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프로젝트 이글> 화성 기지와 바이오스피어 건물 본문
[화성 개척 기지는 웅장하고 우아하고 신비롭고 정교합니다. 특히, 야간 풍경은 환상적입니다.]
비디오 게임 <프로젝트 이글>은 화성 개척 기지를 둘러보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아니, 사실 <프로젝트 이글>은 비디오 게임이 아닙니다. 비록 이게 스팀에 올라왔다고 해도, 이건 게임이 아닙니다. <프로젝트 이글>은 유저가 둘러보고 관찰하고 구경할 수 있는 3D 모델에 가깝습니다. <프로젝트 이글>을 플레이하는 동안, 유저는 정교하고 거대한 화성 개척 기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게임이 아닌 게임'은 화성 샤프 산 주변에 있는 게일 분화구를 조명합니다. 게일 분화구에는 화성 개척 기지가 있습니다.
그 정교하고 거대하고 심지어 신비롭고 우아한 모습은 그저 단순한 사이언스 픽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게임 제작자들은 NASA 제트 추진 연구소 회원들과 논의했고 개척 기지를 구상했습니다. 따라서 <프로젝트 이글>은 사이언스 픽션보다 미래 청사진이나 미래 상상도에 가깝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이걸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건 틀리지 않겠죠. 게임 제작자들은 <프로젝트 이글>이 하드 SF 게임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게임 제작자들은 <프로젝트 이글>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정교한 미래 상상도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양쪽이 서로 크게 다를까요?
하드 사이언스 픽션과 정교한 미래 상상도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있을까요? 아무리 과학자들이 정교하게 화성 개척 기지를 상상한다고 해도, 결국 그건 상상입니다. 아직 2117년은 오지 않았고, 아직 인류는 화성을 유인 탐사하지 않았고, 아직 거대한 화성 개척 기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프로젝트 이글>이 엄중하게 고증했다고 해도, 모든 것은 상상입니다. 만약 2117년에 정말 미래 인류가 화성 개척 기지를 세운다면, 진짜 화성 개척 기지는 <프로젝트 이글>과 아주 다를지 모릅니다. <프로젝트 이글>이 보여주는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납작하고 세련된 우주선과 우주선 발사대는 엉터리일지 모릅니다.
미래 인류는 그런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짓지 못할지 모릅니다. 미래 인류는 납작하고 세련된 우주선이 아니라 다른 모양의 우주선을 탈지 모릅니다. 게임 제작자들과 NASA 회원들은 열심히 고증했으나, 그들은 예언자나 점쟁이가 아닙니다. 아무리 화성 개척이 현실적인 우주 사업이라고 해도, 아무도 미래를 확실하게 예언하지 못합니다. 미래 상상도가 정교하다고 해도, 상상은 상상입니다. 따라서 미래 상상도는 하드 사이언스 픽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미래 상상도와 하드 사이언스 픽션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 차이점은 과학적인 엄중함이 아니라 이야기일 겁니다. 사람들이 울고 웃고 떠들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야기.
흔히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말할 때, 사이언스 픽션은 그저 미래 상상도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속에서 사람들은 울고 웃고 떠들고 미워하고 사랑합니다. 화성 개척 기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프로젝트 이글>은 화성 개척 기지에 5000명이 산다고 묘사합니다. 그들은 기계가 아닙니다. 화성에서 살아가는 동안 5000명은 지구를 그리워하거나, 외계 행성을 좋아하거나, 외계 행성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거나, 누군가와 크게 다투거나, 우주를 새롭게 고민하거나, 낮은 중력과 바이오스피어 속의 생명체들을 신기하게 바라볼 겁니다.
어떤 개척자들은 핵 발전소가 터질지 걱정하거나, 큐리오시티 로버 기념비를 감동적으로 바라보거나, 녹색 조수 웅덩이에서 생명이 번성하는 기쁨을 느낄 겁니다. 아니면 외계 행성에서 개척 기지를 세웠음에도, 누군가는 무덤덤하거나 아무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지구와 화성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이야기들을 담습니다. 만약 독자가 SF 소설을 읽는다면, 독자는 화성에서 살아가는 개척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만약 독자가 SF 소설을 읽는다면, 독자는 화성에서 살아가는 건축 기술자나 거대 트럭 운전사나 녹조 웅덩이 담당자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겠죠. 작가는 글자들로 등장인물들의 내면들을 묘사할 겁니다.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내면들을 살펴보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열심히 논의하거나 토론하거나 말싸움할 때, 작가는 글자들을 이용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 이글>에는 이런 내면 묘사나 대화가 없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게임 제작자들은 내면 묘사나 대화를 넣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면 묘사나 대화가 없다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없다면, <프로젝트 이글>은 하드 사이언스 픽션보다 미래 상상도에 가까울 겁니다. SF 작가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 논문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담습니다.
