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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하드 SF 작가 역시 큰 뻥을 친다는 사실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하드 SF 작가 역시 큰 뻥을 친다는 사실

OneTiger 2017. 9. 2. 20:00

[영화 <라이프>의 한 장면. 이런 SF는 엄격할 것 같으나, 결국 이것 역시 상상의 영역입니다.]



어쩐지 하드 SF 소설들은 굉장히 엄중할 것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흔히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 활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조롱하지만, 반대로 하드 사이언스 픽션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죠. 분명히 하드 SF 소설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빛내는 정수를 담았습니다. 만약 독자가 가장 순수한 사이언스 픽션을 만나고 싶다면, 하드 SF 소설이 해답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드 SF 소설에 환상적인 요소가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드 SF 소설은 엄중한 고증을 자랑하는 것만큼 수많은 환상적인 요소들에 기댑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만큼 신화와 전설이 점유하는 영역까지 날아가지 않으나, 종종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진부한 설정이나 상투적인 상상력에 기댑니다. 스타니스와프 렘 같은 작가는 그런 상투적인 상상력을 비판했으나, 렘 역시 진부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죠. <중력의 임무> 같은 소설은 왜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찬사를 받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중력의 임무> 역시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지극히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하드 SF 작가들은 천재적인 과학자가 아닙니다. 때때로 명석한 과학자들이 하드 사이언스 픽션을 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설정들을 꿰뚫지 못합니다. 할 클레멘트는 <중력의 임무>를 썼으나, 어떻게 지구 우주선이 그 머나먼 행성까지 날아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 클레멘트 본인도 그걸 모르기 때문이죠. 이 양반은 그저 중력을 좀 더 독특하게 논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래서 지구 우주선이 다른 행성으로 날아가거나 벌레 외계인들이 인간처럼 사고한다고 설정했을 뿐입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아주 진부하고 상투적인 설정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만큼 진부하고 상투적이죠.


하지만 <중력의 임무>가 상투적이라고 말하는 비평가나 독자는 별로 없을 겁니다. 사실 이건 좀 불공평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상투적이라고 비판을 받는다면, 응당 하드 SF 역시 그런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드 SF 작가도 뻔한 상상력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하드 SF 범주에서 벗어나는, 좀 더 일반적인 SF 작가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SF 소설에는 수많은 우주선들과 인공 지능들과 로봇들이 등장하나, SF 작가들은 어떻게 그것들이 작동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단 소설가들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삽화가들은 각종 SF 영화와 게임에서 우주선과 로봇과 강화복을 제작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그것들이 작동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종종 삽화가들은 SF 설정집이나 백과사전을 출판하지만, 자세한 청사진이나 설계도 역시 핵심적인 물음을 슬쩍 피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우주선이 타키온 드라이브를 이용하고 우주 저편으로 날아갈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SF 매니아들은 설정과 각종 수치를 줄줄이 읊을 수 있으나, 그들 역시 어떻게 거대 로봇이 하늘을 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SF 소설, 영화, 게임이 엄중한 과학적 고증을 지킨다고 해도 그건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SF 창작가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분야에서만 엄중한 고증을 지킵니다. 만약 이야기가 그런 부분에서 벗어난다면, 작가들은 뻔한 상상력에 기대고 얼렁뚱땅 지나갑니다. 작가가 잘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SF 소설은 그렇습니다. SF 소설은 어느 특정한 분야에서 과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SF 소설은 상상력을 동원해 과학적인 소재들을 논하기 원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설정이 아니라 주제입니다.



만약 작가들이 과학적 고증을 일일이 지켜야 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도 SF 소설을 쓰지 못할 겁니다. SF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적 고증이 아닙니다. '과학적인 그 뭔가'가 중요합니다. SF 소설은 과학적인 고증이 아니라 과학적인 담론을 원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런 담론을 부각할 수 있다면, 아무리 작가가 뻥을 치더라도 별로 상관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하드 SF 작가들도 뻥을 칩니다. 게다가 그들은 아주 큰 뻥을 칩니다.


물론 하드 SF 작가들이 뻥을 친다고 해서 스페이스 오페라와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동등하게 뻥을 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드 SF 작가들은 뻥을 이용해 최대한 과학적인 담론을 키우지만,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들은 뻥을 이용해 최대한 흥미진진한 모험을 만들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두 분야에서 작가들은 모두 뻥을 친다는 사실입니다. 주제를 부각할 수 있다면, 그 주제가 과학적인 담론이든 흥미진진한 모험이든, SF 작가들은 뻥을 잘 칩니다. 종종 어떤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이 뻥을 안 친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게 대단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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