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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위대한 경험>과 경이로운 거대 바다 거북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위대한 경험>과 경이로운 거대 바다 거북

OneTiger 2019. 8. 7. 20:56

[거대 바다 거북은 경이로운 영성이고 신격입니다. 그래서 이런 장면은 다른 텔레비전 광고들과 다릅니다.]



※ 광고 <위대한 경험> 링크: https://youtu.be/LOPUeWbwYVg



종종 텔레비전과 모니터 광고들에서 자연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텔레비전과 모니터 광고들은 얼마나 선명하게 텔레비전과 모니터가 장관을 보여주는지 알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런 광고들은 웅장하고 화려하고 신비로운 장관을 좋아합니다. 이런 광고들은 웅장하고 화려하고 신비로운 장관을 이용해 시각 체험을 강조하기 원합니다. 비단 광고들만 아니라 가전 제품 매장에서 여러 텔레비전과 모니터 전시 제품들은 웅장하고 화려하고 신비로운 장관들을 보여줍니다. 자연 환경은 이런 조건들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은 웅장합니다.


'대자연'이라는 단어처럼, 자연은 거대합니다. 자연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가 자연 유산을 대표하는 것처럼, 자연 환경은 그뤠잇~합니다. 자연 환경은 화려합니다.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는 화려합니다. 형형색색 물고기들이 다양한 산호초들 사이를 누빌 때, 사람들은 자연 환경이 화려하다고 감탄합니다. 텔레비전 광고들은 이런 장면을 이용해 영상 기술이 아주 다양한 색깔들을 표현할 수 있다고 알립니다. 자연 환경은 신비롭습니다.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서 여러 무척추 동물들이 흐느적거릴 때, 사람들은 이것들이 외계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양 생명체들은 외계인 같습니다.



그래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는 텔레비전 광고들, 모니터 광고들과 잘 어울립니다. 비단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만 아니라 온갖 자연 환경들은 텔레비전 광고들, 모니터 광고들과 잘 어울립니다. 사람들이 커다란 가전 제품 매장을 찾는다면, 여러 텔레비전들과 모니터들은 높은 산맥, 형형색색 산호초, 드넓은 초원, 울창한 밀림, 붉은 저녁 노을, 풍성한 농장을 보여줄 겁니다. 이건 텔레비전 광고들과 모니터 광고들이 오직 자연 환경만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화 유산, 도시 야경, 형형색색 기구, 아름답고 멋진 모델 역시 텔레비전 광고들, 모니터 광고들과 잘 어울립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텔레비전 광고들, 모니터 광고들에서 자연 환경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어떤 광고들은 이런 '자연'을 훨씬 강조합니다. 광고 <위대한 경험>은 거대한 야생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광고 속에서 어떤 남자는 거대 야생 동물들을 만납니다. 남자는 거대한 올빼미와 거대한 바다 거북과 거대한 흑표범을 바라봅니다. 이런 야생 동물들은 정말 거대 괴수에 가깝습니다. 광고 속의 흑표범 크기는 거의 고지라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고지라처럼 이런 흑표범은 정말 전차 포탄들을 씹어먹을지 모릅니다. 다른 텔레비전 광고들 및 모니터 광고들과 달리, <위대한 경험>은 거대 괴수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광고 속에서 남자가 놀라운 시선으로 거대 바다 거북을 바라본다고 해도, 다른 텔레비전 광고들 및 모니터 광고들처럼, <위대한 경험>은 '자연'을 이용하기 원합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웅장하고 화려하고 신비로운 것을 가리킵니다. 높은 산맥, 형형색색 산호초, 드넓은 초원, 울창한 밀림, 붉은 저녁 노을, 풍성한 농장처럼, 거대 올빼미와 거대 바다 거북과 거대 흑표범은 웅장하고 화려하고 신비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광고 <위대한 경험>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인간은 인간적이고 동시에 인간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 환경을 바라볼 때,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야생 동물들을 바라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꽃과 나무와 버섯보다 야생 동물에게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이른바 고등 동물들에게 훨씬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야생 동물들을 찾습니다. 우리는 야생 동물들이 자연 환경을 대표하기 원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야생 동물들은 자연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가 각종 야생 동물 신격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시시가미(사슴신)가 자연을 대표하는 것처럼, 야생 동물들은 자연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게임 <워크래프트 III>에서 드라이어드가 "아아, 그뤠잇 아웃도어~."라고 감탄하는 것처럼, 자연은 웅장합니다. 자연이 웅장하기 때문에, 야생 동물들이 자연을 대표한다면, 야생 동물들은 웅장해야 합니다. 야생 동물들은 거대해져야 합니다. 야생 동물들이 거대해진다면, 야생 동물들은 거대 괴수가 될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크기만이 아닙니다. 1998년 영화 <갓질라>는 크기가 문제라고 광고했으나, 고지라 팬들은 갓질라가 허접하게 전투기 미사일들을 두들겨맞는다고 비판합니다. 갓질라에게는 오직 거대한 떡대만 있습니다. 갓질라에게는 다른 능력들이 없습니다. 아무리 길이가 100m를 넘어간다고 해도, 갓질라는 쉽게 쓰러집니다.


