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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픽션과 사변과 소설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사이언스 픽션과 사변과 소설

OneTiger 2017. 9. 5. 20:00

[게임 <노 맨즈 스카이>는 근사한 탐험이나, 여기에는 외계 생태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부족해요.]



<블라인드사이트>와 <프로메테우스>와 <스텔라리스>는 모두 똑같은 SF 창작물입니다. 인류가 우주로 나가고, 다른 생명체들과 마주치고, 서로 싸우거나 교류하는 이야기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이나 주제는 전혀 다르지만, 세 창작물들 모두 전형적인 사이언스 픽션들이죠. 사실 세부적인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체일 겁니다. 각각 매체가 다릅니다. <블라인드사이트>는 소설이고, <프로메테우스>는 영화이고, <스텔라리스>는 비디오 게임이죠.


그리고 매체가 다르면, 해당 창작물의 특성 역시 달라지곤 합니다. 저 세 창작물들은 모두 똑같은 사이언스 픽션이지만, 과학적 상상력을 이용하는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저는 SF 소설과 SF 영화와 SF 비디오 게임이 모두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 소설이 제일 사이언스 픽션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소설이 사변을 제일 잘 풀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재미있는 이유는 주류적인 사고 방식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외계인, 인공 지능, 돌연변이, 고대의 생명체 등은 비인간적이고 비지구적이고 비현재적인 존재들이고, 우리는 이들을 통해 사고 방식을 더 멀리 확장할 수 있습니다.



사고 방식이라는 것은 추상적입니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죠. 사고 방식을 도화지에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 구축함이나 거대 로봇이나 선사 시대의 공룡을 도화지에 그릴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실체가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변증법적 논리를 도화지에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정반합 공식을 그릴 수 있겠으나, 그건 변증법의 실체가 아니죠. 그건 개념일 뿐이고, 증명 과정일 뿐입니다. 변증법은 역사가 고정되지 않고 모순을 통해 발전한다는 사변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사변을 뚜렷하게 그리지 못합니다. 그저 서술할 수 있을 뿐입니다.


글쎄요, 어쩌면 최첨단 문명의 외계인은 변증법적 논리를 (공룡을 그리는 것처럼) 그릴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아직 인류는 그러지 못합니다. 사변은 추상적이고, 인류는 그것을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SF 소설은 SF 영화나 SF 비디오 게임보다 훨씬 사변을 잘 풀어낼 수 있습니다. 영화와 비디오 게임은 영상을 직접 보여주기 때문에 추상적인 설명을 풀어내지 못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게임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소설만큼 잘 하지 못합니다. 사변은 소설의 특기이고,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과 소설은 잘 어울립니다.



저는 위에서 <블라인드사이트>를 언급했습니다. 사변이 아주 두드러지는 하드 SF 소설이죠. 어떻게 이걸 그림이나 영상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블라인드사이트>를 훌륭한 비디오 게임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비디오 게임은 소설만큼 사변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할 겁니다. 비디오 게임이 텍스트보다 훨씬 사변을 잘 풀어낼 수 있다면, 아마 전세계의 철학자들은 이미 비디오 게임 매니아가 되었을 겁니다. 그림이나 영상은 텍스트를 보조할 수 있을지 모르나, 텍스트보다 더 우월하게 사변을 풀어내지 못할 겁니다.


앞을 못 보는 소경들 역시 뭔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앞을 못 보는 사람들 역시 뭔가를 상상할 수 있죠. 그런 사람들이 어떤 개념이나 대상을 상상했을 때, 그걸 그림이나 영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음, 글쎄요.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그 그림이나 영상을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반면, 그런 개념이나 대상을 텍스트로 이야기한다면,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거기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사변을 풀어내고 싶다면,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비디오 게임이 엉터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소설과 비디오 게임은 모두 장점이 있으나, 사변을 풀어낸다는 관점에서 소설이 비디오 게임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사실 여러 영화 감독이나 비디오 게임 제작진은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길 때, 애를 먹곤 합니다.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작가가 풀어놓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비유, 함의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종종 SF 영화나 SF 게임을 접하면, 뭔가 갑갑하고 규모가 작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소설이 표현하는 추상적인 사변을 영화나 게임은 담지 못하고, 그만큼 사고 방식을 확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블라인드사이트>를 언급했으나, 다른 작품들도 비슷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SF 영화들이 많다고 해도 그 영화들이 소설보다 사변을 더 제대로 풀어낸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블레이드 러너>,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솔라리스>…. 모두 훌륭한 영화들이죠. 하지만 저는 그 영상들을 보는 것보다 필립 딕이 서술하는 뒤죽박죽이나 아서 클라크가 바라보는 장대함이나 스타니스와프 렘이 비판하는 인간 중심주의를 직접 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스탠리 큐브릭이나 리들리 스콧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천재 감독이라고 해도 영상물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자체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런 영화들만 감상한 관객과 소설들을 읽은 독자는 서로 다른 소감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소감을 들어본다면, 독자가 관객보다 훨씬 사고의 저변을 넓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다시 말하지만, 이는 소설이 영화와 비디오 게임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서로 특징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만약 사변이 아니라 다른 특징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는 사람은 소설보다 영화나 게임이 낫다고 느낄지 몰라요. <크툴루의 부름>과 <클로버필드>는 모두 좋은 작품들이고, <크툴루의 부름>이 반드시 <클로버필드>보다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 역시 SF 소설들만큼 SF 비디오 게임들을 좋아합니다. 흠, 어쩌면 SF 소설들보다 SF 비디오 게임들을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군요.


<데드록>, <마스터 오브 오리온>,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 <오퍼레이션 제네시스>, <스텔라리스>, <비욘드 어스>, <언클레임드 월드>, <서브노티카>, <엔드리스 스페이스>, <압주>, 기타 등등…. 이런 게임들은 너무 너무 매력적입니다. 저는 SF 비디오 게임이 SF 소설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변이나 비유라는 관점에서 소설이 영화와 비디오 게임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잘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SF 비디오 게임들도 좋아하지만, 소설이 훨씬 사이언스 픽션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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