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비판적인 사회주의 본문
마이클 무어콕은 유명한 SF 작가입니다. 음, 정말 그런가요? 마이클 무어콕이 정말 유명한 SF 작가인가요? <이 사람을 보라> 같은 소설이 SF 소설일까요. <이 사람을 보라>는 시간 여행 소설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고, 당연히 이 소설은 SF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보라>는 양자역학이나 평행 세계나 뒤틀리는 시간선이나 과학 기술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종교 소설에 가까워 보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고, 예수를 만나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예수를 새롭게 해석하고, 어쩌면 기독교 신도들은 이 소설이 꽤나 골 때린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시간 여행은 예수를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런 시간 여행이 희한한 마무리를 이끌어내나, 이 소설에서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을 찾기는 어렵겠죠. 양자 역학이나 평행 세계에 흥미가 있는 독자는 <이 사람을 보라>를 별로 흥미롭게 읽지 못할 겁니다. 대신 종교를 뒤집고 싶어하는 사람은 무릎을 탁 칠 수 있겠죠. 마이클 무어콕은 분명히 SF 소설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 SF 소설에서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은 약해요.
SF 소설이 자연 과학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SF 소설은 자연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SF 세상에서 과학자는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일 겁니다. 과학자를 내보내지 않는 SF 소설들이 많으나, SF 세상에서 여전히 과학자는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하지만 SF 소설이 자연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자연 과학은 SF 소설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디딤돌이 아닙니다. SF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전복적이고 비주류적인 사고 방식일 겁니다. 작가가 그걸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면,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이 약하다고 해도, 얼마든지 SF 소설을 쓸 수 있겠죠.
외계인과 우주선과 인공 지능과 돌연변이 괴수는 전복적인 사고 방식을 강조하는 수단들이고요. 작가는 그런 수단들을 이용해 놀라운 이야기를 펼칠 수 있죠. SF 소설이 과학과 마법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작가가 적극적으로 전복적인 사고를 펼친다면, 과학과 마법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겠죠. 하지만 작가가 마법으로 그저 열심히 활극에 치중한다면, 그 소설은 맹렬한 비판들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아마 다들 그런 소설이 SF 소설이 아니라고 말하겠죠.
SF 소설에서 과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 과학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과학을 무조건 자연 과학으로 연결하곤 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과학적 사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자연 과학과 크게 연관이 없습니다. 만유인력이나 진화론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연관이 없어요.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종의 기원>을 크게 호평했으나, 과학적 사회주의는 <종의 기원>과 연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학적 사회주의가 자연 과학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거기로 연결합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회주의가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고 보다 논리적이기 바랐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논리적인 비판 정신을 키웠고, 역사 유물론과 잉여 가치 이론을 정립했어요. 그래서 과학적 사회주의는 과학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 주목하지 않고, 자꾸 자연 과학과 과학적 사회주의를 연결해요. 자연 과학이 너무 맹위를 떨치기 때문에 다들 자연 과학을 숭배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지배 계급들은 자연 과학을 자주 왜곡하나, 사람들은 그것조차 숭배하죠.
왜 과학적 사회주의가 중요할까요. 만약 연민이나 동정이 사회주의에 너무 많이 개입한다면, 사회주의 운동이 길을 잃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혐오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남한에서도 외국인 노동자 혐오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남한 노동자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할까요? 외국인 노동자들의 피부 색깔이 짙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화가 열등하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말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아마 그런 이유들이 있겠죠. 남한 노동자들이 차별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동남 아시아 같은 약소국의 노동자들일 겁니다. 북미 사람들이나 유럽 사람들은, 특히 피부가 하얗고 머리카락이 노랗고 눈동자가 파란 백인들은 좀 더 우대를 받을지 모르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외국인 노동자와 남한 노동자가 월급을 두고 다툰다는 사실입니다. 월급은 자본주의에서 비롯한 요소이고, 따라서 남한 노동자가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때문입니다. 게다가 남한 사람들이 북미나 유럽을 우러러보는 이유는 그들이 자본주의 강대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바꿔야 합니다.
생물 다양성 감소는 아주 심각한 문제죠. 왜 생물 다양성이 줄어들까요. 사람들이 자연 환경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원해도, 소수 재벌들이 수많은 생산 수단(토지)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생물 다양성 감소는 자본주의가 일으킨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바꿔야 합니다. 하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이나 시민 운동가들은 이런 현실을 지적하지 않아요. 그들은 인간성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기가 막힌 헛소리죠.
소수 재벌들이 엄청난 생산 수단을 차지한 상황에서 인간성이 정말 문제인가요? 사람들이 마음을 착하게 먹는다면, 하늘에서 나무들과 토양과 야생 동물들이 우르르 떨어지나요? 사람들이 마음을 착하게 먹는다면,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보 지식인들이나 시민 운동가들은 이런 형이상학적인 헛소리를 열심히 떠듭니다. 저는 진보 지식인들이나 시민 운동가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정말 진심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열심히 형이상학적인 헛소리를 늘어놓을수록 그들은 권력의 앞잡이가 됩니다. 모순적이고 슬픈 상황이죠. 그래서 과학적 사회주의가 중요할 겁니다. 이런 모순적이고 슬픈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