반면, 2014년 영화 <고지라>에서 고지라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2014년 고지라는 비단 거대한 떡대만 아니라 막강한 내구력과 왕성한 활동력과 엄청난 근력과 화끈한 방사 열선을 갖추었습니다. 함선들이 포탄들을 쾅쾅 날린다고 해도, 고지라는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고지라는 망망대해를 아주 빠르게 헤엄칠 수 있습니다. 고지라는 적대 괴수 무토를 움켜쥐고 집어던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고지라는 골판들을 파랗게 방전(위잉~ 위잉~ 윙윙~ 위위위위위위위잉~~~)하고 화끈하게 방사 열선을 뿜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지라는 '자연의 힘'입니다. 고지라는 신과 같습니다. 속편 영화 <콩: 해골섬>은 정말 사람들이 신으로서 거대 괴수를 숭배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장면은 정말 인간이 위대한 자연 신격과 만나는 것 같습니다. 거대 흑표범은 신과 같습니다.]



2019년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도 거대 괴수들은 신격을 잃지 않습니다. <고지라: 괴수왕>이 너무 괴수 싸움박질에 치중하기 때문에, 2014년 <고지라> 및 <콩: 해골섬>과 달리, <고지라: 괴수왕>에서 거대 괴수들은 '신으로서 품격'을 다소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스라, 고지라, 라돈, 기도라는 웅장한 자연의 힘이고, 이것들은 신격이 될 수 있습니다. 1961년 영화 <모스라>에서 이미 모스라는 신격이었습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어떻게 사람들이 모스라를 숭배하는지 보여주지 않으나, 관객들이 다른 모스라들을 고려한다면, 관객들은 <고지라: 괴수왕>에서 여전히 모스라가 신격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도 모스라는 자애롭고 모성적인 신격입니다. 다른 거대 괴수들이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동안, 열대 밀림에서 모스라는 인디언들을 보호합니다. (너무 실망스럽게도)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모스라를 직접 보여주지 않으나, (미아나와 마이나를 비롯해) 남아메리카 인디언 부족과 미래 지구 후투아 부족은 모스라가 웅장하고 자애롭고 모성적인 거대 괴수라고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모노노케 히메>와 2014년 <고지라>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 이외에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은 웅장한 야생 동물들이 자연의 힘이고 신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디오 게임 <레우스>는 거대 갑각류가 바다의 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대 갑각류는 인류 문명을 내려다봅니다. 인류 문명은 거대 갑각류를 올려다봐야 합니다. 돛단배 선원은 미약한 인간이고, 감히 미약한 인간은 거대 갑각류, 자연의 힘, 위대한 신을 내려다볼 수 없습니다. 거대 갑각류가 바다 위로 웅장하게 솟구칠 때, 돛단배 선원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다의 신을 우러러봐야 합니다. 비디오 게임 <레우스>가 보여주는 것처럼, 거대한 야생 동물, 자연의 힘, 위대한 신은 삼위 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광고 <위대한 경험>은 이런 삼위 일체를 이용해 텔레비전이 웅장하고 화려하고 신비로운 영상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합니다.