일상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와 대화와 여러 행동들은 특정한 주제를 드러냅니다. 이런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특정한 시점을 선택하거나, 건조한 수식어들을 늘어놓거나, 서술 문장들보다 대화들을 훨씬 많이 집어넣거나, 어려운 단어들을 남발할 수 있습니다. 종종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일부러 감추거나, 편지나 일기 형식을 사용하거나, 사투리로 사건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읽기 위해 독자는 소설을 펼칩니다. 미래 상상도에는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미래 상상도는 문학에 속하지 않겠죠. <프로젝트 이글>은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으나, <프로젝트 이글>과 소설 <붉은 화성>이 똑같이 화성 개척 기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양쪽은 서로 다른 감성을 풍길 겁니다.
[녹조 웅덩이들은 개척 기지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우주 속에도 녹색 생태계는 필요합니다.]
<프로젝트 이글>이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든 미래 상상도이든, <프로젝트 이글>은 놀랍습니다. 게임이 아닌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유저는 정교한 화성 개척 기지를 아주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게임 제작자들이 사소한 부분들을 열심히 고증했기 때문에, 유저는 자신이 정말 화성 기지를 방문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유저는 마음대로 화성 기지를 돌아다니고 심지어 거대 불도저 차량의 바퀴에 작은 돌멩이가 끼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픽은 섬세하고 사실적입니다. 건물들은 웅장하고 야간에는 화려한 불빛들을 뿜습니다. 야간 기지 풍경은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특히, 거대하고 둥근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조수 웅덩이들이 불빛들을 뿜을 때, 여기에는 우주적인 신비가 깃드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조수 웅덩이들은 일상적인 풍경이 아닙니다. 이런 비일상적인 풍경이 외계의 밤과 만날 때, 이런 만남은 쉽게 우주적인 신비로 이어질 수 있겠죠. 어떤 유저는 화성 개척 기지가 웅장하고 정교하다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비단 웅장하고 정교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주간과 야간은 정교함과 아름다움,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번갈아 연출합니다. 공허를 묵직하게 채우거나 잔잔하게 자극하는 배경 음악 역시 이런 분위기들과 멋지게 어울립니다.
화성 개척 기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들은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녹조 웅덩이들입니다.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가장 거대합니다. 가장 거대하기 때문에 개척 기지에서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가장 눈에 잘 보입니다. <프로젝트 이글>은 바이오스피어 건물이 외계 건물들 중에서 가장 거대하다고 설명합니다. 바이오스피어 내부가 무슨 모습일까요? 어떻게 생태학자들이 자연 생태계를 꾸몄을까요? 아직 <프로젝트 이글>은 바이오스피어 내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유저가 그래픽이 깨지는 버그를 이용해 바이오스피어 내부를 들여다본다고 해도, 내부는 텅 비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게임 제작자들은 내부 모습을 보여줄지 모릅니다. 아니면 게임 제작자들은 내부 모습을 영원히 구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만약 게임 제작자들이 바이오스피어 내부를 보여준다면, 유저는 어떻게 생태학자들이 인공 생태계를 관리하는지 관찰할 수 있겠죠. 바이오스피어 건물 주변에는 녹조 웅덩이들이 있습니다. 녹조 웅덩이들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는 산소 생성이고, 다른 하나는 식량 공급입니다. 영화 <선샤인>에서 녹색 정원이 우주선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처럼, <프로젝트 이글>에서 녹조 웅덩이들은 개척 기지에 산소(와 식량)를 공급합니다. <선샤인>에서 녹색 정원이 우주 속의 녹색 생명인 것처럼, 녹조 웅덩이들 역시 우주 속의 녹색 생명이 될 수 있겠죠.
