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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프랑켄슈타인>과 파생적인 폭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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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과 파생적인 폭력

OneTiger 2019. 5. 15. 19:57

"프랑켄슈타인을 친구라고 부르는 당신은 내가 저지른 범행과 그의 불행을 아는 것 같군. 그러나 아무리 그가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들, 무력한 희망에 시들어가며 견뎌내야 했던 참담한 불행의 세월을 차마 요약할 수는 없었겠지. 이것이 부당하지 않은가? 전 인류가 내게 죄를 지었는데, 나만 유일한 범죄자라는 멍에를 써야 하는가? 어째서 당신은 자기 친구를 경멸하며 문간에서 몰아낸 펠릭스를 미워하지 않는가? 어째서 자기 아이를 구해준 은인을 죽이려 했던 시골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가? 아니, 이 사람들은 덕스럽고 흠이 없는 존재들이겠지! 불행하고 버려진 내가 추물이니, 당연히 면박을 당하고 발길에 차이고 짓밟혀 마땅하겠지."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이렇게 인조인간은 절규합니다. 인조인간은 모든 인류가 자신을 혐오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조인간은 모든 인류가 범죄자라고 말합니다. 애석하게도 이건 일반화 오류입니다. 인조인간은 모든 인류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인조인간은 그저 몇몇 유럽 지역을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인조인간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만난 적이 없고, 아프리카 밀림 흑인들을 만난 적이 없고, 아라비아 사라센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고,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인조인간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음에도, 인조인간은 모든 인류가 자신을 혐오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일반화 오류입니다. 인조인간은 몇몇 사람의 잘못을 모든 인류로 확대했습니다. 하지만 인조인간이 일반화 오류를 저질렀다고 해도, 독자는 인조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끓어오르는 원통함 때문에 인조인간은 이성적이지 못했습니다. 인조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인간들은 인조인간을 문전박대했습니다. 사실 인조인간이 친절하게 굴었고 선행을 베풀었고 지성적으로 소통했음에도, 사람들은 인조인간을 혐오했고 배척했습니다. 인조인간이 추악했기 때문에, 인조인간이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조인간을 멸시했어요.



사실 인조인간은 불행합니다. 인조인간은 인간들과 함께 어울리기 원했으나, 아무 이유 없이, 외모가 추악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인조인간을 밀어냈습니다. 하지만 인조인간의 외모가 추악하다고 해도, 이건 인조인간의 잘못이 아닙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추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말 잘못을 따지고 싶었다면, 사람들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에게 따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인조인간을 만들었는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인조인간이 추악한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인조인간은 추악하고, 여기에는 변명하기 위한 여지가 없습니다.


인조인간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인조인간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인조인간은 분노합니다. 인조인간은 모든 인류가 자신을 혐오할 거라고 간주합니다. 인조인간이 모든 인류를 만나지 못했음에도, 인조인간이 계속 소외를 당했기 때문에, 인조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조인간은 당장 인류에게 복수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조인간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에게 뭔가를 부탁합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부탁을 들어준다면, 인조인간은 자신이 인류 사회를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인조인간을 내쫓았습니다.



창조주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내쫓았기 때문에, 인조인간은 더 이상 아무 데도 의지하지 못합니다. 남은 것은 복수입니다. 그래서 인조인간은 끔찍하게 복수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인조인간이 끔찍하게 범죄들을 저질렀다고 해도, 인조인간은 분노를 풀지 못합니다. 인조인간이 먼저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인조인간을 만들었고, 따라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만약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아름답거나 멋지게 만들었다면, 인조인간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인조인간이 평범하게 생겼다면, 인조인간은 소외를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책임을 회피했고, 결국 인조인간은 무서운 복수를 실행합니다. 독자는 인조인간이 범죄자, 살인자라고 여길지 모르나, 인조인간은 외칩니다. "전 인류가 내게 죄를 지었는데, 나만 유일한 범죄자라는 멍에를 써야 하는가? 어째서 당신은 자기 친구를 경멸하며 문간에서 몰아낸 펠릭스를 미워하지 않는가? 어째서 자기 아이를 구해준 은인을 죽이려 했던 시골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가? 아니, 이 사람들은 덕스럽고 흠이 없는 존재들이겠지! 불행하고 버려진 내가 추물이니, 당연히 면박을 당하고 발길에 차이고 짓밟혀 마땅하겠지."



인조인간은 먼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인조인간이 살인자라고 해도, 인조인간은 먼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독자가 인조인간이 살인자라고 비판하고 싶다면, 그 전에, 독자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비판해야 할 겁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조인간은 폭력을 휘둘러야 했습니다. 인조인간은 폭력을 휘두르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 사회가 인조인간을 배척했기 때문에, 인조인간은 복수해야 했습니다. 만약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평범하게 만들었다면, 사람들이 인조인간을 몰아내지 않았다면, 인조인간 역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을 겁니다.