형형색색 산호초 위의 거대 바다 거북에게는 비단 화려한 색깔들만 아니라 감동적인 영성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광고가 거대 괴수를 이용한다면, 텔레비전 광고는 영성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광고가 문화 유산, 도시 야경, 형형색색 기구, 아름답고 멋진 모델을 이용한다면, 여기에는 영성이 없을 겁니다. <위대한 경험>은 거대 바다 거북을 이용해 영성을 전달합니다. 그래서 광고 제목은 '위대한 경험'일 겁니다. 텔레비전 광고가 형형색색 기구를 보여준다면, 텔레비전 광고는 영상 기술이 다양한 색깔들을 구현한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광고에는 감동적인 영성이 없습니다.



비디오 게임 <레우스>처럼, 게임 <블랙 앤 화이트>는 이른바 신 게임(god game) 장르에 속합니다. <블랙 앤 화이트>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신이 되고 인류 문명을 이끕니다. 신(게임 플레이어)은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크리쳐를 내보냅니다. 크리쳐는 거대 야생 동물입니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거대 야생 동물 크리쳐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기적을 구현하고, 문명 발전에 이바지합니다. 웅장한 호랑이가 비를 뿌리고, 풍성한 곡식들을 축복하고, 사람들을 구할 때, 이런 장면들은 왜 거대한 야생 동물, 자연의 힘, 위대한 신이 삼위 일체가 되는지 보여줍니다. <프롬 더스트> 역시 신 게임 장르이고, 여기에서도 게임 플레이어는 신이 되고 인류 문명을 이끕니다.


게임 속 자연에는 기이한 절지 동물들이 있습니다. 절지 동물들이 자연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류 문명을 위해 신(게임 플레이어)은 자연 환경을 조절해야 합니다. 크리쳐와 기이한 절지 동물 없이, <블랙 앤 화이트>와 <프롬 더스트>는 신과 자연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쳐와 기이한 절지 동물 같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블랙 앤 화이트>와 <프롬 더스트>는 영성을 훨씬 강조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거대한 호랑이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블랙 앤 화이트>는 너무 밋밋할지 모릅니다. 기이한 절지 동물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프롬 더스트>는 기이하고 웅장한 고대 자연 환경을 강렬하게 표현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강렬한 표현 때문에, <위대한 경험>은 문화 유산과 도시 야경과 형형색색 기구와 아름다운 모델보다 거대 바다 거북을 선택했을 겁니다. 거대 괴수에게는 영성이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거대 괴수를 좋아할 겁니다. <고지라: 괴수왕> 같은 영화가 산만하고 쌈마이한 싸움박질을 강조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파괴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거대 괴수가 파괴를 상징하나요? 거대 괴수 이외에 수많은 것들은 파괴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우주 구축함이 파괴를 상징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가 파괴를 상징해야 하나요? 왜 거대 괴수가 파괴를 상징해야 하나요?


거대 괴수는 자연의 힘입니다. 자연의 힘이 파괴와 싸움과 살육인가요? 생태학자들은 고개들을 절래절래 흔들 겁니다. 자연의 힘은 파괴가 아닙니다. 분명히 자연 현상에는 몰락, 파괴, 살육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우주 만물은 엔트로피를 따라야 합니다. 비단 자연의 힘만 아니라 결국 모든 우주 만물은 엔트로피를 따라야 합니다. 오히려 자연의 힘은 (임시적으로) 엔트로피를 막을 수 있습니다. 물질들이 계속 평행 상태를 이루기 원할 때, 생명 현상(신진대사)은 에너지를 투입하고 물질들을 특정한 형태로 유지합니다. 한마디로 생명 현상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생명 현상은 번성하고 진화합니다.