화성 개척 기지에는 다른 여러 건물들과 구조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크고 뚜렷한 것들은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녹조 웅덩이들입니다. 그리고 바이어스피어 건물과 녹조 웅덩이들 모두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외계 행성의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문자 그대로 생태학 SF 설정입니다. 녹조 웅덩이들 역시 생태적인 상상력이 될 수 있죠. 웅덩이 안에서 생명체들이 번성하고 먹고 배설하고 숨쉬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래 인류가 외계 행성에 진출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생명체들이 있어야 하고 생태계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외계 행성에서도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 한다면, 외계 행성에도 생태계가 있어야 할 겁니다. 게다가 태양계 내부에서 생명 현상은 흔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태양계 내부에서 지구는 유일한 생명의 요람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태양계 외부에서도 생명의 요람들은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미래 인류가 외계 행성들에 새로운 생태계들을 퍼뜨린다면, 지구는 더 이상 외로운 요람이 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외계 생태계들에 반대할지 모르나, 저는 인류가 새로운 생태계들을 퍼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성 개척 기지에서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가장 크고, 이 사실은 꽤나 흥미롭습니다. 왜 <프로젝트 이글>이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가장 크게 지었을까요? 어쩌면 특별한 이유는 없고,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그저 우연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게임 제작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도가 없을지 모르죠. 하지만 화성 개척 기지에서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가장 뚜렷한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그리고 불모지 외계 행성과 생태적인 상상력은 쉽게 어울리지 못합니다. 사실 화성 개척 기지를 연상할 때, 많은 사람들은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보다 다른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소설 <붉은 화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화성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꿈꾸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농사 담당 히로코 아이를 비롯해 생물학자들과 생태학자들은 바이오스피어를 바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장 농사를 짓느라 바빴습니다. 비디오 게임 <서바이빙 마스> 역시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돔 도시들에서 녹색 식물들은 싱그럽게 자랍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바이오스피어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것들은 <프로젝트 이글>이 보여주는 바이오스피어와 다를 겁니다. 영화 <레드 플래닛>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화성에 녹색 생명체들을 뿌리고 싶어하나, 이건 다소 극단적인 상상력입니다. 솔직히 외계 행성에서 거대한 자연 생태계를 꾸미고 싶다면, 개척자들은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안에서 자연 생태계가 스스로 순환한다면, 그건 정말 놀라울 겁니다. 동시에 스스로 순환하는 살아있는 체계는 엄청난 비용을 소모할 겁니다.
[센서 모드는 여러 설명문들을 보여줍니다.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오프 월드에서 가장 거대합니다.]
숱한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풍성한 외계 생태계들을 보여줍니다. 비디오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 2>를 보세요. <엔들리스 스페이스 2>는 밀림, 늪지, 초원, 설원, 심해, 해변 생태계들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것들은 정말 웅장하고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심해 생태계에서 여러 해양 생명체들이 어울리고 거대한 해양 동물이 헤엄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릴 겁니다. 이렇게 외계 생태계가 풍성하다면, 개척자들은 쉽게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구태여 개척자들은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짓지 않을 겁니다. 이미 외계 자연 생태계가 풍성하다면, 왜 개척자들이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지어야 할까요?
생태학자들은 얼마든지 야생을 탐험하고 연구하고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개척자들은 맛있는 외계 열매들을 실컷 먹을 수 있겠죠.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는 그저 스페이스 오페라일 뿐입니다. 태양계 내부에는 지구 이외에 풍성한 생태계가 없습니다. 어쩌면 화성이나 유로파 바다에서 인류는 새로운 외계 생태계를 발견할지 모릅니다. 비록 그게 미약한 미생물 생태계라고 해도, 이건 귀중한 발견일 겁니다. 태양계 내부에서 이런 생태계들이 흔한 현상일까요? 태양계 외부에서는? 대답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가 아주 특별한 행성이라고 말하거나 외계 생명체를 논의할 때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토론합니다.
