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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사회 공학

<프로스트펑크>가 사회 생존 게임이 될 수 있는가

OneTiger 2018. 5. 7. 18:15

[혹독한 사회 생존 게임. 하지만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은 평등하게 논의하지 않아요.]



"타인은 지옥이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한 말입니다. 그리고 소설 <붉은 화성>에 나오는 대사죠. <붉은 화성>에서 저 말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온갖 사회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붉은 화성>에서 다양한 과학자들은 화성으로 날아가고, 새로운 개척 문명을 건설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문명을 원했고, 그래서 각종 말싸움들을 벌입니다. 누군가는 빨리 지구화를 시작하자고 말하고, 누군가는 화성을 좀 더 연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지구 정부에게 계속 충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화성이 독립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지도자를 세우자고 말하고, 누군가는 서로 평등하게 지내자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핵 발전소를 이용하자고 말하고, 누군가는 풍력 발전기를 이용하자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이 화성으로 날아가고, 작은 개척 문명을 건설하고, 커다란 도시를 발전시키는 동안 <붉은 화성>은 이런 논의들을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과학자들은 다투고, 다투고, 다투고, 다시 다툽니다. 논란들은 끊이지 않을 것 같고, 말싸움들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타인은 지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사회 속에서 이런 논란들과 말다툼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당연히 서로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말싸움에 진절머리를 낼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식수 전쟁 2017>은 기후 변화와 사회 문제가 아주 긴밀하게 얽혔다고 이야기해요.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를 읊조리고, 어떤 사람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하죠. 그런 태도들은 복잡하고 요란한 말싸움들로 이어지고, 소설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 아주 진절머리를 냅니다. 소설 주인공은 사회 문제들에 상관하고 싶어하지 않고, 말싸움들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무슨 방법이 좋을까요? 아주 권위적이고 강력한 통치자가 모든 의견을 찍어눌러야 할까요? 권위적인 지도자 하나가 모든 인민을 이끌어야 할까요?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파쇼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타인이 지옥처럼 보이고 온갖 토론들이 시끄럽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그런 요란하고 떠들썩한 길을 가야 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평등하게 토론하는 상황입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 역시 얼마든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돕지 않아도, 상류층과 중산층은 스스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 그럴 수 있을까요?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은 기득권들에게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회적 약자들이 기득권들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요? 좋은 방법들 중 하나는 완전한 기본 소득일 겁니다. 노동에 상관없이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적으로 먹고 살 수 있다면, 약자들은 저항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현대 문명에서 일은 기득권들이 허용하는 노동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일에 매달린다면, 기득권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소리는 헛소리입니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노동자가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노동자는 그저 온실 가스만 열심히 뿜겠죠.


아울러 완전한 기본 소득과 함께 우리는 추첨 민주주의 같은 방법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만약 무작위로 사람들이 의회에 들어간다면, 약자들과 소수자들 역시 의회에 들어갈 수 있을 테고, 그들은 기득권들에게 좀 더 저항할 수 있을지 모르죠. 솔직히 저는 대의 제도를 믿지 않습니다. 저는 완전한 기본 소득이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회 구성원들이 토지를 비롯한 생산 수단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완전한 기본 소득이나 추첨 민주주의 같은 방법들은 어떤 변화를 낳을지 모르고, 우리가 그런 변화들을 쌓을 때, 세상이 좀 더 바뀔지 모릅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비긴스>를 쓴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추첨 민주주의>를 썼습니다. 우리가 정말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고 싶다면, 우리는 고정적인 대의 제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우리는 지도자에 복종하지 말고, 대신 서로 평등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평등한 합의가 아니라 강력한 지도자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복종하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비디오 게임 <프로스트펑크>는 스스로 사회 생존(society survival) 게임이라고 부릅니다. 사회 생존이라는 용어를 봤을 때, 저는 이게 무슨 뜻인지 궁금했습니다.


사회 생존 게임? 이게 생존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평등하게 논의한다는 뜻일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프로스트펑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이자 스팀펑크입니다. 1886년, 어마어마한 눈보라는 모든 것을 덮쳤고, 숱한 작물들과 사람들은 얼어죽었습니다. 이제 지구에는 오직 도시 하나만 남았고, 게임 플레이어는 도시를 지배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도시 지도자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법을 만들고, 시민들을 통치하고, 사회를 이끌어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도자입니다. <프로스트펑크>는 스스로 사회 생존 게임이라고 부르나, 사회 구성원들이 숙의하는 과정보다 지도자를 중시합니다.



지도자를 중시하는 게임이 사회 생존 게임이 될 수 있을까요?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그게 웃긴 헛소리라고 말할 겁니다. 저는 <프로스트펑크>를 너무 타박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민주적이고 평등한 토론을 구현하지 못합니다. 인공 지능이 아주 뛰어나게 발전한다면, 비디오 게임은 숙의 민주주의를 구현할지 모르죠. 하지만 아직 그런 때는 아닙니다. <데모크라시> 같은 정치 시뮬레이션 게임조차 그렇게 하지 못하죠. 대중적인 비디오 게임은 아직 숙의 민주주의를 구현할 체계를 갖추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해도 <프로스트펑크>는 다소 우스꽝스럽습니다. 지도자를 중시하는 게임이 사회 생존 게임이라고요? 오히려 이건 지도자 통치 게임이라고 불려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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