면, 그게 착할까요? 그런 주장이 착할까요? 원론적으로 그런 주장은 착하겠죠. 하지만 그런 주장에 문제가 없을까요? 철학 서적 <철학 대 철학>을 소개하는 어떤 방송에서 강신주 박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동정했습니다. 강신주 박사는 남한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측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 돈을 벌기 위해 남한 사람들이 중동에 건너간 것처럼, 돈을 벌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 역시 남한에 왔습니다. 비록 그들이 남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가져갈지 모르나, 동남 아시아에서 그들의 작은 임금은 커다란 부가 될 겁니다. 게다가 남한 사람들은 저임금 노동들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남한 사람들은 동남 아시아 노동자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저임금 노동들을 내줘야 합니다. 이렇게 강신주 박사는 주장했습니다. 언뜻 이런 주장은 착합니다. 이는 약자들을 동정하자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왜 동남 아시아 노동자들이 약자가 되었을까요? 밑도 끝도 없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무조건 약자일까요? 동아시아 일본과 남한이 동남 아시아 국가들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가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동남 아시아가 약자가 되는 이유는 세계가 미국 자본주의로 재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 자본주의에 들러붙은 국가(남한)는 강자가 되고, 거기에 반박했던 국가(동남 아시아 국가들)는 약자가 됩니다. 동남 아시아 국가들은 밑도 끝도 없이 약자가 아닙니다. 미국 자본주의가 세계 질서를 재편했기 때문에 그들은 약자가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남한 사람들이 소설 <호빗>의 샤이어 주민들에게 수 천억 원을 준다고 해도, 호빗들은 절대 고마워하지 않을 겁니다. 왜? 중간계 샤이어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자본주의가 중간계 샤이어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은 약자가 되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 강자에게 피해를 당했을 때, 사람들은 약자가 됩니다. 하지만 강신주 박사는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강신주 박사의 주장 속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절대적으로 약자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고 측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우월하죠. 우리는 왜 우리가 우월한지 깨닫지 못하죠.
게다가 왜 과거에 남한 사람들이 중동으로 건너가야 했을까요? 왜 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을까요? 여전히 제3세계 노동자들은 정든 고향을 떠납니다. 자꾸 자본주의 세계화가 그들을 내몰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식민지들을 수탈하고, 자본을 수출하고, 아예 모든 것을 시장 경제 속으로 통합합니다. 자꾸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 영역을 침략합니다. 그렇게 침략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고, 무조건 확장해야 합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남한 사람들은 중동에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세계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세계화는 바람직할지 모릅니다. 세계 만인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원대하고 조화롭지 않겠어요.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화는 끔찍한 침략이고 수탈입니다. 우리가 이걸 잊는다면, 우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간다고 이해하겠죠. 그런 이해 속에서 지배 계급 강자들이 약자들을 짓밟는 폭력은 잊혀지겠죠. 아무리 우리가 약자들을 돕자고 외친다고 해도, 이런 폭력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지 못하겠죠. 안타깝게도 선행과 동정을 주장하는 숱한 사람들은 이런 폭력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똑바로 굴러간다고 여기죠.
게다가 저임금 노동들이 정상적인 현상일까요? 왜 저임금 노동들이 나타날까요? 만약 그 노동이 사회에 도움을 준다면, 왜 우리가 그걸 저임금이라고 규정해야 하나요? 만약 등산로에서 삼림 환경 미화원이 쓰레기들을 줍는다면, 우리는 그게 하찮은 일이라고 무시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연 환경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고귀한 노동이 하찮다고 무시할까요? 금융 기업들에서 이른바 전문직 종사자들은 엄청난 급여를 받습니다. 파생 상품들이 사회를 산산조각 깨뜨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몰아갔음에도, 우리는 금융 기업들과 전문직 종사자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이 엄청난 급여를 받음에도, 우리는 그걸 뭐라고 탓하지 않습니다. 설사 탓한다고 해도, 우리는 오직 그들의 윤리나 도덕을 탓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이 똑바로 굴러가고 오직 개인들만 잘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 구조를 무시합니다. 사회 구조가 잘못되었음에도, 우리는 그걸 무시하고 오직 착하게 살자고 외칩니다. 하지만 잘못된 사회에서 우리는 폭력적이고 독단적으로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삐뚤어진 사회에서 선행은 무례이고 무례는 선행일지 모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언급했을 때, 강신주 박사는 이런 점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방송을 주관한 <TV 책방 북소리>가 그걸 편집했기 때문일까요? 자본주의를 지적하는 주장이 TBS 방송에 어긋나기 때문일까요? 강신주 박사에게 충분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신주 박사가 경제 현상을 간과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 철학 초고>를 설명하는 어떤 강연에서 강신주 박사는 경제 현상을 아주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강신주는 경제 현상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조롱했습니다.
사실 수많은 진보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가 문화적인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자본가 계급은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그렇게 진보 지식인들은 저도 모르게 권력의 앞잡이가 됩니다. 물론 저는 강신주 박사의 가르침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강신주 박사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여러 감동적인 강연들을 퍼뜨렸습니다.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죠. 강신주 박사는 어떻게 지식인들이 대중과 만나야 하는지 보여줬어요. 하지만 경제 현상을 간과하는 시각은…. 이건 정말 심각하고 심각하고 다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