인조인간이 폭력을 휘둘렀다고 해도, 이건 파생적인 폭력입니다. 무책임한 생체 개조 기술과 사회적인 소외에서 폭력은 파생했습니다. 독자가 인조인간을 비판한다고 해도, 독자는 먼저 무책임한 생체 개조 기술과 사회적인 소외를 비판해야 합니다. 어떤 독자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이 똑같이 잘못했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입니까? 정말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이 똑같이 잘못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만들기 전에, 인조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무책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조인간은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은 똑같이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먼저 잘못했습니다. 인조인간이 폭력을 휘둘렀다고 해도, 이건 파생적인 폭력입니다. 독자는 선천적인 잘못과 파생적인 폭력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파생적인 폭력보다 선천적인 잘못을 훨씬 강력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선천적인 잘못 없이, 파생적인 폭력이 절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생체 개조 기술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인조인간은 아예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인조인간은 아무도 해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모든 폭력이 똑같다고 규정합니다. 분명히 선천적인 잘못과 파생적인 폭력이 다르고, 파생적인 폭력보다 선천적인 잘못이 훨씬 근본적인 문제임에도, 사람들은 양쪽이 똑같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중립을 외치나, 이건 중립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선천적인 잘못을 은폐할 뿐입니다. 파생적인 폭력보다 선천적인 잘못이 훨씬 심각한 문제임에도, 사람들이 양쪽을 똑같이 간주한다면, 선천적인 잘못은 유리해질 겁니다. 파생적인 폭력은 훨씬 불리해질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선천적인 잘못을 비판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선천적인 잘못이 먼저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숱한 파생적인 폭력들이 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을 보세요.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억압적인 독재 국가라고 힐난합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입니까? 문제는 자본주의가 선천적인 잘못이라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는 먼저 식민지들을 수탈했고, 먼저 파리 코뮌을 학살했고, 먼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공격했고, 먼저 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먼저 유럽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탄압했고, 먼저 파쇼주의에 동조했고, 먼저 민중들을 억압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너무 끔찍하게 수탈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공산주의는 나타났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독재 국가라고 해도, 이건 파생적인 폭력입니다. 자본주의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압박했기 때문에, 서구 자본가 계급이 파쇼주의와 2차 세계 대전에 동조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노선에서 탈선해야 했습니다. 이건 소비에트 연방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을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비에트 연방을 비판할 때,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보다 자본주의가 훨씬 먼저 훨씬 심하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지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걸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먼저 잘못했음에도,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잘못했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소비에트 연방을 모욕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선천적인 잘못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유럽 문명이 악랄하게 아메리카 열대 밀림을 파괴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보다 마르크스주의가 훨씬 심각한 폭력을 저지르고 싶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 후반 사상입니다. 이미 18세기부터 유럽 자본주의는 열대 밀림을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자본주의에게 이런 물질성,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마르크스주의가 노력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보다 마르크스주의는 심각한 폭력을 저지르지 못합니다. SF 작가가 새로운 세상을 쓰고 싶다고 해도, SF 작가는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SF 작가처럼, 마르크스주의 역시 자본주의 물질성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19세기 유럽 문맹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어설프게 배웠을 때, 이미 산업 자본주의는 온실 가스를 팍팍 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연 과학자들은 이른바 인류세(자본세)가 산업 자본주의에서 비롯했다고 말합니다. 온실 가스는 기후 변화로 이어지고,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이건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심지어 기후 변화는 지구 지리를 바꿀지 모릅니다. 아무리 마르크스주의가 폭력을 휘두르고 싶다고 해도, 지구에서 행성급 환경 오염보다 무엇이 훨씬 폭력적일 수 있습니까? 산업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아무리 현실 사회주의가 애쓴다고 해도, 안타깝게도(?)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폭력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만약 15~16세기부터 현실 사회주의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 아시아를 수탈했고 막대한 부를 차지했다면, 자본주의보다 현실 사회주의는 훨씬 폭력적일 겁니다. 만약 15~16세기부터 현실 사회주의가 그랬다면, 전세계의 빨갱이들은 당장 운동권 짓거리를 때려치우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게 아닙니다. 아무도 이걸 증명하지 못합니다. 쥐라기 지층에서 호랑이 두개골 화석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자본주의보다 현실 사회주의가 폭력적이라고 증명하지 못합니다. 쥐라기 지층에 호랑이 두개골 화석이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에는 물질성, 역사성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이미 산업 자본주의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신나게 털어먹는 중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들을 계속 털어먹기 원했고 방해 세력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리 코뮌을 비롯해 유럽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했고, 다른 지역들에서도 사회주의 세력들은 처참하게 탈선해야 했습니다. 안락하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상황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은 평등한 사회 구조를 추구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 세력들은 평등한 사회 구조보다 자본주의 공세를 막느라 바빴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처럼 어떤 세력은 지독해져야 했고, 칠레 아옌데 정권처럼 어떤 세력은 무너져야 했습니다.