우리는 아직 우주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외계 생태계를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주 생물학자들은 당당하게 외치지 못합니다. "분명히 저기 머나먼 행성에는 풍성한 생물 다양성이 있어!" 이렇게 아무도 외치지 못합니다. 우주 생물학자들은 그저 저기 머나먼 행성에 생물 다양성이 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미래 인류가 차원 관문들을 짓거나 초공간 도약 우주선들을 건조한다고 해도, 인류는 외계 생태계와 만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미래 인류는 오직 불모지 행성들만 만날지 모릅니다. <엔들리스 스페이스 2>는 심해 생태계를 신비롭게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건 현실이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우주에서 생명 현상이 드물다고 해도, 미래 인류가 불모지 행성에 바다를 뿌리고 해양 생명체들을 풀어놓는다면, 신비로운 외계 심해는 현실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우주에서 생명 현상이 흔하지 않다면, 새로운 생태계 역시 만만하지 않은 작업일 겁니다. 종종 우주 생물학자들은 지구가 정말 신기한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지구가 골디락스 행성이 아니었다면, 태양이 훨씬 가까웠다면, 달이 바닷물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다른 여러 조건들이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지구는 생명의 요람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불모지 행성들처럼 지구 역시 그저 거대한 돌덩어리에 불과했을 겁니다.
지구가 신기한 우연이라면,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우주 개척자들은 신기한 우연을 구현해야 할 겁니다. 물론 이건 개척자들이 골디락스 행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정말 스페이스 오페라겠죠.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미래 인류가 골디락스 행성을 통째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건…. 글쎄요, 아무리 아무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정말 불가능할 겁니다. 어떻게 미래 인류가 골디락스 행성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최선의 방법은 바이오스피어일 겁니다. 테라포밍은 다소 현실적인 것 같으나, 테라포밍 역시 만만하지 않은 작업일 겁니다.
사실 어떤 외계 행성이 골디락스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테라포밍은 무위로 돌아갈지 모릅니다. 식은 죽을 먹는 것처럼,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은 테라포밍을 후딱 해치웁니다. 하지만 테라포밍은 수 십 년, 수 백 년, 수 천 년, 어쩌면 수 만 년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2117년에 미래 인류가 화성 개척 기지를 세운다고 해도, 수 만 년 이후, 화성은 녹색 행성이 될지 모릅니다. 수많은 하드 SF 작가들과 우주 전문가들은 테라포밍을 논의하나,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테라포밍은 아예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결과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시도해야 합니다. 시도하기 전까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계 행성에서 자연 생태계를 조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건 아예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테라포밍이 불가능하기 바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제 <외계 개척 행성들>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빈 땅'은 빈 땅이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주의 모든 생명체를 100% 완전하게 관찰하지 못합니다. 외계 행성에 미생물 생태계들이 있음에도, 개척자들은 그걸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자들이 도시를 확장한다면, 도시는 외계 미생물 생태계를 오염시키거나 멸종시킬지 모릅니다.
외계 생태계는 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을 겁니다. 이게 올바른 행위일까요? 우리가 이런 기회를 뺏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기회를 뺏기 위한 권한이 있을까요? 생명 윤리는 우리가 옳지 않다고 판결할 겁니다. 만약 지구 생명이 소중하다면, 외계 생명 역시 소중할 겁니다. 지구와 외계 행성에 모두 생명체들이 있다면, 왜 지구 생명체들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까? 생태학자들과 에코 페미니스트들과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인류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칩니다. 밸 플럼우드 같은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인간이 비인간 생명을 배제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겨울 행성…이 아니라 만약 외계 개척자들이 정말 외계 겨울 생태계를 만난다면?]