[비록 이건 아동 애니메이션이나, 이런 생태학 애니메이션은 자연 환경이 파괴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생명 현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오직 인간에게 이로운 생명 현상들만 예찬한다고 해도, 분명히 생명 현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광고 <위대한 경험>은 바다가 아니라 바다 속의 거대 거북을 보여줬을 겁니다. 자연의 힘은 이런 것들입니다. 자연의 힘은 신진대사, 번성, 진화입니다. 자연 생태계는 다른 수많은 순환 체계들과 다릅니다. 자연 생태계가 '살아있는' 순환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생태계보다 어떤 순환 체계들은 훨씬 복잡하고 정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복잡하고 정교한 순환 체계들보다 자연 생태계는 훨씬 신비롭습니다. 자연 생태계에게 생명 현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살아있는' 순환 체계이기 때문에, 자연의 힘이 신진대사와 번성과 진화이기 때문에, 거대 괴수는 파괴보다 신진대사와 번성과 진화에 훨씬 잘 어울립니다. 소설 <빛의 세계>에서 생물학자는 레비아탄을 보고 감탄합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 미아나, 마이나는 생명과 치유와 복원을 말합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머지드>에서 기이한 고래 상어는 파괴보다 경이로운 미지와의 조우에 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파괴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나, 이건 너무 1차원적인 시각일 겁니다.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에서 거대 괴수들은 파괴보다 신진대사, 번성, 진화, 치유, 복원, 영성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광고 <위대한 경험>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비록 <위대한 경험>이 그저 자본주의 상업 광고에 불과하다고 해도, 시청자들이 거대 바다 거북을 바라보는 동안, 시청자들은 감동적인 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상업 광고 역시 어느 정도 현실(자연의 힘)을 반영합니다. 이건 <위대한 경험>이 본격적인 거대 괴수 이야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광고 제작자들이 거대 괴수와 자연의 힘과 영성을 파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광고 제작자들은 광고 <위대한 경험>과 <모노노케 히메>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와 비디오 게임 <레우스> 사이에 유사성들이 있다고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깊은 고민 없이, 광고 제작자들은 대충 광고를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위대한 경험>은 남자가 거대 바다 거북을 바라본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여자가 거대 나방 괴수를 숭배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고지라: 괴수 묵시록>은 어떤 열대 밀림 인디언을 이용해 모스라를 이야기합니다. 비단 거대 괴수 이야기만 아니라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은 여자와 자연을 연결합니다.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자연이 모성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가부장적인 편견을 부추길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모성적인 자연'은 훌륭한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사철 발벗은 아내가 /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위 서정시는 정지용이 쓴 <향수>입니다. 서정시 <향수>에서 이삭들을 줍는 사람들은 어린 누이와 아내입니다. 아버지는 이삭들을 줍지 않습니다. 화자 '나' 역시 이삭들을 줍지 않습니다. 여자들(어린 누이와 아내)은 이삭들을 줍고 먹거리들을 모읍니다. 여러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여자들이 아이들을 낳고 먹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텃밭들과 채집들을 맡기 때문에, 풍요로움, 번성, 먹거리, 여자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들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농민이 남자라고 생각하나, 수많은 공동체들에서 여자 채집꾼들과 여자 농민들은 사람들을 먹여 살립니다. 여자는 자신의 몸과 자신의 노동으로 공동체를 먹여 살립니다.


여자는 젖가슴으로 사람들을 먹이고 텃밭으로 사람들을 먹입니다. 여자들이 억압에 저항할 때, 여자들은 공유지를 이용해 저항할 수 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제3세계 여자들을 탄압한다면, 여자들은 식량 생산 공유를 이용해 저항할 겁니다. 정지용이 이것을 알았나요? 정지용이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향수>가 어린 누이와 아내가 이삭들을 줍는다고 언급하나요? 아니면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요? 정지용이 우연히 현실을 반영했나요? 만약 이웃집 영희가 <향수>를 읽고 "그래, 여자들은 공동체를 먹여살리지."라고 말한다면, 이웃집 영희가 틀리나요? 이웃집 영희는 과잉 해석을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희는 현실 속의 여자 채집꾼들과 <향수> 속의 어린 누이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에서도 여자들은 자연을 돌봅니다. 이런 여자들과 달리, <위대한 경험>은 웅장한 바다 거북을 보여주나, 자연의 힘을 바라보는 주체는 남자입니다. 게임 <서브머지드>에서 쪽배 소녀 미쿠는 제3세계 사람 같으나, <위대한 경험>에서 광고 모델은 백인 남자입니다. 어쩌면 광고 제작자들은 웅장한 자연이 남성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광고 제작자들은 비싼 텔레비전이 백인 남자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광고 속에서 인디언 여자가 거대 바다 거북을 바라본다면, 이건 훨씬 인상적인 상징이 될 수 있으나, 감히 인디언 여자 따위에게 비싼 텔레비전이 어울리나요? 어떻게 야만적인 계집년 따위가 비싼 텔레비전을 가질 수 있나요?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광고 제작자들은 우연히 남자 광고 모델을 이용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광고 제작자들이 왜 거대 괴수가 자연의 힘인지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도, 분명히 <위대한 경험>은 <모노노케 히메>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와 <레우스>와 어울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이제까지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거대 괴수는 자연의 힘입니다. 미아나와 마이나는 생명과 번성과 치유를 말합니다. 에코 페미니즘 역시 자연의 힘을 이용해 생명과 번성과 치유를 말합니다. 하지만 결국 <위대한 경험>은 자본주의 상업 광고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자연 환경을 파괴합니다. 자본주의 목적이 오직 이윤 극대화뿐이기 때문에,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을 파괴해야 합니다.