여기에 주기적인 경제 공황들이 덧붙는다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재앙 덩어리일 겁니다. 솔직히 현실 사회주의가 이런 어마어마한 경제 공황들에 까불 수 있나요? 따라서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를 훨씬 강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천적이고 거대한 폭력에 관대하고 파생적이고 작은 폭력을 물어뜯습니다. 이슬람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세속화를 추구했을 때, 서구 자본주의는 이슬람 공산주의를 몰아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는 기승을 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이슬람을 욕할 뿐이고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아요. 이른바 에코 테러리스트라는 용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에코 테러리스트가 테러리스트입니까? 자본주의가 먼저 엄청난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음에도, 왜 사람들이 자본주의보다 에코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하나요?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킴에도, 왜 사람들이 이런 폭력적인 경제 현상보다 오직 일부 환경 운동가들만을 비난하나요? 에코 테러리스트를 운운하는 사람들은 선천적인 잘못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국내에서 메갈리아 사태는 이걸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가부장 문화가 훨씬 먼저, 훨씬 크게 잘못했음에도, 남한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에 관대하고 오직 메갈리아만 물어뜯습니다. 거대한 폭력이 파생적인 폭력을 만들었음에도, 사람들은 거대한 폭력에 관대하고 작은 폭력을 미친 것처럼 물어뜯습니다.



거대한 폭력이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고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폭력은 그저 물리적인 폭력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폭력은 온갖 세뇌들을 동원합니다. 수직적인 계급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보편적인 관념보다 지배 계급의 관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뇌를 당하고 작은 폭력들을 비난합니다. 메갈리아 사태는 단순한 소동이 아닙니다. 지식인들은 거대한 폭력이 작은 폭력들을 만들고 거대한 폭력이 온갖 거짓말들을 늘어놓는다고 지적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메갈리아 사태는 이런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비단 성 해방 투쟁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운동, 노동 운동, 환경 운동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심지어 페미니즘 연구들조차 이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헬페미니스트 선언> 같은 서적은 꽤나 급진적인 제목을 달았으나, 제목과 달리, 이런 서적에는 별로 급진적인 연구가 없습니다. 물론 이건 페미니즘 연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 해방 투쟁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페미니즘 연구 역시 열악한 상황을 따라가야 합니다. 운동이 열악하다면, 지식 역시 열악해질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운동이 열악하다고 해도, 지식은 근본적인 현상을 파악하고 이걸 다시 운동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좌파가 착하고 올바르고 좋은 소리를 떠드는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건 너무 커다란 착각입니다. 좌파는 착하고 올바르고 좋은 소리를 떠들지 않습니다. 좌파는 약자들을 편듭니다. 아무리 약자들이 비열하고 폭력적이고 추레하다고 해도, 좌파는 약자들을 편듭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계급 투쟁이 끔찍하게 전개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착하고 올바르고 좋은 소리를 떠들고 싶다면, 사람들은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시공간을 찾아가야 합니다. 오직 어떤 역사성과 물질성도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에서만 사람들은 착하고 올바르고 좋은 소리를 떠들 수 있습니다. 강자들이 약자들을 착취하지 않는다면, 강자들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착취 없이, 지배 계급은 없습니다. 착취가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약자들은 비참하고 열악하고 추레한 구렁텅이에 빠져야 합니다. 이건 약자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건 절대 약자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무리 약자들이 비참하고 열악하고 추레한 구렁텅이에 빠진다고 해도, 강자들이 끔찍하게 착취하기 때문에, 약자들은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좌파는 이걸 분석하고 약자들을 편들어야 합니다. 이걸 외면하는 좌파는 좌파를 빙자하는 지배 계급의 앞잡이입니다. 그래서 숱한 얄팍한 지식인들은 아주 쉽게 지배 계급의 앞잡이가 됩니다. 약자들이 구렁텅이에 빠질 때, 얄팍한 지식인들은 약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쌍수를 들며 지배 계급에게 뛰어갑니다. 진보 지식인들은 지배 계급의 똥꼬를 열심히 핥으나, 왜 약자들이 탈선하는지 절대 분석하지 않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진보 지식인들과 달리,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현실을 직시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페미니즘 소설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연구와 <프랑켄슈타인>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종속-해방 관계입니다. 메리 셸리는 종속-해방 관계를 깊게 조명했고, 그래서 페미니즘 연구는 <프랑켄슈타인>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메리 셸리가 21세기 남한에서 메갈리아 사태가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메리 셸리는 종속-해방 관계가 파생적인 폭력으로 이어질 거라고 통찰을 보여줬습니다. 비록 <프랑켄슈타인>이 구닥다리 19세기 바이오펑크라고 해도, 심지어 <스타타이드 라이징>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메리 셸리는 훨씬 깊은 고찰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종속-해방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프랑켄슈타인>은 계속 위대한 고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정말 멋진 시조에서 비롯했어요.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은 왜 자신이 유일한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지 따졌습니다.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 따위보다 인조인간은 백 번 옳습니다. 우리는 선천적인 잘못을 구분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저항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파생적인 폭력보다 선천적인 잘못을 비판할 때, 약자들은 저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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