만약 우리가 비인간 생명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면, 동시에 우리는 '외계' 비인간 생명 역시 차별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우리가 비인간 생명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외계' 비인간 생명을 함께 존중해야 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자들이 도시를 확장할 때, 도시는 외계 생태계를 없앨지 모릅니다. 밸 플럼우드가 외계 개척 도시에 반대하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외계 개척 생태계가 너무 거창한 주제이기 때문에, 환경 운동가들은 여기에 쉽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폭력적으로 자연 생태계를 수탈하는 상황에서 머나먼 외계 개척 생태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겁니다. 녹색당 당원들이 전당 대회에 참가한다고 해도, 녹색당 당원들은 외계 행성의 녹조 웅덩이를 논의하지 않을 겁니다. 녹색당 당원들은 토건족들을 비판하고, 자유 무역을 규탄하고, 성 소수자들을 옹호하고, 생태 마을들을 보고할 겁니다. 여기에는 외계 개척 생태계를 위한 자리가 없죠. 하지만 외계 개척 생태계가 거창하기 때문에, 외계 개척 생태계를 논의할 때, 녹색당 당원들은 관점을 옮기거나 넓힐 수 있습니다. 외계 개척 생태계 없이, 녹색당 당원들은 얼마든지 토건족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외계 개척 생태계가 있다면, 녹색당 당원들은 훨씬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환경 운동이 당장 눈 앞의 것들만 바라본다면, 환경 운동은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을 놓칠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처럼 행성적인 재앙을 막고 싶다면, 당연히 환경 운동가들 역시 '행성적으로' 사고해야 할 겁니다. 행성적으로 사고하고 싶다면, 환경 운동은 시각을 훨씬 넓혀야 할 겁니다. 우주를 바라볼 때, 환경 운동가들은 지구 생태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어떻게 우주 속에서 지구 자연 생태계가 진화했고 어떻게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류 문명이 확장했는지 고려할 때, 환경 운동가들은 자연과 문명을 제대로 살필 수 있겠죠. 안타깝게도 많은 환경 운동가들은 이런 관점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상적인 구호를 외치거나 이상적인 자연을 찾거나 자본주의에 굴복하거나 인종 차별에 빠집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우주를 바라보고 지구 자연 생태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들은 피상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을 테고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않을 테고 인종 차별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지구 자연 생태계를 다시 바라보고 싶다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좋은 도구가 될 겁니다. 생태학 SF들은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SF 독자들은 이게 너무 도구적인 관점이라고 반박할 겁니다. 하지만 왜 문학이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합니까? 문학을 읽을 때, 특정한 목적 때문에 독자는 문학을 읽을 겁니다. 독자가 학교 숙제를 하든, 재미를 찾든, 철학과 사상을 배우든, 심심풀이로 시간을 때우든, 독서에는 진지하거나 가벼운 목적들이 있습니다. 도구적인 관점은 나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오직 특정한 목적만을 너무 강조할 때, 그건 문제가 되겠죠.
"독자는 무조건 철학과 사상과 주제를 깊게 탐구해야 해!" 이런 관점은 문제입니다. 독자가 심심풀이로 고전 문학을 읽는다고 해도, 여기에는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받지 못했을 때,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독자가 <키다리 아저씨>를 읽는다고 해도,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읽을 때, 독자가 무조건 20세기 초반의 여자 참정 권리를 고민해야 할까요. 분명히 진 웹스터는 페미니즘 문제와 사회 구조 문제를 집어넣었습니다. 비록 제루샤 애벗이 온건 좌파라고 해도, 제루샤는 아무 이유 없이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근대 유럽 국가들 중에서 핀란드는 여자 투표 권리를 가장 먼저 확보했습니다. 핀란드처럼 북유럽 국가들에는 활발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우연에 불과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읽을 때, 독자는 여자 투표 권리와 사회주의 운동을 고민할 수 있겠죠. 하지만 독자가 오직 발랄하고 화기애애한 연애만 읽는다고 해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소설 <키다리 아저씨>는 모태 솔로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진 웹스터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학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소설들 역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생태적인 상상력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피상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을지 모릅니다. 물론 생태적인 상상력을 이해한다고 해도, 환경 운동가들은 외계 개척 생태계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미래 인류 개척자들이 외계 비인간 생명을 없앨지 모른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외계 행성을 개척할 때, 미래 인류는 (인류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외계 생태계를 영원히 없앨지 모릅니다. 그래서 환경 운동가들은 미래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기 않기 바랄지 모릅니다. 이런 환경 운동가들은 테라포밍이나 외계 바이오스피어 돔이 불가능하기 바랄 겁니다.
그리고 사실 테라포밍이나 외계 바이오스피어 돔은 너무 어려울지 모릅니다. 달에서 자동차를 몰기는 쉽습니다. 이미 달에서 우주 비행사들은 자동차를 몰고 다녔습니다. 반면, 달 표면에서 새싹을 키우기는 어렵습니다. 달 표면에서 새싹을 키우고 싶다면, 우주 비행사들은 바이오 돔을 건설하거나 척박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개조 식물을 심어야 합니다. 불모지 외계 행성과 지구 자연 생태계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글>은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돔을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이게 너무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불모지 행성에서 지구 자연 생태계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게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우주 속의 생태계는 훨씬 놀랍고 신비로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