[게임 <서브머지드>는 제3세계 쪽배 소녀와 무너진 서구 문명과 기이한 해양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위대한 경험>이 거대 바다 거북을 보여준다면, 시청자들은 감동적인 영성을 느끼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시청자들이 멈춰야 하나요? 만약 시청자들이 이런 영성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시청자들은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로 시선을 돌려야 할 겁니다. 현실 속에 해양 생태계와 바다 거북들이 있기 때문에, 광고 제작자들은 현실을 참고하고 거대 바다 거북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기호, 상징, 비유, 표현, 예술을 만들 수 있습니다. 현실에는 거대 괴수들이 없습니다.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거대 괴수들을 연이어 떠드나, 저는 현실에 거대 괴수가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다른 SF 팬들 역시 현실에 거대 괴수가 있다고 믿지 않을 겁니다. 현실에 거대 괴수가 없음에도, 왜 SF 팬들이 거대 괴수들을 이야기하나요? 왜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이 거대 괴수들을 보여주나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자연 환경에 감탄하기 때문입니다. 망망대해에서 물고기 떼가 장관을 이룬다면, 과수원이 풍요로운 열매들을 자랑한다면, 파도가 웅장하게 해안 절벽을 때린다면, 하늘거리는 해파리들 사이에서 장수 거북이 우아하게 헤엄친다면, 높은 설산에서 아무르 호랑이가 드넓고 하얗고 혹독한 밀림을 내려다본다면, 예술가들은 이걸 과장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릴 겁니다.



이육사가 쓴 <절정>에서 화자는 겨울이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말합니다. 어라, 이게 정말인가요? 정말 겨울이 강철로 된 무지개인가요? 이건 엉터리입니다. 이건 헛소리입니다. 어떻게 강철이 겨울을 만들 수 있나요? 어떻게 겨울이 무지개인가요? 하지만 문학 평론가들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가 헛소리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겨울, 강철, 무지개는 상징들, 과장들, 비유들입니다. <절정>에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자는 상징들을 동원합니다. 겨울은 제국주의 수탈입니다. 강철은 사회주의 저항입니다. 무지개는 해방과 독립입니다. 제국주의 수탈과 사회주의 저항과 해방을 노래하기 위해 <절정>은 상징들을 이용합니다.


겨울과 강철과 무지개 없이, 이육사는 독립 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절정>이 상징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절정>은 사회주의 해방을 훨씬 압축적이고 역설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변증법이 역설적인 정(테제)과 반(안티테제)을 합치고 합(진테제)을 만드는 것처럼, 심지어 강철 무지개는 변증법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남한 정부는 제국주의 침략을 추구하나, 사람들이 <절정>을 훨씬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사람들은 강철로 된 무지개로 제국주의 침략을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절정>이 상징들을 동원하는 것처럼, 자연이 위대하다고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온갖 상징들, 과장들, 비유들을 동원합니다.



