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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우익 이데올로기 비판

SF 소설이 무엇을 전복할 수 있는가

OneTiger 2018. 6. 6. 19:08

여러 대학들에는 경영학과가 존재합니다. 경영학과에서 대학생들은 이런저런 경영학 이론들을 배웁니다. 경영학이 뭘까요? 이름처럼 경영학은 기업을 경영하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경영학과 학생이 모두 경영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몇몇 대학생은 경영자가 되겠죠. 하지만 대부분 학생들은 노동자가 될 겁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자본가들은 소수이고 노동자들은 다수입니다. 게다가 중소 자본가들 역시 노동자들과 별로 다른 처지가 아니죠. 프랜차이즈 사장들은 사장이 아니라 본사를 떠받드는 노동자에 가깝습니다.


대부분 대학생들은 경영자가 되지 못하고 노동자가 되겠죠. 하지만 왜 대학생들이 노동학이 아니라 경영학을 배울까요? 남한에서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는 대표적인 명문 대학교입니다.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는 아주 당연하게 경영학과가 있습니다. 이 학교들에 노동학과가 있을까요? 서울대학교에는 없습니다. 연세대학교에도 없습니다. 고려대학교에는 노동대학원이 있군요. 하지만 노동학과는 존재하지 않고, 노동경제학과나 노동법학과라는 세부적인 학과가 존재합니다.



게다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와 고려대학교 노동법학과는 아예 위상이 다른 것 같습니다. 구글에서 저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와 고려대학교 노동법학과를 검색했습니다. 아예 검색 결과 자체가 다릅니다. 경영학과는 뭔가 화려하고 번잡하나, 노동법학과는 단조롭게 보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대부분 사람들이 노동자들임에도, 왜 노동학과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까요? 왜 노동자가 되는 학생들이 경영학을 배워야 하나요?


비단 이것 이외에 우리는 다른 사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을 창시했다고 말합니다. 대학교 경제학과들은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을 창시했다고 가르치죠. 고등학교 교과서들 역시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을 창시하지 않았어요. 아담 스미스는 정치 경제학(political economy)을 창시했죠. 그래서 <자본론>은 <경제학 비판>이 아니라 <정치 경제학 비판>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정치라는 단어를 싫어했고, 정치라는 단어를 뺐습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사회 구조적인 요소를 외면했고, 경제학이 그저 부를 증진하는 수치 계산이 되기 바랐어요.



왜 대학교 경제학과나 고등학교 교과서들이 이런 정치 경제학을 가르치지 않을까요? 더욱 큰 문제는 이런 경제학 교육들이 노동 가치 이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노동 가치 이론을 고안했습니다. 하지만 대학교나 고등학교 교육들은 노동 가치 이론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노동 가치 이론 대신 수요-공급 곡선을 알죠. 그래서 사람들은 무조건 시장 경제를 전제하고, 무조건 판매자와 구매자와 상품을 전제하죠. 그저 이런 경제학 교육들만 문제일까요? 학교 선생님들은 사회 계약론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합의했다고 생각하죠. 그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미국이 북아메리카 부족민들을 짓밟았을 때, 미국은 북아메리카 부족민들에게 미국을 만들기 원하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미국이 흑인 노예들을 부려먹었을 때, 미국은 흑인 노예들에게 미국을 만들기 원하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유럽 침략자들이 식민지들을 세웠을 때, 유럽 침략자들은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 사람들에게 식민지에 찬성하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근대 국가가 탄생했을 때, 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국가에 찬성하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그저 경제학이나 사회학이 문제일까요? 아이들이 배우는 자연 과학은 어떨까요. 숱한 생태학 학습 만화들은 인류가 탐욕스럽기 때문에 자연 환경이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정말 인류가 탐욕스러운가요? 세계 인구 10억은 생지옥에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들이 정말 탐욕스러운가요? 굶주리는 빈민들이 탐욕스러운가요? 최저 기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숱합니다. 그들이 정말 탐욕스러운가요? 최저 빈민들이 탐욕스러운가요? 먹고 살기 위해 비정규직들은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비정규직들이 죽는 문제는 드문 현상이 아니죠.


그들이 탐욕스러운가요? 탐욕스럽기 때문에 비정규직들이 목숨을 바치나요?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공장들, 발전소들, 농장들을 누가 소유했습니까?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공장들, 발전소들, 농장들을 소유했나요? 아닙니다. 그것들은 거대 자본가들에게 속했습니다. 공장들, 발전소들, 농장들의 주인은 거대 자본가들입니다. 아무리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고 해도, 공장 부품 하나 마음대로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거대 자본가들이 막대한 생산 수단을 소유했음에도, 생태학 학습 만화들은 소유 문제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생태학 학습 만화들은 인류가 탐욕스럽다고 말합니다.



숱한 사람들은 서구적인 근대화와 유럽 중심주의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숱한 사람들은 유럽이 진보적이기 때문에 유럽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중세 중국이 멍청했다고 욕하죠.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가 아메리카 대륙과 가까웠기 때문에 유럽 침략자들은 천연 자원들을 수탈하고 자본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었어요. 유럽은 진보적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중국은 유럽만큼 진보적이었어요. 하지만 숱한 사람들은 열심히 서구 문명을 빨아주죠. 서구 문명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런 왜곡들과 차별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여기에서 저는 사이언스 픽션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SF 작가들, 평론가들, 독자들은 전복적인 사변과 인식의 지평선과 고정 관념 타파를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SF 작가들, 평론가들, 독자들이 정말 저런 왜곡들에서 자유로울까요? SF 작가들, 평론가들, 독자들에게 전복적인 사변을 부르짖을 자격이 있을까요? 그저 입으로 전복적인 사변을 떠들 뿐이고, 다들 왜곡들을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사실 아이작 아시모프나 아서 클라크 같은 그랜드 마스터들조차 저런 왜곡에서 한 발자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대단한 아시모프조차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이죠.



SF 소설은 대단합니다. SF 소설은 우주와 이성을 바라보고, 거시적인 시각을 펼치죠. 하지만 동시에 저는 SF 소설이 뭐가 그렇게 잘났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왜곡을 받아들이는 SF 작가가 무엇을 전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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