광고 <위대한 여정>에서 거대 바다 거북은 이런 상징들, 과장들, 비유들에 속합니다. 강철 무지개가 기호이고 예술인 것처럼, 거대 바다 거북은 기호, 예술입니다. 종종 기호에서 표시와 의미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는 장수 거북이라는 해양 파충류와 필수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인간이 장수 거북(동물)을 장수 거북(단어)이라고 부르기 전에, 이미 장수 거북(동물)은 존재했습니다. 후천적으로 인간은 그저 장수 거북(단어)을 부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호를 살필 때, 우리는 기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강철 무지개가 진짜 무지개를 가리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기호가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거대 바다 거북(을 비롯해 거대 괴수들)이 기호라면, 거대 바다 거북이라는 기호 너머에 무엇이 있나요? 그것은 자연의 힘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는 살아있는 순환 체계입니다. 그것은 번성, 치유, 복원입니다. 생태학 연구는 살아있는 퍼즐 풀기와 비슷하고, 거대 괴수들 역시 살아있는 퍼즐에 속합니다. 물론 거대 괴수들은 파괴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들이 '후천적인 기호'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거대 괴수를 이용해 의미들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거대 괴수 너머에는 자연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대 바다 거북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 특수 촬영 영화 속에서 거대 괴수가 도시를 파괴하고 건물들을 무너뜨린다면, 여기에는 번성, 치유, 복원이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런 특수 촬영 영화보다 반다나 시바의 에코 페미니즘 서적들은 훨씬 자연의 힘에 가깝습니다. 반다나 시바의 서적들이 훨씬 자연의 힘에 가깝다면, 특수 촬영 영화보다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 같은 반다나 시바의 서적들은 거대 괴수 속성을 훨씬 강조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거대 괴수라는 '후천적인 기호'를 이용해 파괴를 연출하고 싶다면,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에는 별로 가치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후천적인 기호'를 이용해 번성과 치유와 복원을 노래하고 싶다면,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는 아주 중요할 겁니다. 반다나 시바 서적들이 중요한 것처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 역시 중요할 겁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자연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게임 플레이어는 작은 신이 되고 직접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미 파악이 너무 황당무계하다고 반박할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돌연변이 혹등고래가 똥꼬로 물줄기를 뿜는 헛소리야?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에는 거대 괴수가 없어!"



[이런 책 속에는 거대 괴수가 없으나, 동시에 거대 괴수가 있습니다. (와, 표지 그림이 참 예쁘네요.)]



네, 맞습니다. 반다나 시바 서적들에는 거대 괴수가 없습니다. <타이토 에콜로지>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에도 거대 괴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대왕 오징어를 보여준다고 해도, 감히 대왕 오징어는 초자연적인 거대 괴수에게 까불지 못합니다. 아무리 대왕 오징어가 거대하다고 해도, 대왕 오징어가 <레우스> 속의 거대 갑각류에게 까불 수 있나요? 아무리 대왕 오징어가 사납다고 해도, 대왕 오징어가 어뢰를 씹어먹고 우달로이 구축함을 휘감을 수 있나요? 심지어 쪽배 소녀 미쿠가 만나는 고래 상어조차 평범한 고래 상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대 괴수를 에코 페미니즘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 연결하지 못합니다.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와 <타이토 에콜로지>에 거대 괴수가 없다면, 왜 우리가 구태여 거대 괴수를 에코 페미니즘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 연결해야 하나요? 왜 이렇게 우리가 분류하고 정리하고 종합해야 하나요? 거대 괴수가 '후천적인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는 거대 바다 거북이 없습니다. 현실에는 모스라가 없고, 생물학자의 레비아탄이 없고, 쪽배 소녀 미쿠와 기이한 고래 상어가 없습니다. 우리는 거대 괴수들을 만듭니다. 우리가 선박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거대 괴수들을 만듭니다. 거대 괴수들은 '후천적인 기호들'입니다. 우리가 장수 거북(단어)을 읽을 때, 우리가 의도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호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호를 해석할 때, 우리는 오직 기호 그 자체만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셜록 홈즈가 춤추는 인형 그림들을 영어에 대입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호를 다른 것들에 대입해야 합니다. 현실에 해양 생태계와 바다 거북이 있기 때문에, 광고 <위대한 경험>은 거대 바다 거북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해양 생태계가 있기 때문에, 광고 속에는 거대 바다 거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대 괴수를 해석하고 싶다면, 우리가 어떻게 창작물 속에서 거대 괴수가 나타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생태학에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술(거대 바다 거북)을 근본적으로 덕질하고 싶다면, 우리는 현실(해양 생태계)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는 생물 다양성을 이야기합니다. <타이토 에콜로지>는 생물 다양성을 이야기합니다. 이웃집 영희가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를 읽는다면, 이웃집 영희는 인류 문명이 모성적인 자연에 기대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가 <타이토 에콜로지>를 플레이한다면, 이웃집 영희살아있는 퍼즐들을 조립하고 짜맞추고 해체하고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와 <타이토 에콜로지> 속에는 거대 괴수가 있습니다.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중요한 것처럼, 에코 페미니즘이 거대 괴수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에코 페미니즘 속에는 살아있는 퍼즐 풀기, 거대 괴수가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미 1961년 영화 <모스라>는 환경 오염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구태여 어설픈 기호학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영화 <모스라>는 거대 괴수와 환경 오염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거대 나방 괴수를 이야기하기 위해 <모스라>는 환경 오염을 끌어들입니다. 영화 관객들에게 기호학 석사 학위가 없다고 해도, 영화 관객들은 얼마든지 엄마 나방 괴수 너머의 자연 환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서 거대 괴수는 거대 괴수가 아닙니다. 현실에는 엄마 나방 괴수보다 살아있는 순환 체계가 있습니다. 현실에는 거대 바다 거북보다 해양 생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해양 생태계를 파괴하고, 바다 거북들은 위기에 부딪힙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언젠가 녹색 자본주의가 해양 생태계를 복원할 거라고 기대하나, 이런 기대는 망상입니다. 자본주의 목적이 오직 이윤 극대화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해양 생태계가 그저 원자재 창고와 쓰레기 통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녹색 자본주의는 망상입니다. 심지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서구 제국주의 전쟁(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행성급 환경 오염(기후 변화)을 일으켰습니다. 민중들이 서구 제국주의 전쟁을 막기 원했을 때, 국가 정부는 자본가 계급을 편들었고 민중들을 탄압했습니다.



1930년대 초반 동안, 유럽은 파쇼주의 본거지가 되었고, 미국은 경제 공황을 두들겨맞았고 찌질거렸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했고 다른 국가들을 수탈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때문에, 이슬람을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 아시아는 서구 식민지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소비에트 연방만 세계 대전을 막느라 고군분투했습니다. 20세기 최대 비극을 혼자 막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무리수를 뒀습니다.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은 대숙청을 저지르고 억압적인 정책들을 펼칩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악랄한 독재 국가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짝짝짝, 축하합니다, 소비에트 연방 호갱님~. 호갱님은 대숙청으로 악랄한 독재 타이틀에 당첨되셨습니다." 문제는 이런 억압이 서구 제국주의 전쟁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입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악랄한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었습니다. 그 자체로서 소비에트 연방은 악랄하지 않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악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악랄합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이 외롭고 처절하게 저항해야 했음에도, 파쇼주의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이 무리수를 뒀음에도, 자본가 계급은 이걸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이한 절지 동물들은 자연이 신비롭다는 기호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호를 넘고 자본주의를 없애야 할 겁니다.]



유럽이 파쇼주의 본거지이고, 파쇼주의 군대가 소비에트 연방을 침략했고, 소비에트 연방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았고, 소비에트 연방이 파쇼주의를 몰아냈음에도, 자본가 계급은 이걸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유럽을 칭찬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계속 식민지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했음에도, 오히려 자본가 계급은 소비에트 연방을 모욕하고 식민지 수탈을 미화합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을 미화하기 때문에, 심지어 환경 운동가들조차 열대 밀림 원주민들을 내쫓기 원합니다. 이런 환경 운동가들은 원주민들보다 다국적 기업들이 열대 밀림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녹색 자본주의는 이런 멍청한 망상이고 무식한 인종 차별입니다. 녹색 자본주의는 열대 밀림 파괴와 야생 동물 멸종을 미화합니다. 자본가 계급에게 유일무이한 목적이 이윤 극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파괴적이기 때문에, 녹색 자본주의는 지나가던 모스라가 콧방귀도 끼지 않는 망상입니다. 우리가 정말 모스라를 덕질하고 싶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영원히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평등하게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합니다. 자연 환경은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 게임 <프롬 더스트> 스크린샷 출처: Clavus